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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내가 다시 좋아지고 싶어 - 지금껏 애써온 자신을 위한 19가지 공감과 위로
황유나 지음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23년 1월
평점 :
한 지붕 세 가족 드라마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40대 초반이거나 아니면 나와 비슷한 40대 후반이지 않을까?
평범한 여성으로 직장 생활의 애환과 어린 시절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겪은 다양한 굴곡을 이야기한다. 눈앞에서 목격한 자살의 현장, 계약직으로 기간 만료로 인한 퇴직, 대학 새내기 때 사상 교육에 반대해 자퇴한 이야기, 외국계 회사에서 홍보팀으로 근무한 이야기, 젊은 나이에 팀장이 되어 겪은 스트레스와 자승자박, 생각하기도 싫은 성폭행 이야기, 그리고 결혼 후 육아 이야기 등 자신의 일대기를 거침없이 이야기한다. 남자로 반평생을 살아온 나이기에 동일한 세대의 여성의 일상을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눈앞에서 자살한 현장을 목격한다면? 그것도 나와 이웃인 사람이 투신한 경우라면? 죽은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면? 그것도 크리스마스에...
현관을 열고 나와 이웃이 뛰어내린 난간을 마주한다. 참혹했던 현장은 온데간데없고, 새빨간 피가 흥건하게 번져 나가던 자리도 말끔히 치워졌다. 그녀가 투신하기 직전 밟았을 그 흔적 앞에 서 본다. 모골이 송연해진다. '죽음'과 시선을 마주친 이후 인생이 덧없게 느껴졌다. 아등바등하는 마음도 사라졌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하물며 어디로 가고 무엇을 한다는 것에 의미 있기는 한가. 산다는 건 결국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오늘을 살아내야 한다는 거침없는 몸부림. 그 안에서 꿈을 꾸며 나아가는 나.
내가 살면서 경험했던 우울은 '우울함'이라는 '감정'이 아니었다. 기쁨, 슬픔, 분노로 채색된 감정을 모조리 잃은 '상태'였다. 무의 공허. 삶을 비롯한 모든 것에 대한 집착과 욕망이 사라지는 것, 아니 스스로 놓아버리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어떤 위로나 조언, 책과 강연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상태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이대로 생을 끝내고 싶다는 유혹이 들었다. 왜 살아야만 하는가? 이 물음은 인생의 언제 어디서든 불쑥 찾아왔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지금이 아니면 잠시 후 또 나를 덮여올지 모른다. 사건 이후, 진짜 두려워진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생각, 기쁨도 의미도 없는 삶을 살았다는 후회가 밀려올까 봐 두려웠다. 원했던 삶을 살아가고 있진 못할지언정 최소한 원하는 '방식'대로 삶을 꾸려가고 싶었다.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죽음 앞에서 조금은 의연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함으로.
그런데도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정답은 결국 찾지 못했다. 어떻게 살아야 후회하지 않을지 아직 모른다. 죽음에 수천 가지 이유가 있듯, 삶에도 수천 가지 이유가 있으리란 믿음으로 버티고 있다. 사람마다 사는 목적과 이유가 다르다. 나는 나 자신에게 못난 존재가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하며 나아가기로 했다. 큰 기대를 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보잘것없는 '자기 구원'의 무게 중심을 잡기조차 버거울 때가 있다. 나흘 주저 않고 사흘 일어나곤 하지만 그래도 내가 남기고 있는 자취에 떳떳해지고 싶다. 더불어 내 옆에 있는 한 사람만큼은 구원할 힘을 기르고 싶다.
사회에 주눅 든 나, 음지로 자꾸 기어드는 나, 그늘에서만 서성거리는 나. 나는 이런 내가 싫었다. 나에 대한 나의 거부감은 역설적이게도 이를 악물게 했다. 세상에 나가보자는 다짐, 대신 '진짜 나'를 감추고 '가짜 나'로 나가기로 했다. 진짜 '나'가 상처받으면 안 되니까 가짜의 '나'를 만들고 다듬었다. 누구나 인정하는 '착함'을 방패로 삼았다. 친구를 잘 도와주고 어른들 말 잘 듣고 순종하는 나로 개조했다. 그래서 나의 유년 시절은 안쓰러울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착한 아이, 그게 바로 나였다.
