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어느 여름날, 나를 키우던 아픈 사람이앞머리를 쓸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온 세상이 멸하고 다 무너져내려도풀 한포기 서 있으면 있는 거란다.
있는 거란다. 사랑과 마음과 진리의 열차가변치 않고 그대로 있는 거란다.
2022년 12월고명재

늙은 엄마는 찜통 속에 삼겹살을 넣고 월계수 잎을 골고루 흩뿌려둔다 저녁이 오면 찜통을 열고 들여다본다 다 됐네 칼을 닦고 도마를 펼치고 김이 나는 고기를 조용히 쥔다색을 다 뺀 무지개를 툭툭 썰어서 간장에 찍은 뒤 씹어 삼킨다 죽은 사람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 것, 입속에서 일곱 색번들거린다 - P11

AA를 좋아합니다설산을 그대로 받아쓴 것 같아서 - P15

그리고 나는, 함부로 더 이상해져야지꽃술을 만지던 손끝으로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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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건 신의 말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
"그럼 누구의 말이었다는 거야?" - P31

"용서를 권하려는 건 아니지만, 제 말을 조금 더 들어볼 수 있나요? 곧 퇴근하니까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좀더 얘기해도 될까요?" - P25

그리고 놀란다. 이토록 놀랍고 설레며 기쁜 마음으로 우리는 만났던 것인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둘은 오랜 잠에서 번쩍 눈을 뜬 것처럼 서로를 바라본다. 처음 서로를 마주봤을 때와마찬가지로, 그리고 시간은 다시 원래대로 흐르고, 이제 세번째삶이 시작된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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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에서 왔다 우리의 벌어진 이름은
삐약이라든가 야옹이라든가 은사시나무라든가
엄마— 하고 입 벌리는 무덤 앞이라든가
문자를 버리면 휘발유처럼 번지는 땀띠

고소한 콩물이 윗입술을 흠뻑 스칠 때 엄마가 웃으며 앞니로 면발을 끊는다 나도 너처럼, 뭐라고? 나도, 나도 너처럼, 엄마랑 나란히 국수 말아먹고 싶다 사랑을 줘야지 헛물을 켜야지 등불을 켜야지 예민하게 코끝을 국화에 처박고 싶어 다음 생엔 꽃집 같은 거 하고 싶다고 겁 없이 살 때 소나기 그칠 때 구름이 뚫릴 때 엄마랑 샛노란 빛의 입자를 후루룩 삼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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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성은 꼬집어 말하기 쉬운 게 아니며, 그렇게 한다 해도 나중에 알고 보면 사소한 것으로 밝혀지거나 그 특성들끼리 서로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경우가 많다. 스페인 사람들은 동물을 잔인하게 다루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귀가 먹먹하도록 시끄럽게 굴지 않고선 아무것도 못하며, 중국 사람들은 도박에 중독되어 있다고들 한다. 이런 말들이야 확실히 그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다. 그렇긴 하지만 그 무엇도 원인 없는 건없으니, 영국 사람들이 치아가 나쁘다는 것도 영국인 삶의 한 단면을 말해줄 수 있는 것이다. - P90

어느 기고자가 나를 "부정적"이고 "언제나 무언가를 공격하는 사람이라며 꾸짖었다. 사실 우리는 크게 기뻐할 일이 별로 없는 시대를 살고있다. 하지만 나는 칭찬할 게 있을 땐 기꺼이 칭찬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여기서 울워스‘에서 산 장미에 대한 칭찬 몇 줄을 적어볼까 하는데,
지나간 일에 대해서라는 건 유감이다. - P175

하지만 내가 서점 일을 평생 하고 싶지는 않은 진짜 이유는 그 일을하는 동안 내가 책에 대한 애정을 잃었기 때문이다. - P49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분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 P26

담배 말아 피울 재료를 그에게 좀 주었다. 우리는 부랑자가 들릴 때마다 어린 학생들처럼 숨겨가며 담배를 피웠다. 담배는 묵인해주되 공식적으론 금지였던 것이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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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인간의 상상만큼 빠르게 나아가지 않아.
이게 팩트야. 달나라에 첫발을 디뎠다고 난리가 난지 70년도 더 지났는데 아직 달에 베드타운 세울 기술 하나 없잖아." 혜주가 손을 뻗어 내비게이션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달에 세운 빌라 침실 창문 밖으로 파란 달이 뜬 걸 보며 잠들고 싶었단 말이야."
최는 오래전에 암스트롱이 정말 달에 갔느냐로 설왕설래한 사람들이 있던 걸 기억했다. - P7

한 남자가 가리킨 곳에서 작은 불길이 꺼져가고 있었다. 검은 산기슭 너머로 불빛이 노랗게 아른거렸다. 세 남자는 자리를 떠났다. - P53

"분명히 말하지만 네가 날 위해 해주는 일엔 굳이사랑이 필요하지 않다고. 푼돈이면 누굴 시켜도 다되는 일들이라고." - P67

최는 비로소 지금이 전쟁 상황인 걸 확실히 알았다. 살아야 했다. 최와 혜주에겐 아직 둘의 사랑을 시험해볼 만한 사건이 없었다. 늑대인간족과 좀비족과의 전쟁이 그 시험인지도 몰랐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혜주, 이 미친여자가 뭐라고 내뱉든 함께 가기로했다. - P135

"그런 건 남편한테 하라고 해요." 누군가가 소리를질렀다. - P146

"이놈이 내 사진을 몰래 찍어 갔어."
남자가 굵은 손가락을 들어 최의 목에 걸린 카메라를 가리켰다. 느닷없이 공포가 엄습했다. 그는 두손을 들었다. 뻣뻣하기가 남의 팔을 들어 올리는 것만 같았다. 입에서는 꺽꺽, 혀 굳은 소리만났다. - P152

"추워요. 춥다고." 최가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27도인데요?" 바텐더가 조리용 온도계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4월, 맑은 날 자정 가까운 시간에 27도면 정상이었다. 만져보니 이마가 땀으로 끈끈했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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