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가 세계였을 때
스튜어트 고든 지음, 구하원 옮김 / 까치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지금의 세계 주도권은 미국이라는 강대국과 유럽의 연합국들 중 일부가 거머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여기에 동양의 나라를 붙이자면 일본, 그리고 무섭게 1위를 노리고 있는 중국정도가 될까?

 

이 책에선 과거 실크로드의 길을 보여주고 그 지역에서 오고간 많은 지식인들, 상인들의 모습을 발췌해 봄으로써 지금의 유럽이 갖고 있는 첨단의 산실인 학문과 경제의 토대가 아시아였음을 보여주는 여정을 담아내고 있다. 총 10편의 챕터로 구성이 되어있고 시대별로 차례로 그 시대의 유명했던 인사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봄으로써 어떤 경로로 각국에 문물과 교역을 전파했는지가 흥미로운 지도와 함께 서술되고 있다.

 

1.현장(618~632년)

 

서유기에 나오는 그 현장 법사란 이름만으로도 친근함이 나오는 이 법사는 자신의 의혹을 풀기 위해서 서역으로 떠날 결심을 하게 되고 당시 당나라의 7개 봉화대를 통과함으로써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첫 걸음을 하게된다. 난주 근처에서 당시 그곳을 다스리고 있던 국문태의 도움으로 여행을 시작하게 되고 난주, 돈황, 타클라마칸사막, 이사쿤, 타우렌트, 사마르칸트, 부하라, 바미얀, 카불, 히말라야산맥, 날란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끝마친다. 이 도중에 들른 도시에는 비단이 통용이 되고 그 지역의 결혼풍습의 모습, 같은 음식이라도 서로 불리는 말이 다르더라도 그 방식은 같다는 점을 적었고, 날란다에서는 동자왕의 지원으로 경전, 유물 불상, 의술, 사상, 식물 종자등을 가져오는 수확도 거두게 된다.

 

2.칼리프와 대상 - 이븐 파들란(921~922년)

 

러시아 볼가강에 위치한 유목민족 중 불가르족을 다스리던 알미쉬 왕의 이슬람 배움과 전파 요청으로 인해서 이븐 파들란이 가게 된다. 주 목적은 왕이 요구한 이슬람의 전파였지만,  궁전 지을 돈이 더욱 필요했던 왕에겐 막상 그가 왔을 때 제때 돈이 도착하지 않자 곤란을 겪게 되고 이미 그 지역엔 이슬람이 들어와 있단 사실로 인해서 자신의 할 일이 없어짐을 알게 된다. 대신 왕궁으로 가는 도중에 거친 지역의 부족들의 생활상, 종교생활을 기록했다.

 

3. 철학자와 의사 - 이븐 시나(1002~1021년)

 

철학자이자 의사인 이븐 시나가 남긴 저술은 오늘날 까지도 그 영향이 대단하다. 그가 이렇게 이룰 수 있었던 당시의 바그다는 아바스 왕조가 이슬람의 새 왕조로 부상하면서 그리스, 라틴어책, 철학, 수학 천문학, 희곡. 의학을 다룬 책이 아랍어로 번역된 힘이 컸다. 이는 로마와 페르시아 , 중동, 인도 , 이집트의 지적 산물의 결집을 가져왔으며, 숫자 0의 개념도 받아들인 시기였다. 중국에서 발견된 종이완 다른 그 지역의 특산물로 만들어진 종이로 인해서 도서관의 수가 증가했으며, 신플라톤학파를 따랐던 이븐시나에겐 기존의 왕조가 강조한 방식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방식의 신과 인간관계 수립을 하게 된다. 또한 그의 의학전술과 환자 치료 방법을 저술한 내용은 당시의 상황에선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알고 방랑의 길을 떠나게된다. 이후 그의 저서들이 중세철학에서 중요한 차지를 하고 의학저술 또한 유럽에 권위있는 책으로 인정을 받게된다. 이는 인간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의문을 연구했고 서양의 지식을 넘어서 아시아에게로 까지 넘어온 계기를  주었다.

