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택시운전사 : 일반판
장훈 감독, 송강호 외 출연 / 에프엔씨애드컬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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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쓸까 하다가 이곳에 쓴다.


두번째로 보는 택시운전사..


참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든다. 사람들의 사상이란 물리법칙처럼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서 한 세대만 지나도 너무나도 다른 양상을 보인다. 마치 광주 민주화 운동 처럼 말이다. 평화와 존중이 당연한 세대인 지금에서는, 폭력진압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상하고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바로 몇 해 전,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만 하더라도 광화문 시위가 제대로 뉴스를 타지 못했고 유혈 진압이 심심치 않게 이루어졌던 기억이 난다. 아마 내동생이 이 얘기를 듣는다면 정말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겠지. 그만큼 우리 세대에게, 그리고 내 다음 세대에게는 평화가 기본값이 된 것이다.


사람의 삶이란 무엇일까. 사람의 목숨 값이란. 광주 사태는 너무나 끔찍한 것이지만 보다보면 왜 이런 사태를 겪어야만 하는가 그런 근원적인 질문이 고개를 든다. 차별이 만연하면 그것이 차별인줄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끔찍한 진압이 뉴스를 타고,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그만큼 시민과, 평등권과 인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성장했기 때문이리라.

내가 배워왔던 세상과 실제의 세상은 항상 좁혀지지 않는 갭이 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세상이 1+1=2 처럼 딱 맞춘 공식처럼, 크면서 배워왔던 권선징악의 공식에 딱 들어맞게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세상을 세상 자체로 보지 못하고 책, 영화등 매체로밖에 접할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역사서처럼, 기록되고 남겨지는 것은 선별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더 극적이고, 사람들의 염원이 많이 담긴 것일 수록 더 주목을 받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우리의 세상에 대한 인식과 실제 세계는 좁혀질수 없는 갭을 사이에 두고 진행되는 수밖에 없다. 


광주와 같은 끔찍한 일들이 과거에도 많았을 것이다. 수없이 많았겠지. 다만 그것이 다 기록되지 못한 것일 뿐이리라. 왜자꾸 세상은 어느 쪽으로 뻗어도 디스토피아 같다는 생각이 들까. 이제 한국에는 이렇게 끔찍한 일은 더이상 벌어지지 않지만(적어도 드러나는 뉴스에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여전히 우리는 힘들다. 세상은 힘든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풍선 효과처럼. 지금은 선과 악의 구조가 명확히 눈에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에 스며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위정자의 입장에서는 이제 굳이 그런 폭력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쟁취했지만..글쎄. 여전히 우리는 매우 쉽게 선동당하는 위치에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모르고 선동을 당했다면, 지금은 스스로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라 생각하면서 선동당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겠다. 쓰고 나니 똑같은 말 같군. 


아마 쓰는 내내 딴 얘기로 계속 새겠지만. 위정자 입장에서는 광주 시민들의 목숨이 제 목숨과 똑같은 한 개의 목숨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한나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생각나는군. 이 후기를 다 쓰고 책을 읽어 볼 계획이다. 하여간에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겠지. 그리고 그 명령을 따른 수많은 군인들. 그들도 그냥 위에서 시키니까 따랐을 것이다. 어떠한 반성적 성찰 없이. 나에게도 경종을 울린다. 지금 내가 하는 일. 그 일의 무게를 느끼게 만든다. 


그냥 여러가지 잡생각이 머릿 속을 떠돈다. 현실은 영화처럼 명암이 명확하지 않으니까. 쓰다보니 그것도 좀 아이러니했다. 전범국인 독일 기자가 광주 폭력진압의 사태를 세계에 알렸다는게. 그리고 그 일이 또다른 전범국인 '안전한'일본을 경유해 이루어 졌다는 게.


