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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하나님 설계의 비밀 ㅣ 하나님 설계의 비밀
티머시 R. 제닝스 지음, 윤종석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5년 8월
평점 :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분은 용서하시지만 성경에 "하나님은 용서이시니라"라는 말은 없고, 전지하시지만 "하나님은 지식이시니라"라는 말도 없고, 전능하시지만 하나님은 능력이시니라"라는 말도 없다. 다른 모든 속성은 다이아몬드의 면면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찬란한 창이다. 하지만 사랑에 관한 한 하나님은 그냥 사랑을 행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의 화신이시다!
p.44
어떤 하나님 개념을 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인가? 앤드루 뉴버그 박사가 최근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실시한 뇌 연구에 따르면, 모든 형태의 명상이 뇌의 긍정적 변화와 유관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최대의 뇌 기능 향상은, 참여자들이 구체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을 묵상할 때 이루어졌다. 이런 묵상은 전전두피질(추론하고 판단하고 하나님 같은 사랑을 경험하는 이마 바로 뒤쪽의 뇌부위)을 발달시키고, 그에 따라 공감과 동정과 긍휼과 이타심의 역량을 높여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부분은 그다음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예배하면 타인 중심의 사랑이 커질 뿐 아니라 예리한 사고력과 기억력까지 더 좋아진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하나님을 예배하면 실제로 뇌의 치유와 성장이 촉진된다.
p.50
성경이 가르치는 그대로 베푸는 것이 곧 삶이다. 하나님이 삶을 설계하실 때 그렇게 작동하도록 하셨다.
p.54
... 자아를 앞세우는 우리의 생물학적 충동은 너무도 강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절대로 이기심에서 헤어날 수 없다. 이기심은 두려움과 생존 본능에서 비롯된다. 사실 사랑할 자유, 자기희생을 선택하는 능력, 그리고 모든 이타심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도 모르게 마음속에 역사하는 결과하다.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인정하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다를 바 없다. 그리스도의 승리와 성령의 역사 덕분에 우리 마음은 유전적 성향인 이기심을 극복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단 그것은 우리의 의지적 선택이라야 한다.
p.63-64
방종의 행위는 우리 뇌와 몸과 성품과 관계를 더 해치다가 결국 죽음을 부른다. 이것이 우리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병적 상태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두려움과 이기심으로 병들어 있다. 그것이 우리의 전 존재를 변질시켰다. 뇌는 균형을 잃었다. 두려움 회로는 과잉 발육인데 사랑회로는 발육 부진이다. 사고는 더는 하나님을 모르며, 사랑의 법대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개입이 없는 한 불치병이다. 삶이란 사랑의 법과만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p.67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타인 중심의 온전한 사랑으로 살아가도록 하셨다. 사랑은 밖으로 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행동으로 유익을 끼친다. 아담과 하와도 사랑의 법과 온전한 조화를 이루는 한 죽지 않았다. 하지만 죄란 법을 어기는 것이다. 죄는 사랑의 법을 잘라낸다. 멱을 따면 짐승이 죽고, 스위치를 내리면 불이 꺼지고, 돈을 돌리지 않으면 경제가 마비된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법을 어기면 하나님의 개입이 없는 한 결과는 파멸과 죽음뿐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p.69
... 뇌 연구를 통해 입증되었듯이 어떤 하나님을 예배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뇌가 달라진다. 치유는 사랑의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만 찾아온다. 거짓을 고수하면 치유 과정이 막힌다.
p.99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거부하면 언제나 하나님의 방법과 멀어진다. 그래서 종교적인 사람들은 강요하고 통제하는 신을 얼마든지 예배할 수 있다. 자유가 억압되면 사랑이 파괴된다. 뇌 영상을 통해 입증된 현상이 있다. 자유를 억압하는 복수의 신을 예배하며 신의 형벌과 응보를 예상하고 있으면, 두려움 회로가 강해지고 전전두피질이 손상된다. 다시 말하지만, 전전두피질은 사랑과 공감과 이타심을 경험하는 뇌 부위다. 바울은 말세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 있을 거라고 했다. 이것은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에 대한 말이 아니다. 바울이 지금 말하는 사람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그분과 그분의 속성이 사랑에 대한 진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이다.
