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2 - 박경리 대하소설, 1부 2권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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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2권의 대략은...


용이는 여전히 월선이가 떠나고 마음을 잡지 못한다. 강청댁은 용이에게 소리 질러보지만 소용없다. 오히려 용이에게 추파를 던지는 임이네에게 질투심까지 폭발하면서 동네 여러 사람과도 싸우게 된다. 그와 더불어 봉순네의 이야기, 윤씨부인과 김개주 그리고 환이 이야기, 월선네의 과거 이야기가 현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최치수의 외가 친척인)조준구가 몇 달을 최치수의 집에서 묵고, 그가 구해준 총으로 최치수는 강포수, 수동이를 동행하여 산으로 올라가 (사람)사냥을 한다. 수동이 때문에 김환을 놓치고 난 후, 추석이 되자 일단 집으로 돌아오긴 하나 다시 산에 올라간다. 그러나 강포수의 멧돼지 선불(급소를 놓침)로 수동이의 부상을 입고 최치수 일행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최치수가 산에 오가는 동안, 평산과 귀녀는 귀녀가 최치수의 뒤를 잇는 아기를 갖게 됐다는 음모를 꾸민다. 이 과정에서 칠성도 합류하게 되는데, 칠성은 전체의 흐름을 함께 도모하기보다 그저 약간의 도움(?)을 줄 뿐이다. 그렇게 그들의 의도처럼 귀녀는 임신을 하지만, 칠성의 아이가 아니라 사실은 강포수의 아이다. 강포수든 칠성이든 칠성과 못 이룬 임신인데, 이제와서야 누가 아빠면 어떻냐고 귀녀가 강포수에게 몸을 내어준 거였다.

돌아온 최치수가 귀녀에게 강포수에게 시집을 가라고 말을 던지면서 귀녀의 계획이 빠르게 바뀌었다.

그것은 최치수의 살해! 평산이 최치수를 살해하고, 뛰쳐나오는 평산을 또출네가 보는데,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라 짚을 모아 불을 지르고 자신도 거기서 죽는다. 치수가 죽은 후, 또출네의 짓이 아니라는 것을 의심한 사람 중 윤씨부인이 귀녀를 추궁한다. 귀녀는 자신이 최치수의 아이를 가졌노라고 거짓고백과 연기를 한다. 아기를 만들 수 없는 몸인 최치수임을 아는 윤씨부인은 알았고, 귀녀는 몰랐다. 귀녀와 최치수 살해에 가담한 평산과 칠성을 관아에 고발하고, 그들은 끌려간다. 평산의 아내 함안댁은 이 일로 자살을 하고, 칠성의 아내인 임이네는 아이들을 데리고 야반도주한다.



왜 내 눈엔 제대로 된 남자가 하나 안 보이나?


토지의 대략적인 스토리를 알고, 당차거나 카리스마 있는 남성이 별로 없는 점, 본능에 충실하고 탐욕이 가득한 남자들이 많은 점, 여자를 가축만큼도 취급을 안 하는 점.. 답답했다. 남편이 없는 과부여서 남의 남편에게 얻어맞는 막딸네, 남편에게 뭘 해도 무시받고 맞는 함안댁, 아내인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를 그리워해서 한껏 예민한 나날을 보내는 강청댁, 말로 무시하며 아파도 알아주지도 않는 남편일지라도 남편을 둔 임이네까지...

시대적으론 그런 게 당연한 거였을테고, 다들 그렇게 살았겠지만, 왜 그리 서럽고 억울하면서도 그것을 그냥 견뎌내고 일상으로 지니고 살아야 했는지 씁쓸했다. 뭐 이게 이 소설의 포인트는 아니겠지만, 아무튼 읽는 내내 당하는 여인들의 피해상이 내 눈에는 너무 잘 들어왔다. 정상적이고 멀쩡한 사람이라곤 '문 의원'밖에 없는 것 같다.



인생을 참 닮은 소설, 토지.


사람마다 자기를 변호할 만한 사정이 있다. 도덕, 법, 관습 이런 것들 빼고 한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바라보면,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김환과 도주한 별당아씨, 월선이를 그리워하는 용이, 용이의 아내로 살지만 자기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아 월선이네를 뒤집어 놓는 강청댁, 김환과 최치수 사이에서 제대로 된 어미로서의 역할을 못해 죄책감으로 한 세월을 사는 윤씨 부인, (개인적으론 얄미운 캐릭터지만) 자기 자식을 챙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얍삽한 짓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임이네 ... 내가 이들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상식적인 행동을 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 이렇게 다양하고 가득하게 비상식적인 일이 난무하나 싶다. 소설 속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렇게 몸과 마음이 가는 인물의 내면, 그리고 갈등이 세세히 적혀 있어 그 글들에 내가 설득되었기 때문이다. (위험한 말이긴 하지만) 법대로만, 상식대로만 살아갈 수 없는 게 인간이고, 또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뒤틀리고 억울하고 한스러워도 또 사이다처럼 시원하게 풀리는 구간도 있고, '그 속에서 또 그냥 살려면 살게 되지' 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 책은 우리 인생과 참 비슷하게 보인다. 즉, 이 책은 쓰고, 맵고, 달고, 떫고, 시다. 이 책이 구한말의 시대임에도, 인생은 그런 여러 맛을 느끼는 건 시대를 초월해 매한가지라 또 공감하고 또 감정을 느끼며 몰입하며 읽게 되는 것 같다.



그래도 이 책을 계속 읽으려는 이유는 있다.


