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죽음을 깨워 길을 물었다 - 인간성의 기원을 찾아가는 역사 수업
닐 올리버 지음, 이진옥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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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아름다운 역사서가 또 있을까!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은 수많은 누군가의 역사가 쌓아올린 땅이다!

 

 

 

 

  1985년 열여덟의 나이로 처음 고고학 발굴에 나선 이 책의 저자 닐 올리버는 당시 발굴 책임자로부터 한 장의 평면도를 건네받았다. 흩어진 석기 파편들이 그려진 그 그림은 우주 한가운데 있는 소행성 군단을 찍은 사진처럼 보였다. 토머스는 평면도의 중심에 있는 두 쌍의 빈 공간을 가리켰다. 맥주잔 받침 크기 정도 되는 한 쌍의 원형 아래로 그보다 작은 두 개의 원형이 보였다. 토머스는 이렇게 말했다. “바로 여기가 부싯돌로 석기를 만든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았던 자리라네. 위쪽에 있는 큰 두 개의 원은 두 무릎이 닿은 공간이고, 그 뒤의 작은 원 두 개는 발끝이 놓였던 자리지.” 토머스의 말은 당시의 닐은 물론, 이 책을 읽고 있던 내 마음까지 전율하게 만들었다. 수천 년 전, 바로 그곳에서 누군가 무릎을 꿇고 앉아서 묵묵히 자신의 노동을 해냈던 이의 모습이 이 흔적 하나로 생생하게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나는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뒤,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내가 잠시 머물렀던 자리를 발견하고, 그 흔적이 나의 존재를 증언할 수 있다면 그건 무척이나 놀랍고도 감동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무덤, 건축물, 예술품 등 어떤 것들은 공들여 제작되어 특정한 자리에 배치되고, 어떤 것들은 버려지거나 우연히 사라진다. 평면도 속의 자리처럼 무심코 남겨진 무언가도 있다. 누구에게 보이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나 수천 년이 지난 후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게 될 수 있고,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사소한 행동이나 몸짓도 미래의 어떤 시간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의미가 될 수 있는 법이다. 닐은 고고학의 매력이란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유물, 유적과 같은 과거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이란, 그저 과거 시대의 전유물을 찾는 일이 아니라 인간성의 깊은 근원지를 발견하는 일과 같다고 말이다. 잠자고 있던 죽음에 목소리를 불어넣어 오늘과 미래의 길을 묻고자 하는 이 놀라운 여정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끝없는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고고학자이지만 탁월한 스토리텔러이자 음유시인인 저자의 시선을 통해 살고, 사랑하고, 생과 이별했던 무수한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한 편의 위대한 신화를 읽은 듯한 느낌이 든다. 아마도 이 책을 읽은 이들이라면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역사서가 또 있었을까.

 

 

 

오래된 기억 속에서 길어 올린 놀랍도록 아름다운 인류의 지혜

 

 

  닐 올리버는 ‘유물과 유적은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의 기원에 관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대의 선조들이 남긴 돌과 뼈에는 그들이 느꼈던 이런저런 감정들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아주 먼 고대, 문자 이전의 세계, 이야기가 기록되고 보관되기 전에 살던 이들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현재의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들도 우리와 같은 정소를 지니고 있었고 똑같은 희로애락을 느꼈다는 것을 우리는 그들이 남긴 흔적을 통해 알 수 있다. 비록 그들이 그들의 세계에서 느꼈던 것들을 우리는 우리의 세계에서 느끼고 있지만, 수만 년 동안 변하지 않은 무언가가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감각할 수 있다.

 

 

 

  1978년 탄자니아의 라에톨리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의 발자국 화석은 360만 년 전 우리의 먼 조상이 직립보행을 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발자국의 주인공은 성인 둘과 아이 하나였다. 아마도 단출한 가족이었으리라 추측된다. 이를 발견한 메리 리키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누구라도 분간할 수 있듯이, 여자는 한순간 멈춰 서서 왼쪽으로 몸을 돌렸고 잠시 위험이나 이상이 있는지 살폈다. 그러고나서 다시 북쪽으로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 움직임, 너무나 강렬하고도 인간적인 이 움직임은 시간을 초월한다. 360만 년 전, 당신 또는 나의 먼 조상이 의심의 순간을 경험한 것이다.” 그 오랜 옛날, 어느 가족의 아주 사적인 걸음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인류의 위대한 감정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든든한 나의 울타리, 가족. 자식의 안전을 늘 염려하는 엄마의 모성 그리고 본능을.

