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하나님 설계의 비밀 하나님 설계의 비밀
티머시 R. 제닝스 지음, 윤종석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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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분은 용서하시지만 성경에 "하나님은 용서이시니라"라는 말은 없고, 전지하시지만 "하나님은 지식이시니라"라는 말도 없고, 전능하시지만 하나님은 능력이시니라"라는 말도 없다. 다른 모든 속성은 다이아몬드의 면면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찬란한 창이다. 하지만 사랑에 관한 한 하나님은 그냥 사랑을 행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의 화신이시다!

p.44

어떤 하나님 개념을 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인가? 앤드루 뉴버그 박사가 최근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실시한 뇌 연구에 따르면, 모든 형태의 명상이 뇌의 긍정적 변화와 유관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최대의 뇌 기능 향상은, 참여자들이 구체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을 묵상할 때 이루어졌다. 이런 묵상은 전전두피질(추론하고 판단하고 하나님 같은 사랑을 경험하는 이마 바로 뒤쪽의 뇌부위)을 발달시키고, 그에 따라 공감과 동정과 긍휼과 이타심의 역량을 높여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부분은 그다음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예배하면 타인 중심의 사랑이 커질 뿐 아니라 예리한 사고력과 기억력까지 더 좋아진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하나님을 예배하면 실제로 뇌의 치유와 성장이 촉진된다.

p.50

성경이 가르치는 그대로 베푸는 것이 곧 삶이다. 하나님이 삶을 설계하실 때 그렇게 작동하도록 하셨다.

p.54

... 자아를 앞세우는 우리의 생물학적 충동은 너무도 강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절대로 이기심에서 헤어날 수 없다. 이기심은 두려움과 생존 본능에서 비롯된다. 사실 사랑할 자유, 자기희생을 선택하는 능력, 그리고 모든 이타심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도 모르게 마음속에 역사하는 결과하다.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인정하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다를 바 없다. 그리스도의 승리와 성령의 역사 덕분에 우리 마음은 유전적 성향인 이기심을 극복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단 그것은 우리의 의지적 선택이라야 한다.

p.63-64

방종의 행위는 우리 뇌와 몸과 성품과 관계를 더 해치다가 결국 죽음을 부른다. 이것이 우리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병적 상태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두려움과 이기심으로 병들어 있다. 그것이 우리의 전 존재를 변질시켰다. 뇌는 균형을 잃었다. 두려움 회로는 과잉 발육인데 사랑회로는 발육 부진이다. 사고는 더는 하나님을 모르며, 사랑의 법대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개입이 없는 한 불치병이다. 삶이란 사랑의 법과만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p.67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타인 중심의 온전한 사랑으로 살아가도록 하셨다. 사랑은 밖으로 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행동으로 유익을 끼친다. 아담과 하와도 사랑의 법과 온전한 조화를 이루는 한 죽지 않았다. 하지만 죄란 법을 어기는 것이다. 죄는 사랑의 법을 잘라낸다. 멱을 따면 짐승이 죽고, 스위치를 내리면 불이 꺼지고, 돈을 돌리지 않으면 경제가 마비된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법을 어기면 하나님의 개입이 없는 한 결과는 파멸과 죽음뿐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p.69

... 뇌 연구를 통해 입증되었듯이 어떤 하나님을 예배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뇌가 달라진다. 치유는 사랑의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만 찾아온다. 거짓을 고수하면 치유 과정이 막힌다.

p.99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거부하면 언제나 하나님의 방법과 멀어진다. 그래서 종교적인 사람들은 강요하고 통제하는 신을 얼마든지 예배할 수 있다. 자유가 억압되면 사랑이 파괴된다. 뇌 영상을 통해 입증된 현상이 있다. 자유를 억압하는 복수의 신을 예배하며 신의 형벌과 응보를 예상하고 있으면, 두려움 회로가 강해지고 전전두피질이 손상된다. 다시 말하지만, 전전두피질은 사랑과 공감과 이타심을 경험하는 뇌 부위다. 바울은 말세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 있을 거라고 했다. 이것은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에 대한 말이 아니다. 바울이 지금 말하는 사람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그분과 그분의 속성이 사랑에 대한 진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이다.

p.100

하나님이 중보하시기 때문에 이제 지구에는 두 가지 우너리가 서로 대적해 싸우고 있다. 하나는 사랑의 원리이고 또 하나는 적자생존의 원리다.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는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으로 압축된다. 그것은 이런 의미다. "나는 너를 한없이 사랑하기에 너의 건강과 안녕과 유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내 목숨까지도 바쳐 너를 살릴 것이다." 반대로 이런 경건한 사랑에 맞서 싸우는 적자생존의 원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을 한없이 사랑하기에 나를 보호하고 앞세우고 높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너를 죽이고라도 내가 살 것이다." 내 목숨을 바쳐 너를 사릴 것인가, 아니면 너를 죽이고라도 내가 살 것인가? 이 두 원리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서 서로 싸우고 있다.

p.118

나는 무서워서 최대한 빨리 달아나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가 나를 꼭 붙들고 있었다. 빠져나가려고 몸을 뒤틀어 보기도 하고 울며 조르기도 했지만, 엄마는 놓아주지 않았다. 나를 한없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 일만 한 게 아니라 나에게 말도 했다. 자신이 옆에 있다는 사랑의 말, 다 잘 될 거라는 격려의 말로 나를 다독여 주었다. 엄마의 다독임으로 여섯 살 난 나의 머릿속에서 두려움이 몽땅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한결 두려움이 덜해졌다. 고통의 싸움터에서 사랑과 두려움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p.136

두려움과 불안은 내 존재 속에 아주 깊이 뿌리박혀 있다. 그래서 달아나는 게 훨씬 쉬워 보이고 정당해 보인다. 지금도 나는 엄마가 붙들어주어야만 견딜 수 있던 그 어린아이와 같을 때가 너무 많다. 일단 상처를 입으면 치유의 길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그런데 나는 고통이 싫다. 고통을 피해 달아나라고 두려움이 나를 유혹한다. 사과하거나 회개하거나 나 자신을 낮추거나 상대와 마지막으로 식사하거나 하지 말고 그냥 달아나라고 유혹한다. 나는 자아 속으로 마나의 구석으로 숨어들고 싶다. 나에게 거슬리는 진실을 내 작은 세상 속에 묻어 버리고 싶다. 하지만 계속 달아나면 결코 평안을 얻을 수 없다. 결코, 건강해질 수 없다. 오히려 대뇌변연계가 더 강해져 두려움만 가중될 뿐이다.

