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라는 남자 - 다가가면 갈수록 어려운 그 남자
마스다 미리 지음, 안소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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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마냥 멀게만 느껴졌던 아버지.  어린시절엔 아버지의 담배와 술이 너무 싫어서, 그리고 왠만큼 많은걸 알게 된 시절엔 엄마와 가정에 무심함이 너무 싫어서, 그래서 난 아버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하지 않았다기 보다 일부러 멀리했었다.  대화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다른 사람들처럼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책의 제목 그대로 다가가면 갈수록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남자 그 자체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동네분들이나 친구분들 사이에선 정말 좋은사람, 넓은사람으로 통한다는걸 알게 됐을땐 그 사실을 받아 들이는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나는 엄마, 아빠와 일찍부터 떨어져 살아서 그랬는지 결혼 할때 조차 그냥 아버지랑 데면데면한 그런 상태였었다.  하지만 지금 난 아버지가 너무 좋다.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나 여리신 분이었나, 이렇게나 다정하신 분이었나 싶을때면 그동안 아버지와 나누지 못했던 시간들이 너무너무 아쉬울 따름이다.

 

 

엄마와 관련된 책이나 글들은 많이 접한다.  하지만 아버지와 관련된 책은 아마 처음 접하는 듯 하다.  책 속 작가의 아버지도 여느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권위의식도 있으시고, 성질도 급하시고, 다혈질이시고, 손도 잘 씻지 않으시고...하지만 또 그런 모습과는 전혀 상반된 모습으로 당신이 직접 기르신 야채들을 자랑하시는 부분에선 참 귀여우신 모습도 보여 주신다.  나 역시 아버지를 알고자 했었다면 전자의 모습만 보아왔던 과거에서 벗어나 후자의 모습도 충분히 볼 수 있었을 텐데 나의 편협한 관념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그렇게 데면데면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어릴 적엔 아빠와 외출하는 게 참 싫었다.  길을 걸으면서 거침없이 방귀를 뀌고 음식점에서 밥을 먹다가 누가 듣건 말건 "이 집 진짜 맛없네"하고 큰 소리로 투덜거리는 아빠가 창피했기 때문이다. 어쩜 그리 집에서나 밖에서나 한결같은지 나로서는 신기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외출할 땐 항상 아빠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서 마치 일행이 아닌 척 걷곤 했다. (96쪽)

 

지금 나는 친정에 가면 아버지의 팔짱을 꼭 낀다.  아버지는 나의 손을 꼭 잡아 주신다.  아직도 표현이 서투르긴 하시지만 그래도 최대한 표현을 하시려 노력하신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예전의 우리에게 하신것처럼 무뚝뚝하지 않으시다.  어쩌면 우리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아버지~"하며 따라서일까?  나도 아버지에게 애교도 부리고 사랑한다 말해주고 했다면 아버지도 나에게 달리 대하셨을까? 아니, 내눈에 아버지의 모습이 달리 보였을까? 아마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내가 죄스럽기만 하다.

 

 

이 책을 읽다보니 그동안 내가 아버지에게 참 잘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더 다가가 볼걸. 조금만 더 살갑게 굴어볼걸...요즘 아빠들이야 아이들과 아내들 위주로 배려해주고 봉사(?)해주고 하는 일이 당연한 일이 되었지만 예전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그렇게 권위의식과 집안의 어른은 남자! 라는 생각이 깊숙히 박혀 있었지 않았나 싶다.  조금만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면 좀 더 재미있는 아버지와의 어린시절을 보낼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이젠 흰머리와 주름살이 가득하고 팔 다리가 여위어 버린 아버지를 볼때면 그 꼿꼿하시던 예전의 모습이 되려 그립기도 하다.  맛있는것 많이 사드리고 좋은곳 구경 많이 시켜 드리고,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부녀의 정을 맘껏 나눌수 있게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셨음 하는 맘 뿐이다. 아버지 사랑해요~~^^

 

 