 

 

 

그의 살갗이 닿았던 곳에 나의 살갗이 닿았다. 그들이 그곳을 걸었던 시간과 내가 그곳에 도착한 시간 사이에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온갖 일들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순간 그곳에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 34p

 

 

차탈 후유크의 집들은 폐소공포증을 유발할 정도로 빽빽이 모여 있다. 적게는 3000명에서 많게는 8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거의 질식할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 살았다. 죽은 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시신을 번데기처럼 끈으로 돌돌 감싸서 태아처럼 구부린 자세로 집 아래에 묻었다. 한 집 아래에서 무려 64구의 사람 뼈가 발견되기도 했다. 똥오줌을 포함한 쓰레기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거대한 두엄더미에 차곡차곡 모았다. 인간들이 집단으로 만들어낸 탁한 기운이 마을을 꽁꽁 에워쌌다. 그들은 그 어떤 것도 떠나보내지 못하는 저장강박증 환자들이었다. / 52p

 

 

나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잘 알고 있다. 나는 유한하고 불완전할지라도 이곳 지구를, 살과 뼈를 선택할 것이다. 나는 이 오래된 바위에 마음을 기댄다. 우리 조상들이 그들을 둘러싼 세상과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의지했던 바로 그 바위 말이다. 바위는 늘 그곳에 있었고, 어떤 형태로든 영원히 남을 것이다. 우리에게 영혼이라고 부를만한 어떤 본질이 있는걸까? 바위에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에너지와 물질로 이루어진 무늬가 새겨져 있다. 땅을 밀고 솟아나 깎이고 닳아서 바다로 씻겨 내려갔다가 되돌아오는 것. 돌과의 연결, 돌에 대한 믿음, 그것이 내게 필요한 유일한 불멸이다. / 64p

 

 

 




 

 

 

 

  이따금 나는 상상한다. 아프리카로부터 파생된, 현생 인류라 일컫는 호모 사피엔스가 전 지구상에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난 게 아니라면 그 이전에 살고 있었던 종들과 마주쳤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고. 1994년부터 1998년 사이에 독일 니더작센에 있는 쇠닝겐 유적에서 나무로 만든 창들이 발견되었다. 가늘고 맵시 있는 이 창은 10미터 이상을 날아가 사냥감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는데, 이 도구의 제작자는 네안데르탈인이었다. 이러한 도구를 만들고 사용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섬세하게 소통할 수 있었고 크고 위험한 먹잇감을 잡기 위해 계획을 세우며 그에 대비해 자신을 무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하며, 그들이 우리의 생각보다 더 현대적이며 지혜로웠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에 저자는 네안데르탈인이 둔하고 멍청하여 호모 사피엔스에게 쉽사리 쫓겨났을 거라는 과거의 상상은 잊어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수천 년 동안 유럽이라는 사냥터를 잘 관리하며 유지해온 이들이었고, 심지어 두 종은 짝짓기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비록 두 종의 만남 이후 수천 년 뒤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다. 하지만 유럽인 중 많게는 4퍼센트가 여전히 네안데르탈인의 DNA를 지니고 있다고 하니, 이토록 오랫동안 메아리를 울리며 살아남는 유전자의 힘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거의 200만 년 전이라니, 가늠조차 어려운 시간이다. 한곳에서 발견되었으나 서로 다른 생김새를 지닌 이 다섯 개체의 화석은 과학계 일대에 충격과 논란을 불러왔다. 전에는 아프리카에서 호미닌의 두개골이 발견되면 기존에 알려져 잇던 화석과 비교하여 아주 작은 차이만 있어도 새로운 종으로 명명하고는 했다. 따라서 고인류 종은 계속 늘어났다. 호모 에르가스터, 호모 가우텐겐시스, 호모 하빌리스, 호모 루돌펜시스… 그런데 드마니시에서 각양각색의 생김새를 지녔으며,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인류 화석 다섯 개체 분이 발견된 것이다. 이는 생김새가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다른 종이 아니며, 이들 모두가 하나의 종, 즉 호모 에렉투스(곧선사람)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했다. / 118p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이야기를 만들고 기억하고 전해왔다. 우리 종에게 언제 의식이 생겼는지 알 수 없으므로 가장 오래된 이야기가 무엇인지도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야기와 뜻이 있기 전에 움직임(행동)이 있었다. 우리의 첫 조상들은 의식이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 그저 걸었고 창조했고 살고 죽었다. 이 모든 것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 오랜 역사 속에서 차이를 만들어낸 것은 다만 움직임, 심지어 무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 최근에서야 우리는 행동과 몸짓, 오고 가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 우리에게 단어와 이야기는 필수적이지만, 때로 행동은 때로 우리가 말하는 어떤 이야기들보다 더 중요하다. / 297p

