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택시운전사 : 일반판
장훈 감독, 송강호 외 출연 / 에프엔씨애드컬쳐 / 2018년 5월
평점 :
품절


어디에 쓸까 하다가 이곳에 쓴다.


두번째로 보는 택시운전사..


참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든다. 사람들의 사상이란 물리법칙처럼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서 한 세대만 지나도 너무나도 다른 양상을 보인다. 마치 광주 민주화 운동 처럼 말이다. 평화와 존중이 당연한 세대인 지금에서는, 폭력진압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상하고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바로 몇 해 전,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만 하더라도 광화문 시위가 제대로 뉴스를 타지 못했고 유혈 진압이 심심치 않게 이루어졌던 기억이 난다. 아마 내동생이 이 얘기를 듣는다면 정말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겠지. 그만큼 우리 세대에게, 그리고 내 다음 세대에게는 평화가 기본값이 된 것이다.


사람의 삶이란 무엇일까. 사람의 목숨 값이란. 광주 사태는 너무나 끔찍한 것이지만 보다보면 왜 이런 사태를 겪어야만 하는가 그런 근원적인 질문이 고개를 든다. 차별이 만연하면 그것이 차별인줄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끔찍한 진압이 뉴스를 타고,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그만큼 시민과, 평등권과 인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성장했기 때문이리라.

내가 배워왔던 세상과 실제의 세상은 항상 좁혀지지 않는 갭이 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세상이 1+1=2 처럼 딱 맞춘 공식처럼, 크면서 배워왔던 권선징악의 공식에 딱 들어맞게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세상을 세상 자체로 보지 못하고 책, 영화등 매체로밖에 접할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역사서처럼, 기록되고 남겨지는 것은 선별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더 극적이고, 사람들의 염원이 많이 담긴 것일 수록 더 주목을 받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우리의 세상에 대한 인식과 실제 세계는 좁혀질수 없는 갭을 사이에 두고 진행되는 수밖에 없다. 


광주와 같은 끔찍한 일들이 과거에도 많았을 것이다. 수없이 많았겠지. 다만 그것이 다 기록되지 못한 것일 뿐이리라. 왜자꾸 세상은 어느 쪽으로 뻗어도 디스토피아 같다는 생각이 들까. 이제 한국에는 이렇게 끔찍한 일은 더이상 벌어지지 않지만(적어도 드러나는 뉴스에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여전히 우리는 힘들다. 세상은 힘든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풍선 효과처럼. 지금은 선과 악의 구조가 명확히 눈에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에 스며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위정자의 입장에서는 이제 굳이 그런 폭력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쟁취했지만..글쎄. 여전히 우리는 매우 쉽게 선동당하는 위치에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모르고 선동을 당했다면, 지금은 스스로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라 생각하면서 선동당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겠다. 쓰고 나니 똑같은 말 같군. 


아마 쓰는 내내 딴 얘기로 계속 새겠지만. 위정자 입장에서는 광주 시민들의 목숨이 제 목숨과 똑같은 한 개의 목숨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한나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생각나는군. 이 후기를 다 쓰고 책을 읽어 볼 계획이다. 하여간에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겠지. 그리고 그 명령을 따른 수많은 군인들. 그들도 그냥 위에서 시키니까 따랐을 것이다. 어떠한 반성적 성찰 없이. 나에게도 경종을 울린다. 지금 내가 하는 일. 그 일의 무게를 느끼게 만든다. 


그냥 여러가지 잡생각이 머릿 속을 떠돈다. 현실은 영화처럼 명암이 명확하지 않으니까. 쓰다보니 그것도 좀 아이러니했다. 전범국인 독일 기자가 광주 폭력진압의 사태를 세계에 알렸다는게. 그리고 그 일이 또다른 전범국인 '안전한'일본을 경유해 이루어 졌다는 게.


만약 내가 지금 상황 그대로 그 시대로 돌아간다면 나는 시위를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대학생인 내 동생은 다르겠지. 그 애는 아마 시위를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견디지 못하고 결국 나도 시위대로 나갔겠지. 그럼 처음부터 시위에 나간 대학생이 옳은 것일까? 아니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나? 더 많이 살았다고,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린다고 할 수 있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 '많이 살았다'의 연령기준은 어디인 것일까? 40대? 50대? 아니면 이것은 나이에 따른 것이 아니라 경제력에 따른 것일까? 내가 물론 사회에 찌든 직장인이 아니라 대학생이었다면 아마 나도 불의에 항거하는 시위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직장인인 나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지. "아직 사회를 몰라서 저러네. 젊은 날의 치기로 저렇게. 뭣도 모르면서." 그럼 사회의 부조리함에 치이고 옳고 그름의 경계가 무뎌진, 적당히 불의에 순응하는 그런 삶의 태도가 더 현명한 것이 라고 할 수 있을까. "너가 아직 몰라서 그러는데," 이 말을 나는 잘 모르겠다. 차라리 모르는게 더 나은것도 있지 않을까? 더 많이 안다고 더 훌륭한,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모든 생각이, 등따시고 배부르고, 먹고 살 만 하니까 든다는 건 변명할 여지가 없다. 만약 내가 하루 벌어 하루 살기 급급했거나, 아니면 그날의 광주 금남로 한가운데 있었다면 이거저거 생각할 것도 없이 현장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결국 위에 구구절절 쓴 것은 배부른 인간의 피상적이고도 어설픈 사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그냥 떠오른 생각이니 남겨본다. 단절된 미래의 나에게, 과거의 나를 보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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