칵테일, 러브, 좀비 안전가옥 쇼-트 2
조예은 지음 / 안전가옥 / 2020년 4월
평점 :
품절


12.24 서귀포 사계리 서점에서 (강아지가 무척이나 인간친화적이던...)


1.초대
빠른 전개. 무척이나 빠른 전개. 지금 막 첫번째 단편을 읽었는데 내가 뭘 읽었는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그저 일상적인 연애 얘기인 줄 알았는데..한 두장 전만 해도 교묘하게 가스라이팅 하는 남자친구 욕하면서 읽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몰아치는 피비린내에 정신을 못차리겠다. 문득 완전한행복이 떠오른다. 이 단편을 좀더 길고 섬세하고 느린 호흡으로 (완전한 행복도 그다지 느린 호흡은 아니었지만) 진행시킨다면 완전한 행복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썼는지 궁금해서 작품해설을 봤는데 거기에도 별 이야기는 없네. 두번째 단편을 읽어보도록 하겠다.


2. 습지의 사랑
두 귀신의...사랑 이야기..?


3. 칵테일 러브 좀비
역시 타이틀을 단 내용이라 그런지 흡입력도 있고 짜임새도 탄탄하며 무엇보다 재미있다. 짧은 단편에 한국형 가정 좀비 소설의 핵심을 알차게 담았다. 거기에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까지... 너무나도 실현가능성있고 이해가능한 어머니의 심정에 아마 이 책을 혼자 읽고 있었다면 눈물이 찔끔 나왔을 것이다. (지금은 옆에 동행자가 있어 그러진 않았지만 말이다) 짧은 이야기지만 여기에 여러가지 살이 붙어 장편으로 되어도 재미있을 것 같다. 제목에 왜 칵테일, 러브가 붙었을까. 칵테일... 뱀술을 글로벌한 관점으로 세탁해 붙여놓은 작가의 유머 내지는 냉소적인 시각이었나.


4.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오늘 하루 내 걸쳐 작가의 4번째 단편까지 읽으니 이제는 그의 고유한 색채가 보이는 듯 하다. 어딘가 음울하고 절망적이면서도 대비적으로 차분한, 그래서 꼭 벗어날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빨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드는 이야기들. 그 와중에 얼핏 모습을 드러내는 인물들의 인간적인 면모가 작품에 서글픔을 더한다. 슬픔과 절망적인 패러독스에 기분이 묘하다. 오묘한 시작과 끝.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알 수 없는 굴레. 틈없이 맞붙어 굴러가는 패러독스가 자꾸만 사라진 인물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조예은 작가의 소설은 장르소설의 모습을 하고서 여성의 삶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래서 몰아치는 스토리에 이끌려가면서도 일상의 삶을 자꾸만, 자꾸만 돌아보게 만든다.

"내 옆에 눕지 마. 내가 갑자기 좀비로 변할 수도 있잖아. 내 방 가서 자."
"상관없어. 좀비가 되면, 엄마 꼭 물어 줘."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진심이야. 꼭 물어야 해." - P98

"추운데, 괜찮으세요?"
아, 나의 아버지는 안타깝게도, 나의 젊은 아버지는 어머니 말씀대로 좋은 사람이 맞았다. - P1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laughterhouse-Five: Or the Children's Crusade, a Duty-Dance with Death (Mass Market Paperback) - 『제5도살장』원서
커트 보네거트 지음 / Dell / 199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Poignant and sarcastic tho misogynistic


It is different from typical time-traveling or typical war-novels. Billy's time traveling is unique and Billy's somewhat transcend-life attitude toward life makes the scene very poignant. Tho Billy keeps going out and back and he does not have strong eager toward life, he kind of committed himself to every moment and so the story goes. 


Though I like the way of author depicting the situation, I found this book is very misogynistic. Almost all the women and girls in this book are sexually objectified that they exist as a sexual temptation. I really got disappointed when the author mentioned naked girls in Dresden. Should you have to write that? Should you? I don't even have to mention that almost all the girls here are either beautiful-dumb head or not beautiful-but still dumb as the same. I really want to ask the author-though I'm sure he is already dead- that is this his best way to depict women. It's a pity that male authors always have this kind of limitation in describing half of the human race. It is just a pity. Poor Kurt Vonnegut, hope you'd learned some things before your death!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 안전가옥 쇼-트 1
심너울 지음 / 안전가옥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초엽 작가의 소설을 읽고 막 SF에 빠졌을 때, 누군가 인터넷에 올린 '한국SF 추천목록'을 보고 작가를 알게 되었다. 책을 읽기 전 작가의 사설을 몇 편 읽었는데 하나같이 말투가 어찌나 재미있던지- 옛날 조선시대 때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달까. 역시나 이번 단편집도 어딘가 냉소적이면서도 그래서 더 재미있는 작가의 입담이 돋보인다. 거기에 더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소재에 착안 한 이야기들이라는게 한층 몰입감을 높인다.



