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아닌 것은 쓰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을 바라보면 그 속에 들어 있는 어린아이가 보였다. 사랑이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게 없으면 사람은 죽으니까.
그리고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고 싶어졌다. 관객과 시청자들이 원하고 그들에게 필요한이야기를. 이전의 나는 나를 위해서썼다. 그렇게 「아가씨」와 다른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나는 ‘엄마‘라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정말 아이에게 모든 것을 내주었다. 자고, 먹고, 씻고, 친구를 만나고, 영화를 보고, 거울을보는 나 자신. 아이를 재우고 기진맥진해진 밤이면 아무것도 없이 텅빈 가슴이 느껴졌다.

아이가 집에 있게 된 상황을 생각하면 다행스럽고 생계를 생각하면 불행하게도, 수업하던 곳 역시대면 수업을 진행할 수 없어 잠시휴관하게 되었다. 집합 금지 명령으로 작업하던 카페들은 문을 닫거나단축 영업을 했고 거리에도 임시 휴무 안내를 붙인 가게들이 늘어났다.
나 역시 개점휴업 상태의 심정으로시간을 흘려보냈다. 소설의 장면이나 문장들은 가끔 나를 찾아왔다가오래 머물지 못한 채 떠나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상을 지켜내야만 했으므로 나는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의깊게듣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가 내가 아는 것과 일치한다는 확신이 생길 때에만 비로소 그 단어를 넣어 문장을 만들었다. - P21

모든 것은 자전거 때문이었다. - P33

나는 모두가 사라진 집, 작은 식탁 앞에 앉아 종이 위에 자전거를하나 그렸다. 내가 그리는 자전거는 곡선이 실제보다 더 둥그렇게 왜곡되어 있어, 명랑만화에 나올 법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 P39

숨이 가빠왔다. 몸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뜨거웠다. 나는 안나처럼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래, 그래! 바로 그거야! P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숨이 너무 차서 더이상 참을 수 없게되었을 때, 나는 속도에 몸을 맡긴 채 두 다리를 크게 벌렸다. - P47

그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모멸의 순간을, 수치의 기억을 우리는 그렇게 꺼내놓았다. - P55

못했던 P의 불룩 튀어나온 뱃살이 안나를 달릴 때마다 출렁시켰곧 세 개의 자물쇠가 채워질 자전거를 상상하자 자꾸만 웃음이 터졌다. 흘깃 보니 이번에는 제이가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고 있었다. 나는손가락 끝에 술을 묻혀 빈 테이블 위에 얼굴을 하나 그려보았다. 그얼굴이 어딘가 마음에 들었다. 왠지 나는 이제 유머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 P55

나는 도대체 어쩌다가 폴에게 빠져버린 것일까. - P63

"shock. shock을 한국말로 뭐라고 하죠?"
"충격?"
"응, 충격. 아버지한테는 충격이었어요. yeah, it was a huge shockto him. - P71

"할아버지가 정산에 계셔?"
"네, 산산에요."
"산산?"
"네, 가족들 죽으면 묻는 고향 산요."
"아, 선산이야, 선산, ‘어‘ 하는 발음했다가, ‘아‘ 발음으로, 선산."
"Seon San?"
"응, 선산." - P77

안녕.
나는 속으로 그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폴은 슬며, 미소를 짓더니다시 뒤돌아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눈앞이 온통아시아인들뿐이라 너무 놀랐어요. 폴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나는 오랫동안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폴이 그를 닮은 듯 닮지않은 사람들 틈에 섞여 더이상 구분이 되지 않을 때까지. - P87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이지?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십 분이면충분할 것 같았는데, 비바람 탓이었을까, 가는 길이 너무 멀게만 느꺼졌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은 아닐까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 P101

문득, 그가 독일에 처음 도착했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집에 거의도착할 때 즈음 비가 멎었다. 집이 낡은 아파트의 사층에 있었고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그는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오르느라 조금 힘들어했다. - P113

우리는 아쿠아리움의 수족관 사이를 거닐며 시간을 때우고 있어.
약속시간은 훨씬 전에 지났지만 당신의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이곳에 들어온 것은 할 일이 없어서였어. 당신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아쿠아리움 건너편 호텔의 프라이빗 레스토랑이었지. - P119

당신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신인 소설가의 신작은 어떤가 읽어볼까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읽고 있을 때, 리는 뙤약볕 아래서 그들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아침 여덟시 반에 온다고 했다. 그렇게 일찍 궁을 관광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니. 리는 뭔가 이상하다 - P147

도시의 사람들은 모두 여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 P177

주말에는 무엇을 할 것입니까?
뭐라고?
주말에는 무엇을 할 것입니까? - P185

나는 말을 마쳤다. 오랜만에 내 가슴에서 빠져나간 말들이 공중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나는 천천히 관찰했다. 내 말이 가닿았는지 부인은 다 알아들었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알아들었을리가 결코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니, 알았기 때문에 마음이 놓였다. 거울을 보지 않더라도 나는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있었다. 케이크는 달고, 부드러웠다. - P191