p.137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즉 하나님이 사랑하시듯 사랑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섬길 대상이 없이는 하나님을 닮은 충만한 사랑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담은 자신을 내주고 희생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다. 하와는 아담의 이타적 사랑의 수혜자로 지음을 받았다. 또한, 그 사랑을 받은 뒤에는 하와도 타인 중심으로 아낌없이 베풀고 사랑하도록 지어졌다. 아담은 하와가 없이는 충만하게 살아갈 수 없었다. 하와는 아담이 사랑과 섬김으로 자신을 내줄 대상이었다. 이러한 타인 중심의 전적인 베풂을 통해 둘이 마음과 사고와 목적과 애정과 정절에서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설계였다. 영원한 사랑으로 하나의 서클을 이루게 하신 것이다.

p.146-147

... 당신의 사고를 하나님 외에 누구에게든 넘겨주는 것은 그분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심지어 그분도 당신의 사고를 통제하시는 게 아니라 치유하실 뿐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능력을 치유하고, 양심을 정화하고, 이성을 고양하려 하십니다. 스스로 사고하도록 당신을 자유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옳고 건강하고 합리적인 길을 지혜롭게 선택하되, 그것이 옳고 건강하고 합리적이기 때문에 선택하기를 바라십니다. 남이 시키는 대로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그분의 뜻에 어긋나며, 상대가 남편이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우리 배우자까지 포함해서 세상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첫 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p.150

죄의 파괴적 무게에 결국 짓눌려 괴로울 때는 많은 사람이 당장의 위안을 얻으려고 하나님을 찾는다. 힘들 때 당장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자신을 영원히 변화시키고 치유해 줄 하나님의 처방에는 따르지 않는다. 다시 위스키로 돌아간 제시처럼, 무수히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과 자원과 은혜를 구하되 구원이나 진정한 치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멸의 삶을 지속할 수단으로서만 구한다. 그렇게 거부하면 하나님이 결국 그들을 구워하시기 위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는가.

p.176

"네가 집중해야 할 문제가 바로 그거야. 너는 너를 치료해 줄 하나님의 값없는 치료제를 받아들인 적이 있니? 우리는 혼외 섹스 같은 불순종과 죄의 행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 하지만 그것은 죄성이라는 병의 증상에 지나지 ㅇ낳아. 고열과 기침이 우리 몸에 문제가 있어 진료를 받아야 함을 알려 주듯이, 죄의 행위도 우리 마음이 병들어 있어 하나님의 영적 치료가 필요함을 알려준단다. 죄의 행위도 모든 병의 증상과 비슷해. 치료하지 않고 오래 둘수록 병이 더 악화되고, 증상이 많을수록 몸이 더 상하는 법이지. 그래서 우리는 증상을 축소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되는 거야. 대수롭지 않은 게 아니거든. 죄의 행위는 우리 뇌를 훼손하고, 양심을 마비시키고, 이성을 비뚤어지게 하고, 성품을 망쳐 놓는단다. 또한, 죄를 지을수록 하나님께 반항하기가 갈수록 쉬워져 결국에는 구원을 영영 잃게 된단다."

p.182-183

"기도란 친구에게 하듯이 단순히 하나님과 대화하는 거란다. 그분께 마음을 열고 네 생각과 느낌과 소원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는 거지. 기도는 네 삶의 가장 깊은 비밀, 즉 네 꿈과 두려움과 기쁨과 슬픔을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거야. 뇌 연구를 통해 밝혀졌듯이, 하루에 15분씩 묵상을 하거나 사랑의 하나님과 생각 깊은 교제를 나누면 전전두피질과 특히 전두대상피질이 눈에 띄게 발달한단다. 우리가 사랑과 긍휼과 공감을 경험하는 부위가 바로 거기야 전두대상피질이 건강할수록 편도체가 안정되어 두려움과 불안이 줄어든단다. 그야말로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내쫓는 거지! 하나님께 치유받고 싶거든 그분께 말씀드리기만 하면 돼. 그분의 임재와 용서와 은혜를 원한다면, 그분을 네 마음속에 모셔들이고 날마다 시간을 내서 그분과 생각 깊은 교제를 나누면 돼."

p.186

나는 헬렌에게 말했다. "수많은 사람의 생각과는 반대로 천국의 기록은 상세한 진료 기록입니다. 우리의 병, 제시된 치료, 우리의 반응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의사를 고소하면 진료 기록이 의사를 변호해 줍니다. 진료 기록은 환자를 고소하거나 망신시키거나 벌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렇게 이해하면 성경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즉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벌하려고 우리의 죄를 추적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이 기록을 두는 이유는 우리 각자를 구원하고 치유하고자 그분이 하실 일을 다 하셨음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누가 구원받지 못하면 이는 자신이 치료를 거부했기 때문이지 하나님 쪽에서 뭔가 소홀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을 그 기록이 입증해 줍니다. 사랑은 악을 기록하지 않지만 그래도 천국에 우리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 '진료기록'은 각 사건의 사실관계를 입증해 주고,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엄위하신 분인지를 입증해 주고, 하나님과 그분의 요원들이 잃어버린 죄인 한 명 한 명에게 얼마나 끈질기게 간청하셨는지를 입증해 줍니다."

p.212

어떤 환자가 불치병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하자. 이 병의 치료제가 존재한다면, 환자가 병이 낫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의사를 "신뢰하고" 치료 절차에 응하는 것뿐이다. 환자는 이 치료법의 원리를 몰라도 된다. 치료법이 개발된 경위도 몰라도 된다. 그저 의사를 신뢰하고 처방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환자는 치유된다. 의사에게 치료제가 존재한다면 말이다. 마찬가지로 죄인들도 굳이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이루신 방식을 알아야만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일의 혜택을 누리려면 반드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치료를 받아들여야 한다.

....