1. 정적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장애인중심적인지 그들은 어디까지 밀려나 있는 것인지 돌아보게 한다.


2. 경의중앙선에서 마주치다

 소재가 너무 재미있고 웃겨서 금세 읽었다. 얼핏 대학 다닐때 내 통학 시간을 떠올려 보게 하기도 했다. 무언가를 하기엔 너무 졸리고 답답한 지하철 안에서의 시간들...무엇보다 그들을 좀비로 묘사한 재치있으면서도 시니컬한 작가의 문체가 너무 웃기다.


3.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

 행복에 대한 본질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그래서 우리는 하루종일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일요일보다 주말에 대한 부푼 기대를 안을 수 있는 금요일을 선호하나보다. 물론 나도 그렇고. 하지만 금요일 저녁이라는 그 달콤한 열매는 월~금에 이어진 지난하고도 고통스러운 일과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데! 

 하지만 이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업무시간이 너무 긴 것 같다. 주 4일제 해줘 제발...다같이 하루 덜 일한다고 세상이 뒤집어지지 않는다고. 제발 2022년에는 주4일제가 실현되길.


4. 신화의 해방자 & 최고의 가축

 이어지는 두 편의 이야기. 내심 용의 승리를 기대했건만... 과거 대단했던 존재가 인간의 이기심과 영악함 앞에 스러지는 모습을 보는건 여전히 유쾌하지 않다. 건조한 비극이 느껴지는 단편. 결국 거대했던 그 존재도 언젠간 완전히 길들여져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 빤히 보여서, 그래서 더 안타깝고 씁쓸했던 이야기. 


어쩌면 현은 이 아저씨에게 뒷사람들을 배려해 달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절차 얘기를 다시 함으로써 몇 차례나 이어진 순환을 한번 더 반복할 수도 있었으리라. 대신 현은 감각을 차단하는 방법을 택했다.
너는 계속 짖어라. 나는 생각을 비우련다. 현은 두 눈을 또렷하게 떴지만 아무 데에도 초점을 맞추지 않았고, 귀로 들려오는 모든 소리에 평등하게 무관심을 분배했다. 입으로는 기계적으로 죄송합니다란 문장을 연속 출력했다. 잠시 감각의 가사 상태에 빠지기, 이것이야말로 1년 동안 민원팀에서 일하며 김현이 배운 가장 유용한 능력이었다.

김현은 일주일 중 이틀만 살았다. 그 이틀은 금요일 오후6시에 시작되어 일요일 오후6시 즈음에 끝났다. 평일에는 차마 살아 있다고 하기 힘들었다. 매주 찾아오는 그 짧은 생명의 기간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리하여 우리는 얼마나 변했고, 또 얼마나 변하지 못했는가


첫 챕터를 읽자마자 바싹 마른 천이 물기를 흡수하는 것마냥 빠르게 빠져들어 혹여라도 강민주의 계획이 틀어질까 전전긍긍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마지막까지 달렸다. 자꾸만 암시되는 불길한 징조에 다음 장으로 뛰어넘어가려는 시선을 붙들어 매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그래서 정작 마지막 장을 읽고 나서는 오히려 안도감이 몰려왔달까. 강민주의 죽음이, 사랑하는 자식이 혹여 다칠까 걱정해 도로 거두어가는 신의 손길로 보였다면, 나도 강민주의 자기 암시에 길들어 버린 것일까. 


