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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필 - 들어 세운 붓
주진 지음 / 고즈넉 / 2014년 5월
평점 :

여기 한 사내가 있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그런데 심중 산골, 늙은 노파는 그를 위해 주물러주고 먹여주고 대.소변을 모두 처리해주면서 오직 그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린다.
그가 아는 사람이라곤 자신을 형님이라고 대하는 , 가끔 찾아오는 양반차림의 이정 이란 사람-
자신이 왜 이리 누워있으며, 그는 누구인지, 노파는 누구인지, 아니 자신은 누구인지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해대지만
여전히 두통만 올 뿐이다.
간신히 알아낸 자신의 이름은 민수영이고 시시각각 조여오는 그림자들의 위험을 알리는 이정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알고 있을 듯한 사람들을 찾아 한양에 가게된다.
하지만 그가 이미 살아있단 소릴 알게 된 그 누군가는 결국 그가 가지고 있는, 자신들의 안위보장에 필수인 그 무엇을
찾아내어 뺏기 위해 그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 무엇이란 무얼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초였다. 즉 그의 직업은 사관이었단 말이된다.
사관이란 무엇인가?
아무리 무소불위의 임금이나 권세를 휘두르는 막강한 신하라 할지라도 올곳게 자신이 들은 바를 솔직하게 바로 써내리고 오직
그들만이 간수하고 보관할 책임이 있는 자리를 말한다.
그런 사관이었던 민수영은 실록의 초고인 사초를 매일 기록하고, 후일 실록 편찬에도 참여하게 된다.
실록 편찬에 참여한 민수영은 자신이 예전에 작성한 사초의 내용이 왕의 형제가 연루된 역모와 관련되었음을 알고 피비린내
나는 사화를 피하기 위해 사초를 훔쳐내게 되지만 그 여파의 결과는 유배형에 처해진다.
하지만 유배지에서 피습당해 빈사 상태가 되었다가 십여 년 만에 다시 깨어난 그는 자신이 숨겨놓은 사초를 근거로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 조여오는 당세의 권력자인 한명회, 그리고 지금의 성종 자리를 빼앗으려 역모를 했었다는 의심을 받는
월산대군 이정, 그리고 성종에 의해 모두를 믿을 수도 , 믿지 못할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에 부닥치게 된다.
벼슬에 오름으로써 안이했던 자신의 한 때나마의 지위를 이용해 살아왔던 민수영이란 자의 눈을 통해 당대의 끈은
떨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권세의 상징으로 대두되는 한명회와 월산대군, 성종, 그리고 그의 아버지인 의경세자의 석연치 않은 죽음을 둘러싼
당시 세조와 권신들간의 대화록을 기록한 사초를 빌미로 서로 다른 입장에서 권력의 구도를 차지하려는 모습을 긴박감 넘치게 그려내고 있는 보기드문
흡인력이 높은 책이다.
자신의 손으로 왕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던 한명회의 야심찬 권력유지를 이으려는 야망 앞에 성종은 그러한 선대의 왕들이
훈신들에 주눅들어 정치를 해야만 했던 세태를 인지하고 또 다른 새로운 왕조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민수영이 빼돌린 사초의 필요성을 , 세조의
왕위에 오른 당위성에 찬성할 수없었던 의경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대화록를 기반으로 왕의 정통성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사초의 진실을 덮고 가느냐,
탄핵으로 몰아 또 다시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왕을 앉혀 놓느냐로 ,서로 눈에 가시처럼 견제를 하는 구도의 설정이 기억을 잃어버린 한
사관이란 주인공의 눈으로 스릴과 역사소설의 참 맛을 간만에 느끼게 해 준 재미를 보여준 책이다.

조선의 왕조는 그 정통성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그들 나름대로의 약해진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때론 훈구파, 때론 신구파로 나뉜 신하들을
이용함으로써 견제의 틀을 유지하며 나름대로의 혈통보전을 인정해왔단 사실을 토대로 볼 때 위의 소설은 비록 가상의 인물과 가상의 사건흐름을
구성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 저마다의 야망과 욕심 때문에 벌어진 사태를 두고 누가 이번 기회는 이겼고, 실패했는지를 인정했을 뿐
결코 온전한 나라의 정통성은 시시때때마다 불안의 기미를 보였단 점에서 위의 소설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고 할 수가 있겠다.
같은 혈육임에도 믿지 못하는 왕가의 사람들, 한낱 백성이지만 사관으로서 순리대로 처리하고자 했던 민수영이란 자의 처신은
실로 눈물겹다.
성종이 하나의 인간이었다면 당연히 한명회를 처리하고도 남았겠지만 군주의 순리대로 하자면 무엇보다 조선과 백성을
위해야했기에 한 템포 거둔 그 심정은 오죽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 만큼 감정 몰입도가 높은 가독성을 지니게 한다.
그 와중에도 서로의 실리를 얻기 위해 타진하는 과정은 권력이 가진 구린 속성임에도 불구하고 성종은 나름대로의
경국대전이란 완성, 즉 양법미의(良法美意) , 아름다운 의미의 좋은 법을 토대로 조선의 완전한 기틀을 마련할 기회를 얻는 과정이 노련하고 냉철한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또 다른 군주로서의 입장을 생각해 보게된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 사관으로서 끝까지 바른 순리대로 처신하고했던 민수영의 모습은 저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왕을 맘대로 갈아치울 수있다던 한명회 보다, 아비가 죽지 않았다면 정통순리대로 자신이 왕으로 오를 수 있었을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으로
살아가는 월선대군보다도, 혈육을 믿지 못하며, 사관의 그릇된 행동으로 자신의 선대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위협을 간과 할 수없었던 성종보다도
오히려 살아가는 순리를 따지자면 가장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드라마 '공주의 남자'란 드라마에서 보여주듯이 역사의 단 한 줄의 글로 인해 많은 가상의 이야기들이 탄생할 수있는
것을 볼 때 이 소설 역시 저자의 허구의 세계를 그려놨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도 이런 가능성은 얼마든지 벌어졌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1485년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를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편 저자의 활기찬 글 흐름과 역사적인 한정된 사실과
시간을 두고 그 틀 안에서 촘촘히 벌어졌을 법한 이야기들을 다룬 솜씨가 읽는 동안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만들었다.
드라마나 영화로 나와도 재밌는 소재란 생각과 함께 차후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