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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기업인 유일한은 독립운동가였다
김시우 지음 / 올댓스토리 / 2017년 8월
평점 :
유일한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계기는 아버지 유기연이 이승만, 정순만, 박용만 등 개화파 지식인들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개화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계몽 강연에 감명을 받아 대한제국 순회공사 박정현을 따라 미국에 보내기로 결심하게 된다.
9세의 네브래스카주 커니(Kearney)라는 작은 농촌도시에 정착하게 된다.
커니 침례교 목사는 유일한을 커니시의 터프트 부인 집에 스쿨보이로 들여보냈다.
스쿨보이란 동양학생이 백인의 집에 더부살이로 있으면서 집안의 잡일을 해주고 숙식과 약간의 용돈을 받는 형태를 일컫는 말이다.
1909년 6월 초, 조진찬은 커니시에 농장을 임대하여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였다.
한인소년병학교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제일 먼저 세워진 무관학교로 민족운동을 전개한 항일독립군
양성학교이다. 설립한 이듬해인 1910년 헤이스팅스 대학으로 이전하였고, 1914년까지 6년 동안 167명이 등록하여 40여 명이 졸업하였다. 유일한은 1909년 제1기생으로 입학하여 1912년에 졸업하였다.
유년기를 보낸 커니마을에는 작은 마을이라 마땅한 고등학교가 없어 헤이스팅스로 이주하게 된다.
이곳에서 신문배달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며 헤이스팅스고등학교의 축구와 육상선수로 활약한다.
뿐만 아니라 웅변 서클에 들어가 자신의 포부와 사상을 호소하며 인간관계와 통솔력, 지도력에서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이 무렵 조국에서 일어난 3·1 만세운동 소식이 선교사들을 통해 미국 땅에 전해졌다.
미주사회의 구심점인 대한인국민회를 주축으로 전 미국에 산재해 있던 한인 대표들이 필라델피아로 모여 독립선언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를 주도한 사람들은 서재필, 이승만, 정한경이며, 이들을 비롯하여 장덕수, 김도연, 이대위, 유일한 등도 이 대회에 가담하였다. 당시 유일한은 24살의 대학생 신분이면서도 동대회 대의원 자격으로 참여하여 [한국국민의 독립에 대한 목적과 열망을 석명하는 결의문] 작성을 위한 기초작성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중국 광동성 출신으로 미국 코넬리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양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소아과 의사 면허증을 획득한 호미리와 결혼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마침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에비슨 학장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아내는 세브란스의전 소아과 과장을 제안 받아 귀국하였다. 그는 교수보다는 고국의 동포들이 기생충, 결핵, 학질, 피부병 등으로 고생하는 것을 목격하고 국민보건을 위해 1926년 12월 10일 유한양행을 설립하게 된다.
유일한은 귀국한지 12년이 되는 1938년 4월 사세 확장을 위해 미국 LA에 출장소를 설치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1941년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유한상사 주식회사로 개칭하고 사장직을 사임하였고,
그 해 4월 해외한족대회 집행위원으로 활약하며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방향을 3가지로 집중하게 된다.
이 중 미국 국방업무 후원활동은 재미한인들이 조직한 군사단체인 맹호군(猛虎軍)이었다.
맹호군 창설에 유일한과 함께 일한 사람들은 대개 네브래스카 소년병 출신 인사들이었다.
1942년 6월 일본군은 하와이 북서쪽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태평양 전쟁을 도모했지만 대패하였다.
미국은 대일전쟁에서 확실한 전과를 세우기 위해 중국전선에서 정보전략처(OSS)활동을 강화하여 한국인들을 이용한 한국·만주·일본 본토 침투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전선에서 OSS는 독수리작전을 추진했고, 워싱턴 본부에서는 냅코작전(NAPKO)을 추진하게 된다.
냅코작전이란 재미한인을 이용하여 한국 내에 특수공작원을 침투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일본 본토까지 침투시켜 대일전에서 확실한 전과를 세우기 위한 OSS의 작전 계획이다. 1944년 11월 4일 야전침투훈련부대가 활용할 수 있는 한인 후보자 명단을 작성했는데, 유일한, 최진하, 이초, 이근성, 김강, 하문덕, 차진주 등 19명이 선정되었다. 냅코작전에 참여한 한인들을 연령별로 분류해보면 20대 3명, 30대 8명, 40대 6명, 50대 2명(유일한, 최진하)이며, 미혼이 6명, 기혼이 13명이었다. 1945년 2월 26일 아이플로가 도노반에게 보고한 장석윤이 제시한 침투지구와 공작원 후보는 다음과 같다. 제1지구는 진남포-원산 침투 후 평양, 서울로 향하고, 제2지구는 양양지역, 제3지구는 제물포지구, 제4지구는 목포였다. 당시 유일한이 조장인 아이넥조는 서울 침투조인데 이 조는 주로 경제상황과 일본군 부대의 주둔 위치를 보고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냅코작전에 투입된 한인들은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으며 훈련 장소는 샌프란시스코 연안의 산타카탈리나 섬이었다. 이들은 외부와 격리된 채 고된 유격훈련, 무선훈련, 폭파훈련 등을 3~4개월 동안 모든 훈련을 끝낸 후 출발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냅코작전의 입안자인 아이플러의 회고에 의하면 10개 팀이 한국에 침투되고 그 중 7개 팀이 성공하고 3개 팀은 체포될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1945년 1월 6일에 입대하여 2월 2일부터 공작 훈련을 받고 작전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유일한에게 1945년 8월 15일 갑작스런 일본의 패망 소식은 깊은 좌절과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50대의 나이에 가족도 기업도 모두 버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유일한. 그는 우리가 알고 있던 기업인이 아닌 독립운동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