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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12월
평점 :
여자였지만, 불편함을 모르고 살았다. 워낙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성격인 탓도 있었지만, 내가 살아온 가정이란 테두리에선 남자라고 더 대접해주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와서 딱히 차별이라는 걸 겪을 일이 없었다. 회사를 들어가서 납득이 안 가는 '여직원이 차 준비하기', '여자 막내 직원이 직원들 책상 닦기'라는 성차별이 반영된 잡일을 하긴 했지만, 그냥 내가 해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며느리를 아들보다 더 챙기는 시어머니를 만났다. 아들 둘을 낳아서인지 몰라도 아이들의 성별로도 그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듣지 않아봤다.
내 이야기다. 평범하게, 그리고 무난하게 살아왔던 삶을 살아왔던 터라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냥 살아왔고, 그게 당연한 듯 살아왔다. 할 말이 없었다. 딱히 뭘 해야 한다 생각하지 않았다. 부당함, 억울함을 다루는 이들의 부르짖음을 보고 나는 당황스러웠다. 왜 저렇게 유난스러울까. 왜 그렇게 조용하고 부드럽게 말하지 못할까. 왜 자꾸 내 귀에 내 눈에 거슬리게 왔다 갔다 하는 걸까.
저자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평범한 삶이 아니었고, 불편했다. 소수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했고, '질문'했다. 그래서 공부했고, 사람을 만나 대화했다.
불편해도 괜찮았다. 나의 평범하지 않음.
소수성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여러 갈래의 경험은
내가 사회학이나 여성학, 철학을 공부하는데
자양분이 되었다.
현실 문제에 부딪혀 본 것들이
이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여자라서 불편한 게 많다 보니
피곤하긴 해도 '생각'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고졸이란 신분도 그랬다.
덕분에 내가 누구이고 내가 어디 있는지
늘 되묻고 깨어 있어야 했으니까.
그런 저자의 시선으로 쓴 글들을 맞닥뜨리며 나는 신선한 충격에 몸서리를 쳤다. 내가 당연하다 여겼던 것들이 남들에겐 당연한 것이 아니었고, 편하다고 여겼던 때에 다른 이들은 편하지 않았다. 무난했던 나의 삶에 비해 무난하지 않고 울어야 했던, 외쳐야 했던 누군가의 삶들이 있었다.
저자의 철학적인 사색이, 약자에 관심을 갖는 진보적인 색채가 이 책에서 또렷이 보였다. 내면을 비춰주는 듯한 말에, 평소에 외면하는 시선과 모습을 다룬 글에 나는 그간의 사건을, 어떤 이들의 행동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게 되었다. 나와는 다른 성향과 관심사를 갖고 있는 저자였다. 그의 생각을 따라 세상을 보는 관점은 비좁았기만 했던 나의 소견의 파편들처럼 떠올라 부끄러웠다. 또, 그의 솔직함에 놀랐다. '사랑'에 대한 개념이 상당히 자유롭고 포용력이 넓어 일반적인 통념과 달랐어도 신선했다. 무조건 지지하지는 못하나 어디에 우선을 두느냐에 따라 그녀와 같은 견해를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해해 볼 수 있었다.
그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삶의 몇 가지가 이 책으로 납득이 됐다. 특히 만남과 헤어짐의 불가피성을 다룬 부분은 왜 모든 사람이 결코 나와 같을 수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세월에 따라 바뀌는 체형, 닳아가는 옷을 두고 한 비유가 참 와닿았다. 이별을 통보하는 이기적이고, 불완전한, 비인격적인 과거 남자친구의 행동이 떠올랐다. 그렇게 좋아서 죽겠던 단짝 친구였는데, 각자 사회생활을 하고,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생활환경이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것이 왜 그러했는지에 서운함을 떨쳐낼 수 있었다. 영원할 수 없는게 사람의 감정이란 걸, 상황과 환경의 영향에서 인간의 삶은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인정했다.
말과 행동에 있어서도 조심스러워진다. 편견, 곡해, 고정관념으로 섣불리 판단하고 정해놓았던 생각들이 실상은 진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편협했던 내 삶의 결과물이었음을 알았다. '애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라는 말이 그랬다. 가부장제 언어가 내면화되어(p44) 익숙해져 버린 내 삶이 또한 그랬다.
