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노트르담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3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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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지도에서 내가 갈 여행지 한 곳을 내리찍 듯 빅토르 위고를 작정하고 읽겠다고 달려든 건 아니었습니다.

책의 반듯한 모양새, 그 속의 쏙쏙 박혀있는 활자, 그리고 책을 들었을 때의 그립감, 책을 읽는 분위기, 책을 읽었을 때 빠지는 몰입감 등 제가 책에 관련된 이 여러 가지를 좋아하는 사람인 건 맞긴 하나, 제게 '빅토르 위고'란 이름은 저와는 한참 다른 시대의 위인, 세종대왕만큼이나 (과거에 있으나 현실에는 없고 만날 수도 없는) 먼 거리의 사람이었거든요. 제가 아는 '빅토르 위고'는 그저 프랑스의 대문호이자, '장발장'으로 유명한 작가였을 뿐이었죠. 그런 제가 몇 달 전, 동생 집에 갔다가 여러 실용서들 틈에 있는 민음사 책 몇 권을 발견했어요. 바로 위고의 이 책! <파리의 노트르담>이 그중 한 권이었습니다. <고전 읽기 클럽>에서 자발적 강제로 고전을 읽던 차에 '위고는 이때다!' 싶어서 빌려 와서 읽었어요. 그냥 들어왔던 빅토르 위고 이름 하나만 덥썩 믿고 말이죠.


이 책의 간략한 내용은 ...

카지모도는 노트르담 성당의 종지기입니다. 눈이 하나인데다 꼽추인 채로 태어난 그를 어느 누구도 키우려 하지 않았어요. 그런 그를 클로드 프롤로 부주교가 데려다 키웁니다. 모두가 그에게 경멸과 모욕의 눈길을 보낼 때, 프롤로 부주교만큼은 카지모도에게 그러지 않았죠. 카지모도는 자신을 키워준 프롤로 부주교에게 헌신을 다합니다. 종지기로 살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종지기로 살며 종소리 때문에 그는 귀머거리가 됐어요. 세상과 소통은 더 불가능하게 됐고, 그럴수록 카지모도와 소통이 가능한 사람은 프롤로 부주교 한 사람 뿐이 되었습니다.

에스메랄다는 한 여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지만 납치를 당하게 되고, 집시로 자라나요. 춤과 노래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선사하며 공연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카지모도에게 납치를 당할 뻔하죠. 페뷔스 중대장의 등장으로 에스메랄다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카지모도는 그 납치미수로 붙들려가서 재판을 받습니다. 자신이 누구(프롤로 부주교)에게 사주를 받았는지 말 한마디 하지 못합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재판을 하는 재판관이나 카지모도 모두 귀머거리였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권력자들은 자기 입맛에 맞게 카지모도에게 말도 안 되는 판결을 내려요 그리고 카지모도는 형벌을 고스란히 받게 됩니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잠잠히 처벌을 받는 카지모도를 그때만큼은 프롤로 부주교도 외면합니다. 단 한 사람만이 갈증과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카지모도에게 물을 건네는데요. 그 사람이 바로 에스메랄다입니다. 그렇게 1부는 마무리됐어요.


와우! 빅토르 위고가? 큭큭

이 책을 읽으면서, 대문호로 알던 빅토르 위고에 대한 환상이 살짝 깨졌어요. 엄해 보이고 진중해 보이는 초상사진과는 달리 그는 굉장히 유머스러운 작가인 듯 보이기도 했는데요.