p.100
하나님이 중보하시기 때문에 이제 지구에는 두 가지 우너리가 서로 대적해 싸우고 있다. 하나는 사랑의 원리이고 또 하나는 적자생존의 원리다.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는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으로 압축된다. 그것은 이런 의미다. "나는 너를 한없이 사랑하기에 너의 건강과 안녕과 유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내 목숨까지도 바쳐 너를 살릴 것이다." 반대로 이런 경건한 사랑에 맞서 싸우는 적자생존의 원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을 한없이 사랑하기에 나를 보호하고 앞세우고 높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너를 죽이고라도 내가 살 것이다." 내 목숨을 바쳐 너를 사릴 것인가, 아니면 너를 죽이고라도 내가 살 것인가? 이 두 원리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서 서로 싸우고 있다.
p.118
나는 무서워서 최대한 빨리 달아나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가 나를 꼭 붙들고 있었다. 빠져나가려고 몸을 뒤틀어 보기도 하고 울며 조르기도 했지만, 엄마는 놓아주지 않았다. 나를 한없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 일만 한 게 아니라 나에게 말도 했다. 자신이 옆에 있다는 사랑의 말, 다 잘 될 거라는 격려의 말로 나를 다독여 주었다. 엄마의 다독임으로 여섯 살 난 나의 머릿속에서 두려움이 몽땅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한결 두려움이 덜해졌다. 고통의 싸움터에서 사랑과 두려움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p.136
두려움과 불안은 내 존재 속에 아주 깊이 뿌리박혀 있다. 그래서 달아나는 게 훨씬 쉬워 보이고 정당해 보인다. 지금도 나는 엄마가 붙들어주어야만 견딜 수 있던 그 어린아이와 같을 때가 너무 많다. 일단 상처를 입으면 치유의 길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그런데 나는 고통이 싫다. 고통을 피해 달아나라고 두려움이 나를 유혹한다. 사과하거나 회개하거나 나 자신을 낮추거나 상대와 마지막으로 식사하거나 하지 말고 그냥 달아나라고 유혹한다. 나는 자아 속으로 마나의 구석으로 숨어들고 싶다. 나에게 거슬리는 진실을 내 작은 세상 속에 묻어 버리고 싶다. 하지만 계속 달아나면 결코 평안을 얻을 수 없다. 결코, 건강해질 수 없다. 오히려 대뇌변연계가 더 강해져 두려움만 가중될 뿐이다.
p.137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즉 하나님이 사랑하시듯 사랑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섬길 대상이 없이는 하나님을 닮은 충만한 사랑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담은 자신을 내주고 희생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다. 하와는 아담의 이타적 사랑의 수혜자로 지음을 받았다. 또한, 그 사랑을 받은 뒤에는 하와도 타인 중심으로 아낌없이 베풀고 사랑하도록 지어졌다. 아담은 하와가 없이는 충만하게 살아갈 수 없었다. 하와는 아담이 사랑과 섬김으로 자신을 내줄 대상이었다. 이러한 타인 중심의 전적인 베풂을 통해 둘이 마음과 사고와 목적과 애정과 정절에서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설계였다. 영원한 사랑으로 하나의 서클을 이루게 하신 것이다.
p.146-147
... 당신의 사고를 하나님 외에 누구에게든 넘겨주는 것은 그분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심지어 그분도 당신의 사고를 통제하시는 게 아니라 치유하실 뿐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능력을 치유하고, 양심을 정화하고, 이성을 고양하려 하십니다. 스스로 사고하도록 당신을 자유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옳고 건강하고 합리적인 길을 지혜롭게 선택하되, 그것이 옳고 건강하고 합리적이기 때문에 선택하기를 바라십니다. 남이 시키는 대로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그분의 뜻에 어긋나며, 상대가 남편이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우리 배우자까지 포함해서 세상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첫 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p.150
죄의 파괴적 무게에 결국 짓눌려 괴로울 때는 많은 사람이 당장의 위안을 얻으려고 하나님을 찾는다. 힘들 때 당장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자신을 영원히 변화시키고 치유해 줄 하나님의 처방에는 따르지 않는다. 다시 위스키로 돌아간 제시처럼, 무수히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과 자원과 은혜를 구하되 구원이나 진정한 치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멸의 삶을 지속할 수단으로서만 구한다. 그렇게 거부하면 하나님이 결국 그들을 구워하시기 위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는가.