'책을 읽을지 말지' 선택의 기로에 선 초반 몇 장에서 이 책에 침잠해가는 나를 발견했다. 흔치 않았다. 그래서 이 책을 선택했고 잘 읽었다 중얼거리며 마지막 장을 덮었다. 두고두고 읽어볼 글들이 많았다. 그걸 아래와 같이 적는데 너무 많아 힘들었다. 중간중간 시로 마무리하는데, 나는 도무지 집중이 안 됐다. 시의 잘못이 아니라 아직도 시가 어렵기만 한 내 잘못이다. 내 속에 나도 모르게 뒤섞여 있는 생각의 조각들이 책 속에서 하나하나 끄집어내어지는 묘한 쾌감을 느끼며 좋은 책 하나 잘 집었다고 다시 확신했다.
.. 우리가 입을 다무는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던가. 말하고 싶음과 말할 수 없음, 말의 욕망과 말의 장애가 충돌하던 어느 봄날, 나는 이미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p.9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 형성은 '출산' 유무와 상관이 없다. 남자의 성숙이 '군필' 유무와 무관한 것과 같은 이치다. 내 주변에서 세월호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광화문 광장에라도 한번 나가는 사람은 상당수가 비출산 여성이다. 육아 부담이 없어 저녁이나 주말에 시간이 나기 때문이고, 세월호 이전에도 세상일과 자기 삶을 분리시키지 않고 살았기 때문이다.
애 낳고 가족 이기주의에 빠지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나부터도 출산 이후, 즉 육아 집중기에는 신문을 챙겨볼 시간도 행동하는 시민으로 살 기운도 없었다.
p.31
인간적 성숙은 낯선 대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혼란과 갈등을 겪으며 자기와 세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때 일어나는 것이다. 엄마라는 생태적 지위는 성숙에 이르는 여러 기회 가운데 하나일 뿐 저절로 성불하는 코스가 아니다.
p.32
박 대통령이 세월호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애를 안 낳아봐서가 아니라 해결하지 않아도 권력을 유지하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권력을 떠받치는 것은 온갖 나쁜 관념에 휩싸여 주변의 여린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주변 사람들이다.
p.32
모든 물음은 질문자의 입장과 욕망을 내포하는 법이다. 나의 물음은 그간 얼마나 진화했는가. 남편의 시선만 간신히 모면한 듯하다. 자기 욕망을 일인칭 시점에서 구사할 수 있는 언어는 여전히 모자라다. 착한 여자는 천당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는 말대로, 일상의 금기는 넘나들지만 몸에 그은 선은 제자리다.
p.36
... 이렇듯 개인의 존엄을 간단히 몰수하는 나쁜 관념을 만드는 건 너무도 평범하게 굴러가는 저마다의 일상이다.
p.48
왜 엄마들에게 행복은 늘 충족 유예 상태로만 존재해야 하는가. 내일을 위해 오늘은 인내하는 삶. 자식을 위해 당신은 포기하는 삶...... 워낙 가난한 시대에 태어나서 그러신 줄은 안다. 그래도 난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는데, 엄마가 호강 한번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결심이 더 확고해졌다. 나의 일신의 호강은 주체적으로 '지금 여기서' 챙겨야 한다는 것. 그 엄정한 사실 말이다.
p.101
.. 육아가 힘들 때 이들이 족쇄 같아 괜히 낳았다고 원망했던 것처럼 더러는 괜히 죄 없는 부모님을 탓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나는 안다. 힘든 일 포기하고 떠난다고 자유롭지 않다. 그건 자유에 대한 환영이고 망상이다. 넘지 못할 것 같은 산도 한 걸음 내디디면서 다리 힘이 길러지고 그러면 다음 봉우리는 더 쉽게 건널 수 있다. 근육이 튼튼해지고 체력이 길러지면 삶의 어느 고비에서도 성큼성큼 문제안으로 들어가는 궁극적인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런데 문제를 회피하고 도망가면 걸린 데서 또 걸린다. 아무런 상처도 주지 않고 좋기만 한 관계는 가짜이고, 아무런 사건도 생기지 않은 무탈한 일상이 행복은 아니었다.