한 나라의 아픔의 역사가 담겨있다. 그 아픔이 고스란히 서민들의 삶에도 베여있었다. 아픔이 여기에선 소설에 섞여 희석되어 보일테니, 이렇게라도 역사를 마주하려고 읽는다. 그리고 문장문장에 그리고 작가님의 철학과 고민에 설득되고 매료되었다. 특히 삶과 죽음에 대해 그리고 인간자체와 인생에 대해 깊은 이해와 너그러움이 느껴진다.


'칼을 주어보게. 우중들은 모두 사람백정이 될 것이네. 오므렸던 발톱을 펴는 야수와 같은 본성을 드러낼 뿐이지.'

'사명감이라는 것도 식자깨나 배운 놈의 허울 좋은 겉옷이요. 헤치고 보면 크게 격차 나는 게 아니지. 사람의 존엄이란 능동에 있는 게 아니며 이치에 대한 피동에서 지켜져나가는게야.'

'학문이 진리를 찾는 것이기는 하되 반드시 진리가 이롭고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네. 학문하는 태도 역시 이롭고 보탬이 된다는 생각이 앞선다면 장이 바치에 떨어지고 마는 법, 규격에 맞춰 틀에 끼울 것이 못 되지. 진리는 만인이 함께 가질 물건이 아니거든. 이 손 저 손 넘어가는 동안 쇠퇴되고 시체가 되고 썩어버리고 마른 허울만 남고 종국에는 얼토당토않게 본뜬 물건이 나타나서 만인을 호령하게 되는데 그것에 영합되면 학자는 학자가 아닌 동시 우중과 위정자들의 공범자가 될 수밖에 없지.' p.83


... 인간의 죽음은 좀 사치스러워서 땅속 깊숙이 묻혀지고 혹은 풍습에 따라 영혼의 천상행을 위해 편주에 실어 물 위에 장사지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짐승들같이 고기밥이 되는 일도 있고 짐승에게 창자를 찢기기도 하고 까마귀밥이 될 수도 있다. 이 갖가지 죽음의 처리를 앞두면서, 헛된 탄생에 삶을 잇는 그동안을 집념의 조화는 참으로 위대하여 옷을 걸치고 언어를 사용하고 기기묘묘한 연극으로써 문화와 문명을 이룩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비극과 희극이 등을 댄 양면 모습이며 무덤의 팻말을 향해 앞뒤 걸음을 하는 눈물 감춘 희극배우, 웃음 차는 비극배우의 일상이 아닌지 모르겠다. 귀녀와 평산의 경우도 그러하거니와 패륜을 다스린다는, 양반의 권위 손상에 보복을 한다는, 적어도 그만한 이유를 박아놓은 집념을 앞세우고 지금 구천이를 쫓고 있는 최치수는 웃음 참는 비극의 배우일까. 그의 집념이 설령 본능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며 정열과 욕망과도 거리가 있는 것이며 복잡한 인과관계가 따르고 있다 하더라도 풍토가 빚은 계율에의 복종이며 그 이행은 풍습과 괴뢰적 역할밖에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집념에는 다를 바가 없을 성싶기는 하다. ... p.221-222



... 어떤 연유에서든 최참판댁과 인연을 맺었던 모든 사람들은 아닌 말로 하느님이라도 살해를 당한 것 같은 이 엄청난 사건에 넋이 빠진 것 같았다. 뜻하지 않던 흉사를 천착한다거나 호기심에서 왈가왈부할 여유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백성들은 항상 어디서든 속성에 얽매인 현실적인 동물이다.

.... 이들이 현실적이라는 것은 푼수를 아는 겸양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푼수, 바로 이 푼수를 헤아리는 겸양 때문에 이들은 최치수의 죽음을 보고 하느님이라도 살해된 것 같은 충격을 받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이들은 하느님을 본 일이 없다. 그 누구도 본 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님도 본 일이 없고 터줏님 조상의 얼굴도 모른다. 설령 삼 대 사 대쯤, 어린 시절에 본 일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들이 죽은 후 만난 일이 없다. 다만 하느님을 하늘과 해와 달에서, 별빛이나 구름이나 강물에서 자연에 존재하는 크나큰 것, 혹은 신기하고 위태로운 것에서 느끼는 것이며, 나라님은 포졸의 육모방망이나 원님들의 거룩한 도임행차 같은 데서 느끼는 것이며, 터줏대감은 무당의 주술에서, 조상은 신주 위패에서 느끼는 것인데, 하느님을 말할 것 같으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특히 농민들이 실감하는 것으로는 사계절 천후를 임의로 하심이요, 세상에 태어나고 또 하직하는 인간사를 관장하신 분이 하느님이시다. .... , 아무튼 눈앞에 없는 그분네들과의 수수 관계는 그렇다 치고 그와 달리 최참판댁은 그들에게 있어 보다 뚜렷하고 지척에서 볼 수 있는 현실로서 존재해왔다. 그들과 다름없이 두 개의 눈에 입이 하나이며 하루세끼 밥을 먹는 사람으로서 눈앞에 실감하며 의무를 다하고 감사를 올려야 할 상대들이었던 것이다. 나라 땅의 임자이신 나라님은 멀었고 만 석의 벼를 거둬들이는 토지 소유자인 최참판댁은 가까웠다. 그 토지에서 명을 이어나가는 농부들에게는 언덕 위에 높이 솟은 성곽 같은 기와집, 그 속에서 많은 노비들을 거느리고 사는 그 집의 당주인 최치수는 누가 뭐라하든 절대적인 권위의 상징이다.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권리를 인정하듯이 농민들은 만 석의 볏섬을 거둬들이는 최참판댁의 부를 인정한다. ... p.409-411




앞으로 이야기는 더 많이 남았으니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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