p.176
"네가 집중해야 할 문제가 바로 그거야. 너는 너를 치료해 줄 하나님의 값없는 치료제를 받아들인 적이 있니? 우리는 혼외 섹스 같은 불순종과 죄의 행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 하지만 그것은 죄성이라는 병의 증상에 지나지 ㅇ낳아. 고열과 기침이 우리 몸에 문제가 있어 진료를 받아야 함을 알려 주듯이, 죄의 행위도 우리 마음이 병들어 있어 하나님의 영적 치료가 필요함을 알려준단다. 죄의 행위도 모든 병의 증상과 비슷해. 치료하지 않고 오래 둘수록 병이 더 악화되고, 증상이 많을수록 몸이 더 상하는 법이지. 그래서 우리는 증상을 축소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되는 거야. 대수롭지 않은 게 아니거든. 죄의 행위는 우리 뇌를 훼손하고, 양심을 마비시키고, 이성을 비뚤어지게 하고, 성품을 망쳐 놓는단다. 또한, 죄를 지을수록 하나님께 반항하기가 갈수록 쉬워져 결국에는 구원을 영영 잃게 된단다."
p.182-183
"기도란 친구에게 하듯이 단순히 하나님과 대화하는 거란다. 그분께 마음을 열고 네 생각과 느낌과 소원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는 거지. 기도는 네 삶의 가장 깊은 비밀, 즉 네 꿈과 두려움과 기쁨과 슬픔을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거야. 뇌 연구를 통해 밝혀졌듯이, 하루에 15분씩 묵상을 하거나 사랑의 하나님과 생각 깊은 교제를 나누면 전전두피질과 특히 전두대상피질이 눈에 띄게 발달한단다. 우리가 사랑과 긍휼과 공감을 경험하는 부위가 바로 거기야 전두대상피질이 건강할수록 편도체가 안정되어 두려움과 불안이 줄어든단다. 그야말로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내쫓는 거지! 하나님께 치유받고 싶거든 그분께 말씀드리기만 하면 돼. 그분의 임재와 용서와 은혜를 원한다면, 그분을 네 마음속에 모셔들이고 날마다 시간을 내서 그분과 생각 깊은 교제를 나누면 돼."
p.186
나는 헬렌에게 말했다. "수많은 사람의 생각과는 반대로 천국의 기록은 상세한 진료 기록입니다. 우리의 병, 제시된 치료, 우리의 반응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의사를 고소하면 진료 기록이 의사를 변호해 줍니다. 진료 기록은 환자를 고소하거나 망신시키거나 벌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렇게 이해하면 성경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즉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벌하려고 우리의 죄를 추적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이 기록을 두는 이유는 우리 각자를 구원하고 치유하고자 그분이 하실 일을 다 하셨음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누가 구원받지 못하면 이는 자신이 치료를 거부했기 때문이지 하나님 쪽에서 뭔가 소홀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을 그 기록이 입증해 줍니다. 사랑은 악을 기록하지 않지만 그래도 천국에 우리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 '진료기록'은 각 사건의 사실관계를 입증해 주고,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엄위하신 분인지를 입증해 주고, 하나님과 그분의 요원들이 잃어버린 죄인 한 명 한 명에게 얼마나 끈질기게 간청하셨는지를 입증해 줍니다."
p.212
어떤 환자가 불치병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하자. 이 병의 치료제가 존재한다면, 환자가 병이 낫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의사를 "신뢰하고" 치료 절차에 응하는 것뿐이다. 환자는 이 치료법의 원리를 몰라도 된다. 치료법이 개발된 경위도 몰라도 된다. 그저 의사를 신뢰하고 처방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환자는 치유된다. 의사에게 치료제가 존재한다면 말이다. 마찬가지로 죄인들도 굳이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이루신 방식을 알아야만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일의 혜택을 누리려면 반드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치료를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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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죄인의 처지에서 보자면, 속죄에 필요한 일은 신뢰의 회복뿐이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다시 신뢰하기만 하면 우리는 구원과 치유를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는지 몰라도 된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 삶 속에 적용해 주시는지 몰라도 된다. 하지만 반드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지침에 따라야 한다.