 

4. 잉곳과 유물 - (인탄의 난파선 1000년)

 

1000년 젼 자바 해협에 선박 1척이 난파 되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것이 묻혀있던 장소를 발굴하면서 그 안에 들어있던 유물과 각종 장신구, 주석이 포함된 거울, 청동불상,불교 경전, 일상용품을 통해서 당시 교역로와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오고 간 물품을 확인해 봄으로써 아시아의 거대한 뱃길이 유럽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루트였음을 알 수가 있다.

 

5. 후추와 동업자 _ 아브라함 빈 이주(1120~1160년)

 

유대인 향신료 상인인 아브라함 빈 이주의  통상을 통해서 당시의 향료연결 길을 알 수가 있다.

홍해 입구의 아덴에 있는 상인 마드문 휘하에 제자로 들어가서 망갈로스로 보내지면서 향신료 무역을 시작하게 된 그는 독립후에 향신료의 수급에 문제가 생기자, 금속공예인들을 이용해서 손상된 물건을 새로운 용기로 대체시켜 네트워크를 이용한 무역업에 뛰어들게 된다. 하지만 비 유대인인 노예출신의 해방뇨예 여인과 함께 결혼을 하게 되지만 배타적인 유대사회에 의해 자녀들이 곤란을 겪게 되자 부인을 떠나 자식들을 데리고 제 2의 장소에서 교역을 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고, 이후 향신료 사업은 이집트출신의 무슬림들에게 넘어가게 된다.

 

6. 귀족과 명사 - 이븐 바투타(1325~1356년)

 

모로코에서 태어난 그는 튀니스 대상에 합류를 하면서 여행을 하게되고 지나가는 도시들마다 그 곳의 건축, 특산물, 관습, 제조업을 관찰하고, 이후 몽골까지 가게 된다. 각 나라의 왕실의 의례.옷차림, 나뭇잎을 씹는 풍습도 같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기록했고 타국의 왕들에게 다른 나라의 왕실 얘기를 해 줌으로써 오늘날의 경영자 수업 방식을 취하게 됬다. 말년에 아내와 자녀들이 모두 죽는 쓸쓸함을 겪기도 하지만 흑사병 기록도 남겼으며, 자서전을 씀으로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7. 보물과 협정 _ 마환(1413~1431년)

 

1413년 명나라 함대가 정화를 지휘자로 선두로 한 57척이  동남아시아, 스리랑카,인도해안, 중동남부  해안에 이르는 길에 무슬림이면서 아랍어로 말하고 읽기가 가능한 하급직 관리로 가게 된다. 여기서 그는 참파에서의 왕실 모습, 처벌 방법, 기후, 결혼풍습 묘사와 자바에서의 중국인 출신 마을과 왕실 묘사, 인종분류의 글을 남긴다. 타 지역에서는 불교 승려들과 여승들을 중국 불교와 비교해 보고 주석 광업에 관심을 보인다. 이후 무사히 중국에 돌아오게 되지만 중국의  새 정책에 따라서 원정대에 의한 기록이 불에 태워지고 간간이 남아 있는 자료로서 그 당시의 모습을 추즉해 볼 수가 있을 뿐인 아쉬움을 준다.

 

8. 피와 소금 _ 바부르(1494~1526년)

 

징기츠칸의 수 많은 직계후손인 바부르는 아버지로부터 파르가나 왕국을 물려받고 사마르칸트 몽골족의 도움으로 사마르칸트사막 정복에 성공하지만 , 다시 이들의 배신으로 우즈베크족 공격으로 실패를 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고 카불은 아시아의 교차로 지점으로서 중요해졌다.

서로 말도 통하지 않았던 이들의 이민족 간의 충성도는 소금이 정해줬다. 아주 귀한 소금은 상관이 부하에게 제공하는 음식과 기회를 상징했고, 부하는 명예를 걸고 바쳐야 할 충성를 상징했다. 그는 죽기까지 부하들에게 전리품기부, 포상을 내린것도 피와 소금으로 이루어진 네트워크의 결과물이다.

 

9. 약재와 오해 - 토메 피레스(1511~1521년)

 

포르투칼의 약종상이었던 피레스는 포르투칼 식민총독이었던 친구의 부탁으로 중국 외교 사절단으로 떠나게 된다.