누군가 틀어놓은 라디오를 타고 파업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파업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가 없다고, 라디오 진행자는 빠르고 단정적인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런 것과 상관없이 식당에 자리잡은 사람들은 높낮이가 각기 다른 억양과 발음으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한발, 대화 밖으로 떨어져나와 그것을듣다보니 그들의 대화는 성당에서 들었던 성가곡의 가락처럼 들렸다.
창밖은 완연한 여름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 곡조의 결을 가만가만짚어보았다. 그리고 그 곡조가 익숙해졌을 때, 고요하게 울리는 그 합창곡에 끼어들기 위해서 나는 굳게 닫고 있던 입술을 살짝 떼었다. - P196

백수린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또하나의 특징은 언어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소재의 차원에 드러난다. 이 책에실린 소설의 많은 부분이 언어 일반에 대한 문제의식과 결합되어 있다. 외국 유학이나 외국어를 배우는 상황(「거짓말 연습」 「폴링 인 폴」「부드럽고 그윽하게 그이가 웃음짓네」)과 실어증이나 언어적 혼란(「감자의 실종」 「꽃 피는 밤이 오면」) 등이 소설 속에서 중요한 장치나상황으로 등장하고 있다. - P252

이런 생각을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포착해내고 있는 작가 백수린에게 소설이란 이런 마음들, "언제나 내 안을 둥둥 떠다니는 "표현되지 않는 수많은 이야기의 부스러기들"을 표현하는 도구라 할 수 있지않을까. 이렇게 읽고 싶은 유혹을 느낄 만큼, 백수린은 이 소설에서소설쓰기에 대한 상징으로 읽힐 만한 몇몇 장면들을 배치해놓았다. - P262

이처럼 언어의 수행성에 대한 테제로 귀결되는 거짓말 연습의 서사적 성찰이 믿음직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위와 같은 단편적인 구절때문이 아니라, 이 책에 실린 소설 전체가 지니고 있는 서사적 활기때문이다. 언어의 한계에 직면하여 백수린의 인물들은 종종 입을 닫거나 혹은 매우 왜곡된 소리를 내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계기일 뿐이다. - P26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예지에 발표되는 단편소설은 대개 200자 원고지 80 매 안팎의 분량이다. 이 분량은 문예지 중심으로 전개된 한국문학의 특별한 역사 안에서 형성된 것인데 그 과정에서 서구문학의 노벨레(novelle)나 쇼트스토리(short story)와는 조금 다른 미학적 형식을 이루게 된 것 같다. - P145

말을 바꾸면 한국에서 단편소설은 그렇게 녹록하고 편한 읽기의 대상이 아니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훈련된 독자라고 할 수 있는 문학평론가 후배가 하루에 읽을 수 있는 단편소설의 최대치를 서너편이라고말한 것을 기억한다. 실제로도 한편의 단편소설을 제대로 음미하려면최소한 두번의 읽기는 불가피한 것 같다. 서사 정보의 압축과 지연을통한 독자와의 머리싸움이 문체의 층위에서 세심하게 의미를 쌓는 직업과 동시에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파에 누워 편히 읽기에는 맞춤한 양식이 아닌 셈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수고가 문화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기가 곧 한국문학의 황금기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문예지의 단편소설이 일간지의 월평란에서 다루어지며 화제를 생산하곤 하지 않았나. - P146

서점 가는 일이 피하고 싶은 숙제처럼 된 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20년 넘게 책 만드는 일 언저리에 있었으니 서점은 어느 모로 보나 내일상의 가장 친근한 공간이어야 맞지 싶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교보문고에 한시간쯤 있다보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고 가슴이답답해진다. 눈에 띄는 책이 있으면 판권란이나 디자이너 이름에 눈이먼저 가고, 그 와중에도 내가 만든 책의 행방을 좇느라 마음 한구석으로는 금세 피곤이 쌓인다.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새로 나온 책을 만나고 읽고 싶은 책 앞에서 가슴 설레던 그 시간이. - P151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게 내 탓인가. 내가 내쫓았나. 그녀는 이불을 발로 차며 돌아누웠다. 노인은 방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을 뿐이고 내게는 있었을 뿐. 그냥 그것뿐. 만사가 그뿐 - P161

우리 세대의 성장기에 ‘자아‘라는 말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1919)과 함께 도착했을 수도 있다. - P136

정말 그렇지 않은가. 짜장면 배달부는 누가 부르기 전에는 갈 수 없다. 주문전화가 와야 한다. 혹은 장난전화나 잘못 걸려온 전화도 있을 수 있다. 어쨌든 누가 불러야 간다. (그런데 그 착한 사촌은 누가 불렀기에 그렇게 서둘러 갔나?) 그리고 누가 부른 다음에는 서둘러야 한다. 곧 가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서둘러 가도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다. 짜장면 배달부는 늘 늦는다. 우리는 전화를 하고, 중국집의 대답은 똑같다. 지금 가는 중이라고, 그러니 누구든 퉁퉁 분 짜장면을 받아든다. - P191

