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드 오브 타임 - 브라이언 그린이 말하는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와이즈베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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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가 입자구조임을 인식한다는 것


어떻게든 대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말로 표현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 저자 덕분에 장장 일주일에 걸쳐 완독해낼 수 있었다. 이 영광을 브라이언 그린에게 바칩니다! (하지만 아직도 난 엔트로피가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용의 반이상을 차지하는 생소한 과학에 대한 이야기는 이해가 아니라 외국어 단어 외우는 기분으로 읽어내서... 그렇다. 엔드오브타임을 읽는 내내 책을 '읽는' 기분이 아니라 꼭 '읽어내는' 기분이었다. 마치 등산하듯이 말이다. 가끔 내리막길도 나와 수월한듯 하다가도 몰아닥치는 가파른 등산로에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그런 느낌.


솔직히 말하자면 인간이 등장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4장까지는 쏟아지는 졸음과의 싸움80%, 흥미로움19%, 오기1%로 버텼고 5장부터는 꽤나 흥미롭게 읽다가(왜냐면 이때부터 인간이 등장했다) 9장에서 정말 끔찍한 최악의 공포를 느끼고 절망감에 허우적대기를 잠시, 다시 작가의 희망찬 낙관과 함께 긍정회로를 열심히 태워 11장까지의 여정을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책을 덮고나니 리처드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었을때와 비슷한 기분이 든다. 이기적 유전자가 내게 강한 충격을 주었던 이유는 


1. 진화는 문득 나타난 돌연변이에 의해 시작되며 

2. 해당 형질이 후손에게 유전이 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이고 

3. 개체의 의식적인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어난다 


이 세가지 사실이 꼭 뇌구조를 바꾸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냥 높은 곳에 있는 풀을 뜯어먹는 기린을 묘사한 네컷짜리 만화처럼 높은 곳에 있는 풀을 뜯어먹고 '싶어한' 기린이 목을 늘리면 그 다음 후손도 목이 길어진다 뭐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게 상관없고, 우연히 어떤 개체에서 발생한 돌연변이적 특성이 개체의 생존에 유리한 경우, 그 개체가 후손을 남길 확률이 높아지고, 그 후손이 해당 돌연변이 유전형질을 가질 확률이 높아지면 그 개체의 수가 늘어나고 그렇게 진화가 이루어지는 그 일련의 과정-그리고 이 과정속에서 '진화해야지!' 하는 개체의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우연에 기반한 진화가 이루어지기 위한 그 기나긴 세월을 상상하는데 그 순간 마치 문맹자가 글을 깨친것 같은 기분이었달까. 한번 그렇게 깨닫고 나니 아, 전에 어쩜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을까 싶었다. 


이 책은 내게 그것과 비슷한 깨달음을 전해준다. 1장에서부터 저자가 입자와 양자역학과 빅뱅과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설명하는 이유는 결국 그곳이 인간이 탄생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탄생과 함께 나타난 그 입자의 집합 (여전히 난 이 입자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그동안 궁금했던 부분들이 해결되는 기분이다. 이기적 유전자를 읽을 때 나는 인간이 그저 여타 생물과 다를 바 없는 '생존기계'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신선한 충격이었음) 그 후에 어쩌면 인간의 정신은 인간의 뇌가 복잡하게 진화를 거듭하다가 어느 순간 마치 돌연변이 생겨나듯 생겨났다고 생각했었다. 그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냥 진화의 부수적 산물처럼. 그리고 컴퓨터를 보면서 인간의 정신도 이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신체는 하드웨어와 같고 뇌는 모니터 속에 펼쳐진 세상과 같은 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러던 중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읽고나선 컴퓨터와 인간을 일대일로 매칭시키는건 어쩌면 잘못된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느꼈다. (일례로 인간이 기억을 끄집어내는거랑 컴퓨터가 정보를 불러오는 과정은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그리고 마침내, '엔드오브타임'이다. 앗 너무 비장했나? 인간의 정신이 그저 물리법칙에 입각한 입자의 배열일 뿐이고 인간의 의식은 그 과정을 인식하지 못하고 스스로 사고의 기원이 자유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인간을 정말 탁월하게 설명하는 말 같다. 그러니까 인간이 이렇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인간이 주변환경에 영향을 그렇게나 많이 받고, 그리고 오로지 심리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저 약물복용만으로 상당부분 개선되는 것에 대한 타당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 기계와는 다른 무엇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아 생각하지만 스스로 지배받는 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다...! 사고의 기원은 자유롭지 않지만 행동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나를 너무 가슴뛰게 한다...