그는 동남아의 약재 식물에 대한 기록과 각국의 특징, 항구에 대한 기록을 남겼지만 그릇된 인종관과 세계관으로 인해서 중국에서 마찰을 빚게된다. 그의 생각은  자신들이 믿는 종교외엔 적이라고 불리는 순니파 이슬람교도, 동맹이라 불리는 나라는 기독교인들로 구분짓고 중국을 자신들과 같은 백인이라고 생각하고 정복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한 데서 비롯된다. 주강 삼각주에서 광주로 가기 위한 절차가 늦어지자 허가 없이 광주로 떠나게 되고 예복과 연회를 베풀지 않음으로써 중국인들의 눈 밖에 나게 된다. 더욱이 말라카를 정복한 뒤에 말라카의 요구로 다시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는 편지쓰기를 거부한 피레스와 그의 동료들에게 쇄족쇄가 채워지고 일부는 처형이란 극단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는 계속된 아시아의 정복에도 불구하고 끝내 중국을 정복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고 스리랑카에서도 물러나게 된다.

 

10. 아시아의 세계 - 500~1500년

 

총괄편적으로 아시아가 세계를 누비벼 살았던 시기의 상황을 정리해 놓았다.

 

대체적으로 다룬 시기가 중요한 점도 있었고 워낙에 그 당시 기록을 해 놓았던 저술에 입각한 것을 바탕으로 해 놓은 것이라서 다양한 폭을 읽을 수 있다. 현장 법사가 누볐던 시기는 현장이 가지고 있던 불교가 무관할 수 없을 정도로 중국은 불교를 통해서 발전을 했고 불교의 성공은 왕권을 유지하는데 보편적인 사상과 기관확산. 각 지역의 문화를 바꾸었고, 무역을 융성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난파된 배의 유물을 통해서 승려들에 의해서 종교용품이 전파, 각 지역의 특산물이 교류, 향유 수입은 종교와 무관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후추를 통한 무역을 했던 아브라함 빈 이주의  시대는 신용과 평판이 중요했으며, 가족과의 인맥이 중요함을 알려준다. 배를 여러 척 구입해서 위험 부담을 줄였고, 그들이 믿는 종교단체마다 자치가 이루어졌단 점, 유럽의 길드같은 것이 없었단 점도 눈에 뛴다.

포르투칼의 아시아 정복 시도 결과로 파생된 것도 중국이 외국 상인들의 출입을 금지 시킨 결과를 가져오고 아시아 각국은 저마다의 해상 전쟁에 대비한 군비 경쟁을 불러왔으며, 항구 요새화 , 향신료를 직접 유럽으로 가서 팔 수 있게 연결된 점, 포르투칼이 유럽의 향신료 절반의 무역을 쥐게 되었단 점도 눈길을 끌었다.

 

세계의 역사는 돌고 돈다지만 아직까지는 아시아의 힘이  유럽과 미국에 비해 많이 부족한 실정이다. 과거 이 책에서 알려주는 상인들의 무역항로 개척과 중국의 비단과 초원 스텝 지역에서 키운 말과의 교환, 왕실들의 사신 접대 방식이나 옷 입는 방식, 통화 화폐주조와 함께 지방 정부도시의 상업의 중심지 역할은 지금 생각해도 상당히 발전된 지방 분권 독립 자치구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불교나 이슬람의 종교는 외국인을 받아들이는 태도나 다툼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실천적 윤리를 갖고 있었기에 다른 종교와 경쟁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됬고, 정치면에서는 왕의 귀감서를 발행해서 이븐 바투다가 주장했던 타국의 문화를 알아야 할 필요성을 말했다는 데서도 알수가 있다. 일찍이 유럽에선 당시로선 보기 힘들었던 저서 활동, 전기, 자서전 ,그림들이 넘쳐난 그 시대는 오늘 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와 견주어 봐도 결코 모자람이 없는 확실한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단 점에서 경쟁이 치열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많은 본보기를 보여준 사례가 아닌가  생각한다.

 

총 9명의 그 당시의 활동했던 대표적인 사람들의 행로를 따라가다 보니 자세한 설명도 있는 반면, 많은 사람들의 등장은 때론 듬성듬성 커다란 물줄기만 다뤄진 부분도 보여진다. 아마 저자의 욕심으로  저술하다 보니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큰 폭의 강줄기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고 그 안에서 다뤄진 무역 품목 하나를 집중적으로 읽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입문서가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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