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와 블루를 넘어서 - 젠더 고정관념 없이 아이 키우기
크리스티아 스피어스 브라운 지음, 안진희 옮김 /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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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핑크와 블루를 넘어서
지은이: 크리스티아 스피어스 브라운
옮긴이: 안진희
펴낸 곳: 창비 출판사

 

 얼마 전에 재밌는 일이 있었다. 아기 띠로 아이를 안고 택시에 탔는데, 기사님이 아이 옷 색깔만 보고 '아들이죠?'라고 물어보셨다. 그날 우리 꼬마가 입었던 옷은 갈색 체크무늬. 기사님께 갈색은 남자아이의 색이었나 보다. 기사님이 당황하시지 않게 웃으면서 '씩씩한 딸이에요'라고 말씀드렸고 잠시 어색하긴 했지만, 곧 기사님도 손녀가 있다고 말씀하셔서 유쾌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날 잠자리에 들며 문득 떠오른 생각, '딸과 아들, 꼭 색깔을 구분하여 옷을 입혀야 하는 걸까?' 물론 나도 우리 꼬마에게 핑크 옷을 자주 입히곤 한다. 얼굴이 뽀얘서 입혀 놓으면 참 예쁘니까. 하지만 꼭 핑크만 입힐 생각은 없다. 그리고 장난감도 성별에 따라 선호하는 제품보다는 누구나 가지고 놀 수 있는 학습적이고 실용적인 제품을 선호한다. 사회에서 기대하는 성별 잣대에 큰 유감은 없지만 그래도 아이에게 '여자는 이래야 해!'라는 고정관념을 심어주기 싫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핑크와 블루를 넘어서』의 저자도 나 같은 생각으로 두 딸을 키우고 있다고 한다. 발달심리학과 부교수인 저자는 과연 독자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을까?

 일단 이 책은 저자의 어투가 상당히 강하다. 이건 번역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옮긴 게 아니라, 저자의 실제 말투가 세고 강하다는 느낌이 든다. 딸이 바비 인형과 핑크 옷을 선물 받는 걸 싫어하며, 여자아이 전용으로 나온 레고나 화장 놀이 세트 같은 장난감도 싫어한다. 자기 생각을 강요하고 싶진 않다고 말하면서도 자기주장이 상당히 강하고 자신이 옳다는 신념이 확고하여 문장 하나하나에 힘이 실려 있다. 말 잘하고 싸움 잘하는 센 언니 같은 느낌이랄까? 사실 글에서는 저자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내용만큼은 알찼기에 나름 즐겁게 읽었다. 어른이 아이에게 심어준 성 고정관념이 아이의 미래에 미치는 악영향에 놀라면서 말이다.

 자, 그럼 이제 한 편의 논문 같은 이 책을 중요한 부분만 추려 짧게 요약해보자!

아이들은 어른이 제공하는 정보를 통해 세상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깨닫기 때문에
아이들을 성별이나 색깔로 분류하는 것은 옳지 않다.
★ 부모가 아이에게 강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건 불과 3년, 그 후엔 세상이 끼어들어 성 평등 인식 교육이 힘들어진다.
여자아이들끼리는 비슷하고 남자아이들과는 매우 다르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 성별에 따른 차이가 없다는 걸 밝혀낸 연구는 많다.
아이가 성별 고정관념을 형성하면 바꾸기가 힘들므로 잘못된 점을 곧장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아이마다 고유하게 가진 특질을 반영하여 키워야 한다.
우리는 뿌리 깊이 숨은 여러 고정관념을 바꿔야 한다.