적어도 죄인의 처지에서 보자면, 속죄에 필요한 일은 신뢰의 회복뿐이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다시 신뢰하기만 하면 우리는 구원과 치유를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는지 몰라도 된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 삶 속에 적용해 주시는지 몰라도 된다. 하지만 반드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지침에 따라야 한다.

p.226-227

아담과 하와가 거짓말을 믿어 사랑과 신뢰의 서클이 깨졌다. 그 결과로 인류는 사랑의 법과 조화를 이루어 살던 존재에서 두려움과 이기심에 지배당하는 존재로 바뀌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본래대로 되돌리시기 위해 죽으셨다. 성경에서 보듯이 그분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심은 사탄과 사망과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해서였다.

p.228

하나님이 행하시는 정의, 즉 옳은 일이란 그분의 설계에 어긋나게 사는 사람들을 바로잡아 주시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해주시고, 원수들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여 친구로 삼아주시는 것이다.

p.263

사랑은 우리를 치유하고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하는 유일한 힘이다. 사랑은 명령이나 강압이나 강요로 될 수 없다. 본인이 자원해 주어야만 한다. 두려움에 찌든 우리 마음은 이런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이 사랑을 하나님에게서 받아 나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할 수 있을 뿐이다.

p.278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준다.

싸움은 날마다 벌어진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거나 자아를 구하거나 둘 중 하나다. 인생은 둘 중 하나의 선택이다. 두 개의 길과 두 개의 원리뿐이다. 두 갈래 길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 하지만 근본적으로 사랑은 나보다 남에게 집중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받기보다 주는 것이다. 삶의 모든 행위 속에서 이 두 원리(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것인가, 자아를 구할 것인가)가 우리 마음을 지배하려고 싸우고 있다.

p.282

... 너무도 생소하고 생전 들어 보지 못한 개념이라서 같은 본문을 여러 역본으로 다시 읽었다.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전통에 너무 젖어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배웠던 내용에 사고가 너무 종속되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하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정말 없었다. 선입견에 막혀 진리를 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나는 성경 전체를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탐색했다. 성경 속에서 발견되는 증거로 내 결론을 삼기로 했다.

p.291

하나님에 대한 거짓이 남아있는 곳에는 사랑이 흐르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거짓이 제거되지 않는 한 우리 뇌는 치유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자신에 대한 기쁜 소식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를 기다리신다. 그제야 그분의 사랑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 그분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다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벧후3:9) 그래서 그분은 우리가 바로 우리가 그분에 대한 진리를 온 세상에 전하기를 기다리신다.

p.287-288

모세의 얼굴을 해처럼 빛나게 한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신기하고 놀라운 사랑이다!

이 삼키는 불은 해로운 불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불이다. 그것을 깨닫고 기뻐하던 중에 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이 떠올랐다. 모세의 얼굴을 본 그들은 뒤로 물러나면서 그에게 수건을 쓸 것을 당부했다. 하늘의 빛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퍼뜩 깨달아졌다. 사랑의 불은 사고가 치유되지 않았을 때에만 고통스럽다. 유죄 상태의 양심과 중생하지 않은 마음은 거짓과 이기심을 선호하기 때문에 사랑과 진리의 빛을 용납할 수 없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 이 불의 목적은 두 가지다. 이 불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고 보호함과 동시에 이 땅의 죄를 완전히 없애버린다. 이 신기한 불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악을 전소시켜 버린다.

....

그렇다면 거짓을 태우는 것은 무엇인가? 진리다! 이기심을 태우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이다! 그런데 성령의 진리의 영이자 사랑의 영이시다. 놀랍게도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각 사람 위에 있는 불줄기가 모두에게 보였으나(행2:3) 아무도 타지 않았다. 건물도 타지 않았고 옷에도 불이 붙지 않았다. 그 불 곧 사랑과 진리의 불은 그들의 마음과 생각에 붙어서 그것을 정화했다. 그러자 하나님에 대한 모든 왜곡이 제거되고 시기와 불화와 이기심이 다 타버렸다. 다시 그들 안에 사랑이 불타올랐다! 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들은 성령과 불로 사랑과 진리의 불로 세례를 받았다!(마3:11)

p.293-294

하나님은 자기 자녀를 하나도 잃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천국의 모든 요원을 동원해 우리 안에 그분의 사랑을 회복시키려 하신다. 우리는 두려움과 이기심으로 병들어 있어 매사에 자아밖에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백성은 그분이 오실 때 그분을 맞이할 준비가 된 백성, 천국으로 곧장 들어갈 준비가 된 백성, 그분의 사랑의 불꽃 속에서 살아갈 준비가 된 백성이다.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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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아 옷장에 갇힌 인도 고행자의 신기한 여행
로맹 퓌에르톨라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토요일 오전. 어느 토요일, 같은 시간에 KBS <영화가 xx>를 보고 있었다.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영화를 보며 참 독특한 설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저렇게 가구에 들어간다면, 그래서 여행을 하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좁겠지? 불편하겠지? 먹고, 배출하는 욕구는 어쩐담?‘ 생각하는데, 이미 출판된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며 진행자가 소개했다.

 

여행이란 단어는 우리를 설레게 한다. 그것도 세계여행이라면? 다양한 나라 문화와 기후를 경험할 수 있어 늘 고대하지만, 나같은 제약 가득한 성인에게는 머나먼 이야기다. 그뿐 아니라 상식적인 방법(, 비행기 티켓 등)이 아닌 이케아 옷장을 통해서라면? 상상불가다. 너무도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지 않나?

 

이 책을 보면서 책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떠올렸다. 창문을 넘어 돈을 훔치게 된 노인이 불가피한 상황들에 떠밀려 하게 된 세계 여행 이야기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 여행이며, 특유의 융통성과 대담함으로 위기에 대처하고 모면하는 모습이 꼭 닮았다. 이 책(<이케아..>)의 주인공은 인도의 고행자로 현란한 거짓말과 마술로 만나는 이들을 눈감으면 코 베어가 듯속인다. 그가 살아온 생존본능에 따른 것이라지만, 그의 행동은 적들을 늘린다. 소설 내내 이동되고, 발각되면 도망간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로 사랑을 찾고, 진실을 찾고, 도움의 손길을 받음으로 여행의 다양한 매력을 찾을 수 있다. 그 안에서 삶의 의미 또한 찾아 인생 또한 바뀐다.