만약 내가 지금 상황 그대로 그 시대로 돌아간다면 나는 시위를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대학생인 내 동생은 다르겠지. 그 애는 아마 시위를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견디지 못하고 결국 나도 시위대로 나갔겠지. 그럼 처음부터 시위에 나간 대학생이 옳은 것일까? 아니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나? 더 많이 살았다고,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린다고 할 수 있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 '많이 살았다'의 연령기준은 어디인 것일까? 40대? 50대? 아니면 이것은 나이에 따른 것이 아니라 경제력에 따른 것일까? 내가 물론 사회에 찌든 직장인이 아니라 대학생이었다면 아마 나도 불의에 항거하는 시위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직장인인 나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지. "아직 사회를 몰라서 저러네. 젊은 날의 치기로 저렇게. 뭣도 모르면서." 그럼 사회의 부조리함에 치이고 옳고 그름의 경계가 무뎌진, 적당히 불의에 순응하는 그런 삶의 태도가 더 현명한 것이 라고 할 수 있을까. "너가 아직 몰라서 그러는데," 이 말을 나는 잘 모르겠다. 차라리 모르는게 더 나은것도 있지 않을까? 더 많이 안다고 더 훌륭한,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모든 생각이, 등따시고 배부르고, 먹고 살 만 하니까 든다는 건 변명할 여지가 없다. 만약 내가 하루 벌어 하루 살기 급급했거나, 아니면 그날의 광주 금남로 한가운데 있었다면 이거저거 생각할 것도 없이 현장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결국 위에 구구절절 쓴 것은 배부른 인간의 피상적이고도 어설픈 사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그냥 떠오른 생각이니 남겨본다. 단절된 미래의 나에게, 과거의 나를 보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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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혼자다 - 결혼한 독신녀 보부아르의 장편 에세이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박정자 옮김 / 꾸리에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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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프면서 근 한달간 책을 손에 쥐지 않았다. 활자를 읽을 줄 안다는 것은 정말 내게 내려진 축복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책읽는게 생각보다 적극적인 활동임을 아프고 나니까 알겠더라. 아무리 오만가지 피상적인 생각을 하면서 특출난 척은 다 해 봤자 결국 인간은 동물과 다를 바 없이 신체에 메인 일차적 존재임을, 정신적 활동은 신체를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아주 아주 뼈저리게 느낀 한달이었다. 무튼지간에 아프고,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까 도무지 두뇌활동이란 걸 하기 싫어지더라고. 


모든 사람은 혼자다.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번뇌하는 인간이라면 제 길을 정립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사변적이고 피상적인 사유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보부아르의 이 저서는 주장하는 바가 꽤나 명확해서 좋았다. 요약하자면, 인간의 존재에 '왜' 라는 이유란 없으며 사는 동안 자신이 정립한 기획에 따라 열심히 살다 가면 된다는 게 보부아르의 생각이다. 인간이 왜 존재하는가, 나는 왜 태어났는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생각에 한번 빠져들기 시작하면 결국 질문들의 종착지는 죽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질문의 과정에서 모든 의지와 열망을 잃어버리고 마침내 죽음과 다름없는 상태, 죽음밖에 원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물론 그것 또한 개인이 선택하는 길이라 내가 왈가왈부 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가능한 한 그 길을 가고 싶지는 않다...가능한 한 말이다..

 


그 다음에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다! 누워서 모든것의 헛됨을 통감하며 허망하게 시간을 보내는 삶과 매순간 그 다음을 향해 충실한 삶,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과연 후자를 택할 것인가? 헛됨의 역설은 무척 매혹적이고 그 자기파괴적인 느낌은 너무나 달콤하여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어느순간 빠져들기 십상이다. 이것은 오묘한 중독성이 있어서 한번 빠져들었다간 그 생각의 개미지옥 속에서 다시 빠져 나오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인간은 현재를 지양하고 초월성을 지향하는 존재.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받아들인다면 삶을 살아가는 동안 머리가 조금은 명확해지지 않을까. 적어도 내가 왜 현재에 머무르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 다음을 원하는 지는 알게되는 거니까. 덧붙여 이것은 삶의 길 곳곳에 파여 있는, '산다는 것의 순수권태', 보편성이 뿜어내는 무상함으로의 유혹으로부터 고개를 돌리는 지침서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5.20 마지막 2 챕터를 읽고 나서 덧붙임


결국 인생의 허무함을 논하는 것은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아니 관점의 차이인가? 시네아스적으로 살기로 선택한 사람들도 그들이 선택한 것이므로 그들의 삶의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 그렇지만 나는 보부아르의 관점에서 서서 인생이라는 노역에 임하고 싶다.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무상적인 행동이야말로 인간본연의 존재양식이라는 그의 관점에.


