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에 유서를 썼던 그날처럼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다.
아, 시원하다. 나는 열대우림 한가운데에서 소나기로 샤워중이다. 내 땀이랑 섞인 빗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 입으로 비집고 들어온다. 짜고 비릿한 맛이 난다. - P231

그래서 몇 주째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 의지가 아니라 몸이 나에게 주는 일종의 징벌이었다. 장은 항암으로완전히 초토화된 지 오래고, 자궁과 난소는 방사선으로 말라비틀어졌고, 폐는 암이 막 장악하기 시작했고, 다리의 신경줄들은 벌겋게 녹이 슬기 시작했다. - P230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살고 있는 거라고. - P236

소풍의 끝에서 이렇게 외치고 싶다.
"재밌었고,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고, 자알 놀다 갑니다!"
무성한 풀밭으로 다시 성큼 걸어 들어갔다. - P238

이 책의 주요 서사가 되는 시간의 절반을 죽음을 기다리며 병상에서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을다닐 때보다도 세상에 대해 훨씬 많은 것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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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옆 테이블 여성은 계속 울고트 팔처럼 쭉 뻗어서 토닥거려주고 싶네. - P36

프리퀀시 미션 음료인 오로라 캐모마일 릴렉서를주문했다. ‘크리마스마스 밤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듯한 오로라가 살포시 내려앉아 홀리데이 시즌을 더욱설레게 만들어주는 음료‘라는 설명이 딱 어울린다. - P43

일본어 책과 교정지를 펼쳐놓고 씨름하는 50대 여성의 모습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지. 그렇다고 그렇게 단체로 보시면 민망합니다요. 소음은 이길 수 있었지만, 시선은 이길 수 없어서 피난 가는 기분으로 가방을 쌌다. 조금만 참으면 점심시간 끝나서 그들이 나갈 텐데 그걸 못 견디다니. 강해져라, 나의 멘탈. - P47

이상 스타벅스에서 베이비시터를 한 이야기였습니다

일본어로도 다리 떠는 걸 ‘빈보유즈리‘라고 한다. - P53

새해가 시작된 지 한 달이 다 돼 간다.
몇 십 년째 내 인생은 번역에서 시작해 번역으로끝나는 한 해였는데, 올해는 도무지 예측할 수 없다.
무슨 계획을 세워야 할지, 어떤 꿈을 가져야 할지 모르겠다.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라고 자이언티는 소박하게 흥얼거리지만, 그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잖아. - P55

자식 수능 치뤄본 학부모라면 안다. 저 밝은 모습이 얼마나 감사한지. 진로가 정해진 자의 여유와 기쁨에 넘친 모습은 남이 보기에도 흐뭇하다. 축하한다. - P57

신메뉴도 ‘이제 물리네‘ 싶을 때가 되면 들어간다.
겨울 신메뉴였던 블랙 햅쌀 고봉 라떼를 마시는 것도오늘로 마지막이다. 안녕, 덕분에 위가 든든했다. 볼수 있으면 내년에 또 보자. - P58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깔깔깔 웃음소리가 과하다 싶을 때, 한 학생이 들으라는 듯이 탁탁탁 소리 내어 짐을 챙기더니 휙 가버렸다. 나는 놀라서 언니들을슬쩍 보았으나 언니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하던 얘길계속했다. - P60

2022년 3월 15일 화요일생일 쿠폰으로 슈크림 라떼(6,100원)를 주문했다.
정하가 "존맛이야"라고 추천해서 주문해봤는데존맛은 개뿔. - P79

‘세상은 온통 봄이고, 나는 외톨이다.‘
오가와 요코의 소설 <우연한 축복》을 번역하며 책문장을 적어둔 것이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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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고 있어, 가자!" - P139

"아가야, 엄마야."
라고 서로를 명명하는 말소리. - P149

모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은 억양과 리듬이라고 한다. 우연히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듣다가 엄마와 닮은 억양과 리듬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 적이있다. 글도 마찬가지다. - P155

진실은 어떤 모양이든 가치가 있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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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시절은 단단히 기억하지,
밀려온 진눈깨비조차참 따뜻한 나라라고-김명인의 시 「여수」 - P9

여수, 그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대고 있을 것이다. 여수만(灣)의 서늘한 해류는 멍든 속살 같은 푸릇푸릇한 섬들과 몸 섞으며 굽이돌고 있을 것이다. 저무는 선착장마다 주황빛 알전구들이 밝혀질 것이다.
부두 가건물 사이로 검붉은 노을이 불타오를 것이다. 찝찔한바닷바람은 격렬하게 우산을 까뒤집고 여자들의 치마를, 머리카락을 허공으로 솟구치게 할 것이다. - P9

