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신앙을 위한 질문들 - 김세윤 박사에게 묻다
김세윤 지음 / 두란노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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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라하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말하는 용어였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기독교인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뜻보다는 부정적인 뜻으로 많이 인용됩니다.

9시뉴스에 자기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목사가 칼을 들고 다른 목사를 찌르는 일까지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할 기독교와 목사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 '소금과 빛' 이 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5:13~16)

교회는 먼저 세상의 '소금'으로서 세상의 부패를 막고, 상처를 치유하며,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파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하였다. 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세상의 부패를 막고 상처를 취유하기는커녕, 교회의 내부가 심히 부패하고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장이 되었습니다.

그런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빛' 노릇을 한다고 전도하고 선교하니, 요새 유행어대로 "너나 잘하세요" 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냉소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죄사함과 무죄선언이라는 법정적 의미로만 '이신칭의​의 복음'을 선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이라는 관계론적인 의미도 함께 강조해야 한다.

'칭의'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 됨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함을 알게 된다.

"이중계명 = 하나님 사랑 + 이웃사랑"

​우리가 잃어 버린 '이웃사랑'을 회복한다면 동성애자, 우상숭배자, 타종교인등 모든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그들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이자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인간 스스로 구원할 수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신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복음'​을 굳게 지켜야 할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적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들을 멸시하거나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 저분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르기에 자신들의 방법으로 진리를 깨닫고 구원을 얻으려 하는구나. 참 안쓰럽다. 어떻게 하면 저 분들을 도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을 먹고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타 종교인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도리라면, 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하셨다.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우리는 자신들의 위치에서 복음의 정신, 성경적 원칙을 반영하려 노력하여 우리 사회에 인권이 확대되고, 사회정의가 실현되며, 화평이 증진될 때,

사람들은 우리의 '착한 행실'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이렇게 될 때 기독교가 신뢰와 존경을 얻고, 전도의 문도 열리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통치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순종하여 그런 '착한 행실'을 할 때. '의의 열매'를 맺을 때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키는 '일꾼', 또는 사단의 통치를 무찌르는 '군사'의 소명을 다하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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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찾아서 - 어느 무신론자의 진리를 향한 여정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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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이후 이성적 사고를 하는 현대인에게 신을 이해하고 믿기까지는 참 많은 질문이 필요합니다. 

과연 신이 있나? 있다면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모순되어 있는가?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질병이나 고통 속에 버려져 있나?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들어 신에게 기도하고 매달려 보았지만 왜 현실은 변하는게 없는가?

계속되는 질문과 현실 배반적인 모습들 속에 결국 신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신이 있다. 신을 믿어라 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로 보입니다.

 무신론자인 작가는 어떻게 신을 찾게 되었을까요?

작가가 신을 찾게 된 계기는 "죽음" 외할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다.

죽음이란 공허하고 흉할 뿐 순식간에 닥친다.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건 내가 없는 세상을 믿는다는 뜻이다.

작가는 신을 찾아가는 출발점에서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한다.​

모든 것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안다고, 심지어 그런 진실이 존재한다고 나로 하여금 상상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하늘이 열려 내게로 쏟아져 들어왔고 하늘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경험을 한다.

이 경험은 극도로 피곤한 상태의 저혈당증이라는 우연한 생리학적 해리상태에서 경험이었다.

그 경험을 고스란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작가는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느겼다. 이때 대면한 힘 또는 에너지를 "신"이라 정의하였다.

​그때 무언가를 보았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작가는 신을 믿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신은 신을 알고 있으니까.

 책을 읽고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단지 저혈당 쇼크 상태에서 느낀 해리상태를 신을 만났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 진행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을 만나 소통하고 의미있는 무언가를 얻고 깨닫았다는 이야기도 없이 그저 신을 알기 때문에 신을 믿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는 더욱 이상하다.

조금은 개인적인 내용과 뭔가 해결책이 없는 이야기 스토리. 조금은 실망스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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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 120년 만에 밝혀지는 일본 군부 개입의 진상
이종각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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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500년 역사 중 가장 치욕적이고 지우고 싶은 부분. 바로 고종시대입니다. 

한 나라의 왕비가 그것도 한 나라의 수도로 가장 경비가 삼엄한 궁궐 침실에서 일본인 낭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니 말입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일본 군인과 낭인들이 침입한 것으로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조선인 훈련대 2개 소대가 동원되어 왕실의 경비대와 접전을 벌여 일본 군인과 낭인의 침입을 도운 것이었습니다.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에서 조인된 청일전쟁 강화조약으로 청나라는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 등 일본에 할양하고 배상금으로 2억 량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전쟁을 끝마칩니다. 그러나 남하정책을 추진 중이던 러시아가 프랑스, 독일과 연대해 일본에 랴오둥 반도 영유를 포기하도록 압박했습니다.