강렬한 제목과 강렬한 챕터. 이 책은 외줄타기를 하는 곡예사 처럼 긴장의 끝이 마지막까지 팽팽히 당겨져 있다. 강민주의 삶도, 그는 자신이 그토록 경계했던 노트의 내용처럼, 한순간 줄 아래의 풍경에 현혹되어 떨어져버리고 만다...그렇지만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줄 아래 그 무엇에도 한눈팔지 않고, 현혹되지 않고 그저 줄 끝까지 이어가는 인생이, 한순간이나마 찬란한 풍경을 가슴에 담은 삶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중요한 순간에 감정에 흔들린 강민주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도 인간이었고, 뛰어난 지능을 가졌기에 자신과 소통이 가능한,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는 인간을 발견했을 때 움트는 감정의 씨앗을 저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 남자는 세상의 거의 모든 여심을 사로잡은 최고의 미남배우가 아니던가... 다만 안타까운 점은 강민주가 좀더 세상에 치이고, 여러가지 감정을 미리 몇 차례 경험한 노련한 인물이었다면, 그랬다면 잠깐 흔들린다 하더라도 상황의 모든 통제권을 손에 쥐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결국 목표한 바를 이루고 유유히 범행현장을 떠나고, 해당 사건은 평생 미제로 남았다면, 그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강민주의 심복이 여자였다면, 그랬다면 상황은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 하고. 결국 강민주를 망친 것은 주변의 남자들이다. 그를 존경해 마지 않던 황남기조차 고작 강민주를 위한답시고 생각해 낸 게 그의 죽음이라니...



 챕터가 시작할 때마다 등장하는 강민주의 노트는 그 통렬하고도 강인한 어조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도 나의 범인적인 속성을 날카롶게 짚어내 자조적인 웃음을 너털 터뜨리게 만든다. 강인한 사람, 흔들림 없는 사람.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에 차 있는 사람.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강민주 새싹이 있었을까. 그리고 그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교묘하고도 숨막히는 압박과 결혼이라는 달콤한 환상에 홀려버렸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총명함과 재능을 빨래하고, 요리하고, 청소하고, ...그렇게 남편의 수발을 드는, 그런 일에 흘려보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말이다. 그리고 가장 슬픈 점은 그런 삶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점이다. 강민주의 강인함은 어쩌면 강민주가 젊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 수록 사회는 더욱 복잡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여자의 삶을 옥죄고 가능성의 씨앗을 말려버린다. 그것을 처음 경험했을 땐 분노하지만 반복되는 경험에 동일한 농도로 분노하기란 쉽지 않다. 인간은 비극적이게도 순응의 동물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얼마간의 시차를 두었다 뿐이지 종래에는 모두들 순응이라는 종착역에 다다르게 되기 때문이다. 


 1992년에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직도 강민주의 외침은, 생각은, 편지는 나에게 많은 울림을 준다 .대략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많은 것들이 변화했지만 아직까지도 변하지 않은 것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렇지만 이것 또한 내가 살아야 할 세상... 세상은 바위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천천히, 더디게 변한다. 하지만 그 느릿한 변화가 계속되다보면 분명히 10년 뒤에는, 또 20년 뒤에는 또다른 세상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비록 수많은 차별들이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여성의 삶을 옭아매고 있지만, 그 농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묽어지리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그렇게 믿을 수 밖에 없다. 이건 내가 끌어안고 살아가야 할 세상이기에...



애초에 길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살고 있었을 뿐이다. 길은, 그것이 신작로이거나 오솔길이거나 간에,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길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삶이 길 위에 있다는 말은 인간은 결국 고독한 순례자라는 뜻에 다름 아니다. 순례자에게 길이 어디 있는가. 오직 고행의 가시밭길만 있을 뿐이다. - P39

모든 삶은 길 위에 있다.
이 명제에 충실하기 위해 나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은 계획이나 목적 없이 훌쩍 떠나야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고 말하는 바보들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
얼마나 우스운 소리인가. 무계획이나 무목적 속에서 자유가 나온다는 발상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지 못한 자들의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길을 향해 떠나기 전에 미래를 모두 계획한다. 그것이 길 위에 서서 뒤늦게 미래를 생각하는 보통의 사람들과 내가 다른 점이다.
_강민주의 노트에서 - P40

그 누구도 어떤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방식대로 살뿐이다. 선각자는 있어도 지도자는 없는 것이다. 자신을 내던져 새로운 것을 깨우치는 일은 존중받을 수 있으나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채 남을 지도하려 드는 일은 조롱받아 마땅하다. - P86

외줄 타기에는 절대 금기가 하나 있다. 줄 아래를 보지 말 것. 아래를 내려다보면 떨어지고 만다. 까마득한 그 아래에 실패가 있는 것이다. 곡예사의 세계는 외줄에 닿아 있는 두 발을 경계로 그 위다. 두 발 아래는 아닌 것이다. - P97

여자인 주제에 감히 이만한 일을 저지를 수 있겠는가, 라는 그 무작정한 고정관념을 수정하지 않는 한은 그들은 결코 나를 찾아 낼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절대 자신들의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을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 P239