그의 의견대로 인간은 순환적 존재이며, 선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허망하게 느껴지고 무용하게 느껴지는 시점도 올 것이다. 파뤼스 또한 그런 생각을 안해보진 않았을 것이다. 결국 나는 죽을 것이고,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 하지만 그런 허망함에 빠져있다가도,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자신을 기투하는 데 힘을 쏟았을 것이다. 그것이 인간 본성이기에. 기투하고자 하는 인간 본성이 엔진처럼 작동하여 현재 인류가 이곳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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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리커버 일반판, 무선)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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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축이 된 여성, 이미 진행 중인 디스토피아


책을 산지는 꽤 됐는데, 사 놓고 백만년만에 드디어 읽는데 성공했다. 

첫머리부터 정말이지 여자 입장에서는 끔찍하고 역겹고 굴욕적인 내용의 연속이라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기면서 이걸 계속 읽어야 할지, 아니면 여기서 덮고 좀 더 생산적인(?) 서적을 읽을 것인지 매번 고민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힘겹게 힘겹게 '시녀 이야기'라는 산을 오르고 있는데 소설 중반부가 넘어가자 갑자기 팽팽하게 잡아당긴 실처럼 긴장감 넘치게 내용이 전개되는 것이 아닌가. 덕분에 결말까지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달려갔다.


책을 읽는 내내 머리에 떠다닌 의문점은 '그래서 이 소설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었다. 애초에 페미니즘 도서라고 광고하길래 산 책이었는데, 가축으로 취급되는 여성 묘사가 상당히 구체적이고 사실적이어서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당최 이게 과연 페미니즘 도서가 맞는지 자꾸만 의구심이 들었다.


그저 짓밟히는 여성에 대한 묘사, 자원이라기보단, 흡사 가축 취급을 받는 여성들...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 길리어드가 남자에게 이득이 되는 사회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득을 보는 것은 소수의 고위 권력층뿐. 나머지 남성들 또한 자재처럼, 그저 평생 오르지 못할 헛된 꿈을 꾸면서 보초를 서고, 노역을 한다. 

내가 끊임없이 굴욕적이고 역겨움을 느꼈던 부분은 여자들이 '성'적으로 착취를 당하는 부분이었다. 출산만을 위해 존재하는 여성. 그것이 가축과 다를 바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냥 착취당하는 것과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이냐 한다면, 후자가 전자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굴욕적이라는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갑자기 수년전에 보았던 모 드라마가 떠오른다. 인상깊은 장면: 여자 주인공이 강간 당할 위험에 처하자 남자 주인공은 사랑하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대신 자기를 강간하라 말한다. 그리고 그는..당한다. 강간을! 굉장히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온라인에서 후기를 찾아보았는데 그 장면이 적지 않은 여성들(남성의 반응은 모르겠다. 나는 여성 유저들의 후기를 찾아봤으니까)에게 충격을 넘어선 역겨움(?)까지 들게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러나..원래 이런 반응이 맞는 것이다. 눈을 떴다 하면 수없이 쏟아지는 여성에 대한 성폭행, 살해 뉴스로 인해 우리는 여자가 당하는 이야기에 너무나도 무뎌져있다. 이 끔찍한 일들에 우리 스스로가 무감해진 것이다. 여기 피해자의 성별만 살짝 바꾼것만으로도 상당한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충격적이지 않은가? (아마 남자 주인공이 우락부락한 근육질에 커다란 덩치를 가진, 누구보다도 남자답다고(?) 할 수 있는 캐릭터여서 그 효과가 더 컸을 것이다)


이야기가 딴데로 샜군. 하여간에 성 착취의 대상이 되는건 노동착취와는 결이 다르고 강한 굴욕감을 준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그래서 마지막 장을 덮는 그순간까지 계속 들었던 의문은 이거였다. '작가는 왜 이 책을 썼을까?'

