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하이든
사샤 아랑고 지음, 김진아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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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뭔가 음모가 진행되는 게 느껴집니다.

주인공 헨리 하이든은 열 살 무렵 어머니가 사라졌고, 아버지는 그날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어린 헨리는 보호시설을 떠돌다 원장실의 비상금을 들고 사라졌다, 35살의 생일날 술집에서 한 여성을 만나 하룻밤을 보냅니다.

숙취로 머리가 깨질듯한 아침, 여성이 깨어나기 전에 자리를 뜨기 위해 옷을 주섬주섬 집어 들다 양말 한 쪽을 찾기 위해 침대 밑을 확인합니다. 침대 아래에는 고무줄에 감긴 원고 한 뭉텅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성이 깨지 않게 조심히 원고를 넘기던 그는 이 소설에 흠뻑 빠져, 그녀를 위해 점심을 준비하며 집안의 허름한 곳을 고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동거하게 된 헨리 하이든과 마틸다.

마틸다는 계속해서 소설을 쓰고, 헨리는 식사와 집안일, 그리고 마틸다의 원고를 읽는 일을 하며 하루를 보냅니다. 헨리는 훌륭한 원고가 책으로 나오지 않은 것에 의문을 가지고 마틸다에게 출판할 것을 제의합니다. 하지만 마틸다는 유명세보다는 그저 글쓰기를 즐겨 하기에 세상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녀를 위해 헨리가 표면적인 작가 행세를 하기로 하고, 원고를 4곳의 출판사에 우편으로 발송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출판사에서 연락이 없자 출판을 포기하고 일상을 살아갑니다.

모리아니 출판사는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불황의 늪에서 허우적거립니다. 출판사의 인턴인 베티는 지겨운 하루 중에 점심시간에 몰래 편집자 방에 들어가 우편으로 접수된 원고를 읽는 것을 낙으로 삼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눈에 띈 한 권의 원고, 바로 헨리 하이든이 보낸 '프랭크 엘리스'입니다. 베티는 곧바로 사장인 모리아니를 찾아 원고를 보여주며 출판할 것을 제의합니다. 그들의 예상대로 프랭크 엘리스는 대박을 치며 헨리와 모리아니 출판사를 돈방석에 앉혀 줍니다.

아내의 소설로 가짜 작가로 행세하는 헨리 하이든, 하이든의 소설로 편집자 자리를 꿰찬 미모의 삼십 대 베티.

이 둘의 관계는 서로 내연의 관계로 발전하는데 결국 베티는 헨리의 아이를 임신하게 됩니다.

이쯤 되면 아내와 내연녀 사이에 갈등하는 치정 문제로 인한 살인사건이 예상되지요.

물론 하이든은 내연녀를 살해하려 하지만 그녀가 타고 있던 차에는 아내 마틸다가 타고 있었다.

살인이 계획했던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 가운데 살아남기 위해 헨리는 완전 범죄를 꿈꾸는데.....

짧은 소설 속에 많은 인물이 나오지 않아 더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예기치 않은 반전과 사이코 패스 성격의 헨리 하이든, 재미와 스릴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기에 영화로 만들기에 재격입니다.

아킬레스 건염으로 움직일 수 없어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하루를 즐겁게 보냈답니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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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현대사교육총서 3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엮음 / 휴먼컬처아리랑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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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전쟁의 양상을 띈 한국전쟁.
우리 민족에게도 큰 상처이지만 함께한 세계의 여러 나라도 함께 큰 인명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후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냉전이 더 극렬해진 가운데 대한민국은 전쟁 복구에 박차를 가하지요.
맥아더 장군은 100년이 지나도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힘들 것이라 했는데, UN과 미국의 도움으로 50년도 채 안 돼 전쟁의 상처를 말끔히 씻어내는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럼 한국전쟁의 역사를 함께 알아보도록 하지요.

북진 통일을 주장하던 이승만 정부이지만, 국군의 화력이나 군사력은 북침할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이에 반해 북한은 소련의 도움으로 14개 사단을 무장시킬 재래식 무기와 10개 사단 규모의 장비를 인계받았습니다.
1947년 중국이 공산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대소, 대공산주의의 방파제로 일본을 선택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과 오키나와, 필리핀을 잇는 도서 방위 전략을 설정합니다. 그 결과 한국과 대만은 제외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런 결정은 부동항 확보를 소원하는 소련에게는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유럽 방향으로의 진출이 봉쇄된 후 열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소련은 아시아 지역으로 확장을 목표로 삼습니다.
그중에서도 한반도와 중국 지역은 미국의 전략적 방어 정책에서 소외된 지역이었기에 쉽게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한반도는 구한말 이래로 미국과 일본에 대항할 수 있는 부동항으로 동남아와 태평양까지 영향력을 확대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소련은 김일성의 친소 군부에 전투 물자를 지원하였습니다.