영혼을 찍는 카메라가 있다면, 짓눌리고 억압받는 정신을 촬영하고 인화할 수 있는 과학이 있다면, 렌즈를 들이대고 분명히 찍어두어야 할 여성의 깊은 상흔은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찍어야 상처의 증거가 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은 교묘하고 복합적이다. 이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일상적으로 이해되고, 그리하여 일상의 하나로 무심히 잊히는 사회는 진정 옳지 않다.
_작가의 말 - P3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엔드 오브 타임 - 브라이언 그린이 말하는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와이즈베리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스로가 입자구조임을 인식한다는 것


어떻게든 대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말로 표현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 저자 덕분에 장장 일주일에 걸쳐 완독해낼 수 있었다. 이 영광을 브라이언 그린에게 바칩니다! (하지만 아직도 난 엔트로피가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용의 반이상을 차지하는 생소한 과학에 대한 이야기는 이해가 아니라 외국어 단어 외우는 기분으로 읽어내서... 그렇다. 엔드오브타임을 읽는 내내 책을 '읽는' 기분이 아니라 꼭 '읽어내는' 기분이었다. 마치 등산하듯이 말이다. 가끔 내리막길도 나와 수월한듯 하다가도 몰아닥치는 가파른 등산로에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그런 느낌.


솔직히 말하자면 인간이 등장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4장까지는 쏟아지는 졸음과의 싸움80%, 흥미로움19%, 오기1%로 버텼고 5장부터는 꽤나 흥미롭게 읽다가(왜냐면 이때부터 인간이 등장했다) 9장에서 정말 끔찍한 최악의 공포를 느끼고 절망감에 허우적대기를 잠시, 다시 작가의 희망찬 낙관과 함께 긍정회로를 열심히 태워 11장까지의 여정을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책을 덮고나니 리처드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었을때와 비슷한 기분이 든다. 이기적 유전자가 내게 강한 충격을 주었던 이유는 


1. 진화는 문득 나타난 돌연변이에 의해 시작되며 

2. 해당 형질이 후손에게 유전이 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이고 

3. 개체의 의식적인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어난다 


이 세가지 사실이 꼭 뇌구조를 바꾸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냥 높은 곳에 있는 풀을 뜯어먹는 기린을 묘사한 네컷짜리 만화처럼 높은 곳에 있는 풀을 뜯어먹고 '싶어한' 기린이 목을 늘리면 그 다음 후손도 목이 길어진다 뭐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게 상관없고, 우연히 어떤 개체에서 발생한 돌연변이적 특성이 개체의 생존에 유리한 경우, 그 개체가 후손을 남길 확률이 높아지고, 그 후손이 해당 돌연변이 유전형질을 가질 확률이 높아지면 그 개체의 수가 늘어나고 그렇게 진화가 이루어지는 그 일련의 과정-그리고 이 과정속에서 '진화해야지!' 하는 개체의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우연에 기반한 진화가 이루어지기 위한 그 기나긴 세월을 상상하는데 그 순간 마치 문맹자가 글을 깨친것 같은 기분이었달까. 한번 그렇게 깨닫고 나니 아, 전에 어쩜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을까 싶었다. 


이 책은 내게 그것과 비슷한 깨달음을 전해준다. 1장에서부터 저자가 입자와 양자역학과 빅뱅과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설명하는 이유는 결국 그곳이 인간이 탄생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탄생과 함께 나타난 그 입자의 집합 (여전히 난 이 입자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그동안 궁금했던 부분들이 해결되는 기분이다. 이기적 유전자를 읽을 때 나는 인간이 그저 여타 생물과 다를 바 없는 '생존기계'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신선한 충격이었음) 그 후에 어쩌면 인간의 정신은 인간의 뇌가 복잡하게 진화를 거듭하다가 어느 순간 마치 돌연변이 생겨나듯 생겨났다고 생각했었다. 그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냥 진화의 부수적 산물처럼. 그리고 컴퓨터를 보면서 인간의 정신도 이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신체는 하드웨어와 같고 뇌는 모니터 속에 펼쳐진 세상과 같은 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러던 중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읽고나선 컴퓨터와 인간을 일대일로 매칭시키는건 어쩌면 잘못된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느꼈다. (일례로 인간이 기억을 끄집어내는거랑 컴퓨터가 정보를 불러오는 과정은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그리고 마침내, '엔드오브타임'이다. 앗 너무 비장했나? 인간의 정신이 그저 물리법칙에 입각한 입자의 배열일 뿐이고 인간의 의식은 그 과정을 인식하지 못하고 스스로 사고의 기원이 자유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인간을 정말 탁월하게 설명하는 말 같다. 그러니까 인간이 이렇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인간이 주변환경에 영향을 그렇게나 많이 받고, 그리고 오로지 심리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저 약물복용만으로 상당부분 개선되는 것에 대한 타당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 기계와는 다른 무엇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아 생각하지만 스스로 지배받는 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다...! 사고의 기원은 자유롭지 않지만 행동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나를 너무 가슴뛰게 한다...