마거릿 애트우드, 그는 어쩌면 여성들의 기본권을 위해 싸우는 페미니스트들을 기피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여성 동지들에게 외치기 위해 썼을 수도 있다. 마치 주인공 준의 어머니가 준에게 하는 짤막짤막한 대사 처럼 말이다. 그 말을, 작가는 이미 세상은 평등하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여성 동지들에게 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세상은 전혀 평등하지 않고, 우리가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싸우지 않는다면 길리어드와 같은 사회는 언젠가 도래할 것이라고. 그것도, 빠르게.


사실, 여자를 가축으로 보는 시각이 그렇게 낯설지가 않다. 기억나는지? '가임기 지도' 사건을. 전국의 임신 가능한 나이의 여자 수를 핑크색으로 색칠했던 그 지도. 대체 왜 그런 걸 만들었을까? 가임기여성을 다 임신시키라는 얘긴가? 여성을 마치 가용 자원으로 보는 듯한 그 시각... 놀라운 건 그 불쾌함을 한세대 위인 내 어머니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오히려 분노하는 여성들에게 분노했다. 그게 뭐 어떠냐고. 체화된 차별의 시각은 이토록 무섭다. 본인을 가축화해서 바라보는데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기에... 





우리가 어디로든 가 버리는 건 그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야. 내기를 걸어도 좋다고. - P309

당신이 내 돈을 다 갖는단 말이지. 내가 죽은 것도 아닌데. 농담처럼 말했지만, 막상 내뱉고 보니 소름이 끼쳤다.
쉿. 루크가 말했다. 아직도 마루에 무릎을 꿇은 채로 있었다. 내가 언제까지나 당신을 돌봐줄 텐데 뭘.
난 생각했다. 벌써 이이가 나를 봐주는 척하고 있어. 그러고는 또 생각했다. 벌써 나는 피해망상에 시달리는구나. - P310

나는 행진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루크는 그래 봤자 헛수고라고, 식구들, 루크 자신과 딸애를 생각하라고 말했다. 나는 집안일을 더 많이 하고, 빵도 더 많이 구웠다. 식사 시간엔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때쯤 나는 예고 없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고, 침실 창가에 앉아 창문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 P311

어떤 엄마도, 아이가 바라는 완벽한 엄마의 모습이 될 수는 없을 터이다. 그리고 그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불만이 많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 형편없지는 않았다. 아니, 심지어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여기 계셨으면 좋겠다. 마침내 내가 깨달은 이 사실을 말씀드릴 수 있게. - P313

내가 직장을 잃은 그날 밤, 루크는 사랑을 나누고 싶어했다. 나는 왜 기분이 내키지 않았을까? 절망감에라도 루크에게 달라붙었어야 하는데.
(...)
우리에겐 아직도...그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아직 뭐가 남았는지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갑자기 루크는 ‘우리‘라는 말을 쓸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한, 루크는 아무것도 빼앗긴 게 없었다.
(...)
그이는 마음에 걸리지 않는 거야. 그이는 전혀 마음 쓰지 않아. 어쩌면 오히려 잘됐다고 여길지도 몰라. 우리는 더 이상 서로의 것이 아니야. 이젠, 내가 그의 것이 되어 버린 거야. - P315

오, 하느님, 저를 지워주소서. 저를 다산하게 하소서. 제 육신에 고행을 주셔서, 저로 하여금 번식하게 하소서. 채워지게 하소서...
기도에 흥분해 제정신을 잃는 사람들도 있었다. 굴욕의 황홀경. 신음소리를 내고 흐느껴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 P337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꾸면 되지. 우리는 서로에게 또 스스로에게 말하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남자로 바꿨다. 변화는 언제나 좋은 거라고 우리는 굳게 믿고 있었다. 우리는 수정주의자였다. 우리가 수정한 건 물론, 우리 자신이었다. - P393