조용히, 그녀는 숨을 들이마신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 P227

그러니까 삶은 살아내는 것이 아니다. 그때 삶은 한없이 축소되고거짓 고통과 거짓 약속, 거짓 환상으로 물든다. 인생으로부터 잘려져나와야 한다. 아니, 인생을 ‘나‘로부터 잘라내야 한다. 자발적인 격리말이다. 무언가가 있다면 ‘인생과 나 사이‘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그래야 하는 것일까. ‘보기‘ 위해서다. - P2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쓰레기를 쓰겠어!
라고 결심하니 써지긴 써진다.
매일 다짐해야겠다.
쓰레기를 쓰겠어! - P31

어느 나라건 ‘헌정 역사상 최고의 여풍‘이라는 수식어를 달고서, 정원의 1/3 정도를 최대의 여성 머릿수로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건 로스쿨 제도 도입 전, 판사신규 임용을 사법연수원 성적순으로 했을 때는 신규 판사임용에서 여성 비율이 87.5%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커리어출발 시점의 똑똑한 젊은 여성들은 어디론가 쉽게 사라지고고위 임명직은 30%가 최선인 현실 속에서 ‘9명 중 9명‘은 여전히 먼 미래, 그래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더욱 입 밖으로 내뱉어야 할 이상이다. - P64

검은색 카드키를 인식기에 대면 파란 불빛이 초록색으로 바뀌고 묵직한 출입문이 열린다. 층고가 높고 통유리로 되어개방감이 드는 널찍한 공간 안에서 노트북을 앞에 둔 사람들이 드문드문 자리를 차지한 채 모니터를 들여다보거나 조용히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좌석들 사이에 설치된 벽은 자기 자리를 엄격하게 구획하는 묵직한 파티션 대신 투명 아크릴 가림막이다. 여느 사무실의 라운지와 가장 다른 점은내내 음악이 흐른다는 것. - P75

일할 때의 거절은 내 영역을 지키겠다는 선긋기다. ‘철벽을 친다‘라는 표현은 대개 사람을 묘사할 때 부정적으로사용되지만, 반대로 경계선이 아예 없는 사람을 부르는 다른 말은 아마 ‘호구‘일 것이다. 좋은 사람과 쉬운 사람은 다른데, 거절을 못하다 보면 어느새 주변에 쉬운 사람이 되어있기가 쉽다. 그리고 쉬운 사람이 반드시 좋은 사람은 아니다. 일 잘하는 사람일 확률은 더 낮다. - P89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는 평생 세상 속에 머무르지못하고 떠돌던 아티스트가 온라인 공간에서 비로소 자기 자리를 찾게 되는 이야기다. 생전에 누리지 못한 명예와 금전적 혜택은, 그 가상 공간의 아카이브를 만들어준 제3자의 몫이 된다. 다행스럽지만 쓸쓸하고, 찬란하지만 씁쓸하다. - P109

.
어떤 진실들은 머릿속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발바닥으로 디뎌봐야만 알게 된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뭘까? 그나라의 자연과 문화를 접하고 싶어서, 여행지에서 평소와다른 방식으로 반응하고 행동하는 나를 보려고, 혹은 그저복잡한 일상을 잊고 즐기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렇게 잘여행하고 돌아올 때 일상을 잘 사는 역량이 늘어 있기도 한다. 돌아와 계속되는 삶에서 만나게 되는 돌발 상황, 내 머리밖의 진짜 현실을 받아들이는 유연성과 적응력을 키우는 기회가 여행이기도 한 것이다. - P159

점점독립적이 되어가는 대신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법, 도움을 요청하는 법을 잊어갔다. 그 상태는 독립인 동시에 고립이기도했다. 엄마도 어쩌면 아픔 그 자체보다 자신의 아프고 약한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더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 P17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았어. 당신 좋을 대로 해." - P55

"그거 협박이야, 약속이야?"
"둘 다지." - P54

"있잖아, 폴." 그녀가 말한다. "가끔씩은 긴장을 푸는 것도 괜찮아. 그건 죄악이 아니잖아.",
"뭐가 죄악이 아니야?"
"행복한 거." 그녀가 내 손을 잡으며 말한다. "그건 죄악이 아니야." - P57

"그냥 전화 왔었다고 전해주세요." 라몬이 말한다.
PE
"그래." 나는 잠시 말을 멈춘다. "그런데 말이다. 바꿔줄 수도있는데."

"아뇨, 괜찮아요." - P75

"당신은 어때요? 나이 어린 여자를 사랑해본 적 있나요?"
"아." 그는 미소를 지었다. "몇 명은 됐었지 싶은데요." 그는내게 윙크를 했고, 그러더니 와인을 마저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음반을 바꿔 걸었다. - P107

"놀란 게 아니야. 행복할 뿐이지." - P1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