일본은 삼국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해 같은 해 5월 5일 랴오둥 반도 영유를 포기했습니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 조선에 대한 일본의 야욕이 드러나자 민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물리친다는 '인아거일' 전략의 외교를 진행합니다.

같은 해 8월 말 단행된 제3차 김홍집 내각은 친러파와 민씨 세력을 바뀌고, 친일내각이 추진하던 각종 개혁은 폐기가 되었습니다.

한편 왕실과 민씨 일파에선 일본군 장교가 교육하는 훈련대를 해산시켜 군대에서도 일본의 영향력을 없애려 하였습니다.​

이를 타계하기 위해 일본은 육군 중장 출신인 미우라 고로를 임명하여 민비를 제거할 계획을 수립합니다.  

 미우라는 민 왕후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가장 강력한 왕후 반대 세력인 대원군을 이용하기로 계획합니다.

자정 무렵 아디치가 이끄는 낭인퍄와 사복의 일본인 순사 등 30여명이 공덕리 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으로 향했습니다.

한밤중에 처들어간 이들은 대원군을 급박하여 가마에 태워 경복궁으로 행했습니다. 대원군 일행이 서대문 쪽으로 향하던 중 한성부청 (현 서대문경찰서) ​부근에 우범선이 이끄는 조선 훈련대 제2대대 병사들과 합류하여 새벽 5시 30분 광화문에 도착하였습니다.

일본 순사 몇 명이 긴 사다리로 광화문 담벼락을 타고 넘어가자 경비하던 시위대 병사들은 무기를 버린 채 도망쳤습니다.

광화문이 열리자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대원군과 함께 궁구러로 진입하였습니다.

 이때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경복궁 밖에서 대기 중이던 훈련대 1개 중대 병력을 겨우 설득하여 군부대신 안경수와 함께 광화문으로 집입하는 일본군을 제지하려 하자 총격전이 벌어졌고 홍계훈은 일본군 장교가 쏜 총에 맞아 전사하였습니다. 총격전은 불과 10여 분 만에 끝이 났습니다.

 을미사변 당일인 1895년 10월 8일.

우치다 영사는 경복궁에서 돌아온 낭인들로 부터 사건의 전말을 듣고 외무차관 하라 다카시에게 급보를 전한다.

"살해 당한 부녀 중 한명은 왕비라고 하는바, 이를 살해한 자는 우리 수비대의 어느 육군 소위로서....."

"..... 극비리에 보고 드리는 바이오니 부디 일람하신 후에는 태워 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문구 속에 처음으로 일본 군인이 참여 했고,

살해범이 육군 소위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육군 소위는 누구인가?​

군법회의 팔결서에 따르면 소위 4명 중 다케나가 데쓰노스케는 중대 지휘를 맡았고, 나머지 소위 2명은 궁녀 등 살해 현장에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또한 군법회의 3일 만에 조사 종결로 판결하고 소집 해제되어 고향으로 귀향하게 된다.

그 이후 1년 9개월 뒤인 1897년 9월 27일자 미야모토가 육군 보병소위에서 육군 헌병소위로 임명되어 파이완으로 파견된 뒤, 같은 해 12월 20일에 전사 했다는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다. 왜 일본은 저항이 심한 파이완 반일투쟁 최전선에 미야모토를 다시 내세웠을까?

만일 미야모토가 살아 있다면 언제가는 민 왕후 살해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어 일본의 외교 상 불리하게 될 것을 염려해서일 것이다.

이에 대한 반증으로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전몰한 영혼을 신으로 받드는 야스쿠니 신사 명부에 미야모토 이름이 없다.

심지어 같은 타이완에서 같은 시기에 치안을 담당하던 경찰도 야스쿠니에 이름을 올렸는데도 말이다.  ​

이는 만일의 사태를 염려한 일본의 치밀한 계획이지 않을까 싶다.

 어찌 되었든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약소국 조선의 치욕으로 간과하기에는 너무 슬픈 역사이다.

또한 일본인이 사건의 주범이지만 이를 옆에서 도운 조선 훈련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왜 이런 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오늘을 사는 우리는 과거를 잊지 말고 미래를 준비해야할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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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찾은 서양의 세 여인 - 시선에 갖힌 진실
정영목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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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조선을 찾은 서양의 세 여인이라는 제목의 책인데 194페이지의 책에서 93페이지가 되어야 세 분의 여성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럼 그 앞부분은 어떤 내용이 있을까요?

서구인들의 눈을 통해 본 조선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NO Man's Land" ​조선이라는 나라는 수천 년동안 세계에 숨겨져 있다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야 '지리상으로 발견' 된 나라입니다.