'착한 친구'라는 가면은 심리적 약자로서 살아남기 위한 내 유일한 생존 도구이자 무기였다. 고개를 가로저을 줄 모르는 아이, 아니라고 말 못 하는 아이, 누구도 귀찮게 하는 법 없는 얌전한 아이였다. 입을 떼면 내 약점을 들킬까 두려워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내리 짝꿍들과는 말 한마디 자연스럽게 나누지 못했다. 그저 고분고분 웃어주면 '너 되게 착하다'라고 하니 그 말을 위안 삼아 나를 다독였다. 그렇게 나는 착한 아이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후, 나는 스스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하나 둘 단절해 나갔다. 애써 노력해야 하는 관계가 버겁고 불편했다. 학창 시절 얕게 유지되던 친분은 사회인이 되는 순간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항상 누군가에게 인정받길 원했다. 인정에 대한 내적 갈구는 커져만 갔다. 나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는 내가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지 의문스러웠지만 늘 불안하고 외로웠다. 오롯이 혼자이고 싶었지만 혼자여서 괴로웠다. 땅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둥둥 떠있는 기분이었다. 모두가 나를 싫어하게 된 상황에서 모두 나를 좋아해 주길 바라는 이 심리, 대체 무슨 아이러니인가.
수줍음은 '자기애'의 결정체이다. 나는 내성적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 극도로 예민하게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자연히 삶의 무게 중심은 나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가 있었다. 상대에게 내 우위를 허락하며 나 스스로 자세를 낮췄다. 그들이 반사하는 내 모습을 나의 '자아상'으로 만들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어른들이 빚어준 내 모습은 못나고 혐오스러웠다. 왜곡된 자아상을 숨기기에 급급해하고 전전긍긍하느라 진짜 내가 어떤 모습인지 들여다보지 못했다. 보기 무서웠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할 것 같았다. 그로 인해 말을 잃었고 몸은 굳었다. 행동거지는 점점 부자연스러워졌으며 이 경직된 자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진심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진정으로 공감한 적도 없다. 내게는 그럴 여유나 에너지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추한(것이라고 여겼던) 구김살을 감추느라 전전긍긍했던 나에게 진정한 친구 하나가 남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자존감 높이는 비법이 궁극적으로는 남들에게 인기를 얻는 법, 남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법이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이 나를 높게 사면 내 '자존감'이 올라가는 것이라고 믿은 때가 있었다. 상대나 어떤 대상으로부터 평가 절하를 당하면 내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그러나 나의 영역을 수호하고 그 안에서 내 소임에 충실한 것만으로도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때로 세차고 때로 약한 물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결국 '나 자신뿐이었다. 물론 남들의 칭찬과 인정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지극히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무엇이 그들을 특별하게 만드는지 의문스럽다.
타인들 역시 나와 같이 불완전한 존재이자 인간이지 않은가. 전지전능한 신도 아니고 처분을 내릴 재판관도 아니다. 시비를 가릴 감독도 아니다. 애초에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내 자존감에 점수를 매길 수 없다. 남에게 나를 판단할 힘과 권리를 주어서도 안 될 노릇이다. 타인의 눈으로 나를 보고 타인의 인정을 구해서 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인생이 답답해진다. 나는 자존감에도 성장판이 있다고 믿는다. 이제부터라도 사소한 기특함을 벽돌 삼아 차곡차곡 쌓아 가려 한다. 끔찍한 치과 치료를 무사히 마치고 나왔을 때의 내가 기특하다. 문득 친구에게 책을 선물할 때의 기특함이나 안부 전화를 먼저 걸어주는 기특함 등 순간순간 '나 좀 괜찮은데'라는 생각도 잊지 않겠다.
내 안의 여섯 살 꼬마는 지금도 끊임없이 나를 찾아온다. 둘러보니 어린 나를 보아줄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가여워 안아주었지만, 어느새 훌쩍 자란 내가 안겼다. 내 품에 나를 안고 다독였다. "애썼다!"
어느 날 느닷없이 다가온 이웃의 죽음, 그리고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어릴 적부터 가면 속에 갇힌 자아를 되돌아보며 삶의 의미를 찾아본다.
나 역시 작가와 동일한 삶을 살아왔기에 그녀의 삶이 남 같지 않았다. 내 안의 상처받은 자아를 다독이는 순간 나도 치유를 받는듯했다.
감추고 싶은 속내를 모두 꺼내 공유한 작가의 용기와 그녀의 삶에 많은 위안과 격려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