p.226-227
아담과 하와가 거짓말을 믿어 사랑과 신뢰의 서클이 깨졌다. 그 결과로 인류는 사랑의 법과 조화를 이루어 살던 존재에서 두려움과 이기심에 지배당하는 존재로 바뀌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본래대로 되돌리시기 위해 죽으셨다. 성경에서 보듯이 그분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심은 사탄과 사망과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해서였다.
p.228
하나님이 행하시는 정의, 즉 옳은 일이란 그분의 설계에 어긋나게 사는 사람들을 바로잡아 주시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해주시고, 원수들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여 친구로 삼아주시는 것이다.
p.263
사랑은 우리를 치유하고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하는 유일한 힘이다. 사랑은 명령이나 강압이나 강요로 될 수 없다. 본인이 자원해 주어야만 한다. 두려움에 찌든 우리 마음은 이런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이 사랑을 하나님에게서 받아 나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할 수 있을 뿐이다.
p.278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준다.
싸움은 날마다 벌어진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거나 자아를 구하거나 둘 중 하나다. 인생은 둘 중 하나의 선택이다. 두 개의 길과 두 개의 원리뿐이다. 두 갈래 길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 하지만 근본적으로 사랑은 나보다 남에게 집중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받기보다 주는 것이다. 삶의 모든 행위 속에서 이 두 원리(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것인가, 자아를 구할 것인가)가 우리 마음을 지배하려고 싸우고 있다.
p.282
... 너무도 생소하고 생전 들어 보지 못한 개념이라서 같은 본문을 여러 역본으로 다시 읽었다.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전통에 너무 젖어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배웠던 내용에 사고가 너무 종속되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하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정말 없었다. 선입견에 막혀 진리를 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나는 성경 전체를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탐색했다. 성경 속에서 발견되는 증거로 내 결론을 삼기로 했다.
p.291
하나님에 대한 거짓이 남아있는 곳에는 사랑이 흐르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거짓이 제거되지 않는 한 우리 뇌는 치유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자신에 대한 기쁜 소식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를 기다리신다. 그제야 그분의 사랑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 그분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다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벧후3:9) 그래서 그분은 우리가 바로 우리가 그분에 대한 진리를 온 세상에 전하기를 기다리신다.
p.287-288
모세의 얼굴을 해처럼 빛나게 한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신기하고 놀라운 사랑이다!
이 삼키는 불은 해로운 불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불이다. 그것을 깨닫고 기뻐하던 중에 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이 떠올랐다. 모세의 얼굴을 본 그들은 뒤로 물러나면서 그에게 수건을 쓸 것을 당부했다. 하늘의 빛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퍼뜩 깨달아졌다. 사랑의 불은 사고가 치유되지 않았을 때에만 고통스럽다. 유죄 상태의 양심과 중생하지 않은 마음은 거짓과 이기심을 선호하기 때문에 사랑과 진리의 빛을 용납할 수 없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 이 불의 목적은 두 가지다. 이 불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고 보호함과 동시에 이 땅의 죄를 완전히 없애버린다. 이 신기한 불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악을 전소시켜 버린다.
....
그렇다면 거짓을 태우는 것은 무엇인가? 진리다! 이기심을 태우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이다! 그런데 성령의 진리의 영이자 사랑의 영이시다. 놀랍게도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각 사람 위에 있는 불줄기가 모두에게 보였으나(행2:3) 아무도 타지 않았다. 건물도 타지 않았고 옷에도 불이 붙지 않았다. 그 불 곧 사랑과 진리의 불은 그들의 마음과 생각에 붙어서 그것을 정화했다. 그러자 하나님에 대한 모든 왜곡이 제거되고 시기와 불화와 이기심이 다 타버렸다. 다시 그들 안에 사랑이 불타올랐다! 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들은 성령과 불로 사랑과 진리의 불로 세례를 받았다!(마3:11)
p.293-294
하나님은 자기 자녀를 하나도 잃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천국의 모든 요원을 동원해 우리 안에 그분의 사랑을 회복시키려 하신다. 우리는 두려움과 이기심으로 병들어 있어 매사에 자아밖에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백성은 그분이 오실 때 그분을 맞이할 준비가 된 백성, 천국으로 곧장 들어갈 준비가 된 백성, 그분의 사랑의 불꽃 속에서 살아갈 준비가 된 백성이다.
p.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