만약 라바야크가 앙리 4세를 암살하지 않았다면 재판소의 기록 보관소에 라바야크의 소송 기록이 보존되어 있을 리 만무하고, 그 기록을 소멸시키려 한 공범도 있었을 리 만무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 그러므로 결국 1618년의 화재는 있었을 리 만무할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 낡은 재판소는 낡은 대광실과 함께 아직도 서 있을 것이다. 나는 독자에게, 가서 보시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양쪽 모두 재판소에 관한 어떤 묘사도 피할 수 있을 것인즉, 나는 묘사를 하지 않아도 되고, 독자는 읽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는 아래와 같은 새로운 진리를 증명해 준다. '큰 사건들은 헤아릴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p.26

화재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나도 독자 당신들한테 가보세요!라고 추천할 거고, 쓸데없이 묘사 글 안 써도 된대요. 그리고 독자들은 읽지 않아도 될 거라고 해요. 굉장히 누군가를 (귀엽게) 원망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외에도 유쾌하게 웃긴 표현이나 장면이 간간이 나오는데요. 피에르 그랭구아르란 인물이 우스꽝스럽게 표현된 것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랭구아르가 쓴 희곡으로 공연이 될 때, 그는 진지하게 공연을 이끌었지만 군중들은 재미없다고 비난하고, 자신의 공연이 아닌 다른 곳에 시선을 둡니다. 공연은 거의 엉망으로 마무리 되고요. 돈은 제대로 받지 못한 데다 먹을 것도 살 돈도 없어요. 물방아 바퀴에 옷이 다 젖어버리고요. 에스메랄다의 공연을 본 그에게 에스메랄다가 모자를 내밀어 돈을 요구하는데요. 줄 돈이 없어서 외면합니다. 어찌어찌하다가 결혼까지 이르게 된 에스메랄다또한 피에르란 인물은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신혼 첫날밤 퇴짜를 놓았어요. 요즘 말로 그랭구아르 이 사람! '찌질한' 남자로 (의도치 않았겠지만)웃픈 상황을 만드는 인물입니다.


그래도!역시! 빅토르 위고!

인물의 행동과 상황 묘사에 피식 웃음이 나긴 했지만, 위고가 단순히 웃음을 주려고 이런 방식을 선택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시 사회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함을, 문화재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는 프랑스의 여러 상황 등 소설을 통해 지적하여 풍자하기도 했어요. 그와 더불어 이 작품에선 빅토르 위고의 문학적, 역사적, 예술적 지식들이 고스란히 드러나요.


 15세기 도시 파리의 구조, 인쇄술과 건축술의 관계와 흐름에 대한 글을 읽으면 감탄이 절로 납니다. 다소 어렵기도 했지만, 위고만의 뚜렷한 가치와 통찰이 글에 반영되어 읽으면서 신선하고 재밌게 읽혔어요. 마지막으로 이런 지식과 날카로운 지적에도 그의 표현은 빛이 납니다. 특히 종소리에 대한 묘사가 기억에 남는데요. 종소리에 대한 내용은 읽는 것만으로도 그 소리가 들리는 듯 웅장하면서도 영롱하게 느껴졌고, 성스러운 감동이 잔잔하게 들기도 했어요. 구체적인 종소리 표현은 적지 않겠지만요. 도시는 이야기하고, 숨을 쉰데요. 종소리를 통해 도시는 노래하게 된다니 그 표현이 제겐 꽤 낭만적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그가 보여준 문학적 역량을 보며 '역시 빅토르 위고!'란 생각이 들었어요.


위고에게 카지모도는... 그리고 내게 명장면?

