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리하여 우리는 얼마나 변했고, 또 얼마나 변하지 못했는가


첫 챕터를 읽자마자 바싹 마른 천이 물기를 흡수하는 것마냥 빠르게 빠져들어 혹여라도 강민주의 계획이 틀어질까 전전긍긍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마지막까지 달렸다. 자꾸만 암시되는 불길한 징조에 다음 장으로 뛰어넘어가려는 시선을 붙들어 매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그래서 정작 마지막 장을 읽고 나서는 오히려 안도감이 몰려왔달까. 강민주의 죽음이, 사랑하는 자식이 혹여 다칠까 걱정해 도로 거두어가는 신의 손길로 보였다면, 나도 강민주의 자기 암시에 길들어 버린 것일까. 


강렬한 제목과 강렬한 챕터. 이 책은 외줄타기를 하는 곡예사 처럼 긴장의 끝이 마지막까지 팽팽히 당겨져 있다. 강민주의 삶도, 그는 자신이 그토록 경계했던 노트의 내용처럼, 한순간 줄 아래의 풍경에 현혹되어 떨어져버리고 만다...그렇지만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줄 아래 그 무엇에도 한눈팔지 않고, 현혹되지 않고 그저 줄 끝까지 이어가는 인생이, 한순간이나마 찬란한 풍경을 가슴에 담은 삶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중요한 순간에 감정에 흔들린 강민주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도 인간이었고, 뛰어난 지능을 가졌기에 자신과 소통이 가능한,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는 인간을 발견했을 때 움트는 감정의 씨앗을 저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 남자는 세상의 거의 모든 여심을 사로잡은 최고의 미남배우가 아니던가... 다만 안타까운 점은 강민주가 좀더 세상에 치이고, 여러가지 감정을 미리 몇 차례 경험한 노련한 인물이었다면, 그랬다면 잠깐 흔들린다 하더라도 상황의 모든 통제권을 손에 쥐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결국 목표한 바를 이루고 유유히 범행현장을 떠나고, 해당 사건은 평생 미제로 남았다면, 그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강민주의 심복이 여자였다면, 그랬다면 상황은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 하고. 결국 강민주를 망친 것은 주변의 남자들이다. 그를 존경해 마지 않던 황남기조차 고작 강민주를 위한답시고 생각해 낸 게 그의 죽음이라니...



 챕터가 시작할 때마다 등장하는 강민주의 노트는 그 통렬하고도 강인한 어조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도 나의 범인적인 속성을 날카롶게 짚어내 자조적인 웃음을 너털 터뜨리게 만든다. 강인한 사람, 흔들림 없는 사람.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에 차 있는 사람.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강민주 새싹이 있었을까. 그리고 그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교묘하고도 숨막히는 압박과 결혼이라는 달콤한 환상에 홀려버렸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총명함과 재능을 빨래하고, 요리하고, 청소하고, ...그렇게 남편의 수발을 드는, 그런 일에 흘려보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말이다. 그리고 가장 슬픈 점은 그런 삶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점이다. 강민주의 강인함은 어쩌면 강민주가 젊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 수록 사회는 더욱 복잡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여자의 삶을 옥죄고 가능성의 씨앗을 말려버린다. 그것을 처음 경험했을 땐 분노하지만 반복되는 경험에 동일한 농도로 분노하기란 쉽지 않다. 인간은 비극적이게도 순응의 동물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얼마간의 시차를 두었다 뿐이지 종래에는 모두들 순응이라는 종착역에 다다르게 되기 때문이다. 


 1992년에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직도 강민주의 외침은, 생각은, 편지는 나에게 많은 울림을 준다 .대략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많은 것들이 변화했지만 아직까지도 변하지 않은 것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렇지만 이것 또한 내가 살아야 할 세상... 세상은 바위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천천히, 더디게 변한다. 하지만 그 느릿한 변화가 계속되다보면 분명히 10년 뒤에는, 또 20년 뒤에는 또다른 세상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비록 수많은 차별들이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여성의 삶을 옭아매고 있지만, 그 농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묽어지리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그렇게 믿을 수 밖에 없다. 이건 내가 끌어안고 살아가야 할 세상이기에...



애초에 길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살고 있었을 뿐이다. 길은, 그것이 신작로이거나 오솔길이거나 간에,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길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삶이 길 위에 있다는 말은 인간은 결국 고독한 순례자라는 뜻에 다름 아니다. 순례자에게 길이 어디 있는가. 오직 고행의 가시밭길만 있을 뿐이다. - P39

모든 삶은 길 위에 있다.
이 명제에 충실하기 위해 나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은 계획이나 목적 없이 훌쩍 떠나야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고 말하는 바보들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
얼마나 우스운 소리인가. 무계획이나 무목적 속에서 자유가 나온다는 발상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지 못한 자들의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길을 향해 떠나기 전에 미래를 모두 계획한다. 그것이 길 위에 서서 뒤늦게 미래를 생각하는 보통의 사람들과 내가 다른 점이다.
_강민주의 노트에서 - P40

그 누구도 어떤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방식대로 살뿐이다. 선각자는 있어도 지도자는 없는 것이다. 자신을 내던져 새로운 것을 깨우치는 일은 존중받을 수 있으나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채 남을 지도하려 드는 일은 조롱받아 마땅하다. - P86

외줄 타기에는 절대 금기가 하나 있다. 줄 아래를 보지 말 것. 아래를 내려다보면 떨어지고 만다. 까마득한 그 아래에 실패가 있는 것이다. 곡예사의 세계는 외줄에 닿아 있는 두 발을 경계로 그 위다. 두 발 아래는 아닌 것이다. - P97

여자인 주제에 감히 이만한 일을 저지를 수 있겠는가, 라는 그 무작정한 고정관념을 수정하지 않는 한은 그들은 결코 나를 찾아 낼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절대 자신들의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을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 P239

영혼을 찍는 카메라가 있다면, 짓눌리고 억압받는 정신을 촬영하고 인화할 수 있는 과학이 있다면, 렌즈를 들이대고 분명히 찍어두어야 할 여성의 깊은 상흔은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찍어야 상처의 증거가 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은 교묘하고 복합적이다. 이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일상적으로 이해되고, 그리하여 일상의 하나로 무심히 잊히는 사회는 진정 옳지 않다.
_작가의 말 - P3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