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인간 -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석희 옮김 / 살림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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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류의 비애



유난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었다. 현재의 내가 이와 비슷한 고민에 자주 빠져들기 때문일까.

중편 분량의 이 소설은 가벼운 터치로 현대인의 단상을 그려나가지만 이면에는 섬뜩하고 무거운 주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작가는 인간에 대해 고찰하고 곱씹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에 날카로운 메스를 댄다.실존의 문제가 등장한다. 내가 하나의 인간으로 증명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 속에서의 인간'의 증명이다.만일 외딴섬에서 혼자 살아간다면 굳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사회에 속해 있을 때에만 스스로가 인간임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사회 속에서 톱니바퀴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으로서의 증명. 그 증명은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아닌 나 외의 존재들,타인들이 하는 것이다. 타인들이 속한 사회. 그 사회가 나를 인정해줘야만 내가 인간으로 증명될 수 있으며, 그래야만 나도 그 사회, 타인들이 속한 그 사회에 스며들어 어엿한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 혼자서 아무리 떠들어봐야 소용없다. 타인이,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타인의, 사회의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그냥 탈락되고 마는 것이다. 인간 실격으로 낙인찍혀버린다.


편의점에서만 20년 가까이 근무하며 완벽한 편의점 인간으로 살아가는 후루쿠라 게이코는 적어도 편의점 안에서는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며, 스스로를 인간이라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편의점을 벗어나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녀는 연애 경험이 전무한 서른여섯의 독신녀이며, 편의점 알바로 생계를 꾸려가는 프리터다. 번듯한 직장을 가질 의지도, 능력도 없으며 마찬가지로 번듯하게 결혼할 의지도, 능력도 없어 보인다. 인간 실격. 그녀는 편의점 외의 사회에서는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실존을 증명할 수 없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는 자신의 삶에 불만이 없다. 편의점에서의 근무에 만족하며, 보람과 자부심까지 느낀다. 그곳에서번 돈으로 원룸에서 생활하며 먹고, 자고, 다시 편의점으로 일하러 가는 일련의 생활에 불만도 불편도 없다. 거창하게 인간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려고도 들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그런데 그녀의 가족들, 친구들, 그녀 주변의 거의 모든 인간들은 그녀의 삶과 사고방식에 동의하지 못한다. 다수가 동의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 그녀는 결국 사회적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증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사고방식과 사회적 기준 사이에서 괴리와 혼란을 느낀다. 억지로 사회의 기준을 따라가보려 애쓰기도 하는데, 그 순간 편의점 인간으로서의 안정적인 삶이 흔들리고 만다.편의점 인간으로 살아가느냐, 편의점 밖의 인간으로 살아가느냐를 두고 게이코는 일생일대의 고민과 갈등에 휩싸인다. 사회적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증명하려 들면 들수록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이 점점 희미해지고, 모호해지는 이상한 딜레마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후루쿠라 게이코가 굳이 사회적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증명하려 들 필요가 있을까.주변을 돌아보면 후루쿠라 게이코처럼 살아가는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다.현대인의 대부분은 대학을 졸업하고도정규직으로 취직을 못하고 아르바이트나 비정규직의 삶을 살아간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30, 혹은 40대까지도 결혼을 못하는 인간들이 수두룩하다.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고, 번듯한 상대를 만나 일찍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풍족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은 많지 않다. 그렇게 풍족하고 안정적인 삶은 적어도 중산층 이하의 가정에서 자란2,30대 젊은이들에게는 꿈같이요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 대부분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후루쿠라 게이코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지경에 처해 있다.

이들 모두를 인간 실격으로 봐야 할까. 어쩌면 이들을 진화된 신인류로 봐야 하지 않을까.말하자면 편의점인간으로 대변할 수 있는 21세기 신인류의 모습.

외딴섬에서혼자 살아가는 인간처럼. 자신만의 영역에서 자급자족하는 인간처럼.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골치 아픈 부담에서 멀찍이 초월해 묵묵히, 조금은 고독하게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 미래를 도모하기 보다는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런 인간들에게 굳이 타인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조건들을들이댈 필요가 있느냐 말이다. 더구나그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조건이나 기준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구태의연하기 짝이 없다. 게이코가 고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인간과 그 삶의 방식이란 소설 속 또다른 등장인물인 시라하의 말처럼 석기시대의 모습에 다름없는 것이다. 결국 돈 많고 권력 있는 강자가 갖고 싶은 것을 모두 가져가버리는 약육강식의 사회, 남자는 밖에서 사냥하고, 여자는 안에서 아이를 기르는 가부장적사회. 이런낡고 진부한 방식이 그들이 강요하는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조건이며, 기준인 것이다. 편의점 인간으로 대변할 수 있는21세기 신인류들이 그런 구태의연한 조건과 기준을 굳이따라가야만 하는 것일까. 게이코도, 시라하도그런 삶을 거부하지만 한편으론 또 어쩔 수 없이 따라가려고도 한다. 따라가려 하면 할수록 힘들고 지치는데, 계속 따라가야만 하는 것일까.


작가는 무겁고 무서운 질문을 던진다.어떤 삶이, 어떤 인간의 모습이 더 나은 것일까. 인간적으로 더 바람직한 것일까.편의점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과 편의점 밖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 둘 다 만만치는 않는데,당신은 어떤 인간이고싶은지.

책을 집어 든지 두 시간여 만에 다 읽어 버렸다. 순식간에 읽힐 만큼 재미있으며, 공감 가는 대목도 많다. 훌륭한 글솜씨와 맞물려 내 개인적인 관심사까지 만족시켜 작품에 대한 평이 기대 이상으로 좋았던 것도 같다. 짧지만 강한 사유의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역대 아쿠타가와 상 최고의 작품이라는 극찬은 조금 과장된 것일 수도 있지만 칭찬받아 마땅한 수작임은 분명하다. 일본 문학의 새로운 변화, 혹은 진화를 본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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