저는 (아직 1권만 읽었지만) 빅토르 위고가 이 작품에서 '카지모도'에게 굉장한 비중과 가치를 부여했다고 생각해요.. 사실 카지모도는 이 소설에서 행동의 여부가 아니라 겉모습만으로 대중들에게 하찮게 여겨지고 끊임없는 야유와 비난을 받았던 인물이거든요. 작품에선 그런 취급을 당했을지라도 작가인 빅토르 위고는 카지모도의 내면의 순수함을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카지모도만이, 카지모도라서 낼 수 있는 노트르담 성당의 성스러운 종소리를 인정합니다. 그가 없는 노트르담 성당의 종소리에는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한테도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마지막에 '카지모도'가 형벌을 감당하는 모습이었어요. 그 장면이 굉장히 끔찍해서 차마 읽기 힘들었는데요. 제가 기독교인이어서 그런지 마치 그 장면은 십자가 처형을 받는 예수님의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을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군중들의 야유와 비난도 비슷하다 느껴졌어요. 나중에 프롤로 부주교가 외면하는 모습은 베드로의 부인하는 모습도 생각났고요. 어떠한 저항도, 어떠한 분노도 표하지 않고 그저 묵묵한 무력함으로 채찍을 맞고 있는 장면은 제 피부에 느껴지는 듯 섬뜩하면서도 안타까웠어요. 아무리 고통을 부르짖어도 그 누구 하나 고통을 헤아려주지 않습니다. 간절하게 물을 달라 부탁해도 누구도 주지 않아요. 잘 못한 게 없는 데 죄를 뒤집어쓰며 홀로 외로움을 묵묵히 삼키는 카지모도의 모습이 이 책에서 명장면으로 제 기억에 남았어요. 그런 중에 에스메랄다의 등장은 감격스러웠습니다.



급 리뷰 마무리 ..ㅎ

아직 1권만 읽었는데, 다 읽은 듯 리뷰를 쓴 것 같습니다. 2권 마저 읽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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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이 있는 집
김진영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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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와는 결론이 살짝 다른가 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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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3 - 박경리 대하소설, 1부 3권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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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줄거리


김평산과 칠성은 처형당했다. 귀녀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강포수는 살뜰히 그녀를 챙겼다. 아이를 낳고 법에 따라 그녀가 죽은 후엔 아이를 데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산다. 이 시기는 고종황제가 죽고, 그가 독살을 당한 소문이 퍼지던 중이었다. 서희와 할머니 윤씨 부인은 최씨네 갖고 있는 토지들을 보러 다닌다.

칠성의 아내 임이네는 남편이 죽고 도망갔다가 살 곳이 없어 결국은 다시 평사리로 돌아왔다. 주변인들의 도움으로 이래저래 먹고 살았다가 윤씨 부인에게 그의 모습이 보이고, 그런 그녀의 딱한 처지를 보고 그들에게 곡식을 지원한다. (칠성네가 모함으로 살인죄에 가담했다는 죄를 뒤집어 쓴 걸 뒤늦게 윤씨부인이 알고 기억한 것이다.) 임이네는 더욱 당당해졌을 뿐 아니라 용이로부터 아이까지 갖게 됐다. 이때 월선이도 다시 돌아온다.

조준구는 최 참판 댁에서 하릴없이 지내다가 삼월이를 수차례 범한 걸 알고 서울로 쫓겨나는데, 뻔뻔하게도 아내와 꼽추 아들을 데리고 돌아와 당분간 살게 해달라고 윤 씨에게 청한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딱 그 시점에 역병이 돌면서 평사리의 여러 사람들이 죽어났다. 김서방을 시작으로, 강청댁, 봉순네, 윤씨 부인, 그리고 문 의원까지 무참히 죽음으로 몬다. 조준구는 이때다 싶어 최 참판 댁의 사랑으로 그들의 거처를 옮기고, 그가 주인인 양 지내는데 이를 한바탕 서희가 뒤집어 놓기도 한다.

강청댁이 죽었으니, 용이의 아이를 낳은 임이네가 용이네 집으로 들어오지만, 월선이에게 수시로 드나든다.

이때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머니까지 잃고 형이라 친척 집에서 키워진 한복이는 때마다 평사리를 들르며, 엄마의 기억을 잊지 않으려고 애쓴다. 이를 보던 용이가 월선이네를 집에서 묵게끔 도움을 주려고 한다.



안타깝다. 그리고 이젠 당신들 모두 이해가 된다.


