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배트 20 - 완결
우라사와 나오키 글.그림, 나가사키 다카시 스토리 / 학산문화사(만화)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류와 지구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선택...!

 


인간은 선택하는 동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살아가는 동안 시시각각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양 갈래 길 중 어디로 갈까점심으로 무엇을 먹을까어떤 영화를 볼까대학은 어디로학과는 어디로 갈까무슨 일을 할까대통령은 누구를 뽑을까이 문장에서 어떤 단어를 넣을까여기서 글쓰기를 멈추고 잠깐 쉴까...

자의든 타의든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선택은 끊임없이 존재한다선택의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선택으로 둘러싸인 벽을 끊임없이 더듬는 일이 우리네 삶인 지도 모르겠다.

개개인의 모든 선택들은 어떤 결과로 이어지고그 결과들이 모여 하나의 우주를 이룬다선택이 하나라도 달라졌다면 필시 지금과는 다른 모습의 우주가 만들어졌을 것이다우주가 최종적으로 어떤 모습을 갖느냐는 개개인의 선택들이 모여 결정되는 것이다. 선택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 지구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다.  


무수한 선택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라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더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말하자면 인생 전체를 통틀어 몇 안 되는 중요한 선택을 내려야 하는 순간빌리 배트라 불리는 박쥐는 바로 그 중차대한 선택의 순간에 등장한다그리고 널 영웅으로 만들어 줄게’, 혹은 네가 원하는 게 뭔지 말해봐라는 램프의 요정 지니 같은 달콤한 말로 인간을 현혹한다중대한 선택이면 중대한 선택일수록 박쥐의 제안은 더욱 달콤해진다이번 선택 하나만 잘 하면 평생의 팔자와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는 엄청난 기대감을 심어주는 것이다.

박쥐가 인간에게 실질적으로 뭔가를 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20권 분량의 긴 만화 속에서 박쥐는 수시로 등장하지만 사실 박쥐는 허깨비와도 같다없는 존재라고 봐도 무방하다. 메타포로만 존재한다. 선택을 유도할 뿐선택에 물리적인 힘을 가하지는 않는다없는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다만 박쥐는 인간에 따라 다른 선택을 유도한다그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욕망을 읽고그에 맞는 선택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선택은 늘 인간 개개인의 몫이다그러나 그 결과는 때로 개인을 넘어 타인들, 그리고 인류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심지어 그 선택을 한 개인에게는 좋은 영향을그 개인을 제외한 나머지 인간들에게는 나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나비효과처럼 한 개인의 선택이 그 개인과 인류에게 상상도 못했던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는 것이다. 선택 하나로 운명이 바뀌고, 미래가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박쥐로 상징되는 메타포의 의미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박쥐는 선택의 기로에 선 우리 마음(양심)을 비추는 거울에 다름없다. 


박쥐의 목소리를 듣는 이들은 미래를 예측하는 것처럼 묘사되기도 한다말했듯 박쥐의 제안대로 선택해 팔자와 운명이 바뀌는 인간들도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것은 눈속임에 불과하다박쥐가 보여주는 미래는 인간 세계에서 필연적으로 벌어질 운명의 단면들에 불과하다그것은 박쥐가 아니라 누구라도 조금만 심각하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다지구의 운명도 그렇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지금까지 인간들이 해 왔던 선택과 그 결과들이 오늘날의 모습이라면 지금 하고 있는 선택과 그 결과들이 바로 내일의 모습인 것이다우리에게는 누구나 열람 가능한 역사라는 미래 예측 교본서가 있는 것이다역사 속에서 인간들의 선택과 결과가 어땠는지 잘 파악한다면 인간의 현재와 미래도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박쥐 목소리 따위에 기댈 필요가 없는 일이다. 

