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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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미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 움베르토 에코가 지난 2016년에 별세했다. 이제 다시는 그의 작품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낙심하던 찰나에 2015년에 집필된 마지막 작품이 있다는 소식을 입수! 언제 출간될지 기대하다 세월이 흘러 잊힐 때쯤 드디어 출간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유작, 『제0호』. 어렵기로 소문난 에코의 작품이기에 의식이 아득히 멀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첫 장을 펼쳤는데, 이거 웬걸! 에코의 작품답지 않게 술술 잘 읽혔다.

 이 책은 1992년 6월 6일 토요일, 오전 8시를 기준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때는 2개월의 걸친 일련의 사건이 절정을 이룬 시기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독자가 머릿속에 수천 개의 물음표를 떠올리며 몰입하게 만든다. 그러고는 사건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4월 4일로 돌아가 하나씩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기 시작하는 구성. 모든 사건은 주인공 '콜론나'가 '시메이 주필'이라는 사내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절대 창간되지 않을 신문 <도마니>를 위해 1년간 기자들이 써내는 기사를 관리하는 척하며, 거기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담은 책을 대필해달라고 제안하는 시메이. 쉽게 벌 수 없는 큰돈을 주겠다는 말에 콜론나는 끝내 유령작가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바로 다음 날인 4월 7일, 편집실에 모인 기자 6명. 여기서 주목할 인물은 홍일점인 '마이아'와 큰 사건을 뒤쫓고 있는 '브라가도초'다. 어떤 기사를 어떻게 쓸지 매일 같이 벌어지는 편집회의가 며칠 이어질 무렵, 평소와는 다른 움직임이 곳곳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브라가도초'가 주요 국가기관과 정치인이 연루된 큰 건을 물었는데 바로 이탈리아 파시즘의 지도자인 무솔리니가 처형되지 않고 망명하여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 사건을 조사하며 마침내 진실 가까이 도달한 순간 '브라가도초'는 살해당하고 주인공 '콜론나'는 쫓기는 신세가 되는데... 과연 그를 죽인 자는 누구일까? '콜론나'는 검은 손아귀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까?


 

 

 

 

 『제0호』를 통해 언론의 추악한 이면을 꼬집고자 했던 움베르토 에코. 암이라는 무서운 병과 싸우며 끝까지 원고를 써 내려간 작가의 간절한 염원과 유지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아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시메이'를 통해 작가가 폭로한 언론의 부끄러운 민낯. '기사에서 어떤 대상이나 사건도 직접 저격하지 말고, 독자가 언론이 원하는 이미지를 떠올리도록 유도할 것!'. 결국 누군가를 영웅으로 추대하기도 파멸시키기도 사람의 세 치 혀와 언론 조작이면 가능하다는 소리다. 워낙 박학다식한 작가이다 보니 주석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든 문화적 풍자와 역사적 사건이 꽤 있어서 흐름이 끊기기도 했지만, 알 수 없는 묘한 끌림에 이끌려 한 호흡으로 내달렸던 소설. 가뭄에 단비 내리듯 퐁당퐁당 등장하는, 주인공 '콜론나'와 '마이아'의 로맨스 덕분에 소설의 난이도가 적절하게 조절되어 가독성 면에서 만족스러웠다. 또 하나의 즐거움은 번역가의 풍부한 어휘력! '비역, 기연가미연가하다, 조심성스럽게, 누르퉁퉁, 방사' 등등 다채롭고 풍성한 단어로 한글의 맛이 살아 있어 참 좋았다. 무솔리니 최후를 조사하던 '브라가도초'의 죽음과 나이 차를 초월한 '마이아'와의 로맨스에 언론에 대한 신랄한 비판까지. 이 작품은 에코가 죽는 순간까지 독자에게 남기고 싶었던 단 한 권의 책이 아닐까? 어린 시절 그렇게나 좋아했던 종합선물세트를 받은 기분이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작가의 명복을 빌며 '멋진 작품을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깊은 밤, 조용히 속삭이며 마음을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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