초반에 귀녀와 김평산의 죽음으로 죄에 맞게 응징이 이루어진 데는 속이 다 시원했다.(이 와중에 강포수의 순수한 사랑은 또 어쩜 그리 애절한지...) 그런데 때마침 다른 악인 캐릭터가 등장한다. 김평산이나 귀녀같이 극악무도하다기보단 소심하지만 비열하고 탐욕스러운 조준구 때문이다. 이에 부인 홍 씨까지 더해지니, 이들에게 당하는 이들을 보는 게 제일 안쓰럽다. 특히 이번 책에서는 '삼월'에게서 그 안타까움이 더했는데, 종이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면이 참담했다. 나중에는 버려진 몸이라고 (삼월을) 노리개로 쓰려는 조준구와 삼수의 악랄한 꾀를 순이가 귀띔하며 도망가라 말해준다. 그런데 삼월인 도망가지 않고 남았다. 삼월이가 조준구에 아직도 희망이 있어서 한 선택인지, 최참판댁을 나가도 별 볼 일 없을 거란 포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그 시대 여자로 종으로 사는 건 선택권도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곤 딱히 별다를 게 그 당시에서 '삼월이가 도망가지 않았다'는 문장이 내겐 아프게 다가왔다.


전 편에서는 임이네가 그렇게 얄미웠다. 강청댁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도, 용이한테 그렇게 추파를 던지던 임이네였다. 이젠 강청댁까지 죽었으니 임이네가 비록 평사리를 떠나며 고생했지만, 끝내는 다 가진 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사리 여인네들의 험담처럼 말이다. 그런데, 강청댁이 죽으니 그 자리를 임이네가 대신하게 된 안타까운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평사리를 떠났던 적엔 여러 남자에게 몸을 주지 않고는 제 아이들을 먹여살릴 수가 없었다. 여기서도 못 살면 다 죽어버리자는 맘으로 평사리에 와서 용이의 아내가 되었지만, 용이는 자기(임이네)가 낳아준 아들에게도 자신에게도 별다른 애정이 없다. 그리고 여전히 월선이를 향한 마음만 그대로다. 참... 임이네도 옛 안 좋은 말로 박복한 인생이다. 또 그렇다고 용이도 줏대 없이 이리저리 흔들거리고 여러 여자에게 상처만 주는 캐릭터였는데, 그의 번민과 어쩌지 못하는 애정도 책을 읽다 보니 이해가 된다. 아주 악랄한 이들을 제외하고, 각 캐릭터들의 마음을 두루두루 읽다보면 각자의 사정에 따라 다 그럴만 하게 보인다. 각자의 인생들도 다 그렇게 보면 이해할 만한 인생들이 아닐지... 줏대없이 흔들거리는 건 용이가 아니라 독자인 내가 더 그런 게 아닌가 생각도 든다.


모두가 죽었어도, 서희는 살아있다!


윤씨부인도 죽고, 봉순네도 죽은 마당에 서희는 어쩌나 싶었는데, 서희가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뒤집어 놓는 모양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속이 다 후련하다. 그래도 아직은 어린지라 결국엔 조준구에게 깜냥이 되겠나 싶기는 하고, 이야기를 알기도 해서 뺏기게 될 거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읽으면서 지금만큼은 통쾌했다. 수동이를 중심으로 윤보, 용이와 함께 곳간을 털러 자물쇠를 때려 부수는 내용도 신나게 읽혔다. 내가 서희 같은 아이를 키운다면 고개 절로 흔들만큼 싫다할 인물이지만, 어려도 최씨 가문 손녀라고 여느 사람 못지 않게 꼿꼿하고 당찬 서희를 보면 (실제 인물인 듯) 대견하다. 명성황후 시해, 을미사변에 이어 고종황제도 결국 사망하게 되며 점차 왜에게 통치권이 넘어갈 시대적인 상황에서 서희가 어떻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갈지 (그나마 해피엔딩이라) 기대된다.



