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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 전쟁, 위기의 세계사 - 위기는 어떻게 역사에 변혁을 가져왔는가
차용구 지음 / 믹스커피 / 2024년 11월
평점 :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까지 현대 인류는 역병의 무서움을 모른 채 살았다. 역사에서 페스트나 흑사병 관련하여 인구의 1/3이 줄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런 역병이 현대 인류에게 다시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역사적으로 질병은 전쟁이나 기후 위기 속에서 발생했지만 코로나19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발생하여 전 세계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다행히 현대 인류는 2년여 만에 이 질병의 확산을 막았지만 앞으로 발생할 역병에 대한 두려움을 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역병전쟁위기의세계사 #믹스커피
우크라이나 문제의 기원
우크라이나는 선사시대부터 동서 교통로의 중심이었다. 게르만족, 훈족, 아바르족 모두 이곳을 거점으로 유라시아의 초원 지대를 넘나들었다.
하지만 유라시아의 '지정학적 중심축'으로 불리는 우크라이나의 중요성 때문에 이곳에 정착한 어떤 정치 세력도 오랫동안 통일 국가를 유지하지 못했다. '우크라이나'(Ukraine)는 동슬라브어의 u(인근)와 kraina(변경)의 합성어로 '변경• 접경 지대'(borderlands)라는 의미다. 12세기에 등장한 이 명칭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세워진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국명으로 채택되었다. '변경'을 의미하는 일반명사였던 '우크라이나'가 고유명사가 된 것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때 '우크라이나가 국가로서 지도상에 처음 등장했다는 것이다.
국명에서부터 지정학적 특징이 드러나듯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독립된 국가 형태를 길게 유지한 적이 별로 없다.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주변의 강력한 세력들의 침략과 지배를 받으면서 국제 정세에 따라 이리저리 귀속되었다.
19세기에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현재의 우크라이나 동부와 서부를 각각 분할 점령했다. 그나마 1917년에 세워진 신생 독립국인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도 불과 몇 년 만에 소멸했고 결국 1922년 서쪽은 폴란드, 동쪽은 소련 영토가 되었다. 서유럽과 러시아의 경계에 위치한 지정학적 특수성으로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러시아의 영향을 받는 동부와 서유럽의 영향권에 있는 서부로 나뉜 채 전개되었다. 이렇듯 수백 년 동안 계속된 종족적·문화적·종교적 이질감은 우크라이나인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동서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민족 국가를 형성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1991년 소련 해체와 더불어 독립한 우크라이나의 최대 문제점이자 과제는 여전히 동부 지역과 서부 지역의 대립과 갈등이 심하다는 것이다.
지난 30년간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동과 서가 번갈아 권력을 잡으면서 정치권에서 동과 서의 힘의 균형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다.
사실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이 동부 우크라이나와 통일되어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모습을 갖춘 건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우크라이나는 이처럼 두 개의 상이한 문화로 나뉜 단절국이다. 수도 키이우를 가로질러 흑해로 흐르는 드네프르강을 경계로, 서구 문명과 정교 문명의 단층선이 몇 세기째 우크라이나의 심장부를 관통하고 있다.
강대국 사이에 '끼인 국가'인 지정학적 중추국 우크라이나는 자국 문제를 해결하고자 외세(유럽연합과 나토)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또 다른 외세(러시아)가 개입하는 빌미를 준 것이다.
러시아가 이 지역을 놓치지 않으려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곳이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국경 지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접 국가인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 논의를 본격화하자 러시아가 강력히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러시아가 돈바스 지역을 원하는 이유에는 경제적인 면도 있다. 돈바스는 석탄 탄광과 철강 공장 등이 밀집해 있는 중공업 지역이기 때문이다. 돈바스라는 지명도 이곳을 흐르는 도네츠강과 석탄 분지라는 단어들이 축약된 혼성어다.
전략적으로도 이곳은 2014년에 러시아가 강제 병합한 크림반도를 연결하는 랜드브리지(land bridge)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서구 공포증'(Zapadophobia)이라는 역사적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큰 강이나 산과 같은 자연 방벽이 없어서 유럽과 평원지대로 연결된 러시아는 19세기와 20세기에 각각 프랑스와 독일의 침략을 받아 '지리적 저주'를 경험했다. 그래서 취약한 지정학적 위치가 안보에 심각한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안보 강박증'에 시달리고, 결국 국가와 안보 이익을 위해 '공격이 최선의 방어'인 정책을 택했다. 푸틴은 자국 안보를 위협하는 서구의 팽창에 무력으로 대항한 넵스키에게서 역사적 교훈을 얻고자 한 것이다.
푸틴식 역사 만들기와 기념비 제작 프로젝트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점령한 이후 모스크바의 크렘린 바로 옆 광장에서 또 다른 동상의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높이가 17.5m나 되는 동상의 주인공은 키예프 공국의 통치자였던 블라디미르 대공인데, 현재의 우크라이나가 바로 키예프 공국이었다. 그는 988년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선포해 오늘날 그리스 정교가 러시아·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핵심 종교이자 문화적 기반이 되도록 이끈 지도자다.
