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동에서 태어나 이태원소재의 국민학교에 다녔던 나는 얼마 전 읽었던 책에서 그 동네가 공동묘지터였다는 것을 알았다. 하긴 사대문안으로만 묘지가 없지 그 밖으로는 온통 묘지가 즐비하던 시절 이야기일터다. 암튼 어려서 무슨 클럽이니 양공주니 하는 말들을 일상으로 들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물건들을 웃돈을 주면서 사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참사가 일어났던 그 호텔은 내가 결혼을 한 곳이기도 하다.
어려서는 그닥 친하지 않았던 친구가 이태원에 고깃집을 내어 성공해서 돈을 무척 벌었다.
아주 오랫만이 그 집을 찾아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참사의 그 날 그 현장에 있었다고 한다.
실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기도 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심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고 요즘도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고 했다. 얼마 전 그 현장에 구호활동을 하던 소방관의 자살 소식이 들리기도 했다.
우리는 무수한 사고를 겪고 보고 듣고 살아간다.
그리고 흥분하고 성토하고 때로는 현장에 찾아가 시위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달라졌을까.
인간의 아주 탁월한 능력인 '잊기'에 익숙해지고 나면 냄비에 물이 급격히 끓어오르다가 또 그만큼 식어가듯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래야만 복잡한 머리속을 비워내고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때로 잊혀질뻔했던 일들을 이렇게 다시 끌어내야 하기도 한다.
그래야만, 어쩌면 그런 일들이 반복되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끌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관내 방관자'로 남았다는게 많이 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