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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전쟁 ㅣ 샘터 외국소설선 1
존 스칼지 지음, 이수현 옮김 / 샘터사 / 2009년 1월
평점 :
‘노인의 전쟁’이라고 해서 나이가 엄청 많은 작가가 쓴 진짜 노인들 이야기일거라 짐작하고 별 생각이 없었는데 최근 휴고상 본선 리스트를 훑어보다가 존 스칼지를 다시 발견. 최근 리스트에 오른 상호의존성단 이야기를 읽기 전에 가장 인기가 많은 이것부터 읽어보자고 그냥 집었는데.
정말 재밌다! 이건 밀리터리 SF라고 불리는 모양인데 ‘밀리터리’의 ‘ㅁ’도 좋아하지 않는데도 엄청 즐겁게 읽었다. 역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상한 모양의 외계인이 왕창 나오는데도 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작가의 유머가 이 모든 비호감적 요소까지 재미로 바꿔놨다! 읽다가 몇 번을 소리내어 웃었는지.
1. 아주 오래 전에 아마도 고딩이 시절에 주말의 명화 같은 데서 <줄리아를 아시나요? Who is Julia?>라는 영화를 봤다. IMDb를 찾아보니 1986년 영화였다. 영어 제목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깊이 각인된 영화다. 한 날 한 시 같은 장소에서 트럭에 치어 몸 전체가 심하게 다쳤지만 뇌는 멀쩡한 여자(줄리아)와 갑작스런 두통과 실신 후 다른 신체적 이상은 없지만 순식간에 뇌사에 빠져 버린 여자(메리). 두 사람은 같은 병원으로 이송되고 의사들은 메리의 몸에 줄리아의 뇌를 이식하기로 한다. 이 때 기증자는 메리. 깨어난 사람은 줄리아. 신체적인 모든 것은, 목소리까지도, 메리와 똑같지만 기억과 생각과 취향은 모두 줄리아이므로. 사고 전 줄리아는 미모에 부유하고 모든 사람에게 부러움을 사는 여자였지만 메리는 어느 모로 보나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아내이자 엄마인 여자였다. 이제 옛날과는 다른 펑퍼짐한 몸매에 별로 우아하지 않은 목소리를 지니고 살아가게 된 줄리아. 줄리아는 주변 사람들 특히 남편이 자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남편과의 잠자리에서도 마치 남편의 외도를 목격하는 듯한 복잡한 감정을 갖게 된다. 게다가 아내의 신체를 기증하기로 동의한 메리의 남편은 깨어난 줄리아가 메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없어 줄리아를 납치해서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기까지 한다. 그러나 메리의 집에서 역설적으로 줄리아는 자신이 메리가 아니고 줄리아임을 확실히 깨닫게 된다... 뭐 이런 이야기.
소설을 읽고 영화 이야기를 길게 하는 것은 이 소설에서도 비슷한 일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책 뒷표지에도 써 있으니 (“지구에 묻고 온 아내가 날 구하러 왔다!”) 이 정도까지 얘기하는 건 스포가 아니겠지? 그런데 이 소설에서 ‘사고 후 아내’는 줄리아와는 다른 선택(?)을 한다. 물론 ‘사고’의 세부사항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선택을 하는 이유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를 나로 만드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나로 인식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억과 경험이 그토록 중요한 거라면, 사람은 정말 바뀔 수 없다. 특히 나에게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게 될 수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지금의 바뀐 나는 그런 척하는 나이거나 아예 내가 아니거나 그런 걸까.
