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죽었을 때 이렇게 많은 생각과 추억을 건넌다면 죽음에 대해 후회할 것 같아서 읽으면서도 어떤 조마조마함이 생긴다.

또는 빨간 광역버스가 와 버리는 바람에 진짜 멀리 갈 때도 물론 있었다. 수원에도 한 번 갔고, 일산에도 갔다. 그러면 잠시 게임 중지를 외치고 동네를 산책했다. 처음 와 보는 곳이니까 무엇이든 다 재미있었다. 그렇게 3000번 버스 덕에 화성도 가고 1500번 버스 덕에 호수공원도 돌았다. 거기 가자, 하고 데이트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러고는 반대편 정류장에 자리를 잡고 앉아, 다시 서울에 들어가는 빨간 버스가 올 때까지 서로 농담 따먹기를 하며 기다렸다.

영원히 그렇게 지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런 순간이 평생 지속될 거라고 막연히 기대하기에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것에 억눌려 있었다.

95/301

"몰라, 나는 결혼한다면 돈 많이 버는 남자랑 하고 싶으니까 그런 줄 알아."

그럼 나랑은 결혼 안 한다는 얘기야? 건웅이 방 저쪽 끝까지 있는 힘껏 굴러가더니 그대로 이불을 몸에 말며 다시 용수철 튕기듯 빠르게 굴러와 내 몸을 덮칠 때 나는 깔깔대며 웃었지만, 그렇지만 내게만 들리는 툭 소리와 함께 무언가 끊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건웅은 계속 웃으며 내 얼굴에 입을 맞췄다. 가볍고 성근 입맞춤. 그리고 나는 체념했다. 나는 얘와 언젠가는 이별하겠구나. 언젠가는 남이 되겠구나.

97/301

"너 죽은 아이들의 이름이 어른들에게 어떻게 조롱당하는지 다 봤을 거 아냐. 뉴스 기사 댓글 같은 걸로. 슬퍼하는 척하다가 금세 돌변하는 거. 억울한 죽음을 다시 반복되게 하지 않으려 조금이라도 노력할라치면 시체 팔이 하지 말라는 이야기나 듣는 거. 우릴 과연 사람들이 믿을까? 우리에게도 어린애 가지고 무슨 득 보려 그러느냐는 핀잔이나 놓을 걸."
99/301

지하층과 이, 삼 층은 모두 ‘원룸을 절반으로 나눈 원룸’으로 채워진, 그리고 사 층은 주인이 통째로 쓰던 건물. 일 층에는 원룸이 아니라 구멍가게라고 하는 게 어울릴 법한 슈퍼가 위치해 있었다.

"주상복합이네."

"그렇지."

부엌이 없고 한 층 전체가 복도 끝의 공용 부엌을 사용하며, 무릎 높이 정도까지밖에 올라오지 않는 아주 작은 냉장고 하나가 옵션으로 덜렁 있는 방이었다. 도배를 다시 한 것 같았는데 매직아이를 하듯 눈의 초점을 풀면 그 아래에 검은 곰팡이 자국이 가득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천장은 아주 비스듬해서, 가장 천장이 낮은 방 끝에 내가 서면 정수리가 닿았다. 서진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나는 키가 작으니까 닿을 일 없어, 괜찮아. 고시원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래도 고시원을 구하는 것보단 여기가 나은 것 같다고 했다. ‘집’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100/3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