 

저자의 이력을 보면 다른 작가와는 남다른 점이 눈에 띈다. 이 소설의 디테일을 살리는데 그의 직업들이 크나큰 공헌을 했다. DJ, 작곡가, 통번역가, 항공기 승무원, 서커스단 소속 마술사, 슬롯 머신 청소원 등을 거쳐 현재는 국경 담당 경찰로 문서 위조를 가려내는 업무를 한다고 하니 그의 직업 경험들이 소설하나를 거뜬히 만들어 냈다. 그 무엇보다 그가 주목했던 것은 밀입국자들에 대해서다. 흔히 밀입국자에 대해, 어디에 빌붙는 기생충같은 이들처럼 여기기 쉽다. 뉴스를 통해, 그리고 여러 영상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주는 부정적인 영향에 지레 겁먹고 그들을 배척한다. 하지만 저자가 바라보는 시각은 달랐다. 그들을 한 가족의 가장으로 바라봤고, 그들의 명예를 생각했으며, 인격체로 대했다. 인간에 대한 존엄이라는 가치를 기본으로 충실히 소설에 담았다. 이 소설은 독특하고 유머러스한 상황을 설정으로 두었음에도 이들을 보는 시각은 진지하고 따뜻했다. 그 점이 참 인상적이었다.

 

또한, 그는 선한 일을 행하는 것으로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의미를 찾는다. 그가 믿는 불교의 사상이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어찌됐든 나 자신은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고 있으며,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가난에도 처해보고 부함에도 처해본 파텔의 삶에 남은 것은 가난을 떠나 풍족함을 누리는 게 아니라 선을 행한 일이었다는 것. 이를 통해 전기가 찌릿하는 보람과 감격을 느끼는 파텔의 감정을 다룬 걸 보면, 유명인이 아니더라도 작지만 선한 일을 해서 생기는 느낌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교과서적인 교훈을 주려는 의도가 아닐까도 싶지만, 결국 그것이 또 특별할 거 없다는 삶에서의 통찰이 아닐까 싶다.

 

짧게나마 인도의 카스트 문화부터, 리비아의 열악한 환경, 프랑스, 영국을 거쳐 이태리의 집시까지 여러 가지의 문화를 한 소설에서 거쳐보게 되어 흥미로웠다. 독특한 설정과 위트넘치는 그의 글을, 책을 또 찾아 읽어보게 될 것 같다. 역시 책은 간접경험을 하게 하는데는 이만한 게 없다고 생각하며...

 

 

 

내가 선함을 주변에 퍼트리는 사람이라고?”

....

때론 사람들이 당신을 특정한 어떤 방식으로 보기만 해도, 특히 특정한 방식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가 긍정적인 경우 당신은 실제 그런 사람으로 변하기도 할 것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파텔이 이번 여행을 시작한 이후 자신의 폐부를 강타한 최초의 강력한 전기 충격과도 같았다. 그렇지만 최초이되 최후의 충격은 아니었다.

p.48

 

경찰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들은 불법 체류자였지만 적십자사 입장에서 보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완전히 상반되는 두 가지의 정체성과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산다는 건 정서를 매우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p.76-77

 

모멸감. 밀입국자들에게도 최소한의 명예는 있는 법이다. 재산, 여권, 신분을 모두 박탈당한 이들에게 명예는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무형의 자산일 것이었다. 그들이 부인도 아이도 없이 혼자 떠난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었다. 언제까지고 부인과 아이들에게 위대하고 강한 존재로 남아 있어야 했다. 이들의 창자를 뒤틀리게 하는 건 매질에 대한 두려움 따위가 아니었다. 떠나온 나라로 다시 돌려보내지는 두려움이 그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나라로 보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 더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p.80-81

 

파텔은 밤의 어둠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적어도 일생에 한 번쯤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보고 싶어졌다.

p.85

 

... 오히려 똑똑하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사람들을 속이는 게 제일 쉬웠습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매사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거든요. 아무도 자기를 속일 수 없다고 자만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얼마나 쉬운 먹잇감이었겠습니까. 오히려 자신이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기꾼이다 싶은 사람을 상대할 땐 훨씬 조심을 합니다. 그들은 내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관찰하죠.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면서 말입니다. 아이러니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바보들을 속이기가 더 힘든 법이죠. 이건 프랑스 마술사 로베르 우댕이 한말입니다....“

p.241

 

절 위해서라도 받아주세요. 더는 배의 밑바닥, 자동차의 트렁크 화물 트럭 같은 데서 불안에 떨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전 당신이 늘 공포에 쫓기는 인간 사냥감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았으면 해요. 이 나라 저 나라를 장기판의 말처럼 떠도는 것은 그만 두세요. 다시 아버지가 되어야죠. 자식들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p.247-248

 

세상엔 사기꾼, 협잡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최근 며칠 동안 경험한 여러 만남은 속임수로 남의 돈을 갈취한 것보다 훨씬 득이 되는 일이 존재함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 일이란 바로 남에게 돈을 주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함을 베푸는 것이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이런 말을 들었다면 그는 입에 발린 말, 그럴듯하게 감정을 포장하는 달착지근한 말, 기만적인 말이라고 받아넘겼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너무나도 맞는 말이었다. 파텔은 비라지에게 4만 유로를 주었을 때 그가 짓던 표정이며 눈길을 떠올렸다. 그는 절대 그의 시선을 잊지 못할 것이었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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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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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였지만, 불편함을 모르고 살았다. 워낙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성격인 탓도 있었지만, 내가 살아온 가정이란 테두리에선 남자라고 더 대접해주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와서 딱히 차별이라는 걸 겪을 일이 없었다. 회사를 들어가서 납득이 안 가는 '여직원이 차 준비하기', '여자 막내 직원이 직원들 책상 닦기'라는 성차별이 반영된 잡일을 하긴 했지만, 그냥 내가 해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며느리를 아들보다 더 챙기는 시어머니를 만났다. 아들 둘을 낳아서인지 몰라도 아이들의 성별로도 그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듣지 않아봤다.

내 이야기다. 평범하게, 그리고 무난하게 살아왔던 삶을 살아왔던 터라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냥 살아왔고, 그게 당연한 듯 살아왔다. 할 말이 없었다. 딱히 뭘 해야 한다 생각하지 않았다. 부당함, 억울함을 다루는 이들의 부르짖음을 보고 나는 당황스러웠다. 왜 저렇게 유난스러울까. 왜 그렇게 조용하고 부드럽게 말하지 못할까. 왜 자꾸 내 귀에 내 눈에 거슬리게 왔다 갔다 하는 걸까.

저자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평범한 삶이 아니었고, 불편했다. 소수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했고, '질문'했다. 그래서 공부했고, 사람을 만나 대화했다.

 

불편해도 괜찮았다. 나의 평범하지 않음.

소수성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여러 갈래의 경험은

내가 사회학이나 여성학, 철학을 공부하는데

자양분이 되었다.

현실 문제에 부딪혀 본 것들이

이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여자라서 불편한 게 많다 보니

피곤하긴 해도 '생각'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고졸이란 신분도 그랬다.