 쑥쑥 자라는 우리 아이들은 어른을 통해 성 역할과 사회성을 배운다. 그러니 성 역할 교육에 있어 남성과 여성으로 분리하여 주입식 교육을 하지 말고 성별을 떠나 모든 것이 아이의 선택에 달렸으며, 남녀는 평등하다는 걸 가르쳐 주라는 게 아마도 이 책의 요지일 것이다. 결국 아이는 어른 하기 나름이구나! 너무 당연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어른이 올바른 기준을 갖고 아이를 바른길로 이끌어주어야 성 고정관념 없는 다음 세대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아이를 가르치고 유도해야 할까? 그 해답과 방법 역시 이 책에 실려 있으니 궁금하신 분은 『핑크와 블루를 넘어서』를 꼼꼼하게 읽어보시기를! 여러 사례와 더불어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통해 바른 해결책을 제시해주니 이제 실천만 하면 될 것 같다. 우리 아이들의 성 고정관념 없는 밝은 미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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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느리게 걷다 - 고즈넉한 여유와 낭만이 공존하는 특별한 여행지, 내셔널트러스트
오윤석 지음 / SISO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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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특별한 여행책을 만났다. 유명한 관광지나 맛집이 아닌 '내셔널 트러스트'라는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둘러 본 영국 여행 이야기 『영국, 느리게 걷다』.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는 나는 이 책 덕분에 반드시 알고 지켜야 할 인류의 소중한 보물을 알게 되었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내셔널 트러스트가 뭐지?'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을 것 같으니 일단 정확히 알아보고 가자.


 

『내셔널 트러스트』 :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
보전가치가 큰 자연자산이나 문화유산을 매입해 영구히 보전ㆍ관리하는 운동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힘을 모아 길이 보존하고 보전해야 할 문화유산을 보수하고 지키는 운동.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 책을 쓴 오윤석 작가는 우연 같은 필연으로 내셔널 트러스트에 관해 알게 된 뒤, 이 소중한 보물을 직접 보고 카메라에 담고자 여행길에 올랐다. 영국에 있는 500여 곳의 내셔널 트러스트 중에 40여 곳의 여정과 사진을 담아 펴낸 책이 바로 『영국, 느리게 걷다』이다.

 

 

 

 

 호수로 가득한 국립공원, 예쁜 수선화밭, 왕이 되고 싶었던 귀족들의 궁궐 같은 성, 피터 래빗이 깡충 뛰어 수풀로 숨어들 것 같은 피터 래빗 마을, 세상의 끝을 알리는 아름다운 절벽, 지구가 아닌 외계를 연상시키는 벌판 등등 영국에 있는 내셔널 트러스트는 정해진 특정한 기준만 갖춘다면 보물로 선정되어 개발되지 않고 지금 모습 그대로 대대손손 전해질 수 있다. 영국에 가본 적이 없기에 낯선 지명과 이름 때문에 좀 헤매긴 했지만, 작가가 직접 찍은 아름다운 사진에 취해 패키지 여행객처럼 이리저리 열심히 둘러보았다. [영국 전체 지도→지역 지도→문화재 위치] 순서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You're Here"을 함께 실어 주었다면 여행이 더 즐거웠을 텐데 지도의 부재가 살짝 아쉽다. GPS 도표 등의 정보가 첨부되긴 했지만, 뭔가 눈으로 대략 여기쯤이구나 알고 싶었던 마음이랄까? 그래도 이 귀한 인류의 보물을 알리고자 했던 작가의 진심은 충분히 느낄 수 있어 책을 읽는 내내 즐겁고 행복했다.

 

 

 

 하나하나 정말 예쁘고 아름다워 어디가 가장 좋았는지 꼽기 힘들지만, 책을 사랑하는 나는 피터 래빗 마을, 시인 워즈워스의 집과 『폭풍의 언덕』의 모티브가 된 브론테 자매가 살던 곳이 기억에 남았다. 과연 영국에 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순 없지만, 피터 래빗 마을은 꼭 가보고 싶다. 마을의 주택과 토지를 사들이는 데 거의 모든 재산을 쏟아붓고 '개발하지 않는다'는 단 하나의 조건으로 내셔널 트러스트에 마을 전체를 기부했다는 베아트릭스 포터. 타샤 할머니만큼이나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기에 직접 방문하여 그 소중한 곳을 눈과 마음에 담아오고 싶다.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과 태곳적 모습의 숲, 흐드러지게 핀 예쁜 꽃밭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러다가 책에서 만난 모든 곳이 좋았다고 말할 기세! 사실, 정말 하나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가슴 설레는 곳이었다. 한국에도 내셔널 트러스트 단체가 있다고 하니 어떤 문화유산을 보전하고 알리고 있는지 알아봐야지! 『영국, 느리게 걷다』 덕분에 이제는 영국이라고 하면 짙은 안개나 셜록 홈스가 아닌 내셔널 트러스트가 제일 먼저 떠오를 것 같다. 소중한 경험과 추억을 남겨주신 작가께 감사드리며, 내 인생 버킷 리스트 마지막 칸에 '영국 내셔널 트러스트 가보기'라고 살포시 적어두었다. 간절히 바라면 언젠가는 꼭 이룰 수 있겠지? 부디 그날이 빨리 오기를! 특별한 영국 여행을 바라거나 눈부신 문화유산을 경험하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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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석 2018-12-03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다람쥐님!
책《영국, 느리게 걷다》의 저자 오윤석입니다. 여기에서도 보는 멋진 리뷰도 저에게 멋진 응원입니다.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되세요^^
2018.12.03.
오윤석 올림
 