푸틴은 동상 제막식 축하 연설에서 블라디미르가 강력한 통일국가를 건설하고 그 위에 동슬라브 민족의 공통된 정신적 토대를 구축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키예프 공국을 러시아 역사로 끌어들임으로써 새로 병합한 크림반도에 대한 영유권을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인 2021년 7월 크렘린 홈페이지에 자신이 직접 쓴 우크라이나 역사 관련 글을 올리면서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키예프 루스에서 기원했으며 역사적 뿌리가 같은 하나의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식의 논리 뒤에는 우크라이나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부인하려는 은밀한 속셈이 숨어 있다. 이렇듯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부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일체성을 강조하면서 분단된 역사를 통일하려는 거라는 선전 작업이 선행되었다.
푸틴은 역사 마니아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진행되는 중에도 푸틴이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장면들은 그가 전쟁을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몰고 가려 한다는 인상을 준다. 러시아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정권을 네오나치 세력으로 규정하고, 이를 지원하는 서구 세력과 충돌하는 걸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러시아가 마주한 상황은 1941년 나치군이 소련의 국경과 안보를 위협했던 때와 다를 바 없다는 논리다.
푸틴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군사작전처럼 정교하게 기획되었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 이후인 2016년 러시아에서 이반 4세의 동상 제막식이 있었다. 그의 조각상은 이때 처음으로 세워졌는데 이후 모스크바를 비롯해 여러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반 4세의 동상 이 세워졌다. 그동안 학계에선 제정 러시아의 첫 공식 차르인 이반 4세를 공포 정치의 극단을 보여준 폭군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푸틴은 이반 4세에 대해 다른 역사적 평가를 한다. 이반 4세를 일련의 개혁 정책과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 국가와 전쟁을 벌여 영토를 넓히고 근대 러시아의 기초를 다진 강력한 지도자로 재평가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반 4세의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이 분열되고 나약했던 러시아를 유럽의 강국으로 만들었다고 봤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이반 4세의 권력 지향적 정책에서 '러시아에는 강한 국가권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라는 판단에 따라 정적과 배신자를 제거한 푸틴이 연상된다.
표트르 대제는 푸틴의 또 다른 롤 모델로 그의 집무실에는 표트르 대제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고 한다. 그는 발트해의 제해권을 놓고 스웨덴과 벌인 대북방 전쟁에서 승리하고, 부국강병은 물론 영토 팽창을 통해 낙후되어 있던 러시아의 부흥을 이끈 인물로 평가된다. 푸틴 자신도 2022년 열린 표트르 대제 탄생 350주년 기념행사에 서 표트르 대제에 대해 "21년 동안 스웨덴과 전쟁을 벌였다. 러시아의 영토를 되찾겠다는 역사적 가치야말로 우리 러시아인의 존재 이유"라고 밝혔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도 이곳이 본래 러시아 영토였기에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자국 영토 회복'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충실히 이행했을 뿐이라고 인식한다. 푸틴에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잃어버린 옛 영토를 되찾는 것과 다름없다.
푸틴은 정부 기념행사를 할 때나 중대한 고비 때마다 러시아 역사를 끄집어내 자신을 러시아 제국의 차르와 동일시했다. 제국에 대한 향수에 젖어 '강력한 대통령, 강력한 러시아'를 기치로 내걸고 현대 판 차르가 되려는 모양새다. 그만큼 그는 과거 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강대국 콤플렉스'를 지닌 듯하다.
물론 통치자가 나름의 역사 인식을 갖추는 건 바람직하다. 하지만 역사를 정치에 이용하려는 교묘한 논리는 궤변으로만 들린다. 강대국으로서 위용을 복원하려는 통치자의 역사관이 '전쟁의 기억'을 소환할 때 더욱 그렇다.
2022년 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3년 가까이 지났다. 1991년 구소련의 해체 등으로 냉전체제가 종말을 고한 이후 30여 년간 이어진 나토의 동진으로 서방에 대한 러시아의 불신과 안보 불안이 커졌다.
나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을 비롯한 공산 세력의 군사적 팽창을 막고자 미국과 유럽 등 서방 국가들이 결성한 군사동맹이다. 1991년 이후 30여 년 동안 나토는 전선을 동쪽으로 1천 ㎞ 이상 전진시켜 이제는 러시아 국경과 맞닿게 되었다. 나토가 모스크바 코 앞까지 세력을 뻗치는 상황에서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를 강제 합병한데 이어 2022년에는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하기에 이른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예상과 달리 장기화하면서 원치 않게 다른 나라의 문제에 말려드는 '연루의 공포'가 나토 동맹 내부에 확산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나토는 지난 70년간 '동맹이 공격받으면 함께 싸운다'라는 집단방위 체제를 유지하면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논의되던 2008년에 미국은 이를 지지했으나 프랑스와 독일이 반대하면서 동맹국 간 내부 분열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조지아·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으로 러시아와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2022년 전면전으로 확대되자 나토는 군사적으로 다양한 지원을 했으나 전투기와 미사일 지원에선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지상군 파견 가능성' 발언을 다른 나토 동맹국들이 부정하면서 동맹 내 균열도 감지되었다.
이처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예상 밖으로 장기전 양상을 띠자 나토 동맹국 간의 분열이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양상을 보고 있노라면 조정 능력의 부족과 위기관리의 실패로 세력 충돌이 발생하면서 전 세계가 전쟁의 블랙홀에 휘말린 100여 년 전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한낮 영토 분쟁이 아닌 세계대전으로 가는 불씨가 아닐까 생각된다. 최근엔 북한의 전투병 파병에 이어, 한국의 무기 제공이 또 다른 불씨가 되어 확전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