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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리커버 일반판, 무선) ㅣ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축이 된 여성, 이미 진행 중인 디스토피아
책을 산지는 꽤 됐는데, 사 놓고 백만년만에 드디어 읽는데 성공했다.
첫머리부터 정말이지 여자 입장에서는 끔찍하고 역겹고 굴욕적인 내용의 연속이라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기면서 이걸 계속 읽어야 할지, 아니면 여기서 덮고 좀 더 생산적인(?) 서적을 읽을 것인지 매번 고민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힘겹게 힘겹게 '시녀 이야기'라는 산을 오르고 있는데 소설 중반부가 넘어가자 갑자기 팽팽하게 잡아당긴 실처럼 긴장감 넘치게 내용이 전개되는 것이 아닌가. 덕분에 결말까지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달려갔다.
책을 읽는 내내 머리에 떠다닌 의문점은 '그래서 이 소설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었다. 애초에 페미니즘 도서라고 광고하길래 산 책이었는데, 가축으로 취급되는 여성 묘사가 상당히 구체적이고 사실적이어서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당최 이게 과연 페미니즘 도서가 맞는지 자꾸만 의구심이 들었다.
그저 짓밟히는 여성에 대한 묘사, 자원이라기보단, 흡사 가축 취급을 받는 여성들...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 길리어드가 남자에게 이득이 되는 사회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득을 보는 것은 소수의 고위 권력층뿐. 나머지 남성들 또한 자재처럼, 그저 평생 오르지 못할 헛된 꿈을 꾸면서 보초를 서고, 노역을 한다.
내가 끊임없이 굴욕적이고 역겨움을 느꼈던 부분은 여자들이 '성'적으로 착취를 당하는 부분이었다. 출산만을 위해 존재하는 여성. 그것이 가축과 다를 바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냥 착취당하는 것과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이냐 한다면, 후자가 전자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굴욕적이라는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갑자기 수년전에 보았던 모 드라마가 떠오른다. 인상깊은 장면: 여자 주인공이 강간 당할 위험에 처하자 남자 주인공은 사랑하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대신 자기를 강간하라 말한다. 그리고 그는..당한다. 강간을! 굉장히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온라인에서 후기를 찾아보았는데 그 장면이 적지 않은 여성들(남성의 반응은 모르겠다. 나는 여성 유저들의 후기를 찾아봤으니까)에게 충격을 넘어선 역겨움(?)까지 들게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러나..원래 이런 반응이 맞는 것이다. 눈을 떴다 하면 수없이 쏟아지는 여성에 대한 성폭행, 살해 뉴스로 인해 우리는 여자가 당하는 이야기에 너무나도 무뎌져있다. 이 끔찍한 일들에 우리 스스로가 무감해진 것이다. 여기 피해자의 성별만 살짝 바꾼것만으로도 상당한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충격적이지 않은가? (아마 남자 주인공이 우락부락한 근육질에 커다란 덩치를 가진, 누구보다도 남자답다고(?) 할 수 있는 캐릭터여서 그 효과가 더 컸을 것이다)
이야기가 딴데로 샜군. 하여간에 성 착취의 대상이 되는건 노동착취와는 결이 다르고 강한 굴욕감을 준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그래서 마지막 장을 덮는 그순간까지 계속 들었던 의문은 이거였다. '작가는 왜 이 책을 썼을까?'
마거릿 애트우드, 그는 어쩌면 여성들의 기본권을 위해 싸우는 페미니스트들을 기피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여성 동지들에게 외치기 위해 썼을 수도 있다. 마치 주인공 준의 어머니가 준에게 하는 짤막짤막한 대사 처럼 말이다. 그 말을, 작가는 이미 세상은 평등하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여성 동지들에게 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세상은 전혀 평등하지 않고, 우리가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싸우지 않는다면 길리어드와 같은 사회는 언젠가 도래할 것이라고. 그것도, 빠르게.
