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지켜내야만 했으므로 나는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의깊게듣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가 내가 아는 것과 일치한다는 확신이 생길 때에만 비로소 그 단어를 넣어 문장을 만들었다. - P21
나는 모두가 사라진 집, 작은 식탁 앞에 앉아 종이 위에 자전거를하나 그렸다. 내가 그리는 자전거는 곡선이 실제보다 더 둥그렇게 왜곡되어 있어, 명랑만화에 나올 법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 P39
숨이 가빠왔다. 몸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뜨거웠다. 나는 안나처럼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래, 그래! 바로 그거야! P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숨이 너무 차서 더이상 참을 수 없게되었을 때, 나는 속도에 몸을 맡긴 채 두 다리를 크게 벌렸다. - P47
그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모멸의 순간을, 수치의 기억을 우리는 그렇게 꺼내놓았다. - P55
못했던 P의 불룩 튀어나온 뱃살이 안나를 달릴 때마다 출렁시켰곧 세 개의 자물쇠가 채워질 자전거를 상상하자 자꾸만 웃음이 터졌다. 흘깃 보니 이번에는 제이가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고 있었다. 나는손가락 끝에 술을 묻혀 빈 테이블 위에 얼굴을 하나 그려보았다. 그얼굴이 어딘가 마음에 들었다. 왠지 나는 이제 유머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 P55
나는 도대체 어쩌다가 폴에게 빠져버린 것일까. - P63
"shock. shock을 한국말로 뭐라고 하죠?" "충격?" "응, 충격. 아버지한테는 충격이었어요. yeah, it was a huge shockto him. - P71
"할아버지가 정산에 계셔?" "네, 산산에요." "산산?" "네, 가족들 죽으면 묻는 고향 산요." "아, 선산이야, 선산, ‘어‘ 하는 발음했다가, ‘아‘ 발음으로, 선산." "Seon San?" "응, 선산." - P77
안녕. 나는 속으로 그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폴은 슬며, 미소를 짓더니다시 뒤돌아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눈앞이 온통아시아인들뿐이라 너무 놀랐어요. 폴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나는 오랫동안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폴이 그를 닮은 듯 닮지않은 사람들 틈에 섞여 더이상 구분이 되지 않을 때까지. - P87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이지?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십 분이면충분할 것 같았는데, 비바람 탓이었을까, 가는 길이 너무 멀게만 느꺼졌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은 아닐까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 P101
문득, 그가 독일에 처음 도착했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집에 거의도착할 때 즈음 비가 멎었다. 집이 낡은 아파트의 사층에 있었고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그는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오르느라 조금 힘들어했다. - P113
우리는 아쿠아리움의 수족관 사이를 거닐며 시간을 때우고 있어. 약속시간은 훨씬 전에 지났지만 당신의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이곳에 들어온 것은 할 일이 없어서였어. 당신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아쿠아리움 건너편 호텔의 프라이빗 레스토랑이었지. - P119
당신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신인 소설가의 신작은 어떤가 읽어볼까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읽고 있을 때, 리는 뙤약볕 아래서 그들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아침 여덟시 반에 온다고 했다. 그렇게 일찍 궁을 관광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니. 리는 뭔가 이상하다 - P147
도시의 사람들은 모두 여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 P177
주말에는 무엇을 할 것입니까? 뭐라고? 주말에는 무엇을 할 것입니까? - P185
나는 말을 마쳤다. 오랜만에 내 가슴에서 빠져나간 말들이 공중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나는 천천히 관찰했다. 내 말이 가닿았는지 부인은 다 알아들었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알아들었을리가 결코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니, 알았기 때문에 마음이 놓였다. 거울을 보지 않더라도 나는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있었다. 케이크는 달고, 부드러웠다. - P191
누군가 틀어놓은 라디오를 타고 파업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파업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가 없다고, 라디오 진행자는 빠르고 단정적인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런 것과 상관없이 식당에 자리잡은 사람들은 높낮이가 각기 다른 억양과 발음으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한발, 대화 밖으로 떨어져나와 그것을듣다보니 그들의 대화는 성당에서 들었던 성가곡의 가락처럼 들렸다. 창밖은 완연한 여름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 곡조의 결을 가만가만짚어보았다. 그리고 그 곡조가 익숙해졌을 때, 고요하게 울리는 그 합창곡에 끼어들기 위해서 나는 굳게 닫고 있던 입술을 살짝 떼었다. - P196
백수린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또하나의 특징은 언어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소재의 차원에 드러난다. 이 책에실린 소설의 많은 부분이 언어 일반에 대한 문제의식과 결합되어 있다. 외국 유학이나 외국어를 배우는 상황(「거짓말 연습」 「폴링 인 폴」「부드럽고 그윽하게 그이가 웃음짓네」)과 실어증이나 언어적 혼란(「감자의 실종」 「꽃 피는 밤이 오면」) 등이 소설 속에서 중요한 장치나상황으로 등장하고 있다. - P252
이런 생각을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포착해내고 있는 작가 백수린에게 소설이란 이런 마음들, "언제나 내 안을 둥둥 떠다니는 "표현되지 않는 수많은 이야기의 부스러기들"을 표현하는 도구라 할 수 있지않을까. 이렇게 읽고 싶은 유혹을 느낄 만큼, 백수린은 이 소설에서소설쓰기에 대한 상징으로 읽힐 만한 몇몇 장면들을 배치해놓았다. - P262
이처럼 언어의 수행성에 대한 테제로 귀결되는 거짓말 연습의 서사적 성찰이 믿음직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위와 같은 단편적인 구절때문이 아니라, 이 책에 실린 소설 전체가 지니고 있는 서사적 활기때문이다. 언어의 한계에 직면하여 백수린의 인물들은 종종 입을 닫거나 혹은 매우 왜곡된 소리를 내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계기일 뿐이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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