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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23 - 피아니스트 조가람의 클래식 에세이
조가람 지음 / 믹스커피 / 2025년 4월
평점 :
빨간색 하드보드의 표지에 흰색 바탕의 띠지. 띠지 안에는 빨간색 드레스와 빨간색 립스틱을 바른 검정 긴 머리의 미인이 눈에 띈다.
미모의 얼굴을 한 30~40대의 여성, 피아니스트 조가람이라는 문구가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다. 역시 여성의 미모는 무기라는 말이 생각난다.
피아니스트 조가람? 클래식 음악을 3~4년 전부터 듣기 시작한 나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다. 초록색 창에 검색해 보니, 한스아이슬러 음악대학교 대학원 피아노 박사에 2013, 2014, 2015, 2017년 국제 콩쿠르 입상 및 준우승의 경력이다. #Op.23 책 내용 중 part 3에서 자신의 이력을 짧게 이야기하는데 예중 - 예고 - 서울대 - 서울대학-베를린 국립음대 석사, 최고 연주자 과정까지 정석적인 교육 코스를 밟았다고 소개한다.
이렇게 피아니스트로 경력을 쌓았으니 피아니스트로 클래식 음악에 대해 소개하겠구나 생각하며 글은 조금 부족하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책을 읽는 동안 나만의 상상으로 조가람 피아니스트와 커피향 가득한 조용한 찻집에서 클래식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Op.23에서 아버지가 기자라는 것과 새벽 2~3시에 출근하는 아버지를 배웅하기 위해 그 늦은 시간까지 책을 읽었고 그 결과 동네 도서관의 책을 5천 권 이상 읽어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에 감탄하며 조가람 피아니스트의 글쓰기 실력이 그 많은 양의 독서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Op.23 에서는 다양한 연주자와 작곡가를 소개한다.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술의 장벽을 뛰어넘는 이야기, 민족을 위해 헌신한 이야기, 좌절을 극복한 이야기, 사랑을 담은 이야기 등 예술가들의 삶을 소개한다. 예를 들자면 쇼팽, 클라라 슈만, 라흐마니노프, 조지 거슈윈 등 우리가 한 번은 들어봄직한 클래식의 거장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의 삶과 음악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작가가 소개하는 곡들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쯤에서 QR코드가 있어 거장들의 음악을 듣거나 실황 영상을 보았으면 했는데, 이 부분이 없어 살짝 아쉬웠다.
주말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듣는 KBS 클래식 FM 방송에서 모리스 라벨에 대해 소개하며 한 달 동안 그의 음악과 삶을 이야기했다.
클래식에 초보인 나에게만 생소한 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방송을 진행하는 아나운서 역시 모리스 라벨이 생소한가 보다. 아직 초보인 나에겐 기존의 클래식 음악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방송에 나온 교수는 우리에겐 잘 소개되지 않았지만 그의 음악 세계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Op.23 CONTENTS를 보다 '모리스 라벨'이 있다는 것에 놀랐고, 그의 삶에 대해 자세히 소개한 작가의 글을 먼저 보게 되었다.
모두를 위해 가벼워지다, 모리스 라벨
스페인 혈통의 어머니와 스위스 혈통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벨 에포크(Belle Époque는 유럽사의 시대 구분 중 하나로,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시절'이란 뜻을 지닌 단어이다. 보통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전 유럽이 평화를 누리며 귀족(부르주아), 상류층이 주축이 된 사회로 부귀영화를 누렸고 경제, 문화가 급속하게 발전했던 태평성대이자 휘황찬란했던 유럽 평화의 최고 전성기를 말하며 영국의 산업 혁명을 계기로 공장, 철도, 자전거, 자동차, 증기선, 열차 등 더욱 발전된 이동 수단의 출현 및 과학 기술의 혁신으로 크게 번영하고 제국주의가 대두되며 전 세계를 오로지 유럽만이 독점하고 주도했었다. 서브컬처 문학이나 애니메이션에서 신분제가 확고해지고, 현대인이 보기에 살 만해 보이는 문물이 갖춰져 있는 시대 설정을 했다면 대충 이때다.)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파리에서 여술과 혁신의 공기를 마시며 자라난 사람,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과거의 질서를 그리워하며, 세상의 오묘함과 인간의 패러독스를 예술로 녹여낸 사람.