고전이 뭘까


고전이라고 하면, 머릿속으로는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사랑받아온 작품이라고 알고 있었다. 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토지'를 읽으면서는 '도대체 고전이란 뭘까'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고뇌와 번민의 깊은 면까지 다룰 뿐 아니라, 그것을 언어로 독자들이 인물의 상황과 행동을 이해하도록 잘 설득했기 때문에 고전을 '고전'이라 하는 게 아닐까? 대하소설일 뿐 아니라 '토지'가 오래도록 사랑받을 수밖에 없고 여러 출판사를 거쳐서 지금까지 고전으로써의 명맥(?)을 이어가는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대략적인 이야기를 알지만, 스토리를 정확하게 내 눈으로 읽고 싶은 마음에, 인물의 심정과 인간의 나약함을 헤아리는 내용과 문장에 매료되어서 다음 편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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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2 - 박경리 대하소설, 1부 2권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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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2권의 대략은...


용이는 여전히 월선이가 떠나고 마음을 잡지 못한다. 강청댁은 용이에게 소리 질러보지만 소용없다. 오히려 용이에게 추파를 던지는 임이네에게 질투심까지 폭발하면서 동네 여러 사람과도 싸우게 된다. 그와 더불어 봉순네의 이야기, 윤씨부인과 김개주 그리고 환이 이야기, 월선네의 과거 이야기가 현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최치수의 외가 친척인)조준구가 몇 달을 최치수의 집에서 묵고, 그가 구해준 총으로 최치수는 강포수, 수동이를 동행하여 산으로 올라가 (사람)사냥을 한다. 수동이 때문에 김환을 놓치고 난 후, 추석이 되자 일단 집으로 돌아오긴 하나 다시 산에 올라간다. 그러나 강포수의 멧돼지 선불(급소를 놓침)로 수동이의 부상을 입고 최치수 일행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최치수가 산에 오가는 동안, 평산과 귀녀는 귀녀가 최치수의 뒤를 잇는 아기를 갖게 됐다는 음모를 꾸민다. 이 과정에서 칠성도 합류하게 되는데, 칠성은 전체의 흐름을 함께 도모하기보다 그저 약간의 도움(?)을 줄 뿐이다. 그렇게 그들의 의도처럼 귀녀는 임신을 하지만, 칠성의 아이가 아니라 사실은 강포수의 아이다. 강포수든 칠성이든 칠성과 못 이룬 임신인데, 이제와서야 누가 아빠면 어떻냐고 귀녀가 강포수에게 몸을 내어준 거였다.

돌아온 최치수가 귀녀에게 강포수에게 시집을 가라고 말을 던지면서 귀녀의 계획이 빠르게 바뀌었다.

그것은 최치수의 살해! 평산이 최치수를 살해하고, 뛰쳐나오는 평산을 또출네가 보는데,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라 짚을 모아 불을 지르고 자신도 거기서 죽는다. 치수가 죽은 후, 또출네의 짓이 아니라는 것을 의심한 사람 중 윤씨부인이 귀녀를 추궁한다. 귀녀는 자신이 최치수의 아이를 가졌노라고 거짓고백과 연기를 한다. 아기를 만들 수 없는 몸인 최치수임을 아는 윤씨부인은 알았고, 귀녀는 몰랐다. 귀녀와 최치수 살해에 가담한 평산과 칠성을 관아에 고발하고, 그들은 끌려간다. 평산의 아내 함안댁은 이 일로 자살을 하고, 칠성의 아내인 임이네는 아이들을 데리고 야반도주한다.



왜 내 눈엔 제대로 된 남자가 하나 안 보이나?


토지의 대략적인 스토리를 알고, 당차거나 카리스마 있는 남성이 별로 없는 점, 본능에 충실하고 탐욕이 가득한 남자들이 많은 점, 여자를 가축만큼도 취급을 안 하는 점.. 답답했다. 남편이 없는 과부여서 남의 남편에게 얻어맞는 막딸네, 남편에게 뭘 해도 무시받고 맞는 함안댁, 아내인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를 그리워해서 한껏 예민한 나날을 보내는 강청댁, 말로 무시하며 아파도 알아주지도 않는 남편일지라도 남편을 둔 임이네까지...