모이라가 나처럼 되는 건 싫다. 굴복하고, 순응하고, 근근히 제 목숨이나 연명하게 되는 건 싫다. 결국은 그게 문제다. 나는 모이라에게서 용감무쌍함을 기대한다. 허세를 부리고, 영웅적인 행동을 하고, 홀홀단신 적진에 뛰어들어 전투를 벌이기를 기대한다. - P435

우리는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서로 속삭이는 법을 배웠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 아주머니의 눈을 피해 팔을 뻗어 허공을 가로질러 서로의 손을 만질 수 있었다. 머리를 바짝 붙인 채로 옆으로 돌아누워 서로의 입을 지켜보며 입술을 읽는 법을 터득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침대에서 침대로 이름을 교환했다.
알마. 재닌. 돌로레스. 모이라. 준.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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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부의 추월차선
엠제이 드마코 지음, 신소영 옮김 / 토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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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추월차선: 사업가들을 위한 길잡이


부의 추월차선이란 젊은 나이에 부자가 되는 길을 말한다. 그리고 이 길에 올라 타는 것은 그 누구라도 될 수 있다! 당신도!


요약하자면, 성공하고 싶다면 사업을 하라는 얘기다. 어딘가 좀 자기계발서적 느낌도 나는 것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보면 상당히 고무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강추까지는 아니지만 젊었을때, 살면서 아직 인생에 기회가 있다고 생각될 때 한번쯤 읽어봐도 나쁘지 않을거 같은 책이다. 


결고 짧은 내용은 아니지만, 자기계발서를 몇 권 읽어봤다면, 자신의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다면 상당부분 속독으로 넘어갈 수 있다. 책은 현실적인 조언을 살짝 가미한 온갖 긍정적인 메시지들로 가득 차 있지만, 삶을 조금이라도 살아보았다면 인생이 이 저자가 말하는 것만큼이나 녹록치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기 위해선 실천해야 한다. 저자의 말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기회들을 파고들어야 한다. 성공으로 가는 길에 비관주의자들은 없다.


그러나 성공할 때까지 계속해서 도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열정이다. 이 책과 같은 서적들은 그저 가이드라인만 제시해 줄 뿐이다. 많은 이들이 중도에 포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현실적인 이유도 많겠지만 아마 열정의 고갈이 가장 클 것이다. 열정은 우리가 무엇인가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꿈꾸고 갈망하는 원천이다.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모터와도 같다. 열정은 꾸며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지만 자신만의 열정을 찾을 수 있다. 그 다음 단계에 실천이 있다. 이 책은 성공으로 가는 이정표를 아주 훌륭하고도 두루뭉술하게 제시하고 있는데, 결국 생각해보면 그것이 이 책이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인 것이다. 일상에서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결국 인생의 운전대를 쥔 각자의 개인들, 나 자신이 찾아야 하는 일이다.




<추월차선 라이프스타일을 위한 40가지 다짐 中>


1. 나는 서행차선이 내 꿈을 묻어 버리게 두지 않을 것이다.

2. 나는 주말을 위해 내 영혼을 팔지 않을 것이다.

3. 나는 내 시간을 돈과 맞바꾸지 않을 것이다.

4. 나는 시간이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5. 나는 내 꿈의 실현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6. 나는 돈이 아니라 니즈를 좇는 길을 갈 것이다.

7. 나는 애정이 아니라 열정으로 스스로에게 동기를 부여할 것이다.

8. 나는 연못 속의 구피가 아니라 바다 속의 상어처럼 헤엄칠 것이다.

9. 나는 아이디어에 집착하지 않고 실행을 할 것이다.




당신의 블록버스터급 아이디어는 남들도 생각한다.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느 사람은 아이디어의 주인이 이니다.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사람이 모든 것을 소유한다. - P358

세상 최고의 사업 계획은 실행 실적이다. 실행 실적은 사업 계획을 승인하는 역할을 한다. - P363

코미디언 빌 코스비는 "성공으로 가는 열쇠는 모르지만 실패로 가는 열쇠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 P371

모든 사람은 목에 보이지 않는 사인을 달고 다닌다.