문제는 대다수의 인간들이 역사에 대한 분석과 고찰을 게을리한다는 것이고그보다 더 큰 문제는 분석과 고찰을 제대로 한 소수의 똑똑한 인간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역사와 미래를 이끌어간다는 것이다극 중에서 박쥐와 소통이 가능한 인간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그 극소수의 인간들그들은 다시 말해 역사에 대한 분석과 고찰을 제대로 하고 있으며그로 인해 미래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이들이다문제는 그들이 어떤 인간인가 하는 것이다앞서 언급했듯 박쥐는 인간의 성향에 따라 다른 선택을 유도한다말하자면 역사에 대한 분석과 고찰을 제대로 한 인간이 어떤 성향을 지녔느냐에 따라 미래는 다른 모습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그 인간이 히틀러라면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 같은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다행스럽게도 그가 아인슈타인이라면 인류의 미래를 위해 크나큰 업적을 남길 수 있다그러나 자신들의 이속을 챙기기에 급급한 이들이라면 케네디 암살이나, 9.11 테러세월호 같은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히틀러 같은 인간들만 박쥐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그래서 그들만 역사를 주도하고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우리의 미래는 암흑 속에 잠길 것이며만화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멸망의 길로 접어드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박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대부분의 인간들은 박쥐의 목소리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즉 인간의 역사와 미래지구의 운명 같은 것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당장 눈앞에 산적한 선택지들을 처리하는 일만 해도 골치가 아프고 여유가 없으며남들보다 몇 가지 선택을 잘 해 약간의 여유가 생겨도 인류의 역사와 미래를 등한시하기 일쑤다. 그보다 더 재미있고당장 이익이 될 수 있는 일들에 더 관심이 쏠리기 때문이다.  

당장 삼킬 수 있는 달콤한 것들을 마다하고 인류의 미래 따위를 걱정하고 고민할 인간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히틀러 같은 이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대부분의 인간이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에 관심을 둔 인간이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며그 소수 인간들의 손에 의해 역사가 만들어지고 미래가 바뀔 수 있었던 것이다만화 내용으로 들어가 본다면 그런 소수의 인간들에 의해 인류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아니 그런 결과를 초래한 것은 소수 인간들만의 잘못이 아니다소수 인간들이 그런 중대한 선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둔(관심을 두지 않은모든 인간들의 잘못인 것이다.


그래서 박쥐는 말한다더 이상 리셋은 없다고더 이상의 평행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고한 번 더 리셋하게 되면 지구는 멸망하고 만다고이제 더 이상 인류의 미래와 지구의 운명에 대해서 책임을 미루거나 전가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지구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단 한 명이라도 나 몰라라 하고 손 뗄 수 없다인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수많은 잘못된 선택들이 어떤 처참한 결과로 이어졌는지 알 수 있다그런 잘못된 선택들로 가득한 인간의 역사가 지구의 수명을 얼마나 처참히 갉아먹었는지 알 수 있다다른 동물이나 식물의 역사는 따질 필요 없다인간의 역사만 따져보면 과오와 답이 함께 나온다인류의 미래그리고 지구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해답 역시 그 안에 있다.

 

작품의 마지막 권마지막 장면에서 빌리 배트는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다. ‘지뢰밭 속에 있는 아이를 구하라’ 그것이 어쩌면 박쥐가 인류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일 것이다마지막 부탁이자 경고일 것이다지뢰밭 속에 있는 아이를 구하는 일지금 당신이 만사 제쳐두고 해야 할 일이 바로 그것이다아이를 구하면 그 아이가 세계를 구할 것이다그러니까 지뢰밭 속에 있는 아이를 구하는 일은 바로 나를 구하는 일이고인류를 구하는 일이고지구를 구하는 일인 것이다.

박쥐의 목소리가 들리든 들리지 않던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적어도 답을 구하는 방법은지구인이라면 모두 알 수 있다알고실천해야 할 때다더 이상의 실수와 잘못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제 리셋은 없다이 지구는 마지막 남은 하나의 지구다전 인류가 올바른 선택을 위해 각오를 새롭게 다져야 할 때다지뢰밭 속에 있는 아이를 위해인류를 위해지구를 위해그리고 내 가족을 위해내 아이들을 위해나를 위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편의점 인간 -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석희 옮김 / 살림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인류의 비애



유난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었다. 현재의 내가 이와 비슷한 고민에 자주 빠져들기 때문일까.

중편 분량의 이 소설은 가벼운 터치로 현대인의 단상을 그려나가지만 이면에는 섬뜩하고 무거운 주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작가는 인간에 대해 고찰하고 곱씹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에 날카로운 메스를 댄다.실존의 문제가 등장한다. 내가 하나의 인간으로 증명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 속에서의 인간'의 증명이다.만일 외딴섬에서 혼자 살아간다면 굳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사회에 속해 있을 때에만 스스로가 인간임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사회 속에서 톱니바퀴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으로서의 증명. 그 증명은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아닌 나 외의 존재들,타인들이 하는 것이다. 타인들이 속한 사회. 그 사회가 나를 인정해줘야만 내가 인간으로 증명될 수 있으며, 그래야만 나도 그 사회, 타인들이 속한 그 사회에 스며들어 어엿한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 혼자서 아무리 떠들어봐야 소용없다. 타인이,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타인의, 사회의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그냥 탈락되고 마는 것이다. 인간 실격으로 낙인찍혀버린다.