매일 바쁘고 한없이 무뚝뚝하지만

언제나 한 걸음 뒤에서 딸의 안녕을 지켜보는 그 사람,

아빠라는 남자는 내 인생 가장 든든한 울타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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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는 여자 - 그리면 그릴수록 그리운 그 여자
마스다 미리 지음, 안소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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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결혼 전과 결혼 후에 느끼는 엄마라는 존재감은 얼마나 다를까.  특히, 나처럼 결혼 후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하는, 더군다나 막내에다 아무것도 할줄 아는것 없이 덜컥 결혼이란걸 해버린 사람이라면 더더욱.  아이를 낳아봐야 엄마의 심정을 안다고 하는 말이 헛말이 아니듯, 첫 아이를 낳고 얼마나 엄마가 그리웠는지 모른다.  먼 걸음 하여 딸래미 산후조리 해준다고 오셨다 가긴 했지만, 엄마가 왔다 가신 후, 더 엄마가 그리웠던건 이 책의 제목처럼 그리면 그릴수록 더 그리운 사람이 엄마가 아닌가 싶다.  아직도 많이 서툰 부엌살림을 하며 언제나 맛깔난 음식을 해주던 엄마를 항상 그리워한다.  명절이라 몇일전 엄마를 보고 왔는데 또 보고싶은 우리엄마.  그리고 만난 책, 그리면 그릴수록 그리운 그 여자, 엄마라는 여자.

 

 

삼십대 중반의 독신인 작가는 그래도 참 행복한 사람인것 같다.  엄마와 여행도 다니고 목욕도 다니고 시장도 같이 다니는 모습이 너무 부럽기만 하다.   난 결혼 전 직장 다니기 전부터 엄마랑 떨어져 살아서인지 엄마와의 추억이 참 많이 없는것 같다.  지금이야 일년에 서너번 친정에 가면 꼭 엄마 손잡고 시장가서 필요한것 사드리고 목욕도 같이 가곤 하지만,  그래도 꼭 같이 하고팠던 엄마와의 단 둘만의 여행을 하기가 힘들다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프고 엄마한테 죄송스럽다.  어느새 엄마는 할머니가 되어 버렸고, 나 역시 직장과 가정에 매여 있다 보니...라는 핑계아닌 핑계만 늘어갈뿐.

 

 

엄마는 아주 시시한 이야기에도 커다랗게 웃는다. 티비속 여배우들이 백치미를 풀풀 풍기며 내뱉는 싱거운 농담에도 눈살을 찌푸리기보다 배시시 웃고만다.  그 모습을 가까이서 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스하고 평온해진다.  글을 쓰면서 지금까지 몰랐던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엄마를 떠올리면 항상 웃는 얼굴이라는 사실 말이다.  지금 내 머릿속의 엄마는 당장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35쪽)

나의 엄마 역시 그렇다.  우리 아이들의 몸짓 하나에도 박장대소를 하신다.  하지만 난 어떤가.  조용히 해라. 공부해라. 빨리 해라 하는 말이 입에 붙어버린 나를 보며 우리 아이들이 훗날 엄마를 기억할때 난 어떤 엄마로 기억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괜히 아이들에게 미안해진다. 

 

 

엄마의 여행 가방에는 언제나 손톱깎이가 있었다.  이런 사소한 물건을 일일이 챙겨 담는 엄마의 모습은 참 사랑스럽다.  더불어 집 밖에서 불필요한 물건을 사지 않으려는 알뜰한 사고방식에 고개가 숙여진다. (19쪽)  김장김치, 된장, 고추장 심지어 양파, 감자까지.  아직도 엄마는 때마다 철마다 바리바리 싸서 택배를 부쳐주곤 하신다.  택배상자를 열다보면 마치 보물상자를 펼쳐 보는것 같다.  "된장 좀 부쳤다" 하는 전화를 받고 곧 도착한 택배를 열어보면 된장은 물론이고 내가 즐겨 먹던 밑반찬까지 서너가지 꼭 만들어 구석구석 박스를 채워서 보내주신다.   친정 가서 신기한 물건, 일테면 마늘 빻는 도구 라던가 하는것에 눈을 반짝 빛내고 오면 어김없이 다음 택배박스엔 그 물건이 들어 있기도 하다.  이렇게 엄마는 정말 내가 흘린 사소한 말들도 기억해 두신다.

 

 

책을 읽다보니 엄마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 나는것 같다.  역자께서 말했듯, 작가의 어머니 참 귀여우신분 같다는 생각을 나도 책을 읽으며 했었다.  중간중간 삽입 되어있는 만화도 너무 따스했다.  작가와 작가 엄마와의 이야기를 옆에서 몰래 엿보는듯한 느낌과 나와 내엄마의 기억도 하나하나 꺼내 보는 느낌에 책을 읽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딸의 입장에서 보아왔던 엄마라는 모습을 이제는 엄마라는 입장에서도 볼 수 있는 위치가 되다보니 이 책은 딸의 입장에서나 엄마의 입장에서나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훗날 나의 아이들이 나를 어떤 엄마로 기억해 줄지, 작가처럼 또는 나처럼 항상 따스하고 푸근한 엄마의 기억을 갖고 있을지 다시한번 마음을 다잡게 만드는 책이기도 했었다.  지금 이 순간, 엄마가 너무 보고싶다... 