시대적으론 그런 게 당연한 거였을테고, 다들 그렇게 살았겠지만, 왜 그리 서럽고 억울하면서도 그것을 그냥 견뎌내고 일상으로 지니고 살아야 했는지 씁쓸했다. 뭐 이게 이 소설의 포인트는 아니겠지만, 아무튼 읽는 내내 당하는 여인들의 피해상이 내 눈에는 너무 잘 들어왔다. 정상적이고 멀쩡한 사람이라곤 '문 의원'밖에 없는 것 같다.



인생을 참 닮은 소설, 토지.


사람마다 자기를 변호할 만한 사정이 있다. 도덕, 법, 관습 이런 것들 빼고 한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바라보면,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김환과 도주한 별당아씨, 월선이를 그리워하는 용이, 용이의 아내로 살지만 자기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아 월선이네를 뒤집어 놓는 강청댁, 김환과 최치수 사이에서 제대로 된 어미로서의 역할을 못해 죄책감으로 한 세월을 사는 윤씨 부인, (개인적으론 얄미운 캐릭터지만) 자기 자식을 챙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얍삽한 짓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임이네 ... 내가 이들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상식적인 행동을 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 이렇게 다양하고 가득하게 비상식적인 일이 난무하나 싶다. 소설 속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렇게 몸과 마음이 가는 인물의 내면, 그리고 갈등이 세세히 적혀 있어 그 글들에 내가 설득되었기 때문이다. (위험한 말이긴 하지만) 법대로만, 상식대로만 살아갈 수 없는 게 인간이고, 또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뒤틀리고 억울하고 한스러워도 또 사이다처럼 시원하게 풀리는 구간도 있고, '그 속에서 또 그냥 살려면 살게 되지' 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 책은 우리 인생과 참 비슷하게 보인다. 즉, 이 책은 쓰고, 맵고, 달고, 떫고, 시다. 이 책이 구한말의 시대임에도, 인생은 그런 여러 맛을 느끼는 건 시대를 초월해 매한가지라 또 공감하고 또 감정을 느끼며 몰입하며 읽게 되는 것 같다.



그래도 이 책을 계속 읽으려는 이유는 있다.


한 나라의 아픔의 역사가 담겨있다. 그 아픔이 고스란히 서민들의 삶에도 베여있었다. 아픔이 여기에선 소설에 섞여 희석되어 보일테니, 이렇게라도 역사를 마주하려고 읽는다. 그리고 문장문장에 그리고 작가님의 철학과 고민에 설득되고 매료되었다. 특히 삶과 죽음에 대해 그리고 인간자체와 인생에 대해 깊은 이해와 너그러움이 느껴진다.


'칼을 주어보게. 우중들은 모두 사람백정이 될 것이네. 오므렸던 발톱을 펴는 야수와 같은 본성을 드러낼 뿐이지.'

'사명감이라는 것도 식자깨나 배운 놈의 허울 좋은 겉옷이요. 헤치고 보면 크게 격차 나는 게 아니지. 사람의 존엄이란 능동에 있는 게 아니며 이치에 대한 피동에서 지켜져나가는게야.'

'학문이 진리를 찾는 것이기는 하되 반드시 진리가 이롭고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네. 학문하는 태도 역시 이롭고 보탬이 된다는 생각이 앞선다면 장이 바치에 떨어지고 마는 법, 규격에 맞춰 틀에 끼울 것이 못 되지. 진리는 만인이 함께 가질 물건이 아니거든. 이 손 저 손 넘어가는 동안 쇠퇴되고 시체가 되고 썩어버리고 마른 허울만 남고 종국에는 얼토당토않게 본뜬 물건이 나타나서 만인을 호령하게 되는데 그것에 영합되면 학자는 학자가 아닌 동시 우중과 위정자들의 공범자가 될 수밖에 없지.' p.83


