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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인문학 - 삶을 위로하는 가장 인간적인 문학 사용법
김욱 지음 / 다온북스 / 2017년 3월
평점 :
사실 이 책을 왜 고르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상처의 연속이며
그 상처로 우리의 삶을 만들어간다는 것을 살면서
잠재적으로 느껴왔기 때문에,
이 책의 제목의 '상처'라는 단어는 오히려 친숙하게 다가왔다.
과연 상처라는 단어를 인문학이란 것은 어떻게 담아낼까?
아무래도 '상처'라는 단어가
심리학자들이 다루는 단어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 책의 저자는 심리학자일 것이고
대체로 심리학자라고 보아왔던 사람들은 중년층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서
중년층의 심리학자가 저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책을 받아보자마자
가장 궁금한 것은 어떤 이가 이 책을 썼냐는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구냐가 그 책이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가 곧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기 떄문이다.
1930년생이신 작가분의 이름은 김욱이었다.
사실 친숙한 이름은 아니었는데,
워낙 요즘 시국이 시국이다보니
연배가 있으신 저자에 대해
나도 모르게 편견을 갖게 되었다.
보수층...
말이 안통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만 하는...
사람의 편견이라는게 얼마나 나약한 어리석음을 표현하는 것인지
섣부른 판단이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좁히는 것인지
나는 내 자신의 편견을 통해
이 책을 읽어보고 깨달았다.
정말 작가분께 죄송하고 나는 참 어리석었다.
이 책의 구성은 대략 이러하다.
책에서부터 혹은 그 책의 작가에게서
모티브를 얻은 이 책의 저자가
주제를 이끌어 내어
그 주제를 토대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소개한 책의 내용이 다소 소개된다.
그리고 저자가 그 내용을 마무리한다.
많은 책을 소개하는 책에서 다루어지는 구성이다.
그리고 나는 인문학, 고전을 아직은 손쉽게 대할 수 없는 사람이어서
이런 책들이 내게는 그것들을 친숙하게 대할 수 있는
통로의 역할을 하여
즐겨 읽는 편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은 그러한 책들과
감히 구별되어진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내용자체가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우리의 삶에 대한 공감을 담아내고 있으면서도
소개하는 책에서 끌어내는 상처와 그 아픔의 표현을 이끌어내는
작가의 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젊은 사람(이는 중년 이하의 사람들을 말한다.)들이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삶에서의 깊은 고뇌와 아픔을 통한 통찰이 담겨있다.
그 표현과 내용이
너무나도 깊고 진실성이 느껴져서
내용을 담아둔 사진 뿐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고 참아낸 내용도 너무 많았다.
작가들의 삶이
이 상처에서는 주인공이 되었다.
한국, 일본, 독일 등 여러 나라에서의 작가들인데
그들의 삶에 있었던 상처를 소개함으로
그들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에서의 고통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널리 알려진, 교과서에서 흔히 본 작가들이
그들도 어쩔 수없는 인간으로써
연약함과 고통의 삶속에
던져져서 찢기고 상하여진 모습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그들은 그러한 상처를
문학으로 표현하였고,
그것으로 삶을 위로받았다.
그러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으나
그러한 사람은 그러했던 사람과 더불어
자신의 상처를
문학이란 매개체를 이용하여
다른 이들을 위로했다.
더군다나 저자 또한 그의 아픔과 자신의 치부를
이 책을 통해 정직하게 내려놓았다.
하나하나 다 짚어가는건 어렵겠다.
나의 삶과 엄마의 삶을 생각할 때는
박경리 선생님과 박완서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가 참 인상적이었다.
읽으면서
모종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그분들의 삶에서 포기하지 않고 집념과 의지를 가지고
지켜낸 결과로 위대한 작품이 나왔다는 점에서
여자로써, 엄마로써
존경심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들의 관계를 통해
세계 문학 고전으로 뛰어난 작품이 나온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헌신적이고 무한적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내의 모습은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윤기의 그리스로마신화>로 유명한 이윤기 소설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소개하는 사람이 아닌
진정한 소설을 쓰고자했던 한 소설가였다는 점은
이 책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이었다.
그 나름대로 소설을 향한 열정이 있었음에 있어서
새롭게 다시 보게 되는 부분이었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을 통해 본 작가의 삶은
자신의 환경이나 세상의 기준에서 굴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향한 끈질긴 노력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노장의 작가는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상반되게
현실의 아픔을 이야기하며
그들의 아픔을 감싸주는 것으로 보였다.
그 상처를 알았고,
자신 또한 그 상처를 겪고 다른 이에게 준 상처로
끊임없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으로 괴로워하며
현시대의 상처를 공감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와 더불어
그 어떤 책에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것 같은..
진실을 마주하고
정직을 향하고
불의에 대항하라고 이야기 한다.
순간을 선택하지 말고
영원을 선택하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내용들이
너무나 나 자신에게 필요했을 뿐아니라
나의 삶이 위로받은 것 같았다.
국정농단으로
그리고 경제적인 침체 등
여러가지 이유로 좌절과 상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위로와 조언을 줄 뿐아니라
통찰로 우리의 영혼을 울리게 하는 책이어서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것처럼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은 없다.
이용기에 나이라든가, 여자라든가, 엄마라는 역할은 거추장스러운 변명일 뿐이다.
박완서는 그녀의 삶에서 가장 지쳐있고 위안이 필요할 때,
진이 다 빠져 빈 껍질만 남은 것 같은 허탈한 시기에 여자도,
엄마도 아닌 개인으로서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용기를 보여줬다.
그녀가 거둔 성공은 행운도 아니며,
그녀에게 아주 특별한 재능이 넘쳐났던 것도 아니다.
용기를 가진 한 인가의 기나긴 투쟁이었을 뿐이다.
