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갖고 있는 공포감. 특히나 전자기기들. 중금속들과 기기 속 내 정보들이.

당신은 매주 화, 목, 일요일에 쓰레기를 내놓는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그간 쌓인 쓰레기를 정리한다. 전염병의 시대를 살게 된 이후로 당신이 만들어내는 쓰레기는 더 늘어난 것만 같다. 줄이려고 애쓰는데도 금세 쌓인다. 당신이 이 지구에 없을 훗날에도 당신이 썼던 모가 닳은 칫솔, 끊어진 머리끈, 깨진 머그잔은 땅속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썩지도 않고 남겨질 것들을 생각할 때마다 당신은 질끈 눈을 감는다.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걸까. 물론 괜찮지 않다. 살아가는 일이 죄스럽다. 당신은 수거차가 다녀가기 전에 늦지 않게 쓰레기를 내놓기로 한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반투명한 비닐봉지에서 달그락달그락 앓는 소리가 난다.

81/96

대단한 물건들은 아니다. 잼이나 소스, 피클이 들어 있던 병, 차나 쿠키, 디퓨저가 담겨 있던 상자들이다. 당장은 쓸모가 없지만, 막상 버리려고 하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들이 당신에게 소중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소중해질 기회조차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금색이나 은색의 병뚜껑, 맑게 빛나는 유리, 아름다운 일러스트가 그려진 틴케이스와 단단한 마분지로 만들어진 상자. 버려지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다.

당신에게는 더는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이름들이 있다.
서서히 멀어졌거나 뒤돌아 떠났거나, 결코 돌아올 수 없을 이름들. 대답을 들을 수 없다고 부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자주 그 이름들을 부른다. 묵독을 할 때처럼,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을 때처럼 호명한다. 그 이름들은 아무런 대답이 없지만 당신은 선명하게 듣는다. 고유한 말투. 희미한 미소, 가만가만한 고갯짓을 본다. 때때로 그 이름들이 당신의 일상에 불현듯 출몰하기도 한다. 한 줄기 바람이 당신의 머리칼을 흩어놓고 나뭇잎 사이로 유유히 빠져나갈 때, 잔물결 위 빛 조각 하나가 끈질기게 당신의 눈길을 따라와 반짝거릴 때, 그것들이 매단 투명한 이름표를 목격한다. 당신은 당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는다. 곧바로 알아차린다. 아니, 덮어놓고 믿어버린다. 해묵은 그리움과 간절한 기도가 다르지 않다고 당신은 믿는다.

79/93

너의 죽음을 소재로 삼지 않겠다.
2001년 여름, 당신은 일기장에 쓴다.





 
나는 수첩에 적힌 외마디 단어들 위에 검은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넣는다. 봄이 오면 뿌리려고 하얀 종이에 고이 싸놓은 작은 씨앗들 같다. 까맣게 지워졌어도, 아니 까맣게 말랐어도 당신은 이제 안다. 씨앗들이 품고 있는 소리를, 하나하나의 이름을. 이 씨앗들을 당신에게 나누어주고 싶다. 씨앗들은 당신에게로 가서 어떤 이야기로 자랄까. 부디, 당신과 당신의 이야기가 무탈했으면, 덜 쓸쓸했으면 좋겠다.
씨앗들은 이제 내게 없고 당신 손바닥 위에 놓여 있다. 부질없는 일일까.
과연 시간은 잘도 흘러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