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에게 물려 잠 깼다. 어느 선생님이 공감을 표해주셔서 울었고, 고 이영승 선생님의 부모님이 올리신 추모영상들 보다 울었고… 잠이 안 왔다.

아까는 아이들 만나기 직전 설렘 가득했던 과거에 내가 쓴 글을 보고 기분이 울컥했다. 또 교육실습 한달 뒤 내 글엔 그런 말이 있었다.


대부분의 애들은 착하고 예쁘다. 아무래도 나는 선생이 될 수 있는 인간이 아닌 거 같다.


어느 곳에서나 악마는 있다. 진상도 있고. 그런데 유독 학교에서 그러는 느낌. 또 선생은 애는 죄가 없다 생각하기에 그런 애나 학부모나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하지 웬만해서 고소고발 안한다. 라포 형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직업인데 그걸 깨뜨리겠냐고. 물론 그렇게 해도 여태까지 선생이 이긴 적은 통계로 봐도 손에 꼽고. 부모부터 제발 부모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지능 문제가 아니라 이건 가정교육이 문제다. 윤리 도덕이 전혀 안된 집안들이 뭐가 어째?

여덟 명의 필자가 자율적으로 선택한 텍스트 중 여섯 작품이 ‘우연히’ 특정 시기에 몰려 있는 것이다. 세계사에 큰 지각변동이 일어난 이 시기의 작품은 주목할 만하다. 1910년대부터 1940년대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나라의 문학은 묘한 공통점을 보인다. 20세기 이후 여성의 사회적 위치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집 밖으로 나와 적극적으로 경제활동을 하거나 정규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늘어났다. 서구 여성들은 참정권 투쟁을 벌였고 식민지 여성들은 여성운동과 더불어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싸움도 전개해나갔다. 조직적인 투쟁의 경험이 쌓였다. 그러나 이 책에서 소개하는 작품이 여성을 규정하는 시각은 마치 세계사의 흐름에 맞서기라도 하는 듯 보인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문학적 역공이다. 문학적 역공을 주도하는 자들은 여성이 시민으로서 자리를 찾으려 하면 할수록 남성성에 위협을 느끼고, 여성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여성들은 언제까지 문학에서 이런 모욕을 경험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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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읽기가 작품의 의의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 중에는 시대와 함께 호흡하며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계속 읽어볼 만한 흥미와 매력을 지닌 작품도 있지만, 냉정한 재평가를 통해 ‘고전’, ‘걸작’의 자리에서 빼버려도 아무 문제가 없는 작품도 있다. 예술적 남성 동맹이 추구해온 자유·아름다움의 개념과 방향성을 의심하지 않으면 전위는 불가능하다. 모두가 자유를 갈구하지만 여성을 착취하는 현실은 외면한다. 권력을 분석하지 않고 자유를 말하는 것, 타자를 주체로서 존중하지 않고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은 예술적 사기다. 자유와 아름다움이 타자를 모욕하며 형성되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구속이며 추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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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나 사회가 여성의 정신세계를 규정하고 단죄하는 방식을 알고 난 뒤에는 과거에 이 작품이 가진 문제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단순히 문제를 살피지 못한 것을 넘어 심지어 재미와 희열을 느끼며 좋아했다니! 여성에 대한 비하와 모욕이 여성 자신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사회에 공기처럼 깊숙이 스며들어 있음을 새삼 깨달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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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 욕망이나 인정 욕구가 꺾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철학자 에릭 호퍼는 《맹신자들》에서 창조적 욕구의 좌절은 심각한 자기 경멸이나 타인에 대한 격렬한 증오로 연결될 수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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