편의점에서만 20년 가까이 근무하며 완벽한 편의점 인간으로 살아가는 후루쿠라 게이코는 적어도 편의점 안에서는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며, 스스로를 인간이라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편의점을 벗어나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녀는 연애 경험이 전무한 서른여섯의 독신녀이며, 편의점 알바로 생계를 꾸려가는 프리터다. 번듯한 직장을 가질 의지도, 능력도 없으며 마찬가지로 번듯하게 결혼할 의지도, 능력도 없어 보인다. 인간 실격. 그녀는 편의점 외의 사회에서는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실존을 증명할 수 없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는 자신의 삶에 불만이 없다. 편의점에서의 근무에 만족하며, 보람과 자부심까지 느낀다. 그곳에서번 돈으로 원룸에서 생활하며 먹고, 자고, 다시 편의점으로 일하러 가는 일련의 생활에 불만도 불편도 없다. 거창하게 인간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려고도 들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그런데 그녀의 가족들, 친구들, 그녀 주변의 거의 모든 인간들은 그녀의 삶과 사고방식에 동의하지 못한다. 다수가 동의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 그녀는 결국 사회적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증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사고방식과 사회적 기준 사이에서 괴리와 혼란을 느낀다. 억지로 사회의 기준을 따라가보려 애쓰기도 하는데, 그 순간 편의점 인간으로서의 안정적인 삶이 흔들리고 만다.편의점 인간으로 살아가느냐, 편의점 밖의 인간으로 살아가느냐를 두고 게이코는 일생일대의 고민과 갈등에 휩싸인다. 사회적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증명하려 들면 들수록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이 점점 희미해지고, 모호해지는 이상한 딜레마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후루쿠라 게이코가 굳이 사회적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증명하려 들 필요가 있을까.주변을 돌아보면 후루쿠라 게이코처럼 살아가는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다.현대인의 대부분은 대학을 졸업하고도정규직으로 취직을 못하고 아르바이트나 비정규직의 삶을 살아간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30, 혹은 40대까지도 결혼을 못하는 인간들이 수두룩하다.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고, 번듯한 상대를 만나 일찍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풍족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은 많지 않다. 그렇게 풍족하고 안정적인 삶은 적어도 중산층 이하의 가정에서 자란2,30대 젊은이들에게는 꿈같이요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 대부분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후루쿠라 게이코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지경에 처해 있다.

이들 모두를 인간 실격으로 봐야 할까. 어쩌면 이들을 진화된 신인류로 봐야 하지 않을까.말하자면 편의점인간으로 대변할 수 있는 21세기 신인류의 모습.

외딴섬에서혼자 살아가는 인간처럼. 자신만의 영역에서 자급자족하는 인간처럼.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골치 아픈 부담에서 멀찍이 초월해 묵묵히, 조금은 고독하게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 미래를 도모하기 보다는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런 인간들에게 굳이 타인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조건들을들이댈 필요가 있느냐 말이다. 더구나그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조건이나 기준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구태의연하기 짝이 없다. 게이코가 고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인간과 그 삶의 방식이란 소설 속 또다른 등장인물인 시라하의 말처럼 석기시대의 모습에 다름없는 것이다. 결국 돈 많고 권력 있는 강자가 갖고 싶은 것을 모두 가져가버리는 약육강식의 사회, 남자는 밖에서 사냥하고, 여자는 안에서 아이를 기르는 가부장적사회. 이런낡고 진부한 방식이 그들이 강요하는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조건이며, 기준인 것이다. 편의점 인간으로 대변할 수 있는21세기 신인류들이 그런 구태의연한 조건과 기준을 굳이따라가야만 하는 것일까. 게이코도, 시라하도그런 삶을 거부하지만 한편으론 또 어쩔 수 없이 따라가려고도 한다. 따라가려 하면 할수록 힘들고 지치는데, 계속 따라가야만 하는 것일까.