이것은 내가 항상 궁금해했던 벌들의 소통을 꽤나 설득력 있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물론 세부적으로 나름의 체계와 방식이 있겠지만) 벌들이 설계도나 대화없이(물론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대화를 하겠지만) 그렇게나 정교한 벌집을 짓고 고도로 분화된 사회를 본능적으로 이루는 것도 그들의 구조가 충실히 물리법칙을 따르는 입자 배열로 되어있기 때문인 것이다...소오름..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엔드오브타임은 다음 두가지 측면에서 나의 뇌를 자극하고 내 심장을 뛰게 한다..


1. 인간은 물리법칙을 충실히 따르는 입자의 규칙적인 배열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고의 기원은 자유롭지 못하지만 자유로운 행동은 가능하다

2. 내가 1년 뒤에 병으로 죽는 것하고 1년 후에 전 인류가 멸종하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더 무서운가? 


 이전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독후감을 쓸 때도 얘기한 적이 있었지만,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그 짧은 시간의 시야만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한계점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긴 시간에 걸쳐 역사를 서술하는 책을 따라가다보면 상당히 새로운 시각으로 인간을 조망하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무슨말이냐하면, 지금 당연해 보이는 것들이 전혀 당연하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저자의 말대로 우주의 역사에서 바라볼 때 생각하는 사고체의 출현은 눈 깜짝하면 사라지는 아주 찰나의 순간인 것을 인지하고 나면 모종의 허무함과 두려움 그러나 결국인 경이로움이 느껴지는것이다...



"인간은 죽음을 아는 유일한 존재다. 그 외의 모든 생명체들도 늙기는 마찬가지지만, 자신이 영원하다는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다. 모든 종교와 과학, 그리고 철학은 죽음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에서 탄생한 것이다." - P10

의식적 사고는 영원히 계속될 것인가?

(중략)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사고를 펼칠 수 있는 이유는 지구의 환경이 생명 현상과 사고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후가 조금만 변해도 온갖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이다. - P31

그라지아노는 우리의 의식이 마음속에 표류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했다. 단순화된 도식을 선호하는 뇌의 성향이 무언가에 집중하는 자신에게도 적용되어, 집중을 유발한 물리적 과정이 무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과 감각은 출처가 불분명하고 그저 머릿속을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진다. - P206

어려운 문제가 어려운 이유(의식이 육체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도식화된 정신모형이 ‘생각과 감각을 육체와 연결하는 두뇌 기능이 부각되지 않도록‘막고 있기 때문이다 - P206

임의의 순간에 ‘나‘는 입자의 집합이며, 입자의 특별한 배열을 나타내는 약칭이다(이 배열은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지만, 개인의 정체성을 유지할 정도로 충분히 안정적이다) 그러므로 나를 구성하는 입자의 행동이 곧 나의 행동이다. 그 저변에서 물리법칙이 나의 입자를 제어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의 행동(입자의 행동)은 자유의지와 무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특별한 입자배열은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라는 거시적 서술이 퇴색되지는 않는다. - P224

그리고 궁극적인 기원에서 자유로운 행동으로 초점을 바꾸면 확고하고 다양한 인간의 자유를 수용할 수 있다. - P227

"진정한 발견은 낯선 지역을 찾아갈 때가 아니라,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이루어진다. 다른 사람의 눈, 수백 개의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 P339

"당신은 인간의 목숨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군요. 그렇다면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당신이 1년 뒤에 병으로 죽는 것하고 1년 후에 전 인류가 멸종하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더 무서운가요?" - P450


그렇다. 우리는 무상하기 그지없는 일시적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하는 짧은 시간은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매우 희귀하고 특별한 시간이다. - P455

그러나 소규모의 입자들이 모여서 현실을 인지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얼마나 단명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연결 관계를 확립하고, 우주의 미스터리를 풀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P4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