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현대사교육총서 3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엮음 / 휴먼컬처아리랑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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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전쟁의 양상을 띈 한국전쟁.
우리 민족에게도 큰 상처이지만 함께한 세계의 여러 나라도 함께 큰 인명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후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냉전이 더 극렬해진 가운데 대한민국은 전쟁 복구에 박차를 가하지요.
맥아더 장군은 100년이 지나도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힘들 것이라 했는데, UN과 미국의 도움으로 50년도 채 안 돼 전쟁의 상처를 말끔히 씻어내는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럼 한국전쟁의 역사를 함께 알아보도록 하지요.

북진 통일을 주장하던 이승만 정부이지만, 국군의 화력이나 군사력은 북침할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이에 반해 북한은 소련의 도움으로 14개 사단을 무장시킬 재래식 무기와 10개 사단 규모의 장비를 인계받았습니다.
1947년 중국이 공산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대소, 대공산주의의 방파제로 일본을 선택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과 오키나와, 필리핀을 잇는 도서 방위 전략을 설정합니다. 그 결과 한국과 대만은 제외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런 결정은 부동항 확보를 소원하는 소련에게는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유럽 방향으로의 진출이 봉쇄된 후 열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소련은 아시아 지역으로 확장을 목표로 삼습니다.
그중에서도 한반도와 중국 지역은 미국의 전략적 방어 정책에서 소외된 지역이었기에 쉽게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한반도는 구한말 이래로 미국과 일본에 대항할 수 있는 부동항으로 동남아와 태평양까지 영향력을 확대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소련은 김일성의 친소 군부에 전투 물자를 지원하였습니다.

1949년 5월 4일, 개성을 비롯한 몇몇 지역에서 전투가 발발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38도선 상의 충돌은 남한의 북침 시 반격으로 전환한다는 전략으로 남한의 북침을 유도했지만, 남한이 북한의 공세에 대응하는 정도의 수준에서 머물렀기에, 북한의 의도가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1950년 4월, 김일성은 비밀리 스탈린을 방문하여 '통일 과업을 위한 선제 남침 개시'를 허락받았으나, 최종 결정은 북한과 중국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달았습니다. 마오쩌둥은 결정에 앞서 스탈린에게 직접 설명을 요청하였고, 3국의 합의에 따라 5월 29일 남침 계획을 완성, 스탈린의 동의를 받아낸 북한은 남침 개시 일자를 1950년 6월 25일로 정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전후하여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되었습니다.
남침에 가장 큰 걸림돌은 미군의 개입 가능성입니다. 당시 소련은 미국에 비해 전력이 열세하고 핵무기 개발에 뒤져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더라도 한반도에 도착하기 전에 재빨리 전쟁을 종결짓는다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1단계로 전쟁 개시 2일 차에 서울 점령, 수원-원주-삼척을 잇는 90km의 거리를 5일 만에 점령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2단계로 군산-대구-포항을 연결하는 180km를 14일 만에 점령하고,
3단계로 국군 잔류 병력을 소탕한 후 신속히 남해안의 주요 항구를 점령하여 부산-여수-목포까지 80km를 10여 일 만에 점령 완료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1950년 7월 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군 사령부 설치 결의하였고, 사령관으로 맥아더 장군을 임명합니다. 7월 24일 정식 유엔군 사령부가 설치되며, 16개 국가가 전투 부대를 파병하고, 5개 국가가 의료 지원단을 보냈고, 그 외 39개 국가가 물자 지원을 담당하였습니다.
1950년 7월 20일, 대전을 상실한 미군이 경부 국도를 따라 철수하면서 경부 국도 서쪽의 호남 지역이 무방비 상태가 되었기에 국군과 유엔군은 최후 방어선으로 낙동강 선을 결정하게 됩니다.
1950년 8월 ~ 9월, 낙동강 방어선의 치열한 전투로 북한군 7만여 명의 병력과 장비를 상실하게 되자 더 이상 공격을 계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의 병참선을 일거에 차단하였고, 북한의 낙동강 전선에서의 공격력을 크게 약화 시켰습니다.