이것은 내가 항상 궁금해했던 벌들의 소통을 꽤나 설득력 있게 설명해주기도 한다. (물론 세부적으로 나름의 체계와 방식이 있겠지만) 벌들이 설계도나 대화없이(물론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대화를 하겠지만) 그렇게나 정교한 벌집을 짓고 고도로 분화된 사회를 본능적으로 이루는 것도 그들의 구조가 충실히 물리법칙을 따르는 입자 배열로 되어있기 때문인 것이다...소오름..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엔드오브타임은 다음 두가지 측면에서 나의 뇌를 자극하고 내 심장을 뛰게 한다..


1. 인간은 물리법칙을 충실히 따르는 입자의 규칙적인 배열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고의 기원은 자유롭지 못하지만 자유로운 행동은 가능하다

2. 내가 1년 뒤에 병으로 죽는 것하고 1년 후에 전 인류가 멸종하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더 무서운가? 


 이전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독후감을 쓸 때도 얘기한 적이 있었지만,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그 짧은 시간의 시야만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한계점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긴 시간에 걸쳐 역사를 서술하는 책을 따라가다보면 상당히 새로운 시각으로 인간을 조망하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무슨말이냐하면, 지금 당연해 보이는 것들이 전혀 당연하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저자의 말대로 우주의 역사에서 바라볼 때 생각하는 사고체의 출현은 눈 깜짝하면 사라지는 아주 찰나의 순간인 것을 인지하고 나면 모종의 허무함과 두려움 그러나 결국인 경이로움이 느껴지는것이다...



"인간은 죽음을 아는 유일한 존재다. 그 외의 모든 생명체들도 늙기는 마찬가지지만, 자신이 영원하다는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다. 모든 종교와 과학, 그리고 철학은 죽음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에서 탄생한 것이다." - P10

의식적 사고는 영원히 계속될 것인가?

(중략)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사고를 펼칠 수 있는 이유는 지구의 환경이 생명 현상과 사고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후가 조금만 변해도 온갖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이다. - P31

그라지아노는 우리의 의식이 마음속에 표류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했다. 단순화된 도식을 선호하는 뇌의 성향이 무언가에 집중하는 자신에게도 적용되어, 집중을 유발한 물리적 과정이 무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과 감각은 출처가 불분명하고 그저 머릿속을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진다. - P206

어려운 문제가 어려운 이유(의식이 육체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도식화된 정신모형이 ‘생각과 감각을 육체와 연결하는 두뇌 기능이 부각되지 않도록‘막고 있기 때문이다 - P206

임의의 순간에 ‘나‘는 입자의 집합이며, 입자의 특별한 배열을 나타내는 약칭이다(이 배열은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지만, 개인의 정체성을 유지할 정도로 충분히 안정적이다) 그러므로 나를 구성하는 입자의 행동이 곧 나의 행동이다. 그 저변에서 물리법칙이 나의 입자를 제어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의 행동(입자의 행동)은 자유의지와 무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특별한 입자배열은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라는 거시적 서술이 퇴색되지는 않는다. - P224

그리고 궁극적인 기원에서 자유로운 행동으로 초점을 바꾸면 확고하고 다양한 인간의 자유를 수용할 수 있다. - P227

"진정한 발견은 낯선 지역을 찾아갈 때가 아니라,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이루어진다. 다른 사람의 눈, 수백 개의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 P339

"당신은 인간의 목숨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군요. 그렇다면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당신이 1년 뒤에 병으로 죽는 것하고 1년 후에 전 인류가 멸종하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더 무서운가요?" - P450


그렇다. 우리는 무상하기 그지없는 일시적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하는 짧은 시간은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매우 희귀하고 특별한 시간이다. - P455

그러나 소규모의 입자들이 모여서 현실을 인지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얼마나 단명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연결 관계를 확립하고, 우주의 미스터리를 풀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P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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