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 - 120년 만에 밝혀지는 일본 군부 개입의 진상
이종각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조선의 500년 역사 중 가장 치욕적이고 지우고 싶은 부분. 바로 고종시대입니다. 

한 나라의 왕비가 그것도 한 나라의 수도로 가장 경비가 삼엄한 궁궐 침실에서 일본인 낭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니 말입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일본 군인과 낭인들이 침입한 것으로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조선인 훈련대 2개 소대가 동원되어 왕실의 경비대와 접전을 벌여 일본 군인과 낭인의 침입을 도운 것이었습니다.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에서 조인된 청일전쟁 강화조약으로 청나라는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 등 일본에 할양하고 배상금으로 2억 량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전쟁을 끝마칩니다. 그러나 남하정책을 추진 중이던 러시아가 프랑스, 독일과 연대해 일본에 랴오둥 반도 영유를 포기하도록 압박했습니다.

일본은 삼국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해 같은 해 5월 5일 랴오둥 반도 영유를 포기했습니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 조선에 대한 일본의 야욕이 드러나자 민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물리친다는 '인아거일' 전략의 외교를 진행합니다.

같은 해 8월 말 단행된 제3차 김홍집 내각은 친러파와 민씨 세력을 바뀌고, 친일내각이 추진하던 각종 개혁은 폐기가 되었습니다.

한편 왕실과 민씨 일파에선 일본군 장교가 교육하는 훈련대를 해산시켜 군대에서도 일본의 영향력을 없애려 하였습니다.​

이를 타계하기 위해 일본은 육군 중장 출신인 미우라 고로를 임명하여 민비를 제거할 계획을 수립합니다.  

 미우라는 민 왕후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가장 강력한 왕후 반대 세력인 대원군을 이용하기로 계획합니다.

자정 무렵 아디치가 이끄는 낭인퍄와 사복의 일본인 순사 등 30여명이 공덕리 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으로 향했습니다.

한밤중에 처들어간 이들은 대원군을 급박하여 가마에 태워 경복궁으로 행했습니다. 대원군 일행이 서대문 쪽으로 향하던 중 한성부청 (현 서대문경찰서) ​부근에 우범선이 이끄는 조선 훈련대 제2대대 병사들과 합류하여 새벽 5시 30분 광화문에 도착하였습니다.

일본 순사 몇 명이 긴 사다리로 광화문 담벼락을 타고 넘어가자 경비하던 시위대 병사들은 무기를 버린 채 도망쳤습니다.

광화문이 열리자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대원군과 함께 궁구러로 진입하였습니다.

 이때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경복궁 밖에서 대기 중이던 훈련대 1개 중대 병력을 겨우 설득하여 군부대신 안경수와 함께 광화문으로 집입하는 일본군을 제지하려 하자 총격전이 벌어졌고 홍계훈은 일본군 장교가 쏜 총에 맞아 전사하였습니다. 총격전은 불과 10여 분 만에 끝이 났습니다.

 을미사변 당일인 1895년 10월 8일.

우치다 영사는 경복궁에서 돌아온 낭인들로 부터 사건의 전말을 듣고 외무차관 하라 다카시에게 급보를 전한다.

"살해 당한 부녀 중 한명은 왕비라고 하는바, 이를 살해한 자는 우리 수비대의 어느 육군 소위로서....."

"..... 극비리에 보고 드리는 바이오니 부디 일람하신 후에는 태워 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문구 속에 처음으로 일본 군인이 참여 했고,

살해범이 육군 소위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육군 소위는 누구인가?​

군법회의 팔결서에 따르면 소위 4명 중 다케나가 데쓰노스케는 중대 지휘를 맡았고, 나머지 소위 2명은 궁녀 등 살해 현장에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또한 군법회의 3일 만에 조사 종결로 판결하고 소집 해제되어 고향으로 귀향하게 된다.

그 이후 1년 9개월 뒤인 1897년 9월 27일자 미야모토가 육군 보병소위에서 육군 헌병소위로 임명되어 파이완으로 파견된 뒤, 같은 해 12월 20일에 전사 했다는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다. 왜 일본은 저항이 심한 파이완 반일투쟁 최전선에 미야모토를 다시 내세웠을까?

만일 미야모토가 살아 있다면 언제가는 민 왕후 살해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어 일본의 외교 상 불리하게 될 것을 염려해서일 것이다.

이에 대한 반증으로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전몰한 영혼을 신으로 받드는 야스쿠니 신사 명부에 미야모토 이름이 없다.

심지어 같은 타이완에서 같은 시기에 치안을 담당하던 경찰도 야스쿠니에 이름을 올렸는데도 말이다.  ​

이는 만일의 사태를 염려한 일본의 치밀한 계획이지 않을까 싶다.

 어찌 되었든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약소국 조선의 치욕으로 간과하기에는 너무 슬픈 역사이다.

또한 일본인이 사건의 주범이지만 이를 옆에서 도운 조선 훈련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왜 이런 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오늘을 사는 우리는 과거를 잊지 말고 미래를 준비해야할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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