라벨보다 13살 연상이었던 드뷔시는, 비로소 독일 음악의 그늘에서 벗어나 프랑스만의 독창적인 음악 언어를 구축했다. 그 옆에서는 스트라빈스키가 혁신적인 작품을 내놓았고, 쇤베르크는 12음기법과 무조성 음악으로 새로운 실험을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휩쓸고 지나간 후 세상은 문명을 불신하고, 신조차 의심하며, 기존 질서를 해체하려 했다. 예술도, 과학도, 철학도, 정치는 사방으로 산발적으로 흩어졌다.
모리스 라벨은 이런 혼란의 한가운데서 신고전주의를 택했다. 18세기 고전주의의 이성적 양식을 음악의 육체로 삼고, 그가 체험한 20세기의 혼돈과 예술적 실험을 영혼으로 삼았다. 이렇게 탄생한 음악은 세련된 지성미와 신랄한 풍자를 띠었다.
라벨이 파리 음악원에서 퇴학당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아시아 문화, 스페인의 민요, 고대 야화에서 음악적 영감을 얻었고, 그의 작품은 당대 학계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생경했다. 그의 음악은 마치 처음 맛보는 타지 음식처럼 낯설었고, 대학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존재였다. 결국 스승이었던 가브리엘 포레를 제외한 교수들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퇴학당했다. 이후 재입학했지만, 여전히 그의 음악은 조성을 기반으로 논리를 발전시켜온 정통 클래식 음악계에 그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존재, '앙팡테리블'이었다.
그는 뜻을 함께하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나 스페인 작곡가 마누엘 드 파야 등과 함께 주도적으로 예술적 추방자들의 모임을 만들고 "Les Apaches", 아파슈족이라고 명명했다. 파리의 젊은 예술가, 음악가, 시인, 평론가 들이 모여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교류하던 비공식적인 모임이었다. 이 모임에서는 사유의 무경계적 충돌이 산발적으로 일어났고, 학문적 교류에는 제약이 없었다. 사상의 실험으로 새로이 배양된 서로의 새로운 작품을 발표했고, 신랄한 비평이 가감 없이 오갔다.
스스로를 예술적 추방자라 칭했던 라벨은 온화한 농담과 냉담한 지성, 그리고 깊은 인류애를 동시에 지닌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당대의 찬사와 질투를 한몸에 받았다. 특히 비평가 피에르 랄로는 라벨의 데뷔 시절부터 수십 년간 그를 끈질기게 공격한 인물이었다. 그는 라벨을 깎아내리기 위해
"재능은 있으나 드뷔시를 모방하느라 큰 빚을 졌으니 이제는 베토벤을 모방하라"라는 독설을 퍼부으며 라벨과 드뷔시 사이를 이간질했다.
세간의 주목 속에서 그에 대한 각종 루머와 비평이 끊이지 않았지만, 라벨은 언제나 신사적으로 대응했다. 청년 시절부터 지혜로운 태도로 자신의 음악적 신념을 지켰으며, 비난이나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러한 라벨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라벨은 자신의 신념과 다른 방식의 작품을 만들었을 때도 흔들리지 않는 태도를 유지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볼레로'다. 어느 날, 공연장에서 한 청중이 곡이 끝나자마자 외쳤다. “이 곡은 쓰레기야!" 그러자 라벨은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드디어 저 부인이 옳은 메시지를 받았군요!"