덕분에 내가 누구이고 내가 어디 있는지

늘 되묻고 깨어 있어야 했으니까.

p.118

그런 저자의 시선으로 쓴 글들을 맞닥뜨리며 나는 신선한 충격에 몸서리를 쳤다. 내가 당연하다 여겼던 것들이 남들에겐 당연한 것이 아니었고, 편하다고 여겼던 때에 다른 이들은 편하지 않았다. 무난했던 나의 삶에 비해 무난하지 않고 울어야 했던, 외쳐야 했던 누군가의 삶들이 있었다.

저자의 철학적인 사색이, 약자에 관심을 갖는 진보적인 색채가 이 책에서 또렷이 보였다. 내면을 비춰주는 듯한 말에, 평소에 외면하는 시선과 모습을 다룬 글에 나는 그간의 사건을, 어떤 이들의 행동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게 되었다. 나와는 다른 성향과 관심사를 갖고 있는 저자였다. 그의 생각을 따라 세상을 보는 관점은 비좁았기만 했던 나의 소견의 파편들처럼 떠올라 부끄러웠다. 또, 그의 솔직함에 놀랐다. '사랑'에 대한 개념이 상당히 자유롭고 포용력이 넓어 일반적인 통념과 달랐어도 신선했다. 무조건 지지하지는 못하나 어디에 우선을 두느냐에 따라 그녀와 같은 견해를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해해 볼 수 있었다.

그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삶의 몇 가지가 이 책으로 납득이 됐다. 특히 만남과 헤어짐의 불가피성을 다룬 부분은 왜 모든 사람이 결코 나와 같을 수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세월에 따라 바뀌는 체형, 닳아가는 옷을 두고 한 비유가 참 와닿았다. 이별을 통보하는 이기적이고, 불완전한, 비인격적인 과거 남자친구의 행동이 떠올랐다. 그렇게 좋아서 죽겠던 단짝 친구였는데, 각자 사회생활을 하고,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생활환경이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것이 왜 그러했는지에 서운함을 떨쳐낼 수 있었다. 영원할 수 없는게 사람의 감정이란 걸, 상황과 환경의 영향에서 인간의 삶은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인정했다.

말과 행동에 있어서도 조심스러워진다. 편견, 곡해, 고정관념으로 섣불리 판단하고 정해놓았던 생각들이 실상은 진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편협했던 내 삶의 결과물이었음을 알았다. '애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라는 말이 그랬다. 가부장제 언어가 내면화되어(p44) 익숙해져 버린 내 삶이 또한 그랬다.

'책을 읽을지 말지' 선택의 기로에 선 초반 몇 장에서 이 책에 침잠해가는 나를 발견했다. 흔치 않았다. 그래서 이 책을 선택했고 잘 읽었다 중얼거리며 마지막 장을 덮었다. 두고두고 읽어볼 글들이 많았다. 그걸 아래와 같이 적는데 너무 많아 힘들었다. 중간중간 시로 마무리하는데, 나는 도무지 집중이 안 됐다. 시의 잘못이 아니라 아직도 시가 어렵기만 한 내 잘못이다. 내 속에 나도 모르게 뒤섞여 있는 생각의 조각들이 책 속에서 하나하나 끄집어내어지는 묘한 쾌감을 느끼며 좋은 책 하나 잘 집었다고 다시 확신했다.

.. 우리가 입을 다무는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던가. 말하고 싶음과 말할 수 없음, 말의 욕망과 말의 장애가 충돌하던 어느 봄날, 나는 이미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p.9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 형성은 '출산' 유무와 상관이 없다. 남자의 성숙이 '군필' 유무와 무관한 것과 같은 이치다. 내 주변에서 세월호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광화문 광장에라도 한번 나가는 사람은 상당수가 비출산 여성이다. 육아 부담이 없어 저녁이나 주말에 시간이 나기 때문이고, 세월호 이전에도 세상일과 자기 삶을 분리시키지 않고 살았기 때문이다.

애 낳고 가족 이기주의에 빠지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나부터도 출산 이후, 즉 육아 집중기에는 신문을 챙겨볼 시간도 행동하는 시민으로 살 기운도 없었다.

p.31

인간적 성숙은 낯선 대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혼란과 갈등을 겪으며 자기와 세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때 일어나는 것이다. 엄마라는 생태적 지위는 성숙에 이르는 여러 기회 가운데 하나일 뿐 저절로 성불하는 코스가 아니다.

p.32

박 대통령이 세월호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애를 안 낳아봐서가 아니라 해결하지 않아도 권력을 유지하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권력을 떠받치는 것은 온갖 나쁜 관념에 휩싸여 주변의 여린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주변 사람들이다.

p.32

모든 물음은 질문자의 입장과 욕망을 내포하는 법이다. 나의 물음은 그간 얼마나 진화했는가. 남편의 시선만 간신히 모면한 듯하다. 자기 욕망을 일인칭 시점에서 구사할 수 있는 언어는 여전히 모자라다. 착한 여자는 천당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는 말대로, 일상의 금기는 넘나들지만 몸에 그은 선은 제자리다.

p.36

... 이렇듯 개인의 존엄을 간단히 몰수하는 나쁜 관념을 만드는 건 너무도 평범하게 굴러가는 저마다의 일상이다.

p.48

왜 엄마들에게 행복은 늘 충족 유예 상태로만 존재해야 하는가. 내일을 위해 오늘은 인내하는 삶. 자식을 위해 당신은 포기하는 삶...... 워낙 가난한 시대에 태어나서 그러신 줄은 안다. 그래도 난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는데, 엄마가 호강 한번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결심이 더 확고해졌다. 나의 일신의 호강은 주체적으로 '지금 여기서' 챙겨야 한다는 것. 그 엄정한 사실 말이다.

p.101

.. 육아가 힘들 때 이들이 족쇄 같아 괜히 낳았다고 원망했던 것처럼 더러는 괜히 죄 없는 부모님을 탓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나는 안다. 힘든 일 포기하고 떠난다고 자유롭지 않다. 그건 자유에 대한 환영이고 망상이다. 넘지 못할 것 같은 산도 한 걸음 내디디면서 다리 힘이 길러지고 그러면 다음 봉우리는 더 쉽게 건널 수 있다. 근육이 튼튼해지고 체력이 길러지면 삶의 어느 고비에서도 성큼성큼 문제안으로 들어가는 궁극적인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런데 문제를 회피하고 도망가면 걸린 데서 또 걸린다. 아무런 상처도 주지 않고 좋기만 한 관계는 가짜이고, 아무런 사건도 생기지 않은 무탈한 일상이 행복은 아니었다.

