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자 물이 샜다. 처음에는 똑, 똑, 떨어지던 것이 나중에는 거실 천장에 구멍이라도 뚫을 기세로 엄청나게 급하게 냄비를 받쳐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종일 물을 퍼내고 바닥을 훔쳐 내다가, 저녁이 되어 비가 그치자 구와 나는 거실 바닥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누운 채로 텔레비전을 켜 보니 세상이 망해가고 있었다. - P35

얼마나 더 나빠져야 세상이 망할까? 자려고 누웠을 때 내가 물었다. 나도 궁금해. 어둠 속에서 구가 대답했다. 이곳에 온 뒤로 우리는 단 한 번도 음악에 대한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구는 기타를 팔아 버렸고 나는노래는커녕 흥얼거리지조차 않았다. 매일같이 하던 일을 한순간에 멈춰버리다니, 이상하지. - P39

내가 처음으로 파견된 집은 삼대가 사는 아파트였다. ‘이경순, 82세, 병환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 바다로 가고 싶음. 고객 정보란에는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 P43

저희가 어머님을 막지 않는 것이 냉정해 보일지 몰라도요, 하고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던 사위가 입을 열었다. 이게 우리의 최선이었어요. 이해합니다. 내가 대답했다. 매뉴얼에 나와 있는 대답이었지만, 실제로도 나는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언가를 사랑하다가 그만두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 P47

둘째 날 나는 해파리로 변해 가는 김지선 씨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김지선 씨는 언제부터 김지선 씨가아니게 되는 것일까. 인간에서 해파리로 넘어가는 정확한 시점은 언제일까. 얼굴이 지워지는 순간? 심장이 사라지는 순간? 아니면 뇌? 해파리로 변한 인간에게서 인간의 흔적을 찾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일까?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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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끔 그때의 네가 창을 흔든다
그때 살던 사람은 이제 흉부에 살고
그래서 가끔 양치를 하다 가슴을 쥔다
그럴 때 나는 사람을 넘어 존재가 된다

대문은 집의 입술, 벨을 누를 때
세계는 온다 날갯짓을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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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로운 오후, 나는 빵집 카운터에 엎드려 있었다.
한낮인데 이렇게 어두운 것을 보니 곧 비가 쏟아지려나, 생각하면서 창밖을 보던 중 짧게 숨을 들이켰다. 무언가가 몸 밖으로 쑤욱 빠져나가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들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내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 P9

나는 문을 열고 달려 나가 길거리에서 유령을 붙잡았다 - P12

유령? 언니 왜 혼잣말을 하고 그래? - P14

유령을 통해 정수와 대화할 수만 있다면, 나는 묻고싶은 것들이 많았다. 돌아오지도 않는 대답을 기다리는사이 계절이 여덟 번 바뀌었다. 나는 이제 혼잣말이 어색하지 않았고, 정수 앞에서 울지도 않았다. - P18

잠시 뒤에 내가 말했다. 싫어. 유령이 말했다. 오래전부터 나는 하기 싫은 일이 있을 때마다 몸이두 개이길 바랐지만, 정작 생겨난 두 번째 몸은 아무 도우도 되지 않았다 - P20

나는 유령의 우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에게 도달하지 못한 감정들이 전부 그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는손을 뻗어 유령의 두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손에 닿지는 않았지만 분명 따뜻했고, 너무나 따뜻해서, 나는 울 수 있었다. 대체 어떤 유령이 눈물까지 흘리는 거야. 내가 말했다. 나는 유령이 아니니까.
유령은 우는 와중에도 그렇게 말했다. 잠시 뒤에 유령이 나를 끌어안았는데, 그것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받아 보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전한 이해였다. 여기까지인 것 같아. 안긴 채로 내가 말했을 때 유령은 그래,
라고 대답해 주었다. - P28

특별할 것 없던 오후, 유령은 내 어깨에 기대어 있다.
가 스르르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 유령은 내 귀에 대고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의 형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꿈처럼 아름답고 깃털처럼 부드러운, 물고기처럼 유연하고 흐르는 물처럼 반짝이는 유령의 마음이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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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분은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 P12

"새로운 몸을 준비하려면 2년 가까이 걸립니다. 그때까지는 물론 남편분의 뇌를 살려두는 일이 가장중요합니다. 지금 같은 상태에서 의식을 되찾을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까, 몸의 남은 부분들을 반드시유지해야 할 이유 역시 없습니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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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희는 옷을 만드는 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 P10

그날 천희는 데님 점프수트를 입고 있었는데 멋있었다. 회사 근처에 살고 자주 이 동네를 산책한다고 했다. 나는 천희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곧 고민을 멈췄다. 두번 다시천희를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P11

나는 소리에 민감한 편이다. 아주 작은 소리도 잘 듣고 유난히거슬려했다. 누군가에게는 별 소리 아닐지 모를 작은 소리에 귀가아프기도 했다. - P13

세번째 갔을 때 너를 만난 거지. 그때만 해도 나는 여기를 하나도 알지 못했는데, - P15

천희는 게이도 양아치도 아니었다. 많은 얘기를 나눈 끝에 나는천희에 대해 다른 것들도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 - P17

그리고 그저 천희가 떠난다는 사실에만 집중했다. 천희가 떠나서 나는 슬프다. 그 문장만을 생각하며 단순하게 슬퍼할 수 있었다. 단순하게 슬퍼할 수 있다는 게 그렇게 후련한 일이라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 P19

말도 안 돼. 나는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 P21

하지만 너 황치열이 <성인식> 추는 영상 열 번 넘게 보는건 봤다. 그건 그냥 봤어. 그때 차마 소리를 못내겠어서. . 앞으로는 헛기침이라도 할게. - P22

죽지 마, 진아야...…… 천희 여자친구 없어. 도쿄에 안 갔어.
뭐라고? - P29

아니. 너는 너무나 사람이구나. - P35

찬희야.
응?
개인방송에선 뭘 했어?
사람처럼 사는 방법. 그런 걸 얘기했어.
그렇구나. - P40

산책로에 닿아 있는 강물에 발목을 담근 채 꼼짝없던 목이 긴 새가 훌쩍 날아갔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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