 

 

 




 

 

 

 

  여기, 다른 두 장소에서 발견된 유골은 우리에게 너무도 상반된 사연을 전한다. 하나는 덴마크 코펜하겐 북쪽의 베드베크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중석기시대의 무덤이다. 18세 정도로 추정되는 여성과 성별을 알 수 없는 영아가 나란히 누워 있다. 아마도 둘은 출산 중에 죽음의 강으로 휩쓸려 간 듯하다. 신비스럽게도 아기의 몸은 백조의 깃털 위에 놓여 있다. 수천 년 전 조상들은 영혼이 백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상상했다 한다. 남겨진 사람들은 백조의 날개가 아기의 영혼을 저 높은 곳으로, 하늘나라로 데려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비록 두 아름다운 삶은 죽음이라는 가혹한 운명을 맞았지만, 이토록 다정한 방식으로 다뤄질 수 있었던 것은 떠나보낸 사람들의 애통한 마음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마음이 뭉클해진다.

 

 

 

  한편, 페루 북부 해안의 우앙차키토라는 마을에서 심장이 도려내진 채 파묻힌 어린아이들의 유골 140구와 새끼 라마들의 뼈는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다. 이들이 죽음을 맞이한 시기는 10~15세기경, 페루 북부 지역에서 치무 왕국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로 추정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뼈 전문가들은 아이들이 죽기 전까지 건강했고,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또 무덤 근처에서는 일렬로 선 발자국들이 발견되었다. 어린이들이 차례로 줄을 서서 살해 장소로 걸어 들어갔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아이들의 두개골과 뼈에는 붉은 안료가 묻어 있었는데, 죽음 직전 혹은 직후에 얼굴과 몸에 문질러 바른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대규모 희생 제의의 일면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잔혹한 인명 경시와 죽음에 대한 집착에 뿌리를 둔 비정한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사랑이 깊은 땅속에서도 살아남았듯 악의 증거도 그러하다고. 이데올로기란 무엇인지, 대체 어떤 이념이 이 끔찍한 악취도 견디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인지 우리도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기나긴 겨울밤

늑대들이 먹이를 찾아 얕은 계곡으로 내려올 때면

창백한 달빛이나 희미하게 명멸하는 북극광 아래

무리의 선두에 서서 달리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동족들보다 훨씬 높이 도약하고

가슴 깊숙이에서 터져 나오는 우렁찬 원시의 노래,

늑대족의 노래를 울부짖는 그의 모습을.

잭 런던, 『야성의 부름』

 

 

 

  36개의 유물과 유적이 남긴 인류의 사연을 따뜻하고 깊이 있는 시선으로 통찰한 닐 올리버의 『잠자는 죽음을 깨워 길을 물었다』는 우리에게 고고학의 신비와 인간성의 위대한 지혜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기억과 흔적은 이토록 오래 살아남아 우리로 하여금 생의 가치를 일깨우지만, 과거의 모든 존재와 사물들이 언제까지나 그대로 있을 거라는 생각은 경계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잊지 않는다.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은 수많은 누군가의 역사가 쌓아올린 땅이다. 함부로 연약해지지 말고, 함부로 나를 대하지도 말자. 내가 지나온 시간들이 어디에 어떻게 새겨질지 모를 일이다. 역사는 바로 이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가장 위대한 보물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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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살게 하는 것들 - 회복과 충전, 다시 잘 살고 싶을 때 읽는 김창옥의 제안서
김창옥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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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이 걱정과 불안이 반복된다면, 사는 게 점점 재미가 없다면,

행복을 좇고 있지만 정작 행복한 적이 없다면 이 책을 추천합니다!

