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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은유 지음 / 메멘토 / 201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전에 2018년 국제도서대전이 있어서 갔다. 사전티켓이 무료라서 넉넉히 예약을 해두었는데, 다른 사람들과 갈 수 없던 상황이라 3장 중 1장만 사용했다. 현 도서관련 흐름이 어떤지 알고 싶었다. 책은 읽는 것 뿐 아니라 기획된 이벤트, 전시를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그 시간에 읽던 책이나 더 읽을까도 했지만, 이번에는 전시가 어떨지 궁금했다. 나이가 들며 점점 굳어져가는 틀을 깨치게 새로운 분야들을 발견하게 되어 개인적으로 좋았던 시간이었다. 책에 둘러싸여 이리저리 둘러보는 게 그저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나서 나머지 2장 티켓은 다른 엄마에게 지역맘까페를 통해 드림을 했다. 그 엄마는 덕분에 잘 다녀왔노라며 거기서 구입한 물건들을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그게 뭐지?' 하며 검색하고 알았다. 무슨 아이들 클레이 같은 거라던가? 사실 지금도 관심이 없다. 내가 준 티켓으로 어떤 엄마가 내게 이런 후기로 감사해 하더라고 남편한테 이야기 했다. 남편이 '너는?(뭘 보고 왔어?)'라고 묻는다. "나는?? 나는 내가 보고 싶은거 보러갔지" 라고 허가 찔린 기분으로 대답했다.
저자는 초반에 자신이 글을 왜 쓰는지 이야기하면서 쓸때에야 자신으로 살 수 있었던 사실을 고백한다. 재테크나 피부 관리, 자식 명문대 보내기에 관심없고, 아이들 사교육비보다 자신의 책값과 공부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사람이었다는데 나는 거기서 동질감을 느꼈다. 도서대전, 유아교육대전 등 대형 전시회장에서 생기는 대전마다 자식들의 교육흐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발에 땀이 나도록 찾아다니는 엄마들과 다른 나 또한 이상한 사람이었다. '나 정말 모성애 있는거야?'라고 자문을 해보다가도 정신차려보면 내 자신을 찾기 위해 쓰고, 다니고, 배우고 하는 그냥 한 사람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 자신을 부정할 수 없었고, 나와 비슷한 저자의 모습이 굉장히 매력있게 느껴졌다.
글쓰기의 최전선....
투쟁과 긴장이 느껴지는 제목이다. 최전선이란 뜻은 적과 맞서는 맨 앞의 전선(戰線)을 뜻한다. (네이버 사전 참고)
중간도 아니고 뒤도 아닌 바로 앞에 적과 대면하는 최전선에서 우리는 긴장할 수 밖에 없고, 수시로 귀울이게 된다. 두려움과 긴장과 치열함 앞에 물러서지 못하고 그 앞에 버티거나 혹은 싸워야 한다.
그런 상황에 놓인 글쓰기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저자가 글쓰기의 본질을 말하는 아래의 말에서 글쓰기의 최전선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 우리 삶이 불안정해지고 세상이 더 큰 불행으로 나아갈 때
글쓰기는 자꾸만 달아나는 나의 삶에 말 걸고, 사물의 참 모습을 붙잡고,
살아 있는 것들을 살게 하고, 인간의 존엄을 사유하는 수단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p.23
나는 왜 글을 쓰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내가 살기 위해 썼다.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모든 게 무의미 하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나는 잠을 덜 자고, 쓰는 행위를 택했다. 그렇다고 거창한 글쓰기가 아니라 하루에 있었던 이야기, 아이의 도약의 순간, 아이로 인해 즐겁고 힘들었던 일을 일상을 적은 글일 뿐이었다. 여전히 나는 그 글을 쓰고 있고, 나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혹은 나 자신이 내향적이어서 수시로 뱉어내지 못하는 마음을 글로 쏟아내곤 했다.
글은 나의 삶의 수단이었고 그런 면에서 저자의 글쓰기의 최전선이란 말이 친숙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저자는 한단계 더 나아간 글쓰기를 이야기 한다. 모든 열심과 노력이 발전이 아니 듯이 바른 가치를 향한, 진실한 글쓰기가 되도록 바른 방향으로써의 글쓰기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면에서 이 책은 글쓰기의 방식과 단편적인 목표를 가진 글쓰기를 제안하는 것과는 다른 깊이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은 그냥 빠르고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생각하고 고민하며 고찰하며 자신의 글쓰기를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다.