・그만해요.
자흔은 내 등을 두드리며 속삭였다. - P13

자혼을 만나던 그 휴일 오후까지 나는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내 결벽증은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만큼 소문이퍼져 있었다. 자취방을 거쳐 간 사람들이 저마다 나에 대한 말을 퍼뜨리고 다니리라는 생각이 내 초조한 신경을 들쑤셔놓았다. 나로서는 조금의 악의도 품고 있지 않은데 단호히 떠나버린 그네들, 다시 찾아오는 것은 고사하고 안부 전화조차도하지 않는 그네들에게 나는 은밀하게 상처받고 있었다. - P17

어째서 여수에 가야 한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치밀었으므로 나는 말을 끊어버렸다. 그곳에서 누구를, 무엇을 찾을 수있다는 말인가. - P23

이렇게 고요해질 통증인 것을, 지난밤에는, 또 수없이 반복되었던 그 밤들에는 이런 순간을 믿지 못했었다. 마치 밤이 깊을 때마다 새벽을 믿지 못하듯이, 겨울이 올 때마다 봄을 의심하듯이 나는 어리석은 절망감에 사로잡히곤 했던 것이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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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껏 분노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 P130

투병 후에는 세상의 감사 강요가 더 집요해졌다. - P131

아이러니하게도 충분히 분노해야 분노에서 벗어난다. 마지막 가루까지 불태우고 소진해야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다. 잿더미가 돼야 가벼워지고, 다시 어디론가 날아갈 수 있다. - P132

일을 통해 사람을 알아가면 좋겠다. 사람을 얻는 능력은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극악의난이도를 자랑한다. - P139

커리어에 있어서 가장 큰 성장과 도약의 순간은 내가 촘촘하게 계획한 플랜 A에 있지 않고 계획이 틀어져서 경로를 수정한 플랜 B에 있기 때문이다. - P143

플랜 B는 단순한 정신승리가 아니다. 커리어와 삶을 빚어가는 태도이자 나침판이다. 그런 의미에서 플랜 ‘Be‘다 - P151

나는 매우 느린 사람이었고 내 암은 남들의 것보다 훨씬 지독했다. 평가와 비교는 병의 세계에서도 엄연히존재했다. - P156

어떠한 성취로도 만족하지 못했던 내가밥을 먹었다는 이유로, 5분이라도 집 밖을 나섰다는 이유로스스로를 칭찬해주기 시작했다. 내면의 꾸준함이 강해질수록 ‘남‘이라는 존재에 대한 기억은 흐릿해져갔다. - P159

성장은 정답을 잘 맞히게 되는 것이라기보다 어제보다 조금 덜 틀리게 되는 것이다. 오답보다 더 최악인 것은 오답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뿐히 정답을 버렸다. - P164

안타깝게도 죽음은 내가 일을 하는 동안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시간은 계속해서 간다. 일을 하는 시간도 삶이고퇴근한 이후의 시간도 삶이다. 똑같은 삶이다. 일을 삶의 중요한 한 축으로 존중하고, 일을 하는 시간만큼은 그 시간을후회 없이 보낸다. 삶을 완성하는 축들은 무 자르듯 뚝뚝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일, 취미, 가족, 친구들, 커뮤니티 등 삶의 다양한 축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이지 제로섬 관계가 아니다. - P168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바뀐다. 결과를 듣기 전까지 나는 삶과 죽음의 ‘중첩 상태‘에 있다. - P171

그렇기 때문에 검진을 앞둔 전날, 내가 숨 쉬는 공기는 조금더 매서워지지만 나라는 사람은 조금 더 따뜻해진다. - P172

그러나 더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있었다. 생존율 50퍼센트를 위해 3기 치료를 받던 시절보다 생존율 15퍼센트를 향해발버둥치며 4기 치료를 받던 시절이 더 즐거웠다는 것이다. - P181

난소의 죽음은 품위 있는 죽음이어야 했다. 내가 여자로서 안고 살았던 기대, 불안, 가능성, 그리고 그 역사가 나무테처럼 난소에 있기 때문이다. - P199

하지만 신기하게도 인터넷이 확실하게 약속했던 불행은 몰려오지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아직 오지 않고있다. - P201

네트워킹이라니, 무슨 미친 소리인가. 친하게 지내자고얘기하고 싶었는데 속세의 단어가 튀어나와버렸다. - P204

한편으로는 예순 살짜리영감이 몸에 들어 있는 것 같았고, 어떤 한편으로는 문학을좋아하는 소년 같아 보였다. 속눈썹은 나보다 길었고, 눈빛은 사슴처럼 깊고 그윽했고, 웃음은 너무 귀여웠고, 나는 갑자기 사랑에 빠졌고…………… - P214

험담을 하고 나니 좀 시원하다. 그의 모든 단점들을 오래오래 파헤치고 싶다. 언젠가 괴팍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서로에게 구시렁대고 싶다.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함께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시간 동안 나는 남편에대한 험담을 멈출 생각이 없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남편에게 다가간다. - P218

삶의 무게가 복리로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나이 드는 과정이다. - P222

너무 많은 것들을 바라기 전에, 나이에 관한 글을 마친다.
와, 정말 마흔이 될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책이 출간된 2024년 12월에 진짜로 마흔이 되었습니다.)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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