p.102

삶은 명사로 고정하는 게 아니라 동사로 구성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생을 오해받을지라도 순간의 진실을 추구하고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며 살아갈 때만 아주 미미하게 조금씩, 삶은 변한다.

p.118

만남의 불가피성이 있다면 헤어짐의 불가피성도 있을 거다. 살뜰한 7년 세월이다. 체형에 맞게 늘어난 청바지처럼 서로에게 잘 맞춰진 사이였다. 어제까지 입던 옷이 오늘 불편해진다나는 것은, 청바지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만물은 유전한다. 한 시절 편안하고 맵시 있게 입었더라도 옷은 작고 체중은 는다. 그리하여 어느 날 몸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때가 온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몸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의 시점이 온다.

p.130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으면서 나는 죽음에 관한 나만의 윤리적 근거를 마련했다. 스피노자는 실존의 소멸과 함께 사라지는 부분과 남는 부분을 대비한다. 죽음을 맞이했을 때 외적 원인에 의해 규정되는 외연적 부분은 사라지지만 자신의 특이적 본질을 구성하는 부분은 영원히 남는다고 한다. 바로 이해했다. ... 삶의 길이보다 삶의 밀도가 중요해졌다. 사는 동안 존재를 확장하려는 노력은 멈출 수 없겠지만 순한 양처럼 주어진 시간에 복종하고 싶다. 어디로든 끝 간에는 사라질 길. 그저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p.139

내 몸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질문이 남는다. 노화는 섭리다. 몸에 대한 근원적 불안과 불만의 강도가 높아질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몸, 낯선 모습으로 고개 내밀 얼굴과 동거하는 연습을, 콩알만 한 그것으로 해보고 싶다. "일찍 시작하고 자주 시행하라"는 시대적 요청에 거슬러, 사십 대부터 잡티 제거 안 하고 살면 어떻게 되는지, 나의 신체 표현이 나도 궁금하다.

p.144

언젠가 봄은 온다고들 말하지만, 당사자에게 겨울은 너무 길고 춥다. 구체적인 아픔을 무화 시키고 봉합해버리는 상투적인 결말이 거슬렸다. 우리는 봄을 기다리기보다 체온을 나누며 겨울을 나는 법을 노래해야 하는 게 아닐까. 마디마디 분절되어 살갗에 닿던 민들레처럼 말이다.

p.163

한 움큼 부끄러움을 삼키며 나는 배웠다. 동정이든 차별이든 그 아래 깔린 근본 생각은 다르지 않다는걸. 어떤 대상을 자기 삶의 반경에 없는 분리된 존재로 취급하는 것(고아들이 불쌍하다), 한 존재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특정한 면만 부각시켜 인격화하는 것(장애인은 무능하다), 자신은 결코 되지 않을 이질적 대상으로 상대를 보는 것(공부 안 하면 노숙인 된다). 하나같이 타자화하는 말들이다.

p.169

안 보이는 사람의 나라가 있다. 삶에 대한 상상력이 직업에 대한 정보력을 넘지 못하는 수준이다 보니,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사람의 이야기는 사라져간다. 남성, 이성애자, 서울 출신, 명문대 졸업, 전문직 종사자로 표상되는 소위 정상적 삶의 서사는 매스컴으로 구전으로 맹렬히 유통되는 반면, 거기서 벗어날수록 삶의 서사를 구성하기가 어렵다. 장애여성 강사처럼 자기 경험과 생각과 감정을 말할 기회가 드물고, 겨우 말한다 해도 오해나 동정을 산다. 그런데 남에게 자기 얘기를 하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를 알기 어렵고 사회에 자신을 위치 지을 수도 없다. 말소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p.170

.. 삶은 늘 그래. 어디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외부가 없더라. 대단한 무엇 없이 소소한 일상으로 굴러가고, 마치 바다처럼 아무것도 대단한 게 없다는 점. 그게 삶의 놀라움이겠지. 너무 큰 물음 세워놓고 내가 작다며 자학하지 말고, 싸우는 노동자들한테 쌀도 보내고 서로 하소연도 하고 술도 마시면서 우리 그렇게 살자. 힘내렴. 술 먹고 인류 문제로 꼬장 부리는 후배도 있고 나는 행복하다."

p.182

... "그런 거 몰랐는데 작년부터 몸이 여기저기 안 좋아지니까 외롭더라. 간사하게" 예전 같으면 배우자가 간병이냐며 실용주의를 비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외로움이 자기 보존에 기여하는 중차대한 감정이구나 생각한다. 인간을 사색하게 한다는 점에서 야만에서 구제하는 요소이고, 관심을 타자에게로 향하게 한다는 점에서 겸손하게 만드는 동력이다. 물론 그 외로움이 지나치고 사무치면 자기 파괴에 이르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찾아오는 나비 한 마리, 바람 한 점 없어서 외롭게 죽어간 이들을 슬퍼하면서, 변변히 외롭지 못했음을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이었다고 믿었던 날들을 부끄러워하면서, 돌아누운 이적요의 비린 눈물을 떠올리면서, 나 그가 누웠던 자리에 가만히 누워본다.

p.223

... "지나고 보니 그동안 나한테 닥친 일을 처리하기에 급급했는데, 그랬더니 남는 게 없구나. 너는 일을 새로 시작하니까 길게 내다보고 해라. 봉사하는 살마들 이야기를 중심으로 글을 쓴다든가 분야를 정해서 집중해봐. 10년 후 네 작업을 집대성할 수 있게 맥락을 잡아가도록 해. 나는 그런 얘기를 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장기적인 안목을 갖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 후회되네."

p.230

젊은 날 자유하고 성찰하며 살았던 사람은

자기 삶을 짓누르는 나쁜 공기를 금세 알아챈다.