나이트 스토커 스토리콜렉터 69
로버트 브린자 지음, 유소영 옮김 / 북로드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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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평소처럼 퇴근하고 돌아온 집. 예상은 했지만 아무도 없어 쓸쓸하기만 하다. 일단 씻자는 생각에 샤워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냉장고를 열어 시원한 음료를 꿀떡꿀떡 마시는 당신, 그리고 그런 당신을 지켜보는 검은 그림자. 갑자기 정신이 아득하고 몽롱해진 순간 범인이 어둠 속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아뿔싸! 저항하고 싶지만 이미 몸은 말을 듣지 않고, 목을 조르는 범인의 손아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범인의 다음 희생자는 과연 누구일까?

 소설이라기보다는 실제로 벌어진 사건 소식을 듣는 기분이라 더 소름 돋고 무서웠던 소설, 『나이트 스토커』. 이 책은 데뷔작 『얼음에 갇힌 여자』로 큰 인기를 끌었던 로버트 브린자의 두 번째 소설이다. 여성인 에리카 경감이 수사를 이끄는 시리즈로 원서로는 지금까지 총 6권이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이번에 2권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얼음에 갇힌 여자』가 살짝 지루했다는 평이 있어 걱정했지만, 『나이트 스토커』를 읽어 보니 가독성과 심리 묘사가 상당히 세밀하여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에리카 경감 시리즈는 챙겨보게 될 것 같다. 그럼, 책 내용을 좀 더 살펴보자.

 이 책은 첫 살인사건과 함께 시작된다. 피해자는 가정의학과 의사인 그레고리 먼로. 공교롭게도 그의 엄마가 시체를 발견하게 되고 에리카 경감이 사건에 뛰어들게 된다. 범인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는 건 두 번째 살인부터다. 첫 사건과 다르게 두 번째 사건부터는 일련의 과정과 생명의 불이 꺼져가는 피해자,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전율하는 미친 살인범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지고 소름이 돋아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두 번째 살인이 끝나고 독자는 살인범의 정체를 알게 된다. 그때부터 우리는 에리카와 범인의 치열한 두뇌 싸움을 한 그림 안에서 볼 수 있다. 세 번째 살인 피해자는 의외의 인물이라 경악! 그리고 네 번째 피해자는 범인에게 배신감이 느껴질 정도로 안타까운 인물이었다.

 이 소설은 사건 수사의 주체가 여성이라는 면에서 신선하고 독특하다. 영국 드라마 <마르첼라>가 연상되어 끊임없이 겹치는 느낌! 이 책을 재밌게 읽은 분이라면 영드 <마르첼라>를 추천한다.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 외에 『나이트 스토커』의 또 다른 매력을 뭘까? 그건 아무래도 탁월한 심리 묘사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가능성이 아닐까 싶다. 2년 전, 작전 수행 중에 남편 마크와 동료를 잃은 에리카의 인간적 괴로움과 학대와 방치로 고통받던 범인의 심리 상태가 상당히 잘 표현되어 있어 몰입감을 높였다. 흡입력과 가독성이 미칠 듯이 뛰어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편! 책을 덮고 나서 여전히 지속되는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문이 잘 잠겨있는지 확인했다는... 누군가 어둠 속에서 나를 지켜본다는 생각만으로도 무서웠던 『나이트 스토커』. 그 스산한 느낌이 꽤 오래 남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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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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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미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 움베르토 에코가 지난 2016년에 별세했다. 이제 다시는 그의 작품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낙심하던 찰나에 2015년에 집필된 마지막 작품이 있다는 소식을 입수! 언제 출간될지 기대하다 세월이 흘러 잊힐 때쯤 드디어 출간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유작, 『제0호』. 어렵기로 소문난 에코의 작품이기에 의식이 아득히 멀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첫 장을 펼쳤는데, 이거 웬걸! 에코의 작품답지 않게 술술 잘 읽혔다.