1949년 5월 4일, 개성을 비롯한 몇몇 지역에서 전투가 발발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38도선 상의 충돌은 남한의 북침 시 반격으로 전환한다는 전략으로 남한의 북침을 유도했지만, 남한이 북한의 공세에 대응하는 정도의 수준에서 머물렀기에, 북한의 의도가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1950년 4월, 김일성은 비밀리 스탈린을 방문하여 '통일 과업을 위한 선제 남침 개시'를 허락받았으나, 최종 결정은 북한과 중국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달았습니다. 마오쩌둥은 결정에 앞서 스탈린에게 직접 설명을 요청하였고, 3국의 합의에 따라 5월 29일 남침 계획을 완성, 스탈린의 동의를 받아낸 북한은 남침 개시 일자를 1950년 6월 25일로 정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전후하여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되었습니다.
남침에 가장 큰 걸림돌은 미군의 개입 가능성입니다. 당시 소련은 미국에 비해 전력이 열세하고 핵무기 개발에 뒤져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더라도 한반도에 도착하기 전에 재빨리 전쟁을 종결짓는다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1단계로 전쟁 개시 2일 차에 서울 점령, 수원-원주-삼척을 잇는 90km의 거리를 5일 만에 점령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2단계로 군산-대구-포항을 연결하는 180km를 14일 만에 점령하고,
3단계로 국군 잔류 병력을 소탕한 후 신속히 남해안의 주요 항구를 점령하여 부산-여수-목포까지 80km를 10여 일 만에 점령 완료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1950년 7월 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군 사령부 설치 결의하였고, 사령관으로 맥아더 장군을 임명합니다. 7월 24일 정식 유엔군 사령부가 설치되며, 16개 국가가 전투 부대를 파병하고, 5개 국가가 의료 지원단을 보냈고, 그 외 39개 국가가 물자 지원을 담당하였습니다.
1950년 7월 20일, 대전을 상실한 미군이 경부 국도를 따라 철수하면서 경부 국도 서쪽의 호남 지역이 무방비 상태가 되었기에 국군과 유엔군은 최후 방어선으로 낙동강 선을 결정하게 됩니다.
1950년 8월 ~ 9월, 낙동강 방어선의 치열한 전투로 북한군 7만여 명의 병력과 장비를 상실하게 되자 더 이상 공격을 계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의 병참선을 일거에 차단하였고, 북한의 낙동강 전선에서의 공격력을 크게 약화 시켰습니다.
1950년 9월 29일, 서울 중앙청에서 거행된 환도식 후 맥아더는 "유엔이 38도선 돌파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북진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합니다. 이에 이승만은 정일권 총장에게 국군 단독이라도 38도선을 넘어 북진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어, 10월 1일 국군의 북진 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1950년 10월 25일, 유엔군이 박천-운산-온정리-희천을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했을 때 중공군의 제1차 공세가 개시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국군 제6사단은 압록강변 초산을 점령하였고, 서부 지역의 미 제24사단은 신의주 남방 정거동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이때 전선의 상황은 12개국의 유엔군이 정주-영원-장진호-혜산진-합수-청진선을 점령하여 만주와의 국경선을 지척에 두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제2차 공세에 부딪쳐 11월 30일부터 모든 유엔군이 무질서하게 철수를 시작하게 됩니다.
1951년 1월 4일, 유엔군은 서울을 포기하고, 평택-삼척 선까지 철수하였습니다.
1951년 1월 27일부터 중공군의 제4차 공세를 단행했지만, 지평리와 원주 일대에서 많은 손실을 입었고, 유엔군의 반격으로 3월 15일에 다시 서울을 탈환하였고, 그 여세를 몰아 3월 말에 38도선을 회복하였습니다.
1951년 4월 22일부터 6월 10일까지 중공군의 제5차 공세가 펼쳐졌지만, 유엔군의 화력에 압도당하여 많은 희생을 남긴 채 저지되었습니다. 이후 유엔군과 중공군은 확전보다는 전쟁 이전의 원상회복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하자는 휴전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1951년 6월 13일, 모스크바에서 북한과 중국, 소련 간의 회담에서 공산군 측은 38도선의 경계선을 복구하는 조건에서 휴전이 유익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 결정을 미국에 통보하며 휴전 협상이 시작됩니다. 1951년 7월 10일부터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2년간 휴전 협상이 지속되었습니다.
