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함의 탄생 - 중국 강남 문화사
나카스나 아키노리 지음, 강길중 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중국이란 나라가 긴 세월동안 여러 민족이나 부족에 의해서 멸망하고 신 국가로 탄생되는 동안 흔히 지금의 우리나라의 강남의 오렌지족이라고 할 수 있는 남쪽지역에서 발생한 문화적인 탄생을 추적하고 이로 말미암아 전파된 문화가 어떻게 조선과 일본 그리고 중국내의 왕조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한 글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주자에 대한 얘기서 부터 시작되는 예술의 세계는 이미 이 당시에 북쪽에 수도를 두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남송왕조때 휘종이 여진족에게 끌려가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의 아들인 고종이 다스리게 되면서 수집에 열을 올리게 된 것이 계기가 된다. 이에는 국가 위신의 회복문제와 북송 전성기영광을 재현하지 못했고 축소 재생산에 그치고 만 결과를 낳는다.  

남송이 엘리트 문화를 이룬 근간에는 일찍부터 북송문화의 축소판인 재생산이 이루어졌고 후대 문인들의 취미의 원형이 되지만 북송은 이를 추구하지 않은 점이 차이를 보인다. 원나라 통일 후 한인의 민심을 얻기위해서 행한 문화정책에 조맹부가 호응을 보이고 이 뒤를 이어서 여러 학자들이 나오지만 조맹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결과가 나온다. 살롱의 좁은 공간에서 뒹굴던 문인화는 명대 중기에 이르러서 문화브랜드로 자릴 잡게 되고 상품으로 유통이 되면서 그 세를 떨치게 된다. 여기에는 동기창이란 사람이 등장함으로써 더욱 활발히 예술품에 대한  품평회가 이루어졌으며, 이는 곧 가격변동을 일으키는 상거래장소로 변하게 된다.  여기엔 신안사람들의 예술시장에대한 투자가 종래에는 예술작품의 값을 크게 좌우하는 데 일조를 한다.  

학술적인 면에선 남방우위란 말로 표현이 된다.   

일찍부터 학습에 차이에 의한 것으로 남안은 어린시절 대구 짓는 과제를 행하면서 수련을 쌓는 반면 북방은 오탈자가 많고 고서의 보급이 되지 않았던 점에서 두드러진 실력의 차이를 보인 결과를 낳는다. 

출판업 또한 과거 수험 참고서인 거업서 출판이 대세를 이루게 되고 이에는 복건 지역이 주를 이룬다. 대표적인  지역이 건양으로 출판중심지면서 주자가 생애 대부분을 보낸 지역이었고 주자 자신이 출판에 관심을 쏟으면서 가능한 일이 된다. 주자 사후에 제자들에 의해서 이 일은 계속 이어졌고 원나라 때 과거 제도가 부활이 되면서 주자학파에게는 교세 확장을 위한 기회로 이용이 된다.  이런 출판은 16세기 최절정기를 맞다가 18세기 들어서면서 건륭제 치하에서 건양판 서적은 거의 수록이 되지 않는다.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은 방대한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왕권이나 신하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워낙 많은 분량은 주자처럼 자치통감강목이란 책으로 절본이 탄생한 결과를 가져오고 이는 후대에 이르러서 과거시험에도 비중이 커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강감은 엘리트 독자보다는 하층에 속한 사람들에게 통속 역사를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이는 예수회선교사들에게도 중국의 통사를 실현한 책이기에 압도를 당하게 된다.  

16세기 왜구가 남쪽지역인 강소, 절강, 복건연해에 쳐들어옴으로써 북쪽 사람들의 유목민에 대한 경계와는 또 다른 세계의 침입에 남쪽은 긴장을 하게 된다. 이에는 왜구와 함께 복건인들도 합세해 침입을 도모하는 양상을 보이고 이는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신세가 되었으며 포르투갈, 네덜란드인 침입으로 배외사상이 증가한다.  여기엔 남인들인 호종헌 , 모순, 당순지가 활약을 보이고 나홍선이 제작한 광여도는 후대 지도 작성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1567~1572년 해금이 해제되면서 화인들의 진출이 본격적으로 진행이 되고 여기에는 일본진출보다 우위를 보이게된다. 주로 장주와 천주출신들이 주세력을 이루었고 후대에 복건과 광동인이 주 세를 이루게 되지만 기초적인 터는 위의 출신들이 이루어 놓았기에 가능함을 일깨워준다. 이외에도 소흥, 영파 사람들이 하급관리의 자리를 많이 차지해 실질적인 행정업무를 맡았고 지리적 여건에다 인구가 많은 강서지역은 기술습득을 하지 않는한 생활고에 시달린 탓으로 자연적으로 버마까지 활동을 넓혀 생활하게 된다. 이는 곧 익양강을 이용한 희곡을 전파한 동기를 부여하게 되고 이후 문인들이 즐겨하는 곤곡의 성향으로 발전해 소주의 문화 제패 현상으로 이어진다.  

그 후 청나라대에 이르러서 문인용의 아부와 일반인의 화부(경극)으로 분리가 되고 이런 발전상은 각 지역에서 쓰고 있는 다양한 방언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일원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는 실패를 하게되고 지금도 중국의 지역을 나누어서 각기 다른 언어가 존재하게 된 이유가 된다.   

흔히 칼보다는(무기) 글의 힘이 세다고 하는 말이 있다. 

위의 경우처럼 중국도 북쪽지역에 수도를 삼는 정책을 취했지만 결과적으로 문화면에선 남인들이 이루어놓은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한계를 지녔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청나라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이들의 남인들의 예술체계가 인정을 받아서 중기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문화의 정통으로 자리를 잡게되고 여기에는 조선의 경우 북쪽을 통해서 받아들인 반면 일본의 경우엔 에도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문물수입이 이루어진다. 여기에는 건양의 출판몰락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지금도 중국에 남아있지 않은 문서들이 일본에 발견된 예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자연적으로 천혜의 자연을 가졌고 지리적으론 해안가에 위치한 점 때문에 일찍부터 출판과 문화의 다양성을 추구했던 남인들이 문과 출신들이 왜구의 침입과 유목민의 침입으로 인해서 무과의기질로 전장에 나가서 물리친 점은 어찌보면 소외되고 멸시받은 자신들의 삶을 다각적으로 알리는 계기로 삼았고 이런 적극성은 순수 한족이 세운 나라부터 오랑캐가 세운 왕조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문,무 실력을 중국 정통으로 삼을 계기를 삼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구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부터 조선의 정책을 생각하는 과정이 흥미롭게 전개가 되고 일본인의 시각으로 쓴 책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여러 방면에 걸친 자료 조사의 정성이 보인 책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작가가 말했듯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한 분야에 치중한 결과를 제시한 글이라기 보다는 잡학적인 다양한 면을 건드려서 쑤시고 다니면서 여기조금, 저기조금식으로 양념 비슷하게 맛만 보여준것 같아서 중국사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면 쉽게 그 시절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힘들단 느낌이 들었다.  

또한 일본학자들에 연구되고 있는 이런 책의 종류가 우리나라 학자들에 의해서도 좀 더 다양하고 일반인들도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든 책이 나왔음 하는 바램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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