사실, 여자를 가축으로 보는 시각이 그렇게 낯설지가 않다. 기억나는지? '가임기 지도' 사건을. 전국의 임신 가능한 나이의 여자 수를 핑크색으로 색칠했던 그 지도. 대체 왜 그런 걸 만들었을까? 가임기여성을 다 임신시키라는 얘긴가? 여성을 마치 가용 자원으로 보는 듯한 그 시각... 놀라운 건 그 불쾌함을 한세대 위인 내 어머니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오히려 분노하는 여성들에게 분노했다. 그게 뭐 어떠냐고. 체화된 차별의 시각은 이토록 무섭다. 본인을 가축화해서 바라보는데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기에...
우리가 어디로든 가 버리는 건 그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야. 내기를 걸어도 좋다고. - P309
당신이 내 돈을 다 갖는단 말이지. 내가 죽은 것도 아닌데. 농담처럼 말했지만, 막상 내뱉고 보니 소름이 끼쳤다. 쉿. 루크가 말했다. 아직도 마루에 무릎을 꿇은 채로 있었다. 내가 언제까지나 당신을 돌봐줄 텐데 뭘. 난 생각했다. 벌써 이이가 나를 봐주는 척하고 있어. 그러고는 또 생각했다. 벌써 나는 피해망상에 시달리는구나. - P310
나는 행진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루크는 그래 봤자 헛수고라고, 식구들, 루크 자신과 딸애를 생각하라고 말했다. 나는 집안일을 더 많이 하고, 빵도 더 많이 구웠다. 식사 시간엔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때쯤 나는 예고 없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고, 침실 창가에 앉아 창문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 P311
어떤 엄마도, 아이가 바라는 완벽한 엄마의 모습이 될 수는 없을 터이다. 그리고 그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불만이 많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 형편없지는 않았다. 아니, 심지어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여기 계셨으면 좋겠다. 마침내 내가 깨달은 이 사실을 말씀드릴 수 있게. - P313
내가 직장을 잃은 그날 밤, 루크는 사랑을 나누고 싶어했다. 나는 왜 기분이 내키지 않았을까? 절망감에라도 루크에게 달라붙었어야 하는데. (...) 우리에겐 아직도...그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아직 뭐가 남았는지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갑자기 루크는 ‘우리‘라는 말을 쓸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한, 루크는 아무것도 빼앗긴 게 없었다. (...) 그이는 마음에 걸리지 않는 거야. 그이는 전혀 마음 쓰지 않아. 어쩌면 오히려 잘됐다고 여길지도 몰라. 우리는 더 이상 서로의 것이 아니야. 이젠, 내가 그의 것이 되어 버린 거야. - P315
오, 하느님, 저를 지워주소서. 저를 다산하게 하소서. 제 육신에 고행을 주셔서, 저로 하여금 번식하게 하소서. 채워지게 하소서... 기도에 흥분해 제정신을 잃는 사람들도 있었다. 굴욕의 황홀경. 신음소리를 내고 흐느껴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 P337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꾸면 되지. 우리는 서로에게 또 스스로에게 말하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남자로 바꿨다. 변화는 언제나 좋은 거라고 우리는 굳게 믿고 있었다. 우리는 수정주의자였다. 우리가 수정한 건 물론, 우리 자신이었다. - P393
모이라가 나처럼 되는 건 싫다. 굴복하고, 순응하고, 근근히 제 목숨이나 연명하게 되는 건 싫다. 결국은 그게 문제다. 나는 모이라에게서 용감무쌍함을 기대한다. 허세를 부리고, 영웅적인 행동을 하고, 홀홀단신 적진에 뛰어들어 전투를 벌이기를 기대한다. - P435
우리는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서로 속삭이는 법을 배웠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 아주머니의 눈을 피해 팔을 뻗어 허공을 가로질러 서로의 손을 만질 수 있었다. 머리를 바짝 붙인 채로 옆으로 돌아누워 서로의 입을 지켜보며 입술을 읽는 법을 터득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침대에서 침대로 이름을 교환했다. 알마. 재닌. 돌로레스. 모이라. 준.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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