 

 

 

  지난 해, SBS TV프로그램 <집사부일체>에서 ‘김창옥 편’을 방영한 적 있다. 일명 ‘소통령’이라 불릴 만큼 소통 전문가로 잘 알려진 그이기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매우 궁금했다. 마침 제주살이를 하고 있던 그는 뜻밖에도 소박한 차림으로 진행자들을 맞이했다. 평소 방송을 통해서 본 그는 깔끔한 정장 차림, 젠틀한 외모로 화려한 입담을 자랑하는 그였기에 수수해보이는 그의 모습은 다소 의외일 정도였다.

 

 

 

  그는 제주에 와서 사는 이유에 대해 ‘강의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어느 날, 소통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저 사람이 행복하지는 않아 보여.”라고 한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누구보다도 소통에 능해 보이는 그였지만, 정작 청각 장애를 갖고 있던 아버지와 걷는 게 외국인과 걷는 것보다 어색할 만큼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고 말했다. 소통 전문가답지 않은 뜻밖의 고백이었다. 대기업과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행복해지는 법’,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던 그였지만 정작 본인은 언제 행복했는지 잊고 지냈을 뿐만 아니라 가까운 가족과는 불통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소통 전문가라고 알려진 그조차도 행복을 찾고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는데,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나를 다시 살게 해야겠다.’

찾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나는 언제 행복하지?’ / 19p

 

 

 

  언젠가 저자는 제주에서 화산토로 직접 옹기를 구워볼 기회가 생겼다고 한다. 흙을 푸고, 흙 속의 이물질을 제거하고, 그 흙으로 옹기를 굽는데, 이때 습기를 머금고 있는 옹기를 바로 가마에 넣으면 강한 온도를 견디지 못하고 깨져버리거나 녹아버린단다. 이를 보며 저자는 우리 인간의 삶과 옹기가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가마 속 뜨거운 불꽃처럼 우리는 고통, 고난, 시련과 같은 어려운 시기를 맞으면서 단단해진다. 하지만 우리 마음에 상처, 열등감, 비뚤어진 마음, 우울, 건강하지 못한 자존심 등 온갖 습한 마음들이 자리 잡고 있으면 강한 불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깨지고 찢기고 터지고 만다. 습한 마음을 볕 좋은 양지에서 잘 말리지 않으면 이전에는 견딜 수 있었던 온도에도 쉽게 깨질 수 있다.

 

 

 

  이에 저자는 내가 어느 선까지 버틸 수 있는지, 어느 선까지 괜찮은지 내 한계선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안전한 상태와 위험한 상태를 감지할 수 있는 체크포인트를 두고 중간중간 나의 한계선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혹여 당장 나아지고 치유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조금 더 힘겨운 상황이 지속되더라도 스스로를 기다려주는 시간을 가지면서 말이다. 그렇게 나를 둘러싼 열기가 차차 사그라들기를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더 튼튼하고 견고해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살면서 한 번도 깨어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한 번도 찢어지지 않은 마음이 과연 있을까요? / 35p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제주살이를 하기 시작하면서 내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는 장소, 사람, 순간을 찾아 나섰다고 한다. 한번쯤 해보고 싶다고 늘 마음속으로만 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해보면서 ‘나를 살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내가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을 지켜나가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운동 시간을 지키면 운동이 나를 지켜주고, 건강검진을 받는 시기를 지키면 그 건강검진이 나의 생명을 지켜줄 것이며, 내가 지킨 친구들이 어느 시기가 오면 나를 지켜주듯, 내가 지켜온 삶의 가치관과 삶이 자세가 나를 평생토록 지켜줄 것이라고 말이다.

 

 

 

당신의 ‘커피’는 무엇인가요?

당신의 숨을 편안하게 하고,

당신을 쉬게 하는 무언가가 존재하나요?

그런 장소, 그런 사람, 그런 일이 존재하나요?

삶은 정답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어떤 의지를 갖고 어떤 감정을 지닌 채

살아갈 것인지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당신만의 커피를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 46p

 

 

숫자에 연연하지 않는 방법을 찾기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마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숫자 속에서 살아가게 될 테니까요. 그럼에도 어떤 숫자 속에 있건 너무 마음 졸이며 숫자에만 얽매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숫자에 우리 삶을 저당잡히 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려는 일이 내 뜻대로 잘 안 되면, 그건 그것대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이라고, 다른 즐거운 일을 찾아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 99p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독서지도사 자격증을 준비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오랜만에 새로운 일을 향한 도전으로 설레었다. 그런데 연이은 환절기 감기로 둘째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다 말다를 반복하고, 곧 있으면 첫째 아이의 기나긴 여름방학이 시작되니 막상 자격증을 땄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더 중요한 건 자격증을 땄다고 해서 내가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 만한 자격이 아직은 충분치 않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게 망설이고만 있는 나를 보며 함께 독서모임을 하는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일단 시작부터 하라고. 초보자부터, 책을 읽고 싶지만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거나 글을 쓰고 싶지만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먼저 시작해보라고. 그러고 보니 나는 이런저런 안 될 가능성부터 타진하느라 시작을 주저하고,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느라 늘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다.

