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뭐 해요." 수진이 회전하는 젓가락 끝을 보며 심상히 말했다. "뭐 하는데?" 수미가 청경채를 우적우적 씹으며 물었다. "소설 써요." "소설?" "네, 밤에요." - P173
"취해 살지 말어." 원장이 고개를 뒤로 꺾곤 그대로 다시 누워버렸다. - P173
사랑에 투여되던 우리의 에너지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사랑이 불러일으킨 우리의 흥분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 P183
만일 ‘살인자들의 무덤‘이 있다면, 그곳은 두 곳으로 나뉠 것이다. 여자를 죽인 자들이 묻힌 A구역과 남자를 죽인 자들이 묻힌 B구역. 나는 살인자들의 묘만을 모아둔 묘지공원을 상상하며 내가 그곳에 묻힌다면 어디에 묻히고 싶은지 매일 생각한다. - P187
* 흔히 대중매체에서 언급되는 ‘아무도 찾지 않는 여자‘ ‘가족도 찾지 않는 여자‘ 같은 표현이 불러일으키는 불필요한 비극성을 중화하고자 필자가 직접 개발한 표현으로, 향후 상기의 표현이 널리 퍼질 경우를 대비해 최초의 발원지가 여기임을밝혀두는 바이다. - P191
겨울이 오면 사장은 와인이 아니라 뱅쇼를 건넸다. 누구나 창문을 두드리면 따뜻한 술이 나왔다. "과일은 한살림 팔각과 정향은SSG." 뱅쇼 재료를 내려놓으며 사장이 말했다. "내 뱅쇼 만들 때도같은 데 거 써. 내 입이라고 상질 쓰고 남의 입이라고 하질 쓰고 그런 짓 안 해. 사람 입에는 같은 걸 똑같이 넣자는 주의라. 동일 개구開口, 동일 퀄리티 quality 랄까?" 보이와 나는 노숙자의 입에 들어가는 술에 값비싼 유기농 과일을 쓰는 것이 몹시 아깝게 느껴졌다. 우리 것이 아닌데도 그랬다. - P197
사장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상상해본 적 없어? 일요일 밤에 재활용 쓰레기를 잘 분류해 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뒤도는데 앞에 그 사람이 있는 상상. 보는 순간 아 왔구나, 묘한 안도감이 드는 그래,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네가 나를 죽인다면 나도 인정, 쌉인정, 하며 편해지는 마음." - P209
달리면서 고개를 든다. 천장이 길게 찢어져 있다. 터진 하늘에서고개를 내민 여자들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눈물을 흘린다. 그 너머로 뒤집힌 무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 P213
어느 날 세 명의 아이 앞에 성모님이 나타나셨고 기후 위기를걱정하며 피눈물을 흘리셨다. 그것이 M이 성지로 인정받아야 할이유였지만, M에서 성모님이 흘린 피눈물은 인정받지 못했다. 우리가 머물 무렵 어디서나 분통을 터뜨리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M이 공식 성지가 되지 못한 까닭은 서유럽이아니기 때문이었다. - P221
우리는 그들 주위를 날아다니는 ‘갈라진혓바닥‘의 귀여운 날갯짓을 보았다. 우리는 더위를 먹은 줄 모르고더위를 먹었고 헛것을 보면서도 헛것인 줄 몰랐다. 우리는 오줌이마렵지 않도록 물을 조금씩 마셨다. - P227
"율리, 마약 해요?" "아니." "그런데요?" 안젤라 아줌마가 입술을 삐죽대며 말했다. - P242
그들이 도착한 곳은 고가도로 밑으로, 인도도 차도도 아닌 그곳에는 주차된 차들만 가득했다. 불법 차고지인 그곳에는 온갖 차가있었는데, 흙먼지를 뒤집어쓴 덤프트럭과 촌스러운 커튼이 달린관광버스와 러시모어산의 큰 바위 얼굴을 닮은 근사한 ‘추레라’와온갖 톤의 탑차와 이 거대한 차들 사이에 있으니 아기처럼 보이는봉고가 있었다. 늙은 개처럼 기름을 뚝뚝 흘리는 탱크로리도 있었다. 머리 위 고가도로를 달리는 차들의 진동에 작은 물웅덩이들이일제히 흔들리고, 그 속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까만벌레가 휘돌았다. - P246
우리는 개를 생각했다.사람이 뿌린 물 한 바가지에 소스라치게 놀라 떨어지는 개들. 흘레붙다 떼어진 그들의 분노를 한몸인 듯 느꼈다. - P261
"너희는 클 거야. 자랄 거야. 그럼 너희도 다른 사람의 가슴을 찢어놓을 수 있어. When I was a child, I used to talk as a child, think as a child, reason as a child; when I became a man, Iput aside childish things. 어릴 적의 일은 뒤로하고. 우리는 죽는날까지 죄의 항상성을 향해 나아간단다." - P264
본래 목경이 카페에서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부류는 아니었다. 그러나 누구나 만나곤 한다. 누가 듣거나 말거나 목청껏 말하는 무신경한 사람이 아니라 카페의 모든 사람이 자기 말을 들어야 한다는 듯 심하게 거들먹대는 사람을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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