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은 웃음이 나지 않았다. 세훈의 말이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익숙한 글씨체였다.

유정이 아는 노무사가 있을 리 없었다. 열심히 검색하고 발품을 팔았고, 비용도 유정이지불했다.

"나가지 말까?"
"왜? 가서 엄마들도 사귀고 정보도 얻고그러면 좋지 않아? 궁금한 거 많았잖아."
"이런 거 기겁할 줄 알았더니."

특별활동이 있던 날, 일부러 조금 일찍 새봄을 데리러 가서 담임선생님께 그 아이에 대해 물었다. 선생님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그렇지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유쾌하게 웃으며 그 친구가 11월생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다른 문제는 없었어요? 없었을 것같지 않은데. 계속 이렇게 유치원에서 감싸주셨어요? 왜요?"

"알겠어. 그만하자."
"그래. 미안해. 그만하자. 그런데 그 말들다 사실 아니야. 고등학교 때도, 지금도. 너무,
너무 지겨워. 지긋지긋해."

"진짜야. 여기 낚시꾼들도 가끔 왔었어. 아빠도 팔뚝만 한 붕어 한 번 잡았는데?"
"차라리 인어가 살았었다고 그래. 그럼 재밌기나 하겠다."

보미의 첫 기억은 베란다에서 비눗방울을불던 일이다. 아직 유치원도 다니기 전, 그러니까 네댓 살쯤이었다. 여름이었고 엄마는 청치마를 입고 있었다. 청치마라니. 그때 엄마는지금의 보미처럼 젊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거의 서영동 안에서 움직였다는 것이다. 보미는 전학도 딱 한 번 했다. 아버지의 3대 투자 원칙 덕분이었다. 서두르지 말것, 무리하지 말 것, 잘 아는 곳에 투자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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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그것이 생긴 이래로 언제나 변해왔다.

‘유유지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지? ‘슬프다‘라는뜻이다. 아마 몰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집 애들이 만든 말이기 때문이다. 이 말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꽤 흥미로웠다. 우리가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ㅠㅠ’, ‘ㅇㅇ’, ‘ㅋㅋ’, ‘ㄴㄴ’하는 식으로 한글 자모를 이용해서 간단하게 의사소통을 한 지는 꽤 오래됐다. 그 가운데에서도 ‘ㅠㅠ‘는 표음문자인 한글을마치 상형문자처럼 사용해 눈물을 흘리는 눈 모양을 나타냈다

이런 언어의 성질을 ‘자의성‘이라고 부른다. 단어와 뜻 사이에 자명한 연관성이 있다면 둘 사이를 연결해주는 사전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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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당하기로 따지자면 내가 더 당했다. 아버지는 선택이라도 했지, 나는 무엇도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빨갱이가 되기로 선택하지 않았고, 빨갱이의 딸로 태어나겠다 선택하지도 않았다.

쉰 넘어서야 깨닫고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지않아도 된다는 것을 행복도 아름다움도 거기있지않다는것을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히려 성장을 막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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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단지에서 일한 적 있는 동아1차 기전과장에게 전화가 왔다. 동아1차도 전기시설을 보수하려한다며 현대 단지 작업을 했던 기사님들에 대해 물었다. 영식은 연락처만 넘기고 말까 하다가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려고 조금 일찍 퇴근해 동아1차에들렀다. 그런데 동아1차 관리사무소에 그 불그레한얼굴이 있었다.

경비실로 들어서는데 노년 남성의 체취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냄새가 훅 끼쳤다. 유정은 거북하지 않았다. 되레 약간 서글픈 감정에 휩싸였다. 유정이 살던 집, 안방, 아버지의 방, 화장실, 어디서도 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냄새는아버지의 냄새가 아니라 이 공간의 냄새일 것이다.

넘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아버지는 비질을하고 택배를 옮기고 순찰을 돌고 있었다. 자동차트렁크에서 커다란 사과 상자를 꺼내던 중년 남자가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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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매일 일기를 쓴 건 그와는 다른 몸, 그러니까 우리의 길동무, 존재의 장치로서의 몸에 관해서란다. 사실매일 썼다곤 할 수 없지. 모든 걸 다 적었으리라고도 기대하지 말거라. 난 매일매일의 느낌을 적은 게 아니란다. - P11

난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엄마가 날 데리러 왔다. 그다음날, 난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첫 문장은 이랬다. 이젠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이젠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이젠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이젠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이젠 절대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 P23

그렇지만 나, 나는 널 지켜줄 거야! 나로부터도 지켜줄 거야! 내가 네게 근육을 만들어줄게 신경도 강하게 단련시켜줄게. 매일매일 널 돌봐줄게. 그리고 네가 느끼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줄게. - P33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을 정확히 묘사하기만한다면, 내 일기는 내 정신과 내 몸 사이의 대사(大使) 역할을 할것이다. 또 내 감각들의 통역관이 될 것이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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