 

 

 

  나처럼 시작을 두려워하고 있는 이들에게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두려워하면서 하라, 크게 하려고 하지 마라,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마라, 작게 시작하라, 실수하면서 하라.” 힘들지만 두려울 때 두려워하면서 해야 한다고, 두렵지 않고 어떤 일을 하는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어느 권투선수가 어떻게 한 대도 안 맞고 경기에서 이길 수 있겠느냐고. 어느 축구선수가 공을 한 번도 뺏기지 않고 앞으로만 계속 달릴 수 있겠느냐고. 나 역시 한 대도 맞지 않고 권투에서 이기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고, 공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골을 넣어보려 했던 사람이었다. “한 대도 안 맞고 이길 수 없다.” 이 말을 가슴 속에 새기며 두려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지금의 나에게 그 무엇보다도 절실하고도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말하면 그 말을 가장 많이 듣는 사람이 자기 자신입니다. 누군가에게 알리기 위해서라기보다 내가 듣기 위해서 그 말을 계속하세요. 그 말을 계속 듣다 보면 점차 길이 나서 항상 가던 쪽에서 삶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눈길이 자꾸 닿고, 발걸음이 가고, 내 말이 약속이 되어 스스로 지키기 시작해요. 어느새 그 지점에 이르러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볼 때 사실 ‘마법’ 맞습니다. / 57p

 

 

당신도 지금 작은 나무를 심었을 수 있습니다. 취업이라는 묘목을 심었을 수도, 결혼이라는 묘목을 심었을 수도, 자녀교육이라는 묘목을 심었을 수도, 사업이라는 묘목을 심었을 수도 있습니다. 조급해하지 말고 1년, 2년은 작은 열매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다 따서 버릴 수 있는 담대함과 지혜를 발휘하십시오. 조급함도, 작은 성취에 취함도 없이, 지금 우리에겐 묵묵함이 필요합니다. 대신 우리의 일에, 우리 마음의 나무에 힘을 주는 일을 합시다. 그리고 5년, 7년이 지나 탐스러운 열매가 삶에 맺히게 되면 그때 달고 귀한 열매를 맛보자고요. / 106p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용서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누군가 나를 속이려 하거나 실수를 저질렀을 때 그의 허물을 오히려 들춰내고, 탓하며, 그의 과오를 비웃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기도 하죠. 내가 용서받아본 적 없으니까, 누군가 나의 허물을 덮어준 적 없으니까, 똑같이 그렇게 합니다.

반대로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방을 위해 실수와 흠집을 눈감아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단 한 순간이라도 본인이 따뜻하게 위로받았거나 용서받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 또는 친구였을 수도 있겠죠. 헐벗은 것같이 춥고 시리고 부끄러울 때 누군가 따뜻한 담요를 덮어주었던 순간이 삶에 있었던 것이지요. / 228p

 

 

 




 

 

 

 

  이처럼 『나를 살게 하는 것들』에는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기준에 따라, 나만의 호흡으로, 좋은 만남을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의 우주를 사랑하고 배우면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인생의 귀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저 좋은 글귀만 나열되어 있는 여느 자기계발서와 달리 저자가 스스로 삶을 재정비하며 경험한 것들에서 비롯된 깨달음이었기에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덕분에 변화하고 싶은데 선뜻 나서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나만의 호흡법에 따라 살아가는 방법이란 무엇인지 배울 수 있어 의미 있는 독서였다. 이유 없이 걱정과 불안이 반복된다면, 사는 게 점점 재미가 없다면, 행복을 좇고 있지만 정작 행복한 적이 없었던 이들이라면 꼭 이 책을 읽어보시길 추천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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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끝
미나토 가나에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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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일 거라는 기대감 한 스푼만 덜어내고 나면 따뜻한 감동과 공감 어린 이야기로 마음이 뭉클해진다!