p.102
삶은 명사로 고정하는 게 아니라 동사로 구성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생을 오해받을지라도 순간의 진실을 추구하고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며 살아갈 때만 아주 미미하게 조금씩, 삶은 변한다.
p.118
만남의 불가피성이 있다면 헤어짐의 불가피성도 있을 거다. 살뜰한 7년 세월이다. 체형에 맞게 늘어난 청바지처럼 서로에게 잘 맞춰진 사이였다. 어제까지 입던 옷이 오늘 불편해진다나는 것은, 청바지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만물은 유전한다. 한 시절 편안하고 맵시 있게 입었더라도 옷은 작고 체중은 는다. 그리하여 어느 날 몸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때가 온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몸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의 시점이 온다.
p.130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으면서 나는 죽음에 관한 나만의 윤리적 근거를 마련했다. 스피노자는 실존의 소멸과 함께 사라지는 부분과 남는 부분을 대비한다. 죽음을 맞이했을 때 외적 원인에 의해 규정되는 외연적 부분은 사라지지만 자신의 특이적 본질을 구성하는 부분은 영원히 남는다고 한다. 바로 이해했다. ... 삶의 길이보다 삶의 밀도가 중요해졌다. 사는 동안 존재를 확장하려는 노력은 멈출 수 없겠지만 순한 양처럼 주어진 시간에 복종하고 싶다. 어디로든 끝 간에는 사라질 길. 그저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p.139
내 몸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질문이 남는다. 노화는 섭리다. 몸에 대한 근원적 불안과 불만의 강도가 높아질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몸, 낯선 모습으로 고개 내밀 얼굴과 동거하는 연습을, 콩알만 한 그것으로 해보고 싶다. "일찍 시작하고 자주 시행하라"는 시대적 요청에 거슬러, 사십 대부터 잡티 제거 안 하고 살면 어떻게 되는지, 나의 신체 표현이 나도 궁금하다.
p.144
언젠가 봄은 온다고들 말하지만, 당사자에게 겨울은 너무 길고 춥다. 구체적인 아픔을 무화 시키고 봉합해버리는 상투적인 결말이 거슬렸다. 우리는 봄을 기다리기보다 체온을 나누며 겨울을 나는 법을 노래해야 하는 게 아닐까. 마디마디 분절되어 살갗에 닿던 민들레처럼 말이다.
p.163
한 움큼 부끄러움을 삼키며 나는 배웠다. 동정이든 차별이든 그 아래 깔린 근본 생각은 다르지 않다는걸. 어떤 대상을 자기 삶의 반경에 없는 분리된 존재로 취급하는 것(고아들이 불쌍하다), 한 존재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특정한 면만 부각시켜 인격화하는 것(장애인은 무능하다), 자신은 결코 되지 않을 이질적 대상으로 상대를 보는 것(공부 안 하면 노숙인 된다). 하나같이 타자화하는 말들이다.
p.169
안 보이는 사람의 나라가 있다. 삶에 대한 상상력이 직업에 대한 정보력을 넘지 못하는 수준이다 보니,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사람의 이야기는 사라져간다. 남성, 이성애자, 서울 출신, 명문대 졸업, 전문직 종사자로 표상되는 소위 정상적 삶의 서사는 매스컴으로 구전으로 맹렬히 유통되는 반면, 거기서 벗어날수록 삶의 서사를 구성하기가 어렵다. 장애여성 강사처럼 자기 경험과 생각과 감정을 말할 기회가 드물고, 겨우 말한다 해도 오해나 동정을 산다. 그런데 남에게 자기 얘기를 하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를 알기 어렵고 사회에 자신을 위치 지을 수도 없다. 말소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p.170
.. 삶은 늘 그래. 어디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외부가 없더라. 대단한 무엇 없이 소소한 일상으로 굴러가고, 마치 바다처럼 아무것도 대단한 게 없다는 점. 그게 삶의 놀라움이겠지. 너무 큰 물음 세워놓고 내가 작다며 자학하지 말고, 싸우는 노동자들한테 쌀도 보내고 서로 하소연도 하고 술도 마시면서 우리 그렇게 살자. 힘내렴. 술 먹고 인류 문제로 꼬장 부리는 후배도 있고 나는 행복하다."