 

 

돌이켜보면 엄마는
우리 가족 모두의 응석을 받아주는 존재였다.
세상에서 가장 강인했던 엄마의 등은 그렇게
가족들의 무관심 속에서 서서히 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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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언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5-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5
엘리자베스 코스토바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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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아들고 7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두께감에 잠시 질려 버렸으나, 그래도 읽어야 했기에, 그리고 너무나 궁금했던 뱀파이어에 대한 책이었기에 냉콤 펼쳐들고 읽기 시작했다.  명절 연휴가 끼어 있어 읽다 말다를 반복해 조금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이렇게 두툼한 책을 지루함을 거의 느끼지 못한 채 읽어 버린게, 오호~ 놀라워라!! 그만큼 나에겐 괜찮았었던 책이었다.  흡혈귀의 본고장 루마니아의 역사와 전설을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이 더해져 드라큘라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 스릴러적인 요소와 함께 스펙타클하게 전개가 된다.  암스테르담, 이스탄불, 헝가리, 불가리아등 동유럽 여러나라를 넘나들며 수도원과 대성당, 도서관등에서 펼쳐지는 불사귀와의 쫓고쫓기는 긴박함, 도서관 사서의 비밀등이 책을 읽는 내내 조마조마한 긴장감을 안겨 주었다.

 

 

외교관인 폴의 16세된 딸은 어느날 아버지의 서재에서 양피지 장정의 오래된 고서와 의문의 편지를 발견한다.  1930년 12월에 쓰여진 "이 편지를 읽을 불행한 이에게"로 시작되는 편지를 발견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폴과함께 여행을 하면서 듣게된다.  책의 내용은 딸의 싯점에서 전개되는 현재의 이야기와 폴의 젊은 시절의 싯점에서 전개되는 과거의 이야기가 엇갈려가며 진행이 된다.  폴은 대학시절 도서관에서 예의 그 고서를 발견하게 되는데 똑같은 책을 가지고 있었던 폴의 지도교수 로시가 어느날 어둠과 함께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드라큘라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폴은 자신과 같은 방법으로 그 고서를 소장하고 있었던 로시가 실종이 되자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드라큘라를 찾으면 로시 역시 찾을 수 있을거란 기대로 드라큘라를 찾아 떠나게 된다. 

 

 

이틀 전 로시가 연구실에서 사라졌을 때도 핏자국이 있었다.  드라큘라가 살아 있다면....헤지스를 포함한 세계 최고의 석학들, 사서들, 고문서실 관리들에게 유감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문득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관심을 갖는 상대는 그의 전설과 관련된 고문서들을 다루는 사람들이다. (138쪽)  <히스토리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주로 역사학자들이다.  암스테르담, 이스탄불, 헝가리, 불가리아등에서 폴이 만나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연유로 드라큘라를 쫓고 있다.   그들의 얽히고 설킨 관게들이 복잡하기도 하지만 폴과 헬렌을 통해 드라큘라의 모습과 로시교수의 행방이 밝혀지는 과정, 그리고 주인공들을 통해 접하게 되는 동유럽의 역사와 전쟁사등은 그야말로 작가의 연구와 노력이 얼마나 방대하고 열정적이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헬렌, 헬렌은 블라드 드라큘라의 후손이에요." 망설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둘 중 누군가는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453쪽) 

그녀가 고개를 가볍게 젖히자 검은 곱슬머리가 베개 위로 흘러내렸다.  키스로 그녀를 깨울 욕심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 순간 새파랗게 질린 얼굴과 목에 난 핏자국을 보고 말았다.  그녀의 목 안쪽, 거의 아물어가던 흉터에 두 개의 작은 상처가 보이고 핏방울도 흘러내렸다.  (582쪽)  로시가 젊은시절 드라큘라를 찾아 나섰다 만난 헝가리 여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헬렌.  다시 찾아 오겠다던 로시는 소식이 없었고 그렇게 아버지 없이 자라 유능한 역사학자가 된 헬렌.   폴과 함께한 여정에서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드라큘라의 후손이고 불사귀에게 두번이나 물린 헬렌.  폴과 결혼 후 여행중에 사라지기 까지 하여 거의 다 읽어갈 즈음까지 그녀의 행방과 그녀가 불사귀가 되어버린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조바심이 나기도 했었다.