1953년 6월 8일, 유엔군과 공산군 협상 대표들은 포로 교환 협정에 조인합니다. 이는 한국 정부의 의사와는 무관한 휴전 협상이었기에 6월 18일 이승만은 반공 포로 3만 6천여 명을 석방하였습니다. 비록 국군과 모든 군사 시설이 유엔군 사령관의 지휘 아래 있다 할지라도 한국 정부가 휴전 회담을 결렬시키기로 결심만 한다면 유엔군과 공산군이 어떠한 협정을 체결하더라도 얼마든지 이를 파기 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 사건이었습니다. 결국 한국은 정전 협정을 묵인하는 대가로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과 군사적 경제적 원조, 국군 증강 등의 약속을 받아내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전 협정 조인식은 유엔군 대표 해리슨 장군과 공산군 대표 남일 대장이 판문점에서 15분 만에 체결하였습니다. 이날 오후 10시를 기해 한반도 전역에서는 포성과 총성이 멈추었습니다. 이로써 3년 1개월 동안 계속되었던 포성은 일단 멎었으나 한반도는 평화도 승리도 없는 미해결의 장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한국의 전후 복구를 위해 유엔은 미국의 경제협조처(ECA)뿐만 아니라 유엔 계통의 한국민간구호제단(CRIK), 주한 유엔민간원조사령부(UNCACK), 유엔 한국재건단(UNKRA) 등의 기구를 통해 한국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습니다. 전쟁 중 미국과 유엔으로부터 받은 구호 원조의 총액은 4억 7190만 달러였는데, 이는 2011년 기준 가치로 약 38억 7380만 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1959년 유엔 기구를 통한 원조가 모두 종결됨에 따라 한국의 대외 원조는 모두 미국에 의한 원조로 한정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미국의 원조는 무상으로 지원하던 구호 원조에서 공공 차관을 제공하는 개발 원조로 전환되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원조 물자를 국내에 팔아 그 판매 수입을 재정에 투자하거나 융자에 사용했습니다.
1953년부터 1960년까지 이런 원조 판매 수입은 일반 재정 세입의 40~50%를 차지할 정도로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습니다.
이런 정부의 지원 속에 한국 경제는 약 5%의 경제 성장을 꾸준히 이룩하며 전쟁의 폐허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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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듣던 밤 - 너의 이야기에 기대어 잠들다
허윤희 지음 / 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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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커가며 교육상 TV를 없애자는 아내의 제안. 스포츠 말고는 TV를 보는 편도 아니기에 흔쾌히 동의해, 신혼살림으로 장만한 TV를 버렸답니다. 그 이후에 생긴 또 다른 습관, 독서와 라디오 청취입니다. 유명 라디오 프로그램은 광고와 DJ의 멘트가 너무 많아 과감히 채널을 돌렸지요. 채널을 위아래로 몇 번을 돌리다 만난 CBS 음악방송, 그중에서 밤 10시에 듣던 '꿈과 음악 사이에' 방송.
귀에 익은 노래와 차분한 목소리, 들려주는 사연까지 귀에 쏙쏙 들어왔지요. 이후 쭉 채널 고정. 거의 7년째 들어오지만, 꿈과 음악 사이에 방송이 10년이 되었다고 하네요. 지금은 CBS도 워낙 광고가 많아 짜증 나 청취를 그만두었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허윤희 씨. 방송에 소개되지 않은 사연과 윤희 씨의 감성을 담아 에세이를 냈다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라디오에서 사연을 읽을 땐 잔잔한 배경음악과 어울리는 노래를 틀어주어 더 좋았었는데, 책에서는 목소리가 아닌 텍스트와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이 없다 보니 상상했던 라디오의 감칠난 맛이 다 사라져 밋밋한 느낌이 듭니다. 아쉽!! 실망!!
DJ인 윤희 씨가 방송을 너무 자연스럽게 진행해 어려운 시절이 없었겠다 싶었는데, 방송 초반에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자책으로 방송 공포증이 생겼다는 말에 더 공감이 됩니다. 그리고 감성을 자극하는 사연과 허윤희 감성이 곳곳에서 묻어나 라디오를 듣는 듯한 상상을 하며 책을 읽게 되네요.

