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중요한 마음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더 중요한 마음이라는 걸, 숨이 꺾여 넘어가는 순간을 다섯 번 겪고 깨달았다. 그래서 그를 신고할 수 있었다.
그와 헤어지겠다고 마음먹자 이전에 원했던 것들이 다 부질없어졌다. 그에게 인정받고 싶지 않았고 사랑받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간단했다니. 이렇게 쉬웠다니. 아아, 이렇게 가치가 없었다니. 그를 견디는 일은, 몸이 짓눌리는 그 순간을 참아내는 일은 정말, 정말 어려웠는데. 아마 그는 당황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내가 조용히 모든 걸 감내하는 모습이 익숙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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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팀장이 내게 아들 같은 사람인 거 알지? 내가 그 친구에게 직접 휴직 권유했어. 그런 짓은 하면 안 되는 거지. 나도 페미니스트라네. 나는 우리 막둥이 철저하게 교육해. 지금 아들이 열 살인데, 항상 그렇게 이야기하거든. 여자는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다. 다른 남자 녀석이 네 코를 부러뜨리면 바로 맞받아 때려야 하지만, 여자는 아니다. 우리 아들은 장난으로라도 여자애 절대 안 때려. 놀리고 도망간다거나 장난을 쳐서 울리는 일도 없지. 점잖은 녀석이야. 그런데 가끔 여자애들한테 맞고 올 때가 있어. 요즘 여자애들이 드세지 않나. 우리 애가 점잖게 구니까, 여자애들이 자기가 남자를 힘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쫓아와서 발차기 하고 주먹으로 등을 때리고 난리도 아니야. 남자애를 때리면서 무슨 희열을 느끼는 모양이야. 사실 우리 애가 봐주는 거라는 걸 모르고 말이야. 나는 말이야, 여자애들 부모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봐. 남자든 여자든 그딴 게 어딨어. 주먹질을 하는 것 자체가 문제 아닌가? 여자애도 남자애들한테 주먹 휘두르면 혼나야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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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애들은 혹시라도 힘 조절 못해서 큰 사고 칠까 봐 참으라고 그렇게 교육시키는데, 여자애들은 마음대로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하도록 내버려둔다니 말이 돼? 그런데 발길질하는 여자애들은 얼굴이 좀 별로야. 진아 씨 같은 여자는 절대 모르겠지만, 그런 애들이 사실 남자애들 관심받으려고 드세게 구는 거지. 아니면 진짜로 지기 싫어하는 거고. 나도 회사 생활 오래 했지만, 그런 여자애들은 커서도 똑같아. 말을 안 들어. 고집이 세. 얼굴도 좀 별로야. 내가 일반화하려는 건 아닌데, 그런 여자들은 진짜 얼굴이 영 그래. 남자도 똑같아. 말귀를 못 알아먹는 놈들 꼭 있지. 그런 남자들은 싸가지가 없어. 자기들이 잘나서 여기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하는 놈들이지. 너무 오만해. 사회에서 남자가 그러면 안 돼. 어쨌든 말이 새나갔는데, 나는 진아 씨 편이라는 이야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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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아 씨가 일 잘하는 거 알아. 기사 봐서 알겠지만, 이 사안에 대해서 나는 어떤 말도 안 했어. 경쟁 사회잖아, 진아 씨. 진아 씨가 계속 성과를 올렸으니 모두 당연히 경계를 하지. 그럼 조심했어야 해. 혼자 해서 성과가 좋아도 질투를 받기 마련인데, 그렇게 대놓고 이 팀장 도움을 받으면 누가 실력으로 인정해주겠나. 자네 지난번 프레젠테이션 때문에 야근했을 때 기억하지? 그래, 그날 말이야. 자네 이 팀장 책상에 자료 더미 갖다 주면서 빨리 여기서 쓸 만한 거 찾아내라고 소리쳤다며? 아니야? 그래, 알았어. 알았는데, 중요한 건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야. 그러니까 진아 씨 행동도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이거야. 아 다르고 어 다른 거지. 진아 씨가 거짓말을 한다는 게 아니라, 회사에 진아 씨가 이 팀장을 이용한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는 거야. 중요한 건 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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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지 않을 거야. 걔를 보며 애당초 무슨 생각을 한 적이 없을 테니까. 그리고 계속 짜증을 내. 걔 잘못인 것처럼. 네가 잘못해서 내가 기분이 나쁜 거다. 상처를 받았다. 너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계속 강조해. 그러면서 슬쩍슬쩍 말해. "너는 날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니?" 그러면 아주 안달이 날 거야. 이번에야말로 잡은 운명적인 사랑이 자기 잘못 때문에 또 사라질까 봐 환장을 할 거라고. 절대 선택권을 주지 마. 네가 주도권을 쥐고 흔드는 거야. 걔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지만, 한때 진심으로 사랑했던 마음 때문에 의리를 지키는 거라는 식으로 말해. 물론 걔가 널 원망할 수도 있어. 따질 수도 있지.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변하냐고. 그럼 말해줘. "처음부터 잘 알아보지도 않은 건 바로 너라고. 네가 나를 좋아해서 그런 거잖아?" 중요한 건 걔한테 계속 틀렸다고 말하는 거야. 절대 어떤 의견도 인정해주지 마. 그러면 더 인정받으려 노력하고 네 눈치를 볼 거야. 그때마다 슬쩍 틈을 보여줘.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진실된 사랑이 돌아올 수 있다고. 그럼 끝이야.
헤어지기 전까지 너는 걔를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어. 걔는 네가 원하는 건 다 해줄 거야.
그래, 뭐부터 하고 싶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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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기억하는 건, 진아도 꽤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야. 그때 진아가 유리를 진절머리 내는 것이 눈에 보였거든. 글쎄, 몰라. 이건 내가 진아에 대해 느낀 바가 섞여서 좀 객관적인 기억은 아닐 수도 있어. 너는 듣기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진아를 안 좋아했어. 거만하다고 생각했지. 자기만 성적 맞춰서 대학 온 것도 아닌데, 매일 울적한 얼굴로 나타나고, 다른 애들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내가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티를 너무 많이 낸다고 생각했어. 왜 자기 기분을 주변 사람들이 다 알게 해? 자기가 뭐라고? 솔직히 말하면, 난 진아가 유리에게 비슷한 점을 느껴서 그렇게 반응했다고 생각해. 맘먹고 신입생 환영회 왔더니 유리 같은 애가 옆에 앉아 있는 거잖아. 싫었겠지. 그리고 자기의 진짜 모습을 들킬까 봐 무서웠겠지. 기분 나쁘게 듣지 마. 그때 그렇게 느꼈다는 것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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