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증거
비그디스 요르트 지음, 유소영 옮김 / 구픽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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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바로 전 홈 쇼핑에 호스트가 방송 끝 무렵에 행복한 추석을 보내시라는 말 끝에 우스개 소리로 가족들 간에 싸움은 하지 마시고요~라는 멘트를 듣는 순간 모처럼 그동안 모이지 못했던 가족들의 오손도손 모여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연상됐다.



그런 가운데 가족들 간에 어떤 부분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으로 인해 마찰이 있을 수도 있고 이것이 웃음으로 넘겨가며 지날 일도 있겠으나 깊은 문제의 회피를 더 이상 건드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 언저리에 간직된 심리도 들어 있을 수도 있는 경우도 있을 터, 이 작품을 대하는 순간 베르기요트의 마음은 어떠했을지를 생각해 본다.




아빠는 다섯 달 전에 돌아가셨다.-




첫 문장 이후로 그녀가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은 결코 쉽게 읽히지는 않았다.




아니 단어는 수월하게 읽혔는데 한 장 한 장 넘기기까지 사흘을 붙잡고 있었던 근저에는 50이 넘어서야 비로소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가족 앞에서 말하기까지 그녀의 일생 부분 부분들이 결코 쉬웠을 것이란 생각은 할 수 없었던 환경이 내내 마음을 울렸다.




아버지의 사망 이후 별장으로 사용하던 두 별장을 두 여동생에게 물려준다는 유언과 오빠와 자신은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단 사실은  23년간 거리를 둔 부모와의 일을 정면으로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고 같은 형제지간이지만 부모의 차별적인 대우에 응할 수 없었던 오빠의 주장에 베르기요트는 이 일로 뛰어들게 된다.




단순히 유언에 제시된 상속 때문이라면, 서로 간의 의논과 협의를 통해 조정이 될 수도 있지만(실제 차후 이런 노력들이 있다), 사실 베르기요트가 친정에 발을 끊었던 결정적인 그 일은 부모로서 지닌 책임감 회피와 비밀 발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식의 입을 막으려 했던 모종의 행동들과 언사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5살부터 7살 사이에 행해진 아버지의 성폭행과 이를 알고 있었을 것이나 짐작으로  (아니면 첫아들이란 위치로 엄격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 아들을 다뤘던 아버지, 외도를 통한 불륜을 저지르고 이혼을 하기 위해 결정적 구실을 제공하기 위한 확인으로 딸인 자신에게 물었던 엄마, 외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다시 가정으로 돌아온 엄마의 무능력과 아빠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은 그녀가 상황을 깨닫고 엄마에게 진실을 말했을 조차도 무시되었다.




그런 그녀가 자발적으로 이 모든 고통을 헤어 나오기까지 겪었던 정신분열 검사 과정과 그녀 스스로도 인지했듯 인간관계의 원만하지 못했던 어려움, 그녀 자신도 마찬가지로 불륜과 이혼을 감행함으로써 되찾은 자신의 일생들을 나열하는 과정은 기존 가족들에게 진실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과 아무리 진실이라 할지라도 증거가 없다는 말로 전적으로 믿기는 어렵다는 동생의 말에는 한 가족 안에 쌓인 비밀의 탑을 무너뜨리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용서와 화해는 누가 결정짓는가?




곁에서 듣는 입장에서 가족 간의 화합을 원하는 동생의 말과 편지, 메시지에 담긴 내용들, 여전히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인정하지 않는 엄마, 이미 오래전 그들의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이라는 사실 앞에서 베르기요트가 풀어내는 기나긴 여정은 참으로 아팠다.




초반부터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부분의 여지를 통해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던 진행은 어린 시절 겪었던 트라우마가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희생당한 입장과 그 희생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 죽음을 맞이한 사람, 그리고 주변의 시선에 자신들이 치부가 드러날까  내내 암묵적인 동조를 했던 그들은 엄마란 사람의 성정과 행동들이 내낸 이해를 할 수도 없었지만 뭣보다 베르기요트가 잊으래야 잊을 수 없었던 것은  한 어린아이의 기억 속에 간직된 '사랑받고 싶다'라는 마음이었다.




때문에 불륜을 저지르면서 ' 난 어디가 잘못됐기에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라고 반문하는 장면은 불안정하고 위태위태하던 그녀 일생을 통틀어 생각해 볼 때 아이들 장성한 뒤에 잘 살아온 인생의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더욱 들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언어도 완전히 결백하지 않다. - p98




작품은 한 가정 안에서 벌어진 폭력 사건과  발칸 반도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드러내 보임으로써  피해자와 가해자(학대당한 사람들) 사이에 불평등한 권력의 구도와 진실임을 알고 있지만 그 상황을 덮고 다시 원만함을 이루려는 사람들의 논리를 각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으로 그려냈다.




- 고통은 인간을 좋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 보통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 누가 더 많이 고통받았나 논하는 것은 유치한 짓이다. 학대당한 아이들에게는 트라우마가 남는 경우가 많고, 그들의 감정적 내면은 파괴된다. 학대자의 사고방식과 학대 방식을 물려받는 일도 흔하다. 그것이야말로 학대의 가장 고약한 유산이다. 학대는 학대당한 사람을 파괴하여 자신을 해장시키는 일을 어렵게 한다. 고통을 누군가에게, 특히 피해자에게 유용한 뭔가로 변화시키려면 강한 노력이 필요하다. - p 268




박수는 한쪽에서 쳐서는 소리가 안 난다.



아무리 베르기요트가 시간이 지난 후 이해를 해보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여전히 그들의 마음은 닫히고 손도 마주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면 진실의 문은 여전히 닫혀 있을 것이다.




그나마 그녀에게 위로가  되는 부분이라면 그녀의 딸이 엄마의 삶 자체가 그 증거라고 증언한 부분이다.




지인 보는 찰학자의 명구를 인용했다.




-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글을 쓴 게 아니라, 동의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려고 썼다고. -p 175




극적인 부분들은 없지만 그래서 더욱 몰입감을 안겨주는 작품, 트라우마를 지닌 사람들의 심리변화와 고통,  이에 굴하지 않고 헤쳐나가는 베르기요트의 섬세한 심리변화를 잘 그린 작품이다.






***** 출판사 도서 협찬으로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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