걸림돌이라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실은 디딤돌이었다.     P.155
관계와 상황 속에서 우리는 수시로 옷을 갈아입는다. 하지만 내 인생의 코스와 아주 짧은 접점을 가졌을 뿐인 누군가를 우린 생각보다 쉽게 판단한다. 화낼 줄 모르는 사람, 뒤끝 없는 사람. 음흉한 사람.....    P.158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아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것이 저녁 메뉴를 고르는 일이든, 인생의 목표가 걸린 일이든.    P.164
그저 내 하루의 수고를 이해해주고 흐르는 눈물을 가만히 닦아주는 사람이면 되었다.
고생했어요. 수고 많았어요... 그 짧은 한마디에 담겨있는 온기는 금세 깊숙하게 스며들어 몸과 마음의 긴장을 완전히 풀어내리게 했다.     P.178
내 맘 같지 않은 사람들에게 상처받으며 살지만, 결국은 나와 다르지 않은 그래서 긴말 필요 없는 이들에게 위로받으며 살아가는 우리 ....   P.231

우린 알게 모르게 사람에게 상처받고 힘들어하며 하루를 보낸다.
이렇게 지친 하루를 마감하며 내 편이 있었으면,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줄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지요.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듣고 "고생했어, 수고했어". 이 한마디가 고픈 우리는 위로받고 싶은 바램을 담아 라디오에 사연을 보냅니다. 이렇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사연들이 마치 내 이야기 같고, 언젠가 겪은 듯한 아련한 추억일 수도 있기에 우리는 라디오에 더 흠뻑 빠져들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라디오의 힘이 TV를 뿌리치고 라디오를 켜게 하는 힘이지 않을까요? 지치고 힘든 인생, 나와 상관없는 누군가가 던지는 그 한마디 위로가 다시 시작하는 힘과 용기를 주는 것 같습니다. 꿈음, 화이팅! 라디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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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태동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현대사교육총서 1
이민원.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지음 / 휴먼컬처아리랑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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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대한제국을 거쳐 민족의 암흑기인 일제강점기를 지나 대한민국이 태동하는 이야기입니다.
19세기 말 유럽 각국은 해외시장을 개척하고자 아시아, 아프리카에 경쟁적으로 진출하기 위해 포함외교를 근간으로 하였다.
반면 조선은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 속에서 외부와 접촉이 가장 늦었고, 전통적인 신분사회와 농업기반 사회였다. 거기에 외척 세력의 수탈과 3정이 문란해지며 지방관의 탐학이 극에 달하며, 민란과 동학과 천주교가 등장하며 사회의 불안과 균열을 초래했다.
결국은 일본의 포함외교에 당해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지만, 무관세 협정이 포함된 가장 불평등한 조약을 맺었다.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한 일본의 정책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불러온다.
아시아의 작은 국가였던 일본은 외교력을 총동원하여 미국과 영국을 조력자로 불러들인 결과 아시아의 종주국으로 군림했다.
1905년 11월 18일, 일본은 대한제국을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시키는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된다.
나라는 허망하게 망했지만 국민은 호락호락 일제에 순응하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고, 일본에 빚진 국채를 갚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으며, 전국적으로 독립을 위한 비밀결사조직이 만들어집니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을사오적 처단 등 다양한 방면으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한 독일의 지배하에 있던 체코 등 소수민족과 아일랜드, 이집트 등 약소민족들이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 이후, 제정 러시아 치하의 피압박 민족들이 선언한 '민족 자결의 원칙'이 선언되어 사회주의 사상이 급격히 파급되기 시작했다. 또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에 힘입어 식민 통치 하에 있던 약소민족의 민족운동가들이 크게 고무가 되었다. 이에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인 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1919년 2월 8일 동경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인 '2.8독립선언'을 발표한다. 이 소식에 고무된 국내의 종교계 지도자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3.1운동은 국내적 배경은 근 10년에 걸쳐 행해진 총독부의  강압적 식민통치와 그로 인한 고통과 불만에 있었다. 거기에 1월 21일 고종의 독살설에 자극된 거족적 만세운동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3.1운동으로 표출된 민족운동의 방향 정립과 독립 후의 신국가 건설에 대비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의 한성정부,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중국 상하이의 임시정부를 꼽을 수 있다.
임시정부의 탄생으로 분산되어 있던 독립군들이 서로 연결되어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하게 된다.
또한 국내에서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로 분열된 민족운동의 통합한 신간회가 결성되어 일제에 항거하였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공황이 전 세계로 파급되자 일제는 만주로 대륙 침략을 위한 인적, 물적 수탈을 강화합니다.
그 결과로 각종 물자의 공출과 학도병, 근로정신대, 위안부 등으로 끌려갔으며, 창씨개명과 우리 말과 글이 사용 금지가 됩니다.
1943년 카이로선언에서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결정에 따라 독립을 향한 결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한국광복군은 일본군에 소속된 한인 병사를 포섭하기 위한 공작과 미군과 협력을 통한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하게 됩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며, 15일 일왕 히로이토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습니다.
미, 영, 중, 소 등 연합국 참전으로 뜻밖에 해방을 맞았지만, 소련은 일본이 항복하기 1주일 전에 대일전쟁을 선포하며 한반도로 진격했습니다. 예상외로 신속한 소련의 진격에 놀란 미국은 황급히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을 분할하자고 소련에 제안하며 군사분계선이 설정됩니다.