1950년 9월 29일, 서울 중앙청에서 거행된 환도식 후 맥아더는 "유엔이 38도선 돌파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북진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합니다. 이에 이승만은 정일권 총장에게 국군 단독이라도 38도선을 넘어 북진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어, 10월 1일 국군의 북진 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1950년 10월 25일, 유엔군이 박천-운산-온정리-희천을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했을 때 중공군의 제1차 공세가 개시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국군 제6사단은 압록강변 초산을 점령하였고, 서부 지역의 미 제24사단은 신의주 남방 정거동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이때 전선의 상황은 12개국의 유엔군이 정주-영원-장진호-혜산진-합수-청진선을 점령하여 만주와의 국경선을 지척에 두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제2차 공세에 부딪쳐 11월 30일부터 모든 유엔군이 무질서하게 철수를 시작하게 됩니다.
1951년 1월 4일, 유엔군은 서울을 포기하고, 평택-삼척 선까지 철수하였습니다.
1951년 1월 27일부터 중공군의 제4차 공세를 단행했지만, 지평리와 원주 일대에서 많은 손실을 입었고, 유엔군의 반격으로 3월 15일에 다시 서울을 탈환하였고, 그 여세를 몰아 3월 말에 38도선을 회복하였습니다.
1951년 4월 22일부터 6월 10일까지 중공군의 제5차 공세가 펼쳐졌지만, 유엔군의 화력에 압도당하여 많은 희생을 남긴 채 저지되었습니다. 이후 유엔군과 중공군은 확전보다는 전쟁 이전의 원상회복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하자는 휴전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1951년 6월 13일, 모스크바에서 북한과 중국, 소련 간의 회담에서 공산군 측은 38도선의 경계선을 복구하는 조건에서 휴전이 유익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 결정을 미국에 통보하며 휴전 협상이 시작됩니다. 1951년 7월 10일부터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2년간 휴전 협상이 지속되었습니다.
1953년 6월 8일, 유엔군과 공산군 협상 대표들은 포로 교환 협정에 조인합니다. 이는 한국 정부의 의사와는 무관한 휴전 협상이었기에 6월 18일 이승만은 반공 포로 3만 6천여 명을 석방하였습니다. 비록 국군과 모든 군사 시설이 유엔군 사령관의 지휘 아래 있다 할지라도 한국 정부가 휴전 회담을 결렬시키기로 결심만 한다면 유엔군과 공산군이 어떠한 협정을 체결하더라도 얼마든지 이를 파기 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 사건이었습니다. 결국 한국은 정전 협정을 묵인하는 대가로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과 군사적 경제적 원조, 국군 증강 등의 약속을 받아내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전 협정 조인식은 유엔군 대표 해리슨 장군과 공산군 대표 남일 대장이 판문점에서 15분 만에 체결하였습니다. 이날 오후 10시를 기해 한반도 전역에서는 포성과 총성이 멈추었습니다. 이로써 3년 1개월 동안 계속되었던 포성은 일단 멎었으나 한반도는 평화도 승리도 없는 미해결의 장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한국의 전후 복구를 위해 유엔은 미국의 경제협조처(ECA)뿐만 아니라 유엔 계통의 한국민간구호제단(CRIK), 주한 유엔민간원조사령부(UNCACK), 유엔 한국재건단(UNKRA) 등의 기구를 통해 한국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습니다. 전쟁 중 미국과 유엔으로부터 받은 구호 원조의 총액은 4억 7190만 달러였는데, 이는 2011년 기준 가치로 약 38억 7380만 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1959년 유엔 기구를 통한 원조가 모두 종결됨에 따라 한국의 대외 원조는 모두 미국에 의한 원조로 한정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미국의 원조는 무상으로 지원하던 구호 원조에서 공공 차관을 제공하는 개발 원조로 전환되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원조 물자를 국내에 팔아 그 판매 수입을 재정에 투자하거나 융자에 사용했습니다.
1953년부터 1960년까지 이런 원조 판매 수입은 일반 재정 세입의 40~50%를 차지할 정도로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습니다.
이런 정부의 지원 속에 한국 경제는 약 5%의 경제 성장을 꾸준히 이룩하며 전쟁의 폐허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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