타인이 알아주고 인정해주느냐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득문득 당장의 생활에 습관처럼 살아가는 내 모습이 역겨워질 떄가 있다.
구원은 누구의 몫도 아니다.
해방은 현실과 조건을 계산하고 수용한다고 해서 얻어지지는 않는다.
현실을 만들어가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p.51
억압과 구속의 증폭은 자유의 결핍에서 만들어진다.
나를 가두는 것은 혹독한 현실의 찬바람이 아니다.
세상의 경계가 정해져있다는 나의 믿음이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메마른 대지에서 벗어나려 기를 쓰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어둠을 비난하는 방식으로는 빛이 찾아와주지 않는다.
빛이 머무는 곳으로 떠나야 되는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삶의 무대를 향한 망명이며 전향이다.
p.60
나이가 들수록 인생에 대한 고민이 늘어나면서 그동안 살아온 시간들을 반추해볼 떄가 많은데
우리를 둘러싼 고민들은 여전히 바깥을 향하고 있다.
바깥의 시선, 바깥의 상황에 따라 현실과 이상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시도한다.
인생은 우리가 풀어야 할 가장 어려운 시험문제다.
객관식처럼 한개의 정답을 고를 수 있다면 편하겠다 싶어
몇개의 근사치적인 대안을 추려놓고 보면
내가 직면한 문제의 답은 아니다 싶어 또 다른 고민이 생긴다.
문제의 지문에 답이 있다는 충고를 떠올리며
주관식으로 써놓아도 내가 살아가야 할 인생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후회없이 최선을 다해 살고 싶다.
비록 성공한 사람들처럼 부와 명예와 권력을 누려보지는 못해도
세상에서 나 한명만큼은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그마음을 지켜나가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며, 따라서 가장 큰 행복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생에는 정답은 없다.
인생에는 비밀도 없다.
인생에 정답이 있어야 한다면 우리가 정답을 만들어나갈 뿐이다.
인생에 비밀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살아온 모든 시간들이 내 살믜 정답이 되어주리라는 것을 윌는 알고 있어야 한다.
p.81
'생업(生業)'이라고 하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내가 서있는 자리를 떠올린다.
순간을 위해 직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항상 순간만을 고집하기 때문에 내일 세상이 어떻게 변해버릴지 늘 불안하기만 하다.
생업을 순간이 아닌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우물이라고 생각한다면 삶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다.
오늘 당장 내가 마실 수는 없더라도
언젠가는 나를 기억해줄 누군가가 마실 수 있다는 믿음아래 인생을 설계하게 된다.
p.89
내가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내 인생 어딘가에
뿌리 내린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양분을 얻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p141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기본적인 이해와 협력에서도 많은 양의 재능이 요구된다.
지속적이고 끈질기고 지치지 않는 재능이 필요하다.
찰나의 순간에 이성에게 반하여 호감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사랑을 지속시키는 재능이 되지 못한다.
순간은 영속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잠재적으로 그 누군가를 인식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인식한다는 것이 잠재적으로 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말은 아니다.
겉으로 보이는 조건을 통해 인식된 애정은 오래가지 못한다.
조건이란 언제나 상대방보다는 내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
진정한 사랑은 내면에 갇힌 자아를 비관하는 데서 시작된다.
관심이 가고 끌리는 누군가를 향해 시선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에 만족한다.
그 과정에서 많은 상처와 고통을 경험하게 될 테지만,
그것이야말로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세계의 토대다.
물질, 지위, 외모와 같은 현상에서 실존을 부르짖더라도
그렇게 채워진 사랑은 형식적이며 외형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p.149
실체는 나를 꼭 닮은 유전자가 확장되어 나의 세계를 넓혀나간다는 놀라운 신비다.
이를 거부하며 가뜩이나 벅차기만 한 일생을 좀먹고 강탈해가는
자발적 굴레로 여길 수 밖에 없는 젊은 시선의 옹졸함이 그래서 더욱 불쌍하다.
생명은 그들의 삶을 더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생명은 깊은 수렁에서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가능성도 함께 품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우리를 한계로 몰아넣는 새 생명이 나 혼자였다면
이뤄내지 못했을 환희를 불러오는 시발점이 되고,
나 혼자였다면 불가능했을 한계를 뛰어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생명에는 신비로운 힘이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생명에의 포기는 마법과도 같은 힘을 인생에서 포기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p153
인생이란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아닌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다리에 불과하다.
우리가 누리는 오늘은 어제를 살아간 수많은 인생들이 남겨놓은 성과들의 결론이다.
따라서 우리의 오늘은 내일의 결론이다.
현재를 통해 인생의 결과가 확인되는 법은 없다.
생명의 지속은 우리의 내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포기하는 섣부른 판단은
자칫 내게 주어졌을지도 모르는 보다 나은 내일을 미리 포기하고 사멸시키는 행위가 될지도 모른다.
p.159
대다수 사람들은 불의와 불법에 눈을 감는다.
그것이 조직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목격자일 뿐, 그것이 공범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자기변명은 매우 편리한 수단이 된다.
개중에는 눈을 감고 침묵하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조직의 불의와 불법에 적극 동참한다.
그것이 조직 내에서 그들의 신분상승에 불가결한 실력으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조직 안에 팽배한 불의와 불법에 시달리던 이들이 침묵과 방조를 통해 불합리한 악습을 세습하는 매개체가 된다.
자신이 당했던 바를 자신의 다음 세대, 혹은 후배, 아랫사람에게 똑같이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침묵과 외면은 단순한 목격이 아니다.
엄연한 협력이다.
p192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만들었던 것들이
실제로는 내 인생의 숨은 그림이 되어
나를 완성시켜주는 퍼즐이 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p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