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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전적비를 찾아서
박양호 지음 / 화남출판사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우리 주위에 많은 기념비가 있지만 유엔군 전적비가 있다는 사실을 많이 모르고 있습니다.
저 역시 2014년 용인에 있는 고구려 산성을 찾으러 석성산을 오르다 영동고속도로 마성나들목에 있는 터키군 참전 기념비를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기념비가 고속도로 입구에 있나 싶어 고속도로를 무단 횡단하여 가로질러 가 보았습니다.
터키가 한국전쟁 참전국이고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는 지식은 있었는데 이런 후미진 곳에 기념비가 있을 줄이야 생각도 못했습니다. 기념비라하면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에 위치해야 그 뜻을 기릴 수 있을텐데 하며 아쉬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 후 유엔군과 한국전쟁에 대한 관심이 없다 올해 유엔군초전기념관을 다녀오며 그 동안 잊었던 고마운 분들에 대해 알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첫번째로 '유엔군 전적비를 찾아서' 책을 통해 지식을 넓히고, 6월 연천의 필리핀군 기념공원과 유엔군 화장장터를 다녀올 예정입니다.
책을 읽으며 그 동안 우리의 무관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태어난 대전, 그것도 보문산은 초등학교시절 소풍장소로 매년 찾았던 곳입니다.
지금도 제 어릴적 사진첩에는 유엔군 대전지구 전승비와 대전지구 전적비에서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무려 30년 동안을 이 전승비와 전적비에 대해 알아볼 생각은 꿈에도 못했으니 말입니다.
1950년 7월 19일 ~ 21일까지 대전에서 치러진 전투를 기리기 위한 전적비입니다.
대전지역 방어를 위해 미 34연대가 현 대전시청 일대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제 1대대는 138고지(현 월평공원 정상)와 193고지(월평경기장 뒷산)에 배치되어 갑천의 만년교를 통제하고, 제3대대는 남선봉 고지 일대에 배치하였다.

대전 둔산동과 갈마동에서만 30년 넘게 살아온 저는 등산로로 도솔산까지 주말이면 운동하던 곳이고, 남선공원 눈썰매장이 있던 곳입니다. 제가 잘 알고 다녔던 곳인데 이곳에는 유엔군이나 한국전쟁에 대한 설명이나 문구도 보지 못했었습니다.
미 34연대 B중대는대규모 북한군 공격을 받아 월평동 산 동쪽에 있던 제1대대본부로 이동하였다. 정오 무렵 가수원 다리를 건너 갑천으로 진격하려는 북한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7월 20일 03시 경 적 전차가 월평리(현 갑천역)을 우회하여 미 제1대대 관측소를 공격하면서 138고지(월평공원)를 포위했다. 3.5인치 바주카포가 배치되어 있었지만 후방이 공격을 받자 갈마리 현 한밭고등학교 인근에 있는 제1대대 지휘소로 철수했다.
적 전차가 32번 국도(계룡로)를 따라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하자 제1대대는 05시경 후퇴하여 11시경 대전시 중구에 있는 보문산 정상에 집결하였다. 남선봉에 있던 제34연대 제3대대는 월평리 138고지와 정림리 무명고지 사이로 들어가 공백을 메우라는 연대본부로 부터 지시를 받아 1개 중대와 화기중대를 보냈는데 용문동 도로에서 적 전차 6대와 북한군 1개 대대와 마주쳤다. 미군은 남선봉 진지로 철수했다. 16시에 1개 중대가 서대전사거리에서 엄호하는 동안 대대는 18시경 2개 조로 나누어 철수를 시작했다.
1조는 차량으로 이동하다가 시내에 들어와 있는 북한군 저격병들의 기관총으로 인해 차량을 버리고 대동 산기슭으로 탈출했고, 2조는 인동사거리에서 옥천가도로 이동하던 중 선두차량이 박겨포탄을 맞아 전복되며 세천터널 쪽으로 이동하다 북한군의 집중사격을 받고 일부만 옥천으로 빠져나갔다.
19연대 제2대대는 20일 새벽 적이 전차를 앞세우고 갑천을 건너자 주진지에서 189고지(도솔산)로 후퇴했다. 하지만 북한군이 계속 밀려들어 189고지를 이탈하여 유천동 쪽으로 철수했다. 대대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남아 박격포를 쏘던 G중대 화기소대가 적의 공격을 받고 화기소대 전체가 전사하고 말았다.
제2대대장은 서대전사거리에 3대의 전차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1개 소대를 보내 수색중대와 후방을 방어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월평리에서 후퇴한 제34연대 제1대대로부터 전투상황을 전해 듣고 후방이 차단 됐음을 알게 되었다. 11시경 연대 본부로 연락병을 보냈으나 통신이 끊기고 대전 시내에서 연기가 솟구치는 것을 관찰한 후 대전이 적에게 점령당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보문산으로 이동한 후 예비 중대도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대전지구 전투를 지휘하던 딘 소장은 연대를 철수명령을 내리고 옥천으로 철수하지만, 인동사거리에서 길을 잘못 ㄷㄹ어 옥천이 아닌 금산가도로 빠지고 말았다. 계속 남하하던 중 낭월리에서 적의 공격으로 차량 진출이 어렵게 되었고 밤이 되어 병사 17명과 함께 산내초등학교 인근에서 산으로 탈출했다. 딘 소장은 소호리 강바위산 인근에서 부상병이 마실 물을 뜨러 갔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후 36일 동안 고립되어 있다가 전북 진안군 상전면에서 부역자의 신고로 포로가 되었다.
미 제24사단은 대전지구 전투에 3,933명이 참가해 전사 48명, 부상 228명, 실종 874명이나 되는 큰 피해를 보았다. 차량 65%가 파괴됐고, 포병대대 A포대는 155mm 야포를 모두 잃었다. 미군은 북한군 T-34 전차를 3.5인치 바주카포로 8대, 포격으로 2대, 항공기 폭격으로 5대 등 15대를 파괴했다.
이로써 미 제8군사령관의 바람대로 제24사단이 7월 20일까지 대전을 사수하며 미 제1기병사단이 정상적으로 전선을 인계받았고 더 나아가 낙동강방어선을 구축하는데 금쪽 같은 시간을 벌어주었다. 미 제24사단은 7월 5일부터 21일까지 17일간의 전투를 치르는 동안 병력 7,305명과 장비 60%를 잃었다.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과 우리의 삶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남의 나라에서 목숨을 바쳐가며 지켜온 자유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이들의 희생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봅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유엔군 전적비에 대한 취재와 공부를 지속하여 이들의 뜻을 기려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