이 곡은 전 세계적으로 대중화되고 수백 번 녹음되며 굉장한 붐이 일었다. 라벨은 이를 두고 “나는 볼레로라는 걸작을 하나 썼어요. 딱 하나의 걸작이죠. 불행하게도 거기에는 음악이 없습니다."라고 비꼬았다.
그의 눈길이 향한 곳은 단 두 가지였다. 전쟁 전에는 자신만의 음악적 어법을 완성하는 것이었고, 전쟁 후에는 상처 입은 세상을 위해 음악이 해야 할 일을 고민하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음악가들 사이에서는 독일 음악을 연주 금지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생상스를 포함한 여러 음악가가 '프랑스 음악 방어 연맹'을 조직하며 캠페인을 벌였다. 그러나 라벨은 이 연맹 가입을 거부했다. 독일의 전쟁 행위에는 반대했지만, 예술이 정치적 갈등이나 민족주의로 제한되어 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독일 음악을 금지하는 것은 음악적 자유를 해치는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라벨의 이런 태도는 프랑스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일부에서는 그의 작품 연주를 금지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것을 감수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적 표현의 자유와 개방성이었다. 이러한 신념들은 그에게 지적 편견이 있다는 평을 만들었지만, 그의 삶과 예술을 관통하는 원칙은 단 하나였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1920년대, 라벨은 미국 여행에서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경험하고 충격에 휩싸인다.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긴밀하게 소통하는 음악을 마주하게 된다. 그 음악은 대중과 멀찍이 서서, 고고한 자태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지 않았다. 재즈였다.
그는 듀크 엘링턴과 폴 화이트먼 같은 재즈 거장들의 실황 연주를 직접 듣고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지 거슈인의 '랩소디 인 블루' 실황 연주를 접하고는 큰 충격에 빠졌다. 라벨은 거슈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재즈가 대중과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서 감정을 전달하고, 양방향으로 소통하는 예술임을 깨닫는다. 그는 이후 자신의 피아노 콘체르토에 재즈의 요소를 독창적으로 융합하기 시작했다.
라벨은 재즈의 복잡한 화성이나 리듬감, 여러 조성을 유영하듯 자유롭게 넘나드는 다조성(Polytonality)에 끌렸다. 그것은 재즈를 만나기 전부터 그가 본능적으로 갈망하던 음악적 욕망이기도 했다. 청년 시절 '아파'에서 지녔던 실험 정신과 자유로운 표현의 욕망, 그 모든 것이 재즈를 만난 순간 운명처럼 다시 타오르지 않았을까. 그는 본능적으로 재즈를 받아들였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했다.
그는 재즈를 단순한 유행 음악이 아니라 유럽의 전통 클래식 음악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강렬한 예술 형태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미국인들에게 '재즈의 가치를 지켜내달라'는 호소가 담긴 칼럼까지 기고하며, 재즈의 깊이 있는 가치를 알리려 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즉시 피아노 협주곡 G장조 작곡에 돌입했다. 본디 협주곡이란 '교향곡과 독주곡의 합인만큼, 작곡가의 어법의 총체와 같아 그 능력의 증명 도구가 되어왔다. 솔리스트의 악마적일 정도의 기량을 뽐내는 카덴차는 협주곡의 백미다. 하지만 라벨은 반대 방향을 향했다. 그는 이 콘체르토의 이름을 '디베르티씨망(Divertissement)'이라고 짓고 싶어 했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희유곡(遊曲)' 정도 되겠다.
유럽의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보면서 미국에서 경험한 재즈의 자유로운 해방감을 선물하고 싶었던 걸까. 대중과 소통하고 함께 즐거움과 회복의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을 담고 싶었던 걸까. 그의 카덴차는 편안하고 쉽다. 직설적인 슬픔과 기쁨이 오간다. 학식과 상관없이, 재즈라는 새로운 문화, 다른 대륙의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 음악을 파리에 들여왔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에서는 온갖 오묘한 이야기들이 녹아있다. 재즈의 블루 노트나, 리듬, 화성, 벨 에포크와 제1차 세계대전을 지낸 그의 삶, 그리고 회복을 바라는 신고전주의의 이성적 형식 간의 기묘한 콜라주를 맛볼 수 있다.