p.182
... "그런 거 몰랐는데 작년부터 몸이 여기저기 안 좋아지니까 외롭더라. 간사하게" 예전 같으면 배우자가 간병이냐며 실용주의를 비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외로움이 자기 보존에 기여하는 중차대한 감정이구나 생각한다. 인간을 사색하게 한다는 점에서 야만에서 구제하는 요소이고, 관심을 타자에게로 향하게 한다는 점에서 겸손하게 만드는 동력이다. 물론 그 외로움이 지나치고 사무치면 자기 파괴에 이르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찾아오는 나비 한 마리, 바람 한 점 없어서 외롭게 죽어간 이들을 슬퍼하면서, 변변히 외롭지 못했음을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이었다고 믿었던 날들을 부끄러워하면서, 돌아누운 이적요의 비린 눈물을 떠올리면서, 나 그가 누웠던 자리에 가만히 누워본다.
p.223
... "지나고 보니 그동안 나한테 닥친 일을 처리하기에 급급했는데, 그랬더니 남는 게 없구나. 너는 일을 새로 시작하니까 길게 내다보고 해라. 봉사하는 살마들 이야기를 중심으로 글을 쓴다든가 분야를 정해서 집중해봐. 10년 후 네 작업을 집대성할 수 있게 맥락을 잡아가도록 해. 나는 그런 얘기를 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장기적인 안목을 갖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 후회되네."
p.230
젊은 날 자유하고 성찰하며 살았던 사람은
자기 삶을 짓누르는 나쁜 공기를 금세 알아챈다.
이것은 위대한 능력이다.
p.239
자기가 처한 그 상황이 영원할 것 같을 때, 그 불안을 어찌 잠재울 수 있을까. 내가 아는 한 묘책은 없다. 외부에 새로운 변수가 오기 전까지는 견디는 수밖에.
p.255
... 구걸하는 처지가 된 것 같아서다. 남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다. 나는 울컥함을 어찌하지 못하고. "왜 이렇게 슬프고 구차한가요" 문자를 보냈다. 답이 왔다. 마음만 남루하지 않으면 괜찮은 거라고 생각하라고. 우연히, 혹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알아보겠다고. 그리고 말했다. "돌봄은 우주를 돌고 돈다고 하죠."
p.256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탈출 욕망이 철조망의 빈틈을 보면서 발생한다는 것. 나의 경우라면 유유히 담을 넘어가는 그의 긴 다리를 보면서 나의 담장의 드높음을 인식하고는 이 수용소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다. 나는 울타리를 넘고 싶었다. 그런데 넘어보기도 전에 넘어지다 다친 것처럼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주체에 도사린 타자는 늘 이토록 낯설다.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나이기에.
p.260
황지우 시인의 말대로 "삶을 한 번쯤 되물릴 수 있는 그곳"에 간다면 난 얼마나 다르게 살 것인가. 아파하고 아파하는 이를 알아보면서 이 아픔의 전승 구조에 몸을 싣고 아마 지금처럼 살고 있을 것 같다. 그것밖에 힘이 없다. 누구나 지금이 존재의 최선이다.
p.262
어디 살림만 그러겠는가 싶다. 삶은 그 자체가 낭비다. ....
사는 게 총체적으로 낭비라는 걸 인지하지 못할 때는 살림만 미워했다. 살림이, 정확히 가사 노동이 지겹고 하찮게 느껴져서 제발 집안일 안 하고 살길 간절히 염원했다. 지금은 아니다. 좀 나아졌다. ....날 괴롭히는 것이 날 철들게 한다더니 살림이 그렇다.
p.285
책을 내는 것, 그 자체가 선업일 수 없다. 특히 요즘은 특정 집단의 이익과 자기 정당성 확보를 위한 출판도 많고 쉽다. 그 경계와 판단은 모호하다.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책이 나왔을 때 주변에서 축하도 좋지만 그 책이 어떤 책인가를 따져 묻고 토론하는 인문적인 풍토가 형성되면 좋겠다. '책 낳는 일'이 권력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권력을 해체하는 일이 되도록 말이다.
p.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