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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9년 5월
평점 :
제목: 주주
글쓴이: 요시모토 바나나
옮긴이:
김난주
펴낸 곳:
민음사
어제 일하러 가던 길에 오래전에 다녔던 대학교를 지나쳤다. 사실 지금이야 '오래전'이란 단어를 꾹꾹
눌러 쓰고 있지만, 불과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졸업 후 한참이나 지난 버린 세월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 시절을 추억하다가 하나, 둘 헤아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나 확인하고는 아주 잠깐 우울했더랬다.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구나. 그때나 지금이나 책은 읽는 사람만 읽지만, 당시
또래 여학생들에게 인기 있었던 작가들은 여전히 기억난다. 그중 한 명이 요시모토 바나나. 바나나... 바나나... 작가의 이름을 처음 듣고
일본에는 이상한 이름도 있구나. 바나나라니 신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필명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 시절에 키친, 암리타 등등 몇 권의 책을
연달아 읽었지만, 엄청난 감동보다는 뭔가 설명하기 모호한 '나른함'만이 강렬하게 남아 지금까지 요시모토 바나나는 나른하다는 엉터리 공식을
머릿속에 달고 살았다. 난 왜 이렇게 추억 보따리를 늘어놓고 있는 것인가. 10여 년이 흘러 다시 만난 요시모토 바나나에 대한 반가움과 아련함
때문일까? 일본어로 고기가 지글지글 익는 소리라는 『주주』. 가슴에 도토리가 통통 떨어지듯 작지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소설. 요시모토
바나나가 달라진 걸까?
미쓰코는 오늘도 머리를 질끈 묶고 가게로 나선다. 할아버지 손을 거쳐 엄마와 아빠가 일궈낸 공간
'주주'로. 6년 전 가게에서 심장 발작을 일으켜 쓰러지고는 그대로 세상을 떠나버린 엄마. 세월도 미처 다 보듬어주지 못한 그 상실감과 슬픔은
툭 치면 터질 것처럼 집, 가게 곳곳 그리고 미쓰코의 마음속에 옹기종기 매달려 있다. 가게를 이어받겠다며 '주주'에서 함께 일하는 먼 친척
신이치. 미쓰코와 신이치는 오래전 부부처럼 함께 살을 맞대고 지내던 사이다. 미쓰코가 신이치의 아이를 유산하면서 둘의 관계는 연인에서 동료로
동료이자 가족이며 친구로 서서히 변화한다. 원수처럼 여기며 꼴도 보기 싫은 법도 한데, 마치 원래 우리는 이런 관계라는 듯 누가 나서서 정리하지
않아도 흐르는 물처럼 '주주' 안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그들. 어느 날 아빠, 신이치, 신이치의 아내인 유코뿐이던 미쓰코의 인생에 가슴 설레는
사랑이 불쑥 찾아오는데. 과연 미쓰코의 인생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할까?
『주주』는 연애소설도 신파극도 아니다. 미쓰코라는 평범한 여인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일생을 한
조각 크게 떼어 익혀낸 소설이랄까? 요시모토 특유의 잔잔함과 나른함은 여전했지만 20대 시절엔 느끼지 못했던 야릇한 감동과 오묘한 매력에 빠져
꿈결을 거닐 듯 미쓰코의 인생을 걸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문장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무심한 듯 뚝 던지는 구절, 구절이 가슴에 '쿵' 하고
내려앉아 자리 잡는다. 가슴이 따스해지고 위로받는 기분 좋은 느낌.
"최대한 조용조용, 살금살금 해 나가자고.
달팽이 같은
속도로.
그럼 인생도 길어질 테니까 더 오래 같이 있을 수
있지.
『주주』 p144
中에서..."
언젠가 이 세상에서 떠날 때, 우리의 꿈은 스테이크나 햄버그처럼 무언가에 먹혀 사라지지만, 햄버그
속에는 누구도 만질 수 없는 기적의 공간이 있으니 괜찮다고 말하는 요시모토 바나나. 이런 독보적인 매력을 보았나! 난 오랜 세월이 지나 인생의
맛을 더 본 후에서야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게 된 모양이다. 갑자기 그녀와 그녀의 작품이 미치도록 좋아진다. 아니,
어쩌면 오래전부터 좋아했지만 이제야 깨달았을 수도... 불판 위에서 맛있게 지글지글 익어가는 스테이크처럼 풍미를 더해가는 미쓰코의 인생에 아무
편견 없이 빠져들었던 시간. 『주주』, 이 작품 참 좋다. 오랫동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예전 책을 다시 꺼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