이것은 위대한 능력이다.

p.239

자기가 처한 그 상황이 영원할 것 같을 때, 그 불안을 어찌 잠재울 수 있을까. 내가 아는 한 묘책은 없다. 외부에 새로운 변수가 오기 전까지는 견디는 수밖에.

p.255

... 구걸하는 처지가 된 것 같아서다. 남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다. 나는 울컥함을 어찌하지 못하고. "왜 이렇게 슬프고 구차한가요" 문자를 보냈다. 답이 왔다. 마음만 남루하지 않으면 괜찮은 거라고 생각하라고. 우연히, 혹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알아보겠다고. 그리고 말했다. "돌봄은 우주를 돌고 돈다고 하죠."

p.256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탈출 욕망이 철조망의 빈틈을 보면서 발생한다는 것. 나의 경우라면 유유히 담을 넘어가는 그의 긴 다리를 보면서 나의 담장의 드높음을 인식하고는 이 수용소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다. 나는 울타리를 넘고 싶었다. 그런데 넘어보기도 전에 넘어지다 다친 것처럼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주체에 도사린 타자는 늘 이토록 낯설다.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나이기에.

p.260

황지우 시인의 말대로 "삶을 한 번쯤 되물릴 수 있는 그곳"에 간다면 난 얼마나 다르게 살 것인가. 아파하고 아파하는 이를 알아보면서 이 아픔의 전승 구조에 몸을 싣고 아마 지금처럼 살고 있을 것 같다. 그것밖에 힘이 없다. 누구나 지금이 존재의 최선이다.

p.262

어디 살림만 그러겠는가 싶다. 삶은 그 자체가 낭비다. ....

사는 게 총체적으로 낭비라는 걸 인지하지 못할 때는 살림만 미워했다. 살림이, 정확히 가사 노동이 지겹고 하찮게 느껴져서 제발 집안일 안 하고 살길 간절히 염원했다. 지금은 아니다. 좀 나아졌다. ....날 괴롭히는 것이 날 철들게 한다더니 살림이 그렇다.

p.285

책을 내는 것, 그 자체가 선업일 수 없다. 특히 요즘은 특정 집단의 이익과 자기 정당성 확보를 위한 출판도 많고 쉽다. 그 경계와 판단은 모호하다.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책이 나왔을 때 주변에서 축하도 좋지만 그 책이 어떤 책인가를 따져 묻고 토론하는 인문적인 풍토가 형성되면 좋겠다. '책 낳는 일'이 권력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권력을 해체하는 일이 되도록 말이다.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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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시가서 (가죽장정) - 일상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 옆의 성경 The Message 시리즈
유진 피터슨 지음, 홍종락 외 옮김, 김회권 감수 / 복있는사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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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성경으로는 욥의 고통이 와닿지 않았는데요. 현대적 언어로 쓰이니 욥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글에서 전달이 잘 됩니다. 번역을 위한 번역이 아니라 상황과 내용이 절절히 이해가 되고 실감나고요. 개인적으론 메시지 성경으로 바꾸고는 통독 시간을 항상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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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구약 역사서 - 일상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 옆의 성경 The Message 시리즈
유진 피터슨 지음, 김순현 외 옮김, 김회권 감수 / 복있는사람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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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이 짧다. 일상적이며 현대적인 언어로 씌여져 낯설지 않다. 친숙하고, 더 깊은 은혜와 감동이 있다.

개역개정에서는 여태까지 신앙생활하며 여러 차례으로 읽어봤기에 익숙한 본문을 감동없이 지나칠 때가 많았다. 또, 낯선 본문은 텍스트를 넘어선 진전이 힘들었다. 읽는데 급급해서 제대로 읽어봐야겠다는 결심에서 늘 포기해버렸다. 하지만 메시지 성경은 익숙한 본문이든, 낯선 본문이든 늘 새롭다. 쉽기 때문에 잘 읽히고 놓치는 부분이 덜해졌다

 

솔로몬을 향한 다윗의 유언이 그렇게 내게 이야기 하는 마냥 은혜스럽다. 부성이 현실감있게 느껴진다.

다윗의 기도는 현재 우리가 하는 기도와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대표기도를 듣고 함께 기도하고 있는 것 같이 읽힌다.

그런 기도는 문장이 쭉 연결되지 않고 기도문이란 걸 인식하게 시처럼 문장을 끊었다.(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보시면 압니다) 이 또한 술술 읽혀 좋다.

요즘은 이스라엘 유다 왕들이 조금씩 정리가 된다. 헷갈리는 이름들도 '둘이 다른 사람이었군!' 인지하게 됐다. 각 사람의 행실이 이해가 잘 되니 인물에 대한 파악에도 도움이 됐다.

메시지 성경이 그런 점에서 좋다

 

다음 시가서도 메시지 성경으로 통독 중이다

 

 

하나님의 천사가 말했다.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너무 놀라워서, 네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사기 中>

p.139

 

 

보아스가 룻에게 대답했다. "그대에 관한 이야기를 내가 다 들었소. 그대의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그대가 시어머니를 어떻게 대했으며, 또 어떻게 그대의 부모와 그대가 태어난 땅을 떠나 낯선 사람들 틈에 살려고 왔는지도 들었소. 그대가 한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오. 그대가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고자 왔으니, 그분께서 그대에게 후히 갚아주실 것이오."

<룻기 中>

p.167

 

 

사무엘이 그들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매우 악한 일을 저지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 등을 돌리지 마십시오. 마음을 다해 그분을 예배하고 섬기십시오! 헛된 신들을 좇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여러분을 도울 수 없습니다. 헛된 신들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전히 자신의 어떠하심 때문에라도, 그분의 백성을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분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습니다.<사무엘상 中>

p.205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보여주기 위한 공허한 제사 의식이겠습니까?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듣는 것이지,

거창한 종교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지 않는 것은

이교에 빠져 놀아나는 것보다 훨씬 더 악한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우쭐대는 것은

죽은 조상과 내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악한 일입니다.

왕께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했으니

그분께서도 왕의 왕권을 거절하실 것입니다.

<사무엘상 中>

p.214-215

 

 

다윗 왕이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했다. "내 주 하나님, 제가 누구이며 저의 집안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이 자리에 이르게 하셨습니까? 그러나 앞으로 있을 일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주 하나님, 주께서는 제 집안의 먼 앞날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장래 일을 엿보게 해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 앞에서 감히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 하나님, 주께서는 제 실상을 아십니다. 주께서 이 모든 일을 행하신 것은, 저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주의 어떠하심 때문입니다. 바로 주님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주께서 그것을 제게 알려주셨습니다.

<사무엘하 中>

p.269

 

 

주 하나님, 주께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고, 언제나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놀라운 일을 제게 말씀해 주셨으니, 부디 한 가지만 더 구합니다. 저의 집안에 복을 내리시고 언제나 주의 눈을 떼지 마십시오. 주 하나님, 주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오, 주님의 복이 저의 집안에 영영히 있게 해주십시오!