 

 

최근 뱀파이어 소설을 많이 접하긴 했었다.  무서운 뱀파이어가 아닌 사랑스런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트와일라잇 시리즈부터 렛미인, 블러드오스까지.  블러드오스는 성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전자의 두 작품은 뱀파이어와 인간의 사랑과 우정을 다루었던 소설이라 그저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히스토리언>은 뱀파이어의 역사를 다룬 조금은 무겁다면 무거운 작품이었다.  하지만 한순간도 지루할 틈을 허락하지 않는 작가의 스토리전개가 700페이지가 넘는 이 두꺼운 책을 금방 읽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영화로도 제작 된다고 하는데 영화에서는 또 어떻게 전개가 될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왠지 이 시간, 드라큘라가 피를 찾아 도시의 밤거리를 배회하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으스스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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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홍 - 彩虹 : 무지개 김별아 조선 여인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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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역사소설과는 많이 다른 역사소설 채홍을 읽었다.  '채홍'이 무지개의 또다른 이름이라 하는데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왕이라는 태양이 빛나는 반대편에는 권력과 욕망과 사랑과 질투 등의 인간적인 감정들로 채색된 여인들의 무지개가 뜬다고 하여 제목을 '채홍'이라 했다고 한다.  이러한 설명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현대의 여성들과는 너무도 많이 달랐던 조선시대의, 그것도 구중궁궐의 틀속에 갖힌 여성들이 얼마나 억눌린 삶을 살았고 표현하고 싶었던 사랑의 감정을 꼭꼭 숨긴채 살아야 했는지 이 책을 읽으며 다시한번 탄식하게 된다.  역사소설 하면 대부분 스케일이 장대한 남성적인 면을 내세운 소설들이 많았던 반면 김별아 작가의 채홍은 역사적인 기록에 조차 남겨지지 않았던 여성들에 대해, 더구나 그들의 사랑에 대해 아주 심도깊게 다룬 책이었다.

 

 

세종의 며느리이자 문종의 세자시절 두번째 빈이었던 순빈 봉씨.  아버지와 오빠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모자람 없이 자란 난(순빈)은 문종의 첫번째 빈이었던 휘빈 김씨가 퇴출됨에 따라 두번째 빈이 되었다.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문종과 순빈의 부부관계는 소원하였다 라고만 나와있다.  하지만 그에 더해 소설속에서 문종은 세자시절 여색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빈과의 동침을 피해 다녔으며 오로지 공무와 정사에만 모든 관심이 쏠려 있었던 남성이었다.  그의 사랑이 절실하였던 순빈은 갖은 노력을 했지만 세자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후사를 걱정한 웃어른들이 세명의 후궁을 보기에 이른다.  그중 후에 현덕황후가 된 승휘권씨가 회임을 먼저 하게되자 요즘 흔히 말하는 상상임신을 하여 극과극을 오가기도 한 순빈봉씨.  지칠대로 지쳐버린 순빈봉씨는 어쩌다 마주하게된 궁녀 소쌍에게서 마음의 위로를 받고 그 위로가 동침까지 이어지게 된다.

 

 

내게 왜 그 아이를 사랑했느냐고 묻지 마세요.  그 아이를 사랑했다기보다 다만 사랑에 도취되었던 것이 아니냐고 따지지도 마세요.  그건 오로지 음욕과 색정에 겨워 그 아이를 취했다는 비방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저 어쩔 수 없는 사랑이었을 뿐이에요.  피해 도망칠 수 없기에 기꺼이 감당하고자 했던 인연이었을 뿐이에요. (316쪽)

 

 

'미실'이란 책으로 이미 유명세를 탔던 김별아 작가의 책은 이 책이 처음이다.  역사소설 다운 문체였지만, 잘 쓰지 않는 단어가 가끔 섞여있어 읽어 내리는데 조금 걸리적 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문장에 그 단어만큼 맞는 단어도 없겠단 생각도 했다.  밝고 쾌활한 사가에서의 생활과는 정반대로 외롭고 우울한 궁살이를 했던 순빈 봉씨.  결국은 폐위가 되고 그녀를 무엇보다 귀히 여겨 주었던 오라비의 손에 목숨을 빼앗긴 한많은 여성이었다.  어쩌면 조선시대와 그 이전의 시대를 살았던 우리 여인들의 삶을 대변해 나타내준 여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동안 궁중 스캔들의 주인공정도로 알려진 순빈봉씨의 삶을 다시한번 새겨보는 책이었다.   순빈봉씨는 동성애자가 아니라 문종이라는 남성에 의해 동성애자가 되어버린 어쩌면 한 남자 때문에 피해를 본, 억울한 죽음을 맞은 여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저 사랑하고 보니 사내가 아니었을 뿐입니다. 제가 사랑한 사람이 여인이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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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색 연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7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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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주홍색 표지를 보고 어떤 내용일지 무척 궁금했었다.  주홍색 연구라는 제목에서 말해 주듯이 이 책의 내용은 주홍색에 얽힌 일종의 트라우마라고 표현해야 할까.  우연히 목격한 죽음의 현장이 짙은 주홍색 화마에 휩싸여 있었던지, 또는 천지의 종말을 예고 하는듯한 강렬한 주홍빛 석양이 질 무렵이라던지 하는 배경 때문인지 온통 주홍빛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들이었다.  