"나를 중요한 사람으로 느끼게 해 달라."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할 때 이 문구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 P391

당신의 믿음이 미래의 선택을 좌우합니다. 진전을 이루고 싶다면 진전을 이룰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과정을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간단한 선택에서부터 시작하세요. 더 나은 선택을 내리기 위한 첫 번째 과정은 과거에 내린 선택들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쩌다가 지금과 같은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까?

(중략)
당신이 현재 화장실 청소부라도 상관없습니다. 다수의 니즈를 해결할 수 있다면, 한 사람의 니즈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이 누구냐고요? 바로 당신입니다. - P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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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10주년 개정증보판) -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니콜라스 카 지음, 최지향 옮김 / 청림출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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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없는 일상은 삶을 편협하게 만든다


이런 류의 책을 읽을 때마다 평소에 곧잘 품곤 하는 의문점이 얼마나 소중한가 깨닫는다. 일상을 고찰없이 살아가면 흥미를 느끼는 책의 폭이 좁아진다. 평소에 의문점을 많이 가졌던 분야의 책을 읽을 수록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고 반박하면서 그렇게 책 속으로 더욱 빠져들고 깊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인간 뇌의 '가소성'이라는 특징 덕분에 우리의 뇌는 외부자극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현재 인터넷은 이런 뇌의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곧잘 읽었던 장편소설이 버거워지고, 한가지 업무에 집중하기 어려워지고, 자꾸만 sns상의 단편적인 뉴스에 관심이 가고 휩쓸리는 것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터넷이 유비쿼터스가 되어감에 따라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우려스러운 부분은,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뇌가 이렇게 급격하고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이 종착지를 모르는 거대한 파도에 부표마냥 휩쓸리고 있다는 점이랄까.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계속 카카오톡의 메신저를 확인하고 불쑥불쑥 이메일의 답장을 떠올린다. 이전에는 간단해 보였던 이 글쓰기 화면창에 숨겨져 있던, 인지하지 못했던 수많은 distraction의 향연이 이제는 보인다. 작업표시줄을 가득 메운 아이콘부터, 메뉴창, 빼곡히 들어 차있는 북마크 주소, 그 위에 옹골차게 올라앉은 크롬 확장 메뉴에까지 시선이 닿자 갑자기 버겁다. 아이콘들이 마구 소리치는 것 같다. 내가 글쓰기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조용하고도 맹렬하게 악을 쓰는 것 같다.


이제는 알겠다. 생각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왜 종이에 손이 갔는지를. 아무것도 없는 누런 종이는 나를 사색의 길로 이끈다. 비록 생각의 속도를 손이 따라가진 못하지만, 꾸역꾸역 그 길을 걷다 보면 끝에는 고요가 나타난다. 나를 차분함과 성찰의 길로 이끄는 무엇들. 그것은 인터넷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그것들이다.


나는 다가오는 미래를 무조건적으로 암울하게 보는 쪽에는 별로 공감하지 않기 때문에 (환경문제를 제외하고 말이다), 책에서 말하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짐으로써 결국 우리 사회가 무조건적인 선동이 난무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에 봉착하고 말 것이라는 의견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미 우리의 역사는 선동의 역사가 아니던가, 하는 생각을 하는 쪽이다. 책의 중반부쯤 나온 구절, 많은 대중이 생각을 하고 책을 읽던 시대는 예외적인 현상이었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많은 대중이 책을 읽고 고찰했다는 그 시절마저도 막상 파헤쳐보면 은밀한 선동과 세뇌의 흔적들을 적지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까, 다가오는 미래도, 무엇이 더 안좋게 변한다기 보다는, 그냥 가치판단이 제외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무엇이 더 바람직 하고 그렇지 않은가를 따지는 것은 정말이지 무용한 질문 아닐까. 여지껏 그래왔던 것처럼, 세계는 계속해서 변모할 뿐이다. 개개인에게 맡겨진 것은 거대한 변화의 파도 속에서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 그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원래 대중은 잘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들이 생각한다고 착각할 뿐이다. 아마...나 자신도 그럴 것이다. 나 자신 또한, 한줌 시야에 보이는 대중들을 우매하다 여기고 있지만, 나보다 식견이 더 넓은 그 누군가가 나를 바라볼 때면 내가 느끼는 것보다 더 커다란 안타까움과 가여움을 느낄것이다. 









