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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태동 ㅣ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현대사교육총서 1
이민원.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지음 / 휴먼컬처아리랑 / 2015년 10월
평점 :
조선에서 대한제국을 거쳐 민족의 암흑기인 일제강점기를 지나 대한민국이 태동하는 이야기입니다.
19세기 말 유럽 각국은 해외시장을 개척하고자 아시아, 아프리카에 경쟁적으로 진출하기 위해 포함외교를 근간으로 하였다.
반면 조선은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 속에서 외부와 접촉이 가장 늦었고, 전통적인 신분사회와 농업기반 사회였다. 거기에 외척 세력의 수탈과 3정이 문란해지며 지방관의 탐학이 극에 달하며, 민란과 동학과 천주교가 등장하며 사회의 불안과 균열을 초래했다.
결국은 일본의 포함외교에 당해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지만, 무관세 협정이 포함된 가장 불평등한 조약을 맺었다.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한 일본의 정책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불러온다.
아시아의 작은 국가였던 일본은 외교력을 총동원하여 미국과 영국을 조력자로 불러들인 결과 아시아의 종주국으로 군림했다.
1905년 11월 18일, 일본은 대한제국을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시키는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된다.
나라는 허망하게 망했지만 국민은 호락호락 일제에 순응하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고, 일본에 빚진 국채를 갚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으며, 전국적으로 독립을 위한 비밀결사조직이 만들어집니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을사오적 처단 등 다양한 방면으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한 독일의 지배하에 있던 체코 등 소수민족과 아일랜드, 이집트 등 약소민족들이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 이후, 제정 러시아 치하의 피압박 민족들이 선언한 '민족 자결의 원칙'이 선언되어 사회주의 사상이 급격히 파급되기 시작했다. 또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에 힘입어 식민 통치 하에 있던 약소민족의 민족운동가들이 크게 고무가 되었다. 이에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인 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1919년 2월 8일 동경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인 '2.8독립선언'을 발표한다. 이 소식에 고무된 국내의 종교계 지도자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3.1운동은 국내적 배경은 근 10년에 걸쳐 행해진 총독부의 강압적 식민통치와 그로 인한 고통과 불만에 있었다. 거기에 1월 21일 고종의 독살설에 자극된 거족적 만세운동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3.1운동으로 표출된 민족운동의 방향 정립과 독립 후의 신국가 건설에 대비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의 한성정부,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중국 상하이의 임시정부를 꼽을 수 있다.
임시정부의 탄생으로 분산되어 있던 독립군들이 서로 연결되어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하게 된다.
또한 국내에서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로 분열된 민족운동의 통합한 신간회가 결성되어 일제에 항거하였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공황이 전 세계로 파급되자 일제는 만주로 대륙 침략을 위한 인적, 물적 수탈을 강화합니다.
그 결과로 각종 물자의 공출과 학도병, 근로정신대, 위안부 등으로 끌려갔으며, 창씨개명과 우리 말과 글이 사용 금지가 됩니다.
1943년 카이로선언에서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결정에 따라 독립을 향한 결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한국광복군은 일본군에 소속된 한인 병사를 포섭하기 위한 공작과 미군과 협력을 통한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하게 됩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며, 15일 일왕 히로이토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습니다.
미, 영, 중, 소 등 연합국 참전으로 뜻밖에 해방을 맞았지만, 소련은 일본이 항복하기 1주일 전에 대일전쟁을 선포하며 한반도로 진격했습니다. 예상외로 신속한 소련의 진격에 놀란 미국은 황급히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을 분할하자고 소련에 제안하며 군사분계선이 설정됩니다.
김구 선생의 탄식처럼 "일본의 항복이 일주일만 늦어졌거나, 일주일만 앞당겨졌더라면" 우리 민족의 삶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일주일만 늦어졌다면 독수리 작전을 통해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국내에 진입했을 것이고,
일주일만 일찍 항복했다면 소련군이 아직 북한에 진주하지 않았을 때이므로 우리 민족이 역사에 보다 나은 결과가 있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