 이 책은 1992년 6월 6일 토요일, 오전 8시를 기준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때는 2개월의 걸친 일련의 사건이 절정을 이룬 시기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독자가 머릿속에 수천 개의 물음표를 떠올리며 몰입하게 만든다. 그러고는 사건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4월 4일로 돌아가 하나씩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기 시작하는 구성. 모든 사건은 주인공 '콜론나'가 '시메이 주필'이라는 사내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절대 창간되지 않을 신문 <도마니>를 위해 1년간 기자들이 써내는 기사를 관리하는 척하며, 거기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담은 책을 대필해달라고 제안하는 시메이. 쉽게 벌 수 없는 큰돈을 주겠다는 말에 콜론나는 끝내 유령작가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바로 다음 날인 4월 7일, 편집실에 모인 기자 6명. 여기서 주목할 인물은 홍일점인 '마이아'와 큰 사건을 뒤쫓고 있는 '브라가도초'다. 어떤 기사를 어떻게 쓸지 매일 같이 벌어지는 편집회의가 며칠 이어질 무렵, 평소와는 다른 움직임이 곳곳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브라가도초'가 주요 국가기관과 정치인이 연루된 큰 건을 물었는데 바로 이탈리아 파시즘의 지도자인 무솔리니가 처형되지 않고 망명하여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 사건을 조사하며 마침내 진실 가까이 도달한 순간 '브라가도초'는 살해당하고 주인공 '콜론나'는 쫓기는 신세가 되는데... 과연 그를 죽인 자는 누구일까? '콜론나'는 검은 손아귀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까?


 

 

 

 

 『제0호』를 통해 언론의 추악한 이면을 꼬집고자 했던 움베르토 에코. 암이라는 무서운 병과 싸우며 끝까지 원고를 써 내려간 작가의 간절한 염원과 유지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아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시메이'를 통해 작가가 폭로한 언론의 부끄러운 민낯. '기사에서 어떤 대상이나 사건도 직접 저격하지 말고, 독자가 언론이 원하는 이미지를 떠올리도록 유도할 것!'. 결국 누군가를 영웅으로 추대하기도 파멸시키기도 사람의 세 치 혀와 언론 조작이면 가능하다는 소리다. 워낙 박학다식한 작가이다 보니 주석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든 문화적 풍자와 역사적 사건이 꽤 있어서 흐름이 끊기기도 했지만, 알 수 없는 묘한 끌림에 이끌려 한 호흡으로 내달렸던 소설. 가뭄에 단비 내리듯 퐁당퐁당 등장하는, 주인공 '콜론나'와 '마이아'의 로맨스 덕분에 소설의 난이도가 적절하게 조절되어 가독성 면에서 만족스러웠다. 또 하나의 즐거움은 번역가의 풍부한 어휘력! '비역, 기연가미연가하다, 조심성스럽게, 누르퉁퉁, 방사' 등등 다채롭고 풍성한 단어로 한글의 맛이 살아 있어 참 좋았다. 무솔리니 최후를 조사하던 '브라가도초'의 죽음과 나이 차를 초월한 '마이아'와의 로맨스에 언론에 대한 신랄한 비판까지. 이 작품은 에코가 죽는 순간까지 독자에게 남기고 싶었던 단 한 권의 책이 아닐까? 어린 시절 그렇게나 좋아했던 종합선물세트를 받은 기분이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작가의 명복을 빌며 '멋진 작품을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깊은 밤, 조용히 속삭이며 마음을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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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 정본 택리지 (보급판) - 이중환, 조선 팔도 살 만한 땅을 찾아 누비다
이중환 지음, 안대회.이승용 외 옮김 / 휴머니스트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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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머니스트 출판사다! 믿고 보는 출판사, 휴머니스트에서 야심 차게 출간한 신간, 완역 정본 택리지! 1751년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래 지금까지 조선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택리지. 안타깝게도 원본이 소실된 탓에 200여 권의 이본(異本)만 남아 있는 상황인데 원본에 가까운 택리지를 만나게 될 줄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연구진이 6년간 작업한 끝에 출간한 이 『완역 정본 택리지』는 이중환이 저술한 원본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200여 권의 이본을 하나씩 살피며 비교하고 고증하여 믿을만한 최상의 결과를 뽑아냈다고 하니 다시 없을 택리지임이 확실하다.