글로 써진 단어는 "기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기억을 상기시키기 위한 재료이며, 제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진정한 지혜가 아니라 껍데기일 뿐"이라고도 말했다. 또 지식을 위해 읽기에 의존하는 이들은 "많이 아는 것 같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무것도 모른다"라고도 말했다. 그들은 "지혜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에 대한 허영으로 가득 차게 된다"라고도 했다. - P99

인쇄된 책을 읽는 행위는 독자들이 저자의 글에서 지식을 얻기 때문만이 아니라 책 속의 글들이 독자의 사고 영역에서 동요를 일으키기 때문에 유익하다. 오랜시간, 집중해서 읽는 독서가 열어준 조용한 공간에서 사람들은 연관성을 생각하고 자신만의 유추와 논리를 끌어내고 고유한 생각을 키운다. 깊이 읽을 수록 더 깊이 생각한다. - P114

구텐베르크의 발명으로 대중화된 "고요함의 의미와 사고"의 일부였던 깊이 읽기의 관행은 점차 사라지고, 이는 계속 감소하는 소수 엘리트만의 영역이 될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역사적으로 봤을 때 일반적이라 할 수 있는 상태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중략)
우리의 독서 습관에 있어 최근의 변화들은 "대중적인 독서의 시대"는 우리 지적 역사에 있어 짧은 "예외"였음을 암시한다고 썼다. "독서는 예전처럼 사회적 기반의 소유물, 즉 독서 계층이라 부를 수 있는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소수의 것으로 돌아가고 있다"라는 것이다.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은 질문은 독서계층이 "점차 드물어지는 문화적 자산의 형태와 관련해 힘과 특권을 지니게 될지 또는 점차 비밀스러운 취미를 행하는 특이한 이들로 보여질지"의 여부다. - P182

Ari Schulman은 2009년 <New Atlantis>에 기고한 ‘Why Minds Are Not like Computers‘라는 글에서 "모든 증거에 따르면 사고는 컴퓨터같이 깔끔하게 분류되는 체례라기 보다는 그 구조와 인과관계가 얽혀 있는 체계임을 알 수 있다. 사고의 변화는 뇌의 변화를 부르고, 이는 그 반대 형태로 일어나기도 한다"라고 했다. - P286

새로운 장기 기억을 저장할 때 우리는 정신적인 힘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한다. 기억을 확장할 때마다 지적 능력은 향상된다. 인터넷은 개인적인 기억에 편리하고 매력적인 보조물을 제공하지만 인터넷을 개인적인 기억의 대안물로 사용하면서 내부적인 강화 과정을 건너뛴다면 우리는 그 풍부함으로 가득 찬 우리의 마음을 텅 비게 하는 위험성을 안게 되는 것이다. - P310

웹은 이와는 다르다. 이는 고차원적 추론 능력에 써야 할 자원을 다른 곳에 사용하게 할 뿐 아니라 장기기억의 강화와 스키마의 발전을 방해하며 작업기억에 더 많은 하중을 가한다. 강력할 뿐 아니라 매우 특화된 도구인 계산기는 기억을 보조하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인터넷은 그야말로 망각의 기술이다. - P311

이를 ‘오귀인, misattribution‘현상이라고 설명하는데, 온라인에서 정보를 모을 때 사람들은 실제보다 자신이 더 똑똑하고 지적이라고 믿게 된다는 것이다. "‘정보의 시대‘의 도래는 실상 세상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모르면서, 그 이전의 어떤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세대의 등장을 가져왔다"라고 결론내렸다.
(중략)
전화기가 그 안에 존재하는 프로파간다, 독단적 도그마, 증오 등으로 당신의 식견을 무디게 해놓을 경우 당신은 전화기가 쏟아내는 어떤 정보라도 믿을 것이다. 자신의 지능을 과대평가한다면 기만적인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공유하는 행동에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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