<사무엘하 7장 中>

p.270

 

 

제가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마음을 주셔서 주의 백성을 잘 인도하고 선악을 분별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영화로운 백성을 어느 누가 자기 힘으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열왕기상 3장 中>

p.328

 

 

"친히 말씀하신 대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분이 모세를 통해 하신 모든 선하고 놀라운 말씀이 단 한 마디의 예외 없이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우리와 계속해서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 그분께서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거나 떠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늘 그분께 집중하고 헌신하게 하셔서, 그분이 예비하신 인생길을 따라갈 때에 표지판을 주의 깊게 살피며, 그분이 우리 조상에게 정해 주신 걸음걸이와 장단에 따라 걷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열왕기상 8장 中>

p.344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엘리야는 유다 남쪽 끝 브엘세바로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그는 젊은 종을 그곳에 남겨 두고 사막으로 하룻길을 더 들어갔다. 외그루 로뎀나무에 이르러, 그는 그 그늘 아래 쓰러졌다.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마음 밖에 없었다. 그저 죽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하나님, 이만하면 됐습니다! 저를 죽여주십시오. 저는 제 조상들과 함께 무덤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습니다!"그는 기진맥진하여, 외그루 로뎀나무 아래서 잠이 들었다.

<열왕기상 19장 中>

p.372

 

 

거센 폭풍이 산들을 가르고 바위들을 부수었으나, 하나님은 그 바람 속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가고 지진이 일었으나, 하나님은 그 지진 속에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가고 불이 일었으나, 하나님은 그 불속에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부드럽고 고요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열왕기상 19장 中>

p.373

 

 

그들은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했으나, 하나님만 섬기지는 않았다. 또 자격과 상관없이 온갖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임명하여, 지역에 있는 다산의 산당들에서 갖가지 의식을 거행하게 했다. 그들을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했으나, 그들이 살다 온 지역의 옛 신들을 섬기는 일도 버리지 않았다. ....

...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며 이렇게 명령하셨다. "다른 신들을 높이지 마라. 그들을 예배하지 말고 그들을 섬기지 말며, 그들에게 제사 지내지 마라. 하나님 곧 큰 능력으로 너희를 친히 이집트에서 구해 내신 그 하나님을 예배하여라. 그분을 공경하고 경외하여라. 그분을 예배하여라. 그분께 제사를 드려라. 오직 그분께만!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그분이 가르치신 것, 너희를 위해 기록해 두신 모든 것을 너희가 사는 날 동안 행하여라. 너희는 어떤 경우에도 다른 신들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 그분이 너희와 맺으신 언약에서 너희가 지켜야 할 것을 잊지 마라. 다른 신들을 예배하지 마라! 하나님,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여라. 너희를 원수의 압제에서 구원하실 이는 바로 그분이시다."

<열왕기하 17장 中>

p.431-432

 

 

그리고 나의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온 마음과 뜻을 다해 그분을 섬겨라. 하나님께서 마음을 살피시고 그 모든 중심을 꿰뚫어 보신다. 네가 그분을 구하면, 반드시 너를 만나 주실 것이다. 그러나 네가 그분을 버리면, 그분도 너를 영원히 떠나실 것이다. 이제 잘 들어라! 하나님께서 너를 택하셔서 그분의 거룩한 집을 짓게 하셨다. 용기를 내고 마음을 굳게 먹어라! 그것을 시행하여라!"

<역대상 28장 中>

p.513-514

 

 

"제가 누구이며 이 백성이 누구이기에, 우리가 감히 주께 그 무엇을 바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주게로부터 옵니다. 다만 우리는 주의 넉넉하신 손에서 받은 것을 돌려드릴 뿐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우리는, 우리 조상들처럼 집 없고 힘없는 방랑자에 불과하며, 우리의 삶은 그림자와 같이 보잘것없습니다. 하나님 우리 하나님, 이 모든 자재-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높이고 예배드릴 처소를 짓기 위한 물건들-는 다 주께로부터 왔습니다! 처음부터 다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주께서는 겉모습에 전혀 관심이 없으시고 우리 자신, 우리의 참된 마음을 원하시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으로부터 정직하고 기쁘게 바쳤습니다. 이 백성도 똑같이 자원하여 아낌없이 바치는 것을 보십시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하나님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낌없이 드리는 이 마음이 이 백성 안에 영원히 살아 있게 하시고, 이들의 마음이 주께만 머물게 하십시오. 제 아들 솔로몬에게 흐트러짐 없는 굳건한 마음을 주셔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주님의 지침과 권고대로 살아가게 하시며, 제가 준비한 성전 건축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역대상 29장 中>

p.516

 

 

... 하나님께서는 항상 깨어 있어서 그분을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역대하 16장>

p.545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일하시오. 그대들이 맡은 직무를 믿음직하고 정직하게 감당해야 하오. 성읍 주민과 관련된 사건을 맡게 되거든, 살인처럼 큰 문제이든 법 해석의 문제처럼 작은 것이든 상관없이, 그들이 하나님을 상대하고 있음을 그대들이 책임지고 알려야 하오. ..."

<역대하 19장 中>

p.551

 

 

... 요담의 능력은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단호하고 한결같은 삶에서 나왔다.

<역대하 27장 中>

p.566

 

 

..."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돌아오라. 그러면 그분께서도 앗시리아 왕들의 강탈 가운데서 살아남은 너희에게 돌아오실 것이다. 하나님 너희의 하나님께 등을 돌린 조상들의 죄를 답습하지 말라. 그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망하게 하셨다. 그 잔해가 사방에 널려 있지 않느냐. 너희 조상들처럼 고집부리지 말고 하나님께서 내미신 손을 붙들라.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그분의 성전, 영원히 거룩하게 하신 그곳으로 오라. 하나님 너희 하나님을 섬겨라. 그러면 더 이상 그분의 불같은 진노가 임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며, 너희 친족과 자녀들을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 이 땅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너희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니 너희를 냉대하지 않으실 것이다. 돌아오라. 그러면 그분께서 두 팔 벌려 너희를 반겨 주실 것이다."

<역대하 30장 中>

p.572

 

 

히스기야는 이 일을 유다 전역에서 지속적으로 시행했다. 그는 단연 최고의 왕이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의로우며 진실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이든,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일이든, 그 모든 일을 기도하고 예배하는 마음으로 행했다. 그래서 그는 하는 일마다 형통했다.

<역대하 31장 中>

p.575-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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