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가 되고 ‘불순한‘ 독서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니, 어쩌면 소설 쓰기를 제대로 결심한 시점부터였을 것이다. 정확히 특정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부터 나의 책 읽는 방식은 조금씩 변화해왔다. 읽는 사람의 독서에서 쓰는 사람의 독서로, 순수한 감탄과 경이에서 벗어나 표면 아래 설계도를 더듬는방식으로 - P159
것을 좋은 작품으로 보는지‘, 즉 미학적 평가의 기준이 둘 사이에 상당히 다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본격문학에서는 인물의 내면, 인물 사이의 갈등, 인물의 변화에 더 주목한다면 SF에서는 인물과 세계의 갈등, 세계의 구조와 규칙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 P164
내가 현실에서 가져온 재료는 전부 내가 나고자란 사회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SF는 낯선 세계를 다루지만창작자의 상상력은 현실에 기반한다. 나는 내 소설을 현실로부터 완전히 탈맥락화하거나 표백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 재료들을 들여다보고 이전의 소설가들이 어떻게 그것들을 다뤄왔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 P179
그래도 내가 데뷔하기 전부터 큰 영향을 받은 단편들이 실린 네 권의 책, 듀나 『태평양횡단 특급』, 배명훈 『예술과 중력가속도』, 정소연 옆집의 영희 씨』, 김보영 『다섯 번째 감각』만큼은 꼭 추천하고 넘어가야겠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소설가들의 각각 다른 개성과 매력이 담긴, 한국 SF의 강렬한 색깔을 담은 소설집들이다. 거의 모든 소설이 선명하고 아름답다. 그들과 동시대에 같은 장에서 소설을 쓰고 있음에 기쁨을 느낀다. - P182
결코 좋아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책들의 매력을 발견하는순간이 있다. 심지어는 그런 책들과 사랑에 빠지는 순간도 있다. 나는 그것이 쓰는 사람으로서의 독서가 나에게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순수하지 않은 동기로 시작한 일이 때로는 가장 멀리 나를 데려간다. 미심쩍은 기분으로 집어 든 책이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읽기가 ‘일‘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세계다. - P188
설득력 있는 비평은 이미 쓰인 작품에 대한 관점을 바꿀뿐만 아니라 앞으로 쓰여질 작품에 대한 관점 또한 바꾼다. 한 장르가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좋은 비평이 필요하다. 국내의 많은 SF 작가가 한국 SF 비평이 아직 충분하지 않아 아쉽다는 말을 자주 한다. - P208
한편으로 창작자로서 나는 내 글을 무작정 변명하고 있을수도 없다. 나의 글에 읽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지만, 더 나아질 여지가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누군가의 말에휘둘려 내 글을 너무 미워할 필요는 없지만 너무 닫힌 마음을가질 필요도 없다. 독자들의 반응을 처음 접하던 데뷔 초기에는 양극단으로 빠지기 쉬웠다. 엄청난 혹평을 접했는데 그 혹평이 어딘가 납득이 가면 ‘그래, 내가 쓰기는 했지만 이 소설은 역시 쓰레기였어!‘라고 생각해버리거나, 혹은 반대로 ‘그럴 리가 없어, 이 사람은 완전 안목이 없네!‘라고 생각했다. 보통 현실은 그 사이에 있다. 결함 많은 작품도 어떤 독자들에게는 소중한 작품이고, 받아들이기 힘든 피드백에도 대체로 진실이 존재한다. - P213
다른 사람들이 그의 책이라고 말하는 책을 자신의 책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도솅은 자기 분열 현상에 직면하고 있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작가들도 종종 사람들이 자신의 책에 대해 말할 때, 어떤 ‘다른 책‘에 대해 말하는느낌을 받는다. 그런 분열은 우리에게 내면의 책이 있기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이 내면의 책은 어느 누구에게도 전달될 수 없고 어떤 책과도 겹쳐질 수 없다. 피에르 바야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중에서 - P218
나는 오랫동안 내가 취향이 무척 확고한 독자이며 어떤 책을 좋아하고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스스로 가장 잘 알고있다고 생각했다. 서점은 이미 구입하기로 결정한 책을 사서오는 곳이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내 취향에 대한확신이 오히려 내 세계를 좁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이미 알고 있는 세계 안에서 빙글빙글 맴돌며 익숙한 즐거움을 찾았다. 서점에 가면 망설임 없이 특정 분야의 서가로 직진해서 그곳만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도서관에서도 마찬가지로 나는 언제나 자연과학서가 근처를 돌아다녔다. - P229
"여기는 소리를 지르는 장소가 아니에요. 여기는 서점이라고요. (중략) 여러분이 서로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든, 무엇에 대해 떠들고 있든 저는 상관 안 해요. 이제부터 여러분은 확실히 예의를 지키셔야 할 거예요, 왜냐하면... 왜냐하면..." 피비는 제이디와 존을 돌아본 다음, 자기 엄마를 바라봤다. "왜냐하면, 잠시 후에 우리의 북클럽 첫 번째 모임이 시작될 예정이니까요.", - 찰리 제인 앤더스, 「아메리카 끝에 있는 서점」 중에서 - P233
그렇게, 좋은 기억들은 책방과 느슨히 연결되어 있다. - P236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우주 속의 창백한 푸른 먼지에불과하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가 무력한 존재라는 당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과학은 지금 우리가 있는 행성, 발 디딘 장소, 거대한 세계 속 미약한 우리의 존재를 말해준다. 하지만미약함을 직시한 사람들이 무엇을 선택하는지는 과학이 말해주는 영역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세계 속에서 미약하면서 존엄하기를 선택할 수 있다. 그 선택은 미약하기에 더 경이로울 수 있다. - P246
과학도 인간이 실천하는 활동인 만큼 수많은 오류를 품고삐그덕거리며 때로는 퇴보하고 이따금 힘겹게 나아간다는것을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과학, 그 자체로 완벽하게 합리적인 과학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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