 그럼, 택리지란 무엇인가? 택리지의 탄생 배경을 살펴보기에 앞서 저자 이중환의 삶을 조금 알아둘 필요가 있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하다가 30대 중반에 당쟁으로 인해 설 곳을 잃은 이중환은 이후 죽을 때까지 철저하게 배척당하며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다. 당시 조선에서 관직에 오르지 못한 사대부는 한양에서 생활할 수 없었고, 결국 삶을 꾸릴 곳을 찾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야 했다. 이런 처지가 비단 이중환 혼자였겠는가? 당시 벼슬에 오르지 못한 사대부의 가장 큰 고민은 '어디에서 살 것인가?'였다. 여행과 글쓰기를 좋아하던 이중환은 조선 8도를 방방곡곡 누비며 어디서 살면 좋을지 4가지 기준을 세워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리(지리적 길지, 배산임수), 생리(물자적 풍요, 교통의 편리), 인심(문화, 인심)과 산수(산과 강이 어우러진 풍경)까지 각 지방의 장단점을 깨알같이 정리한 책이 바로 택리지다. 택리지의 원제가 '사대부가거처'(士大夫可居處)'였음을 감안하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택리지는 베낀 이의 목적에 따라 지리지로 때로는 여행책으로 사용되는 등 여러 면에서 인기를 끌며 조선에서 가장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원본이 소실되어 확인할 수 없던 그 택리지를 오랜 연구를 거쳐 한 권으로 엮어낸 이 작업은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임이 틀림없다. 그런 책을 읽게 되었으니 나는 행운아!

 

 

 

 

 

 『완역 정본 택리지 는 옛 지명을 현대식으로 표기하여 어느 지역인지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시절 그 명칭으로 표기됐다면 내가 과연 해독이나 할 수 있었을까? 절대 불가능! 조선 8도 중에 가보고 싶어도 가볼 수 없는 평안도, 함경도와 황해도를 제외한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와 경기도 편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지역은 역시 내가 사는 충청도! 가장 오랫동안 살아온 곳이기에 잘 알고 애착이 가니 사심 가득한 관심으로 눈이 번쩍, 귀가 쫑긋할 수밖에 없었다. 살기 좋은 곳으로 공주를 대추를 심기 좋은 곳으로 보은을 꼽는 것을 보고 새삼 그 식견과 안목에 감탄하며 이중환의 팔도 이야기에 한없이 빠져들었던 시간. 지금으로 치면 부동산 투자 성공서나 마찬가지니 그 시절 사람들에게 얼마나 인기 있는 책이었을지 실감할 수 있었다. 다만, 저자는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각 지역을 살피며 어느 곳도 무조건 좋다고 꼽지는 않았다. 어느 한 곳 마음 붙일 곳 없는 자신의 처지가 일부 투영되었던 것일까? 

 그 시절 상황을 알 수 있는 여러 지도와 자료를 통해 시간 여행을 하고 때로는 저자가 착각하여 잘못 적은 실수도 찾아가며 며칠 동안 조선 8도 유람을 이어갔다. 대대손손 전해져야 할 이런 귀한 자료가 완역되었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끼며 많은 분께 이 책이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난 잘 보관해두었다가 우리 꼬마가 크면 손에 꼭 쥐여줄 생각! 택리지 이본을 지금까지도 보관하는 집이 있다고 하니 100년 후엔 어쩌면 이 책이 유일한 택리지 정본으로 전해지지 않을까? 귀한 책을 만나게 해준 휴머니스트 출판사와 고생한 연구팀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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