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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여름 - 이정명 장편소설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5월
평점 :

제목: 부서진 여름
글쓴이: 이정명
펴낸 곳: 은행나무
<바람의 화원>과 <뿌리 깊은 나무>로 깊은 인상을 남긴 소설가 이정명의 신작 『부서진 여름』을 만났다. 푸른 물속에 몸을 던진 여인의 모습. 물보라를 일으키며 꼭 쥔 두 손 양옆으로 이어진 캔버스 혹은 액자 같은 형상 때문에 마치 한 편의 작품을 보는 듯 넋을 잃게 된다. 세월의 흔적으로 빛이 바란 듯 여기저기 부서지고 얼룩진 글씨. 책을 펼치기 전부터 '부서진 여름'이란 다섯 글자에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여인의 모습을 한참이고 바라보다 조심스레 책장을 넘겼다. '그 도시 사람들은 그를 잘 알았다.' 이토록 비참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에 휘말릴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채 그렇게 나는 첫 문장을 시작으로 그들의 삶에 빠져들었다.
작은 도시 이산. 쐐기화 화가로 유명한 화가 이한조는 이곳의 자랑이다. 그의 생일이자 작품 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한 날, 한조는 아내와 축배를 든 후 술에 취해 잠이 든다. 원했던 거의 모든 것을 이루며 인생의 절정에 오른 한조. 그런데 아내가 사라졌다. 시간은 쏜살같이 역으로 흘러 한조의 청소년 시절로 향한다. 한조의 아버지가 관리인으로 있던 하워드 주택에 새로운 가족이 이사 온다. 렌터카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희재와 그의 아내 선우 그리고 큰딸 지수와 어린 여동생 해리. 아버지를 도와 하워드 주택의 관리를 돕던 수인과 한조 형제는 곧 주인집 가족과 가까워진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날이었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수의 실종과 죽음. 지수를 짝사랑했던 한조의 마음을 터질 듯 괴로웠다. 하지만 그 순간 한조는 알았을까? 지수의 죽음 보다 더 비참하고 괴로운 고통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고통 앞에서 어른들은 한없이 나약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서로를 망가뜨렸고
그러다 지치면 짧은 잠에 빠졌다.
『부서진 여름』 p253 중에서...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상당히 협소하지만 시간적 배경은 꽤 방대하다. 끔찍한 일을 겪은 후 타지로 향했지만, 한조는 결국 자신의 뿌리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마치 보이지 않는 자석에 이끌리듯 하워드 주택으로 돌아온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 순간 지금의 아내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비교적 초반부에 밝혀진 아내의 정체도 놀라웠지만,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며 그녀가 숨기고 있던 진실이 가장 놀라웠다. 아버지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한조와 살인자의 아들을 사랑하게 됐다는 죄책감에 이젠 그의 결백을 의심하는 상태로 돌아선 아내의 복잡한 심경이 답답하게 숨통을 조인다. 과연 그날 지수를 죽인 범인은 누구일까? 누구도 100%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 사소한 오해와 의심이 어떤 비극을 불러오는지 여실하게 보여준 작품이었다. 눈부시게 찬란했던 그 여름, 지수가 목숨을 잃지 않았다면 두 가족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날 이후 산산이 부서진 그들의 인생과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가슴 깊이 저며 드는 슬픈 미스터리였다.

소설 속 지수의 죽음과 한조가 그린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오필리아의 죽음>
은행나무 출판사 서포터즈로 도서를 지원받아
집중하며 읽고 정성스럽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