작가는 무겁고 무서운 질문을 던진다.어떤 삶이, 어떤 인간의 모습이 더 나은 것일까. 인간적으로 더 바람직한 것일까.편의점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과 편의점 밖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 둘 다 만만치는 않는데,당신은 어떤 인간이고싶은지.

책을 집어 든지 두 시간여 만에 다 읽어 버렸다. 순식간에 읽힐 만큼 재미있으며, 공감 가는 대목도 많다. 훌륭한 글솜씨와 맞물려 내 개인적인 관심사까지 만족시켜 작품에 대한 평이 기대 이상으로 좋았던 것도 같다. 짧지만 강한 사유의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역대 아쿠타가와 상 최고의 작품이라는 극찬은 조금 과장된 것일 수도 있지만 칭찬받아 마땅한 수작임은 분명하다. 일본 문학의 새로운 변화, 혹은 진화를 본듯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물쇠 잠긴 남자 - 상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신작은 '죽은 한 남자'에 대한 보고서다.'그는 누구인가'라는 단순한 물음에 대한 두 권짜리 힘겨운 답변이 되겠다.

작은 호텔에서 장기 투숙 중이던 한 노인이 자신의 방에서 목을 매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경찰은 자살로 마무리 짓는다. 그러나 남자의 자살에 의문을 품은 한 여류 작가의 제안으로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망자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자살이 아니라 타살일 수도 있다'는 희미한 의문 하나를 가슴에 품은 채. 맨땅에 헤딩하듯 차근차근 조사가 시작되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마침내 망자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사건의 단서들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한다.닫혀 있던남자의 과거가 조금씩 열리고, 단단히 자물쇠가 채워져 있던 남자의 비밀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탐문과 심문, 취재와 조사를 근거로 한 땀 한 땀 단서를 모아가는 모습이 엘러리 퀸보다는 애거서 크리스티를 연상시켰다.막막하게 조사를 시작하는1권 중반까지의 내용은 다소 지루한 감이 있으나 죽은 남자의 과거가 드러나는 부분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스피디하게 읽힌다. 특히 사건의 진상과 범인이 밝혀지는 후반부에서 작가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되며 오랜만에 정통 미스터리의 진수를 맛본 듯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대야
소네 케이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이렇게 잘 쓴 소설이라니...

 

 

소네 케이스케는 마흔이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일본 문단에 등단했지만 등단과 동시에 에도가와 란포상, 일본호러소설대상,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연이어 수상하며 경이적인 신예의 탄생을 알렸다.