... 인간의 죽음은 좀 사치스러워서 땅속 깊숙이 묻혀지고 혹은 풍습에 따라 영혼의 천상행을 위해 편주에 실어 물 위에 장사지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짐승들같이 고기밥이 되는 일도 있고 짐승에게 창자를 찢기기도 하고 까마귀밥이 될 수도 있다. 이 갖가지 죽음의 처리를 앞두면서, 헛된 탄생에 삶을 잇는 그동안을 집념의 조화는 참으로 위대하여 옷을 걸치고 언어를 사용하고 기기묘묘한 연극으로써 문화와 문명을 이룩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비극과 희극이 등을 댄 양면 모습이며 무덤의 팻말을 향해 앞뒤 걸음을 하는 눈물 감춘 희극배우, 웃음 차는 비극배우의 일상이 아닌지 모르겠다. 귀녀와 평산의 경우도 그러하거니와 패륜을 다스린다는, 양반의 권위 손상에 보복을 한다는, 적어도 그만한 이유를 박아놓은 집념을 앞세우고 지금 구천이를 쫓고 있는 최치수는 웃음 참는 비극의 배우일까. 그의 집념이 설령 본능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며 정열과 욕망과도 거리가 있는 것이며 복잡한 인과관계가 따르고 있다 하더라도 풍토가 빚은 계율에의 복종이며 그 이행은 풍습과 괴뢰적 역할밖에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집념에는 다를 바가 없을 성싶기는 하다. ... p.221-222



... 어떤 연유에서든 최참판댁과 인연을 맺었던 모든 사람들은 아닌 말로 하느님이라도 살해를 당한 것 같은 이 엄청난 사건에 넋이 빠진 것 같았다. 뜻하지 않던 흉사를 천착한다거나 호기심에서 왈가왈부할 여유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백성들은 항상 어디서든 속성에 얽매인 현실적인 동물이다.

.... 이들이 현실적이라는 것은 푼수를 아는 겸양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푼수, 바로 이 푼수를 헤아리는 겸양 때문에 이들은 최치수의 죽음을 보고 하느님이라도 살해된 것 같은 충격을 받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이들은 하느님을 본 일이 없다. 그 누구도 본 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님도 본 일이 없고 터줏님 조상의 얼굴도 모른다. 설령 삼 대 사 대쯤, 어린 시절에 본 일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들이 죽은 후 만난 일이 없다. 다만 하느님을 하늘과 해와 달에서, 별빛이나 구름이나 강물에서 자연에 존재하는 크나큰 것, 혹은 신기하고 위태로운 것에서 느끼는 것이며, 나라님은 포졸의 육모방망이나 원님들의 거룩한 도임행차 같은 데서 느끼는 것이며, 터줏대감은 무당의 주술에서, 조상은 신주 위패에서 느끼는 것인데, 하느님을 말할 것 같으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특히 농민들이 실감하는 것으로는 사계절 천후를 임의로 하심이요, 세상에 태어나고 또 하직하는 인간사를 관장하신 분이 하느님이시다. .... , 아무튼 눈앞에 없는 그분네들과의 수수 관계는 그렇다 치고 그와 달리 최참판댁은 그들에게 있어 보다 뚜렷하고 지척에서 볼 수 있는 현실로서 존재해왔다. 그들과 다름없이 두 개의 눈에 입이 하나이며 하루세끼 밥을 먹는 사람으로서 눈앞에 실감하며 의무를 다하고 감사를 올려야 할 상대들이었던 것이다. 나라 땅의 임자이신 나라님은 멀었고 만 석의 벼를 거둬들이는 토지 소유자인 최참판댁은 가까웠다. 그 토지에서 명을 이어나가는 농부들에게는 언덕 위에 높이 솟은 성곽 같은 기와집, 그 속에서 많은 노비들을 거느리고 사는 그 집의 당주인 최치수는 누가 뭐라하든 절대적인 권위의 상징이다.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권리를 인정하듯이 농민들은 만 석의 볏섬을 거둬들이는 최참판댁의 부를 인정한다. ... p.409-411




앞으로 이야기는 더 많이 남았으니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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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의 비밀 환상책방 4
조규미 지음, 김령언 그림 / 해와나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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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재밌게 읽었어요. 미래세계뿐 아니라 반려동물과 연관지어 생명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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