 

 

아서 코난 도일의 <주홍색 연구>라는 책을 읽어 본 적이 있는가.  사실, 난 이 책을 접한 후 알게 된 책인데 셜록홈즈에게 보내는 대담한 도전장이라고 책소개에 표현 했듯이, 작가는 셜록홈즈와 그의 조력자 왓슨박사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소설, 즉 <주홍색 연구>에서 이 책의 제목을 따왔다고 한다.  그처럼 이 작품 또한 홈즈역의 히무라와 왓슨역의 아리스가와가 등장한다.  홈즈처럼 날카롭게 사건을 파헤치는 히무라. 그리고 왓슨처럼 현명한 조력자 아리스가와.  두 사람은 과연 홈즈와 왓슨처럼 적절한 콤비를 이루며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게 된다.  히무라는 조각상처럼 우뚝 서서 무토베(살인용의자)와 내가 주고받는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서글픈 심정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 모를 감정을 무토베에게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363쪽) 이 문장에서 아리스가와가 히무라의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함을 알 수 있었다.

 

 

이야기는 법학과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임상범죄학자인 히무라에게 제자인 아케미가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아케미는  2년전 겪었던 살인사건을 조사해 줄것을 히무라에게 의뢰한다.  친척의 별장 근처 해변에서 둔기로 뒤통수를 맞고, 거기다 5미터 높이에서 떨어뜨린 돌덩이에 한번 더 머리를 강타당한 친척의 피아노선생의 살인사건 이었다.  히무라와 아리스가와는 살인사건 조사를 위해 방문한,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아 '유령맨션'이라 불리우는 곳에서 또 다른 사람의 교살된 시체를 맞딱뜨리게 된다.  바로 아케미의 외삼촌이었다.  또한, 아케미는 이모부가 화마에 휩싸여 죽어가는 장면도 본, 주변사람이 세사람이나 피살된 사건을 겪은, 소설속 주홍색의 트라우마를 겪고있는 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사건의 연관성과 세 사건에 관계된 예닐곱명의 용의자를 한사람씩 줄여가며 이야기는 더욱 흥미로와 진다.

 

 

 

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범인이라면 스쳐 지나갈 때 얼굴을 돌리거나, 걸음을 서두르는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는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걸었다. 뭐, 히무라가 마음에 걸린다고 해도 그 인물을 목격한 지 벌써 한 시간도 더 됐으니 이제 와서 뒤를 쫓을 방법도 없다.
"혹시 모르니 인상과 풍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히무라의 천부적인 통찰력이 발휘되는 장면이었다. 남자는 연령 20대. 신장은 1미터 70센티미터 전후, 적당한 몸집. 머리카락은 가운데 가르마로, 길이는 귀를 반쯤 덮는 정도. 베이지색 코트 깃을 세우고 있어 콧대나 입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볼록한 이마와 또렷한 눈이 특징적이었다. 약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었고 손에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이게 전부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라니 대단도 하시다. 나는 그 인물이 코트를 입은 젊은 남자였다는 정도만 자신 있게 증언했다. (55쪽)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은 단 한편 <행각승 지장 스님의 방랑>을 아주 재밌게 읽었었던 기억이 난다.  이색적으로 스님이 탐정으로 나오는 책이었는데 독자에게 추리의 기회를 제공하는 특유의 서술방식이 흥미를 돋우기도 했었던 책이었다.   하지만 <주홍색 연구>는 본격추리로서 내가 느끼기엔 두 작품이 완연히 다른 양상을 띠었음에, 처음 이 책을 잡고는 며칠을 주물럭 거렸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나 "일본의 엘러리 퀸"이라는 명성이 헛되지 않은듯 히무라와 아리스가와가 사건의 실마리를 잡아갈 즈음부터 가속이 붙어 훌쩍 읽어 버린것 같다.  냉철한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본격추리물은 자칫 딱딱하고 지루할 수 있지만, 이 작품 역시 처음엔 좀 지루하다 싶었지만 아리스가와 아리스만의 재치 넘치는 대화들에서 또다른 재미를 느꼈고 새로운 시도를 한것 같은 색채 미스터리는 책을 덮고 난 후에도 강렬한 주홍빛이 남아 있는듯 여운이 남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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