예술적 추방자에서 이제는 작곡가로서 파리의 중심에 서 게 된 라벨은, 편안하고 가벼운 옷을 입기로 결심했다. 무겁고 어려운 옷을 벗어던지고, 당시 패션계에서 유행하던 '데푸이망(depouillement)'의 개념에 공감했다.
데푸이망은 전쟁 전의 사치스러운 장식과 불필요한 디테일을 덜어내고, 오직 핵심과 본질만 남기는 절제된 스타일을 의미한다. 이는 전쟁 이후 예술가들이 전쟁의 상처 속에서 단순함과 본질로 돌아가려는 미학을 추구한 흐름과 관련이 있었다. 과장됨에서 벗어나 현실에 발을 디딘, 실용적이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경향이었다. 전쟁 후의 세계에서, 라벨은 음악이 더 이상 왕좌에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음악은 가장 값비싸고 희귀한 것이 아니라, 쉽게 구할 수 있는 한 그릇의 따뜻한 수프 같은 것이어야 했다. 들으면 웃을 수 있는 음악,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마음 편하게 하는 한바탕 축제 같은 음악, 누구나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선율을 세상이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음악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비평가들이나 동료 작곡가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무시하기 어려웠을 텐데도, 기꺼이 가벼워지기를 택하는 것은 진정으로 음악의 본질적인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우선 생각하고, 세상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키와 체구가 모두 자그마한 그였다. 그런 그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반드시 참전하겠다며 군에 지원했으나 거부당했다. 이미 40대였고 사회적 지위와 명성도 있었기에 굳이 전장에 나설 필요가 없었지만, 그는 기어코 군인이 되겠다고 버텼다. 결국 운전병으로라도 가겠다고 우겨 참전했다. 그는 포화 속에서 부상병을 이송하고, 밤에는 군수물자를 옮겼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는 심각한 건강 악화를 겪었고, 무엇보다 소중한 친구 여섯을 잃었다. 그는 전사한 친구들을 위해 6악장으로 된 '쿠프랭의 무덤'을 작곡하고, 각 악장을 친구들에게 헌정하며 그들의 죽음을 기렸다. 그뿐인가. 전쟁에서 오른팔을 잃은 피아니스트 비트켄슈타인을 위해 왼손만으로 연주할 수 있는 협주곡을 작곡한다. 이 협주곡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두 협주곡의 작곡을 마무리하고 그는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충격으로 뇌질환이 발병하며 창작 능력을 잃는다. 결국 1937년에 눈을 감는다.
그의 친구이자 음악학자 롤랑 마누엘은 이렇게 말했다. "이 마법사는 모든 힘과 마력을 끌어모아, 마지막 주술로 화답한다."
가장 높을 때 가장 가벼워지기를 서슴지 않았던 라벨. 정신과 생으로 사람을 위한 음악을 쓰고, 육체와 삶으로 전쟁에서 사람들을 도왔다. 그는 전쟁 이후 프랑스에서 수여하고 하는 모든 영예를 다 거절했다. 그의 참전에 대한 열망은 애국심이라기보다는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었다.
그는 생애 내내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존재했다. 고전주의에도, 인상주의에도, 클래식 음악에도, 재즈에도, 프랑스에도, 스위스에도, 스페인에도. 그는 자신의 음악으로 모든 경계를 허물고, 모든 것을 품었을 '추방자'이자 '해방자'였다.
너무도 궁금했던 인물이기에 Op.23에 소개된 모리스 라벨 부분을 옮겨 봅니다. 한 사람의 인생과 음악을 들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제가 소개한 모리스 라벨 말고도 여러 인물들의 삶과 음악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Op.23 책으로 만나보시길 권합니다. #믹스커피 #Op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