모든 이야기의 끝은 작가가 정해놓은 엔딩이 아니라 ‘읽는 이’ 즉 ‘나’를 통해야만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주인공인 에미는 작은 산간 마을에 살고 있다. ‘베이커리 라벤더’라는 이름의 빵집을 운영하고 있는 부모님이 종일 바쁜 탓에 마을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에미는 그저 멀거니 산 너머 세상을 상상하며 시간을 보내곤 한다. 어느 날, 메이는 친구 미치요로부터 소설을 써 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이왕이면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미치요의 말에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한 에미는 재미있게 읽어주는 미치요 덕분에 점차 글을 쓰는 즐거움에 빠져든다. 하지만 미치요가 전학을 가게 되고, 중학교 2학년이 되자 빵집 일까지 도와주어야 했던 에미는 점차 이야기의 세계에 몰두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던 와중 빵집에 자주 오는 손님인 햄 씨(햄 샌드위치와 햄 롤을 사 가기 때문에)와 추리소설책을 주고받으면서 가까워지고, 그의 제안으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산 너머 마을로 다녀오게 된다. 덕분에 보다 넓은 곳에서 학교를 다니며 문예부에 들고 싶다는 꿈을 꾸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가까운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만다.

 

 

 

  이후 햄 씨는 에미와 교제를 약속한 뒤 훗카이도 대학에 합격해 마을을 떠나고, 그 사이 에미는 잊고 있었던 새로운 추리소설을 써보기로 한다. 때마침 전학을 갔던 미치요가 당대의 유명한 추리소설가 마쓰키 류세이의 제자가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에미의 안부를 물어온다. 에미의 새로운 소설을 읽고 싶었던 미치요는 에미가 보내 준 소설을 읽고 이를 마쓰키 류세이에게 보여준다. 마쓰키 류세이는 에미의 재능을 인정해 제자로 삼을 테니 도쿄로 오라고 제안한다. 에미는 꿈에 그리던 마쓰키 류세이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뜨지만 이미 햄 씨와 약혼한 신세였고, 여자관계가 난잡하기로 소문난 마쓰키 류세이에게 보낼 수 없다는 햄 씨의 반대에 좌절한다. 그렇게 부모님으로부터 빵집을 물려받고 햄 씨의 아내로 살아가는 수순으로 정해지려는 찰나, 이대로 꿈을 저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 에미는 마침내 역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약혼자 햄 씨가 와 있다…….

 

 

 

내가 만약, 소설을 완결시킨다면?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이야기의 끝』은 정해진 수순의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고픈 한 산골 소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부모님과 약혼자의 만류를 뒤로한 채 당대 유명 추리 소설가 마쓰키 류세이의 제자가 되기 위해 역으로 향하지만,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약혼자가 그녀 앞에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러면서 작가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 이야기에 다음은 없다. 결말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고 해야 할까.’ 이 때문에 독자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이게 끝이라고? 48페이지에 이르는 짤막한 이야기는 정말 이렇게 끝이 나는 건가? 그래서 에미는 어찌되는데? 부모와 약혼자의 뜻을 꺾지 못하고 고향에 주저앉게 되는 건가? 혹시나 다음 이야기에서 이 이야기가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페이지를 넘겨보지만 전혀 다른 시대, 다른 공간, 새로운 인물의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마음이 뒤숭숭해진다.

 

 

 

  분명 이런 기분,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는데…. 『이야기의 끝』을 읽어나가며 나는 어떤 기시감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그러면서 책장을 쭉 훑어보던 나는 어느 책을 발견한 순간,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란 책 때문이었다.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최고의 추리 소설가라 평가 받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인 만큼 당연히 냉혹한 살인으로 점철된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구입한 책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책에는 그동안 그가 그려왔던 작품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뭉클한 감동을 동반한 기묘하고 따뜻한 이야기라는 반전이 담겨 있었다. 미스터리 소설의 순한맛이라고 해야 할까. 미나토 가나에의 『이야기의 끝』도 분명 그러했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지만 이 작가의 작품은 미처 읽어보지 못했기에, 이번만큼은 그 명성을 제대로 느껴보리라 마음먹었던 나로서는 한 방 먹은 기분이랄까.