문장하나하나가 묵직한 울림이 있어서 글쓰기 관련한 그의 통찰에 더욱 진지한 마음을 갖고 나의 글쓰기를 다잡게 한다.
짧은 문장이 무조건 좋을까에 대한 글은 무조건 자르려고만 했던 행위를 멈추게 되었다. 문장을 한번 더 보게 되며, 짧은 글이 꼭 좋은 글이 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길게 끌고 가는 글이 좋지 않을 거란 편견을 다시 뒤집는다. 아직은 짧은 글을 통해 내 생각을 정리해야하는 나는 초보이지만, 추후에 길게 생각을 호흡하는 글들로 좋은 글을 써볼 수 있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늘 내 글은 내가 썼지만 어려웠다. 내글이라서 직면하기 싫기도 했지만 추상적이어서 읽는게 힘들었다. 하지만 거기에 낑낑대며 그 생각을 끌어내고 이어가려고 애썼다.
그것을 저자가 알고 있었다 듯이 꼬집었다. 그 문장 뒤에 내 감정을 숨기는 것이란다.
나는 어려웠다. 나도 나의 추상적임을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저자는 정황을 인사배(인물, 사건, 배경)로 풀어쓰라고 한다. 무언가 해볼만 하겠다 싶었다. 한번 시도해 볼만 하다.
글은 나다. 글은 나보다 잘 쓸수도 없고, 덜 쓸 수도 없단다. 저자에게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는데, 나또한 여기서 위로를 받았다. 누군가에게 읽혀야 하는, 평가가 되는 의식이 되는 글쓰기이다. 글이 나 자체이기에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은 긴장과 무력함의 씁쓸함에서 나를 짓누르는 듯한 돌덩이 하나를 내려놓듯 가뿐하게 한다. 이 글이 어깨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진리와 같이, 생수와 같이 묵힌 갈증을 해소하는 말이 되리라. ㅎㅎㅎ
내가 읽은 책이 곧 내 글이 된다는 말도 명심하며 점차 사유를 즐겁게 할만한 책도 읽어보기로 다짐해보았다.
읽기 쉬운 책이 아니라 읽기 힘든 책을 통해 그 고통스러운 사색들을 헤쳐나간 후 도약을 맛보는 거친 과정에 다시한번 도전해봐야겠다. 양으로 성취감을 느끼고, 그것으로 나 자신이 뭐라도 된 것마냥 즐거워하기 보다, 느리지만 작가의 생각을 거쳐보며 그 가운데 내 자아와 충돌하는 그 사유의 결과들을 통한 성취를 맛보고 싶다.
현재 글쓰기 강의를 들으며 글을 쓰고 있다. 강의를 들으며 어떤 틀에 박힌 글쓰기가 되지 않을지, 어떤 상황에 따라 자유를 억압하는 글쓰기가 되지 않을지 염려했다. 사실 그건 핑계고, 은연 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비판을 피하고 싶어서 적극적으로 나를 드러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띄어쓰기나 문장을 쓰는 방식이 아니라 글에 대한 절차적인 접근을 통해 글과 친밀해지는 것을 보며 더 나은 글쓰기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되었다. 또한, 어떠한 비판이라도 이제는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상황에 접어들게 되었다. 더이상 글쓰기로 나를 드러냄은 이제 피할 수 없는 닥쳐야할 현실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가 자신이 학인들과 함께 글쓰기 수업을 이끌어오며 쌓인 노하우와 경험담이 또한 나의 글쓰기를 돌아보게 해주었다. 맞으려던 매를 조금은 덜 맞을 수 있는 기회를 줬다고나 할까?
알을 깨지 않고는 살아있는 개체로 성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에게는 글쓰기가 바로 나를 둘러싼 알이다. 이를 통해 그동안 극복하지 못한 내 삶의 부정적이고 두려웠던 그 막힘의 벽을 뚫어내고자 다시 도전해본다.
어떻게 써야 할지, 무엇을 써야 할지, 왜 써야 할지...
바라보고 고민하고 써내려가면서 최전선에 선 내 삶의 적진을 뚫어내는 작업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