김구 선생의 탄식처럼 "일본의 항복이 일주일만 늦어졌거나, 일주일만 앞당겨졌더라면" 우리 민족의 삶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일주일만 늦어졌다면 독수리 작전을 통해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국내에 진입했을 것이고,
일주일만 일찍 항복했다면 소련군이 아직 북한에 진주하지 않았을 때이므로 우리 민족이 역사에 보다 나은 결과가 있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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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가격의 경제학 - 바코드 속에 숨겨진 소비자와 판매자의 치열한 심리싸움
노정동 지음 / 책들의정원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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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공짜인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공기와 햇빛 같은 자연은 공짜이지 않냐고 주장하고 싶지만 스위스의 맑은 공기가 유럽에는 판매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세상의 재화와 용역의 가격은 어떻게 결정이 될까?

 

가격은 욕망을 투영하는 거울.
가격에는 제품의 내재 가치뿐만 아니라 파는 사람의 전략, 의도, 심리, 욕망이 담겨있다.

 
소비자는 생각보다 현명하지 못하다.
우선 내가 원하는 제품을 남들보다 더 저렴하게 구매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나와 동일한 시계를 차고 있다면 먼저 가격부터 물어본다.
이런 심리를 이용해 가격비교 사이트가 성행하지만 이들의 목표는 소비자에게 친절하게 가격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여러 제품을 보여주고 이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격비교 사이트가 만든 제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한다. 또 구매한 물건에 대해 지속적으로 할인된 가격 정보를 노출시켜 조금이라도 비싸게 산 소비자의 심리를 자극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쇼셜커머스 업체들의 연말 결산 소식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
이익이 천문학적 수치가 아닌 손실이 천문학적인 수치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총알 배송을 위해 정직원을 채용하기도 하고, 저렴한 제품으로 무장해 인터넷 쇼핑을 하는 엄지족에게 친숙한 업체이다.
왜 이들은 이렇게까지 출혈 경쟁을 하는 것일까? 소비자들을 위해? 천만의 말씀이다.
이들은 1등 기업이 이 시장을 독식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격 인하를 통한 치킨 게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누가 더 자금력과 서비스가 좋은지 결국은 살아남은 기업이 그동안의 손실을 보전 받을 것이다.
그전까지는 소비자가 왕이지만, 머지않아 이들의 횡포가 시작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지리적으로나 경제환경으로나 블루오션이 아니다.
지역적 한계성이 강한 스몰 시장으로 치열한 가격 전쟁이 펼쳐진다.
이러한 전쟁에서 출혈을 피하기 위해 기업들은 정부의 눈을 피해 카르텔을 형성한다.
결국 시장의 가격은 1위 업체의 고유한 권한이다. 그들의 결정에 따라 2, 3위 업체의 가격 정책이 결정되고 시장을 형성한다.
1위 업체의 권한을 잃지 않으려 기업들은 끊임없는 시장조사와 신제품 개발에 몰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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