2. CDF(우주개척방위군)는 75세가 지나야만 지원할 수 있다. 일단 지원하면 유전공학적으로 강화된 완전히 젊은 육체에 정신을 옮겨 우주군대에서 복무하게 된다. 2년 안에 전투 중 죽을 확률이 70%가 넘는 군인(물론 지원할 때 군인이 된다는 건 알려 줘도 죽을 확률에 대한 얘기는 해주지 않는다. 그랬다간 지원자가 엄청나게 줄어들 테니까). CDF가 굳이 노인만을 지원자로 받는 이유는 이 임무가 2년 생존률 30%가 안될 정도로 위험한 일이기도 하지만(아무래도 젊은이보다는 자신의 삶을 거의 다 살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낫다) 노인의 인생의 경험과 그에 따라오는 삶에 대한 태도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그렇다고 한다). 그럼 어떤 사람들이 지원하나?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물론 전직, 이하 모두 동일), 유치원 선생님, 대학교수, 심지어는 상원의원까지, 은퇴 후 늙은 몸을 가지고 무기력하게 남은 생을 견디는 대신 젊어져서 모험을 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지원한다. 우리의 주인공 존 페리는 작가(정확히는 카피라이터)였다. 그럼 나는? 나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물론 노 쌩큐지. 군인 아니라 다른 거라면 좀 생각해 보겠지만, 그보다 편한 보직(?)이라면 경쟁률이 엄청 높겠지. 경쟁에 또 뛰어드느니 그냥 조용히 늙은 상태로 묻히련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자네들이 신경을 써야 [개척 행성에 애착을 느껴야] 하는 것은 자네들이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 만큼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CDF(우주개척방위군)가 노인들을 병사로 삼는 이유 중 하나다- 자네들 모두가 은퇴했으며 경제적인 방해물이라서 데려오는 게 아니다. 또한 자네들이 자기 목숨을 넘어서는 삶이 있다는 것을 알 만큼 오래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네들 대부분은 가족을 부양하고 자식과 손자들을 키워 보았을 것이고.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목표를 넘어서는 일을 하는 가치를 이해하고 있다. 스스로 개척민이 되어 본 적이 없다고는 해도 자네들은 개척행성이 인류에게 좋다는 사실과 개척민을 위한 싸움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다. 이런 개념을 열아홉 살짜리의 뇌에 박아 넣기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자네들은 경험으로 안다. 이 우주에서는 경험에 의미가 있다. “
- p 206
“날 괴롭히는 게 그건지도 몰라. 결과에 대한 감각이 없어. 난 방금 살아 있는, 생각하는 존재를 집어서 건물에 집어 던졌어. 그런데 전혀 괴롭지가 않아. 그게 괴롭지 않다는 사실이 괴로운 거야, 앨런. 행동에는 결과가 있어야 해. 최소한 우리가 얼마나 끔찍한 짓을 하고 있는지, 훌륭한 이유가 있어서 하는 짓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아야 해. 난 내가 하는 짓이 전혀 끔찍하지가 않아. 그게 무서워. 그게 의미하는 바가 무서워. 난 저주받은 괴물처럼 이 도시를 짓밟고 다녀. 그러면서 내가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하는 거야. 내가 무엇이 되었는지를. 난 괴물이야. 자네도 괴물이야. 우리 모두가 인간 아닌 괴물인데 그게 잘못됐다는 생각도 안해.”
- p 270
“여기엔 안정적인 기반이 없어. 내가 정말로 믿을 만한 것이 없어. 내 결혼 생활도 누구 나처럼 오르락내리락이 있었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바닥이 단단하다는 걸 알고 있었어. 난 그 안정감이, 그리고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그리워.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것들에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무슨 의미인지,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지가 포함되어 있어. 난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사람이었던 시간이 그리워. 날 인간답게 했던 부분이 그리워. 그게 결혼 생활에서 그리운 부분이야.”
- p 276
“”물체를 한 우주에서 다른 우주로 옮기는 것이 본래 일어날 법하지 않은 사건이라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 보자고. (•••) 물리학 적으로는 그게[물체를 한 우주에서 다른 우주로 옮기는 것] 허용이 돼.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이것은 양자역학 우주이고, 실제적인 문제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론적으로는 거의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거든. 하지만 다른 모든 조건이 동등할 경우, 각각의 우주는 일어날 법하지 않은 사건을 최소한으로 막는 편을 선호해. 특히 원자 단위를 넘어서는 사건은.”
“어떻게 우주가 뭘 선호할 수 있지?”
에드가 물었다.
“자네 수학 실력으로는 몰라.”
앨런(이론물리학자)이 말했다.
(•••)
“하지만 우주는 어떤 것보다 다른 것을 선호 하지. 예를 들어 우주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를 선호해. 광속은 변하지 않게 하는 쪽을 선호하고. 이런 조건도 어느 정도는 변화시키거나 망칠 수 있지만, 그건 공사가 커. 이것도 같아. 이 경우, 한 우주에서 다른 우주로 물체를 움직인다는 것이 너무나 있음직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으레 물체가 이동해 간 우주는 물체가 떠난 우주와 똑같은 거야. 있음직하지 않음의 보존의 법칙이라고나 할까.””
- pp 282-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