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 감상한 우리문학이랑 너무 비교되잖아. 어릴때 읽은 책에서 이런 비교는 해본적 없는데 둘다 배우가 읽어주는 시리즈라 그런가보다.
우리문학은 천재 작가가 어릴 때 철 모를 때 쓰고 10년 지나면 사라져버리고… 작가가 소진되는 기분이 들곤 했는데 그 느낌이 이런 거였나 싶게 너무 비교된다.
한국 문학에는 A.E.Housman 의 When I was one and twenty같은 느낌이 되게 심하게 많다. 아직 덜 발달된
, 아직 성장중인 젊은이들이 자기는 머리가 다 컸는 줄 알고 나이 더 들면 자연스레 풀리게 되는 고뇌가 많아서, 조금만 독자의 나이가 많아져도 공감못하게 되버림…
예를들어 현실에 아무도 말리지도 않았는데 혼자 좌절하고 기생질, 계집질에만 빠져있는 무기력한 인물들, 스물넷기혼자가 아내 연락은 피하면서 사회주의의 고뇌와 열아홉 미성년자와 연애를 병렬로 하다가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니깐(본인은 기혼자라 시집 갈 수도 없는데) 실연당해서 속상한 거면서 사회주의를 제대로 행할수 없음에 자살하는 새끼들만 주구장창 보다가
(곧 사형당할 나--브루노--만큼이나) 외투 만드는 이--준토, 준토 처--의 생계와 생존의 위협도 이해를 해서 가장추운 1월 사형당하러 로마로 떠나는 이가 외투를 돌려주고 가다니.
우리나라같았으면 생업에 종사한적 없는 부르주아 작가부터가 자기는 프롤레타리아 행세하면서 서술할 때부터 준토는 부르주아 취급하고 벌레 거머리 악덕 상인으로 묘사했겠지. 이 사람은 곧 죽는데 넌 그냥 외투 하나도 거저 못주냐 이런 느낌으로 독자까지도 비난하도록 폭력적인 소설로 만들었겠지.
문득 모든 소설을 오디오북으로 읽고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나를 상상하였다. 그림을 그리면서 점점 보이지 않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노안, 백내장, 망막 색소 변성증이 평소엔 일하면서도 약간 불편한 정도였는데 그림을 그리면서는 좀더 답답한 느낌이 있다. 못 보는 걸 어떻게 옮겨 그려야 할까. 이럴 때 최선의 답은 공백 밖에는 없어서 허무해지는 순간이 있다.

죽는다는 것은 번호가 바뀌는 일이다. 김혜자 배우님이 읽으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아기 예수 중에서.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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