아디다스 광고에 '불가능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카피가 있었다. 나는 소네 케이스케를 보면서 나이 따위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등단 시기, 나이 따윈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문제는 재능이고, 열정인 것이다. 약관도 안 된 나이에 데뷔한 오츠이치나 스물 다섯에 데뷔한 히가시노 게이고나 불혹 넘어 데뷔한 소네 케이스케나 뛰어난 재능과 열정을 타고났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쓰기 시작했고, 오츠이치가 나이로는 가장 젊어서 쓰기 시작했지만, 두 사람에 비해 모든 면에서 훨씬 늦게, 나중에 쓰기 시작한 소네 케이스케의 현재 위치는 앞선 두 사람에 비해 한 치의 뒤처짐도 없다고 본다. 그것은 글을 보면 곧장 알 수 있다. 작품의 상업적인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책을 파는 것은 출판사의 몫이지 작가의 몫이 아니다). 작품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다.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세 작가의 글을 보면 누가 먼저 쓰느냐 나중에 쓰느냐, 젊어서 쓰느냐 나이 들어 쓰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능과 열정. 이것만 있다면 언제라도 앞선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혹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열대야'에는 세 편의 중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작품마다 작가의 번뜩이는 상상력과 사회와 인간에 대한 섬뜩한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표제작 '열대야'는 친구의 아내와 함께 야쿠자에게 인질이 된 한 남자의 기막힌 사연을 그린다. 절묘한 구성과 반전의 묘미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근자에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은 본격이 아닌 이런 류의 범죄 미스터리에 주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호러소설로 케이스케를 알게 된 나로서는 작가의 또다른 면모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작가의 또다른 면모라면 두 번째 작품에서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두번째 수록작 '결국에...'는 더이상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는 근미래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다. 미스터리와 SF, 호러가 공존하는 기이한 혼합 장르소설이지만 그냥 한 편의 잘 쓴 순문학 작품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 당면한 사회 현실 속으로 몸을 내던져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날카로운 메시지를 던질 줄 아는 치열한 작가 정신이 돋보였다. 노인 문제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심도 있게 파헤치며 한 가족을 낱낱이 해체시켜 나가는 솜씨가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작가가 해체시킨 건 한 가족만이 아니다. 한 국가일 수도 있고, 온 세계일 수도 있다. 제목처럼 결국엔... 세계 어느 인간도 노인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은 작품은 마지막 수록작 '마지막 변명'이었다. 이 작품은 말 그대로 공포의 진수를 보여주는 공포소설이다. 죽은 자가 다시 소생하여 돌아오는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인간 본연의 이기심과 흉포함을 잔인할 정도로 섬뜩하게 해부한다. 조금의 망설임도, 타협도 없다. 작가는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낱낱이,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의 결말부에서 드러나는 반전은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장르에서만 나올 수 있는 최적화된 반전이었다. 라스트에서는 마음의 심연을 뒤흔드는 무거운 공포와 슬픈 노스텔지어를 함께 불러일으켰다. 작가에 대한 신뢰를 더욱 공고히 다져주는 수작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트기 힘든 긴 밤 추리의 왕
쯔진천 지음, 최정숙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찬호께이의 '13, 67'이 홍콩 사회의 내부를 건드렸다면 '동트기 힘든 긴 밤'은 중국 사회의 내부를 거침없이 파헤치고 있다. 어느 중국 독자의 리뷰처럼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농후한 작품이었다. 중국은 공식적으로 공산당이 집권하는 사회주의 국가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정치는 엄격한 사회주의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진 것 같지만 문화 예술 분야에서 공안당국의 감시와 검열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동트기 힘든 긴 밤'은 중국 사회를 지탱하는 권력의 심장부로 비판과 고발의 칼날을 들이댄다. 작가가 날카로운 메스로 열어젖힌 중국 사회의 폐부는 추악한 어둠으로 뒤덮여 있다. 아무도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은 견고한 악의 성탑이 지어져있고, 그 안에서 온갖 악행이 난무한다. 막강한 돈과 권력을 바탕으로 거리낌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권력층이 있고, 그를 철통같이 비호하는 고위층 경찰 간부들이 있다. 정의를 수호하고 악을 처벌하려는 이들은 번번이 권력 앞에 무릎꿇고, 내부의 방해에 가로막혀 좌절한다. 다른 집단도 아닌 경찰이, 신성한 공안당국이 여아 성폭행이라는 추악한 범죄부터 살인, 매수, 위장, 증거 인멸, 증인 살해 같은 온갖 범죄에 가담하고 부정과 부패, 비리의 온상으로 그려졌다는 것은 중국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만큼 큰 충격을 던지는 일이다.


이것이 사실을 기반으로 쓰인 소설이라면, 소설을 통해 현재 중국 사회의 내면을 간접적으로나마 들여다볼 수 있다. 물론 어느 사회나 내부를 들여다보면 어둡고 추악한 면면들이 보이기 마련이다. 특별히 새로운 소재는 아니지만 중국 작가의 의해 이런 작품이 쓰였다는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작가의 필력 또한 뛰어나 도중에 책장을 덮을 수 없을 만큼 잘 읽혔고, 구성도 물 셀틈없이 탄탄했다. 과거와 현재, 인물과 인물을 오가며 숨가쁘게 전개되는 서사는 시종 박진감 넘쳤으며, 뜨거운 이야기가 읽는 내내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도입부에 벌어진 이상한 시체 유기 사건과 살인의 전말이 밝혀지는 후반부의 한 장면에서는 애틋한 비애감마저 느껴졌다. 온통 어둠 뿐인 세상 속에서 정의를 수호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요구되는 일인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돈과 직장, 사랑과 명예, 가족마저 내던지고 온 인생을 통째로 불살라야만 겨우 정의의 촛불 하나를 밝힐 수 있다니. 그래서 정의의 가치는 더욱 값질 수밖에 없으며, 더욱 빛날 수밖에 없다. 어떤 어려움과 고통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정의를 사수하려는 멋진 남자들의 '행동'이 삭막한 가슴에 카타르시스와 감동의 비를 내리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