서양인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는 '오리엔탈'​이 아닌 '옥시덴탈' 즉 발육이 덜 된 나라로 단정지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현실을 사진과 그림 속에 남겨 놓은 기록물을 보여 줍니다.

 ​

조금은 비굴하고 씁씁한 사진들이지만 1910년대 조선의 모습을 만나 볼 수 있다는 점이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합니다.

식민지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외국에 알리기 위한 일제의 정책 일환으로 조선을 찾은 서양인들의 시각에 조선은 어떤 나라였을까요?​

사진 뿐만아니라 1850년대 랜턴 슬라이드로 기록된 많은 기록 사진들. 여기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910년도 일본 게이샤 렌턴 사진입니다.

1910년도 사진이라고 믿겨지시나요? 흑백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명한 옷 색깔과 생생한 얼굴 표정까지 1970년대 사진이라고 해도 믿을 듯 합니다.

이런 슬라이드가 어떻게 1910년도에 만들어졌을까요? ​

 ​그에 대한 대답은 흑백 사진에 색을 입히는 작업을 통해 사진이 살아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세 여인의 시각으로 조선을 바라 본 내용은 실망스럽습니다.

그저 단순히 1910년대의 조선의 사진과 생활상을 보기 위해서라면 권장해 볼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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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정청래 - 정청래의 정치현장보고
정청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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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정치인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싸이의 '환희'라는 곡입니다.

"동서로 갈라 여야로 갈라 싸움은 똑같고 사람만 달라. 이러지 말라는 모두의 바램은 말짱 꽝 빛 바랜지 오래야~

하구 맨날맨날 하는 말 국민여러분 I'm sorry 야, 다 뻥이야. 걱정해봤자 얼굴붉히며 소리질러 봤자

뻔할뻔자 백팔백번 귀에 못 박히도록 애기 해 봤자 변하는 거 봤냐. 그냥 쟤네 저러고 살라고 내버려두고 그 열정과 수고 쌓여있는 분노 끄집어내 아니면 병된다."

 정치인에 대한 실날한 비판과 자태를 잘 표현한 가사입니다.

저 역시 정치인 국회의원 하면 생각나는 건 "국회의사당과 함께 셋트로 해외로 무상 수출해 버리고 싶다" 는 생각이 듭니다.

솔직히 '정청래'라는 사람에 대해 들은 바도 없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이 책을 읽었을까요?

아마도 무료로 책을 준다는 소식에 귀가 솔깃하였고, 뭐하는 사람인데 욕 먹을거 뻔히 알면서 책을 냈을까 하는 호기심입니다.

 책을 받아 들고 자기 자랑이 이어지겠지 생각했는데 나의 편견은 조금은 사라졌습니다.

10남매 중 열 번째 막내로 태어난 늦둥이, 1988년 조통특위장으로 첫 징역, 농축산물 수입개방 반대로 미대사관저 점거농성으로 두 번째 징역.

안기부에 끌려가 죽도록 두들겨 맞고 두 번째 감옥살이를 하다 머릿 속을 사로 잡은 주제 "통일".

통일에 기여하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은 '정치'였다. 그렇다면 국회의원?

학생운동으로 징역을 살고 있던 스물일곱 청년의 미래와 삶에서 언제 실현될지도 모를 국회의원을 목표로 인생을 산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운동권 경력과 감옥살이 전과로 취직도  어려운 현실에서 공부 하나 잘한 경력으로 학원을 창립하고 지역주민과 교감을 쌓고 인지도를 높였다.

학원사업을 같이 했던 30년 지기 친구와 "10년 후 우리는 무엇을 할까?" 라는 말을 하다가 종이에 그 계획을 썼다.

이 친구와 장난처럼 써본 '10년 후 인생설계서'였지만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이 친구가 나에게 한 말이 있다.

"너는 인생설계서대로 정말 실천하며 살았어. 10년 후 나의 인생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 해야 할 노력과 과정을 적고 그대로 해냈다"

평탄치 않은 현실과 고비를 넘어 2004년 만38세 제17대 국회의원 출마, 당선.

 책의 다른 내용보다는 이 대목이 가장 인상에 남습니다.

시골 깡촌에서 태어나 가진 것 없이 상경하여 학생운동 하다 호적에 빨간 줄가고 상심하고 놀란 부모님은 몸져 눕다 돌아가시고.

특별한 직업도 갖을 수 없는 현실을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 내고, 꿈 과 이상을 위해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한 그 정신.

'늘 처음처럼' 이라는 말을 달고 사는 그이기에, 생각과 글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그의 삶에서 사람 냄새가 난다.

늘 속고만 살아 더 이상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닫고 살았지만 그래도........ 여운을 남기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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