 

 

 

  하지만 이 소설, 마치 조각조각 잘려나간 이야기가 한 데로 모여 들어 어느 새 커다란 이야기로 완성되는 구성이 기대하던 추리 소설은 아니지만 색다른 미스터리를 선사한다.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 속에서 고민하는 각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각자 처한 상황에 맞게 에미의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여정은, 결국 모든 이야기의 끝은 작가가 정해놓은 엔딩이 아니라 ‘읽는 이’ 즉 ‘나’를 통해야만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이라고 소설은 말하는 듯하다.

 

 

 

“가끔 그렇게 먼 곳을 보는데 뭘 보는 거야?”

“산 너무 세계요. 가보고 싶지만 안 되니까 상상만 하는 거예요.” / 20p

 

 

사실은 모에가 쓴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몇 줄 읽자마자 아무래도 모에는 아닌 것 같다. 문체도 시대 설정도 너무 구식이다. 마쓰키 류세이가 살아 활약하고 있으니 지금으로부터 사오십 년 전일까. 그보다 이는 허구일까, 사실일까. 어느 쪽이든 내가 모르는 시대의,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다만, 에미가 어떻게 되었을지 영 마음이 쓰인다.

에미가 나였다면, 류이치는 어떻게 했을까. / 73p

 

 

하지만 자네 작품에는 뭔가 딱 한 걸음 정도가 부족해. 구로키 선생의 그런 지적은 아마 전하지 않았으리라. 부족한 뭔가는 존경하는 사진작가의 조수를 하면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제는 어묵 공장을 잇게 되었으니 그럴 기회는 사라졌고 프로가 된다는 꿈도 끝났다고 스스로 다독이고 있다.

도모코 씨가 얼마나 내 사정을 알아차렸는지는 모른다. 이 소설을 본인의 해석이나 의견을 더하지 않고 내게 건넨 것은 스스로 답을 찾으라는 의미일까.

내가 만약, 소설을 완결시킨다면……. / 128p

 

 

 



 

 

 

 

“꿈을 빼앗긴다는 거, 어떤 기분이야?”

 

 

  에미가 하늘 저편, 가 닿지 못할 것 같던 산 너머의 세계를 늘 상상했듯 우리는 저마다 완성하지 못한 꿈을 생각하곤 한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 역시 에미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 연인, 처한 상황, 친구와 같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방해 받거나 또는 좌절된 꿈들을 떠올린다. 사진작가가 되기를 꿈꾸지만 가업을 이어야 하는 청년, 자신을 항상 한심하게 바라보고 재능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남자로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여자, 가족을 위해 헌신하느라 넓은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가슴 저 깊은 곳에 봉인한 채 살아온 남자… 이들은 저마다의 입장에서 완결되지 못한 에미의 뒷이야기를 완성해간다. 그러는 사이 각자의 삶 안에서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지,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꿈은 무엇인지, 이제 그 꿈을 위해 나는 또 어떤 선택을 해야 할 지를 고심하게 된다. “당신도 타인의 기대에 따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요?” 소설이 물어오는 이러한 질문에 우리 또한 대답해볼 일이다.

 

 

 

에미가 어떤 선택을 해야 행복해질지, 논리로 생각하지 마.

에미가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지, 아닌지만 생각해.

만들고 싶어서 역으로 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로 달려가 전차를 타면 그만이다. 그 탓에 햄 씨와 헤어져야 한다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햄 씨는 다케오가 아니다. 에미를 따라

함께 전차를 탔다가 직장인 학교에서 신는 덧신을 신은 채라는 것을 깨닫고 둘이 함께 웃으면 그만이다. 도쿄까지의 긴 여행 중, 둘이서 상의하면 된다. 그리고 도쿄역에 도착했을 때 햄 씨가 물으면 된다.

계속 갈래, 돌아갈래. / 172p

 

 

 

억지로 끌고 오면 이 아이는 평생 다른 사람 손에 꿈을 잃었다는 울분을 안고 살 것이다. 너 정도의 애정으로 미코의 울분을 풀 수 있을 리 없다. 세월이 흐르면 작아지리라 생각할지 모르나 실은 딱딱하게 굳어질 뿐이다. 일단 굳어진 것을 없애는 것은 어렵다. 이렇게 말하기는 그렇지만, 부모라도 그건 힘들다.

지금 눈앞에 있는 문제는 피하지 않고 직면해야 한다. 당당하게 맞서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사흘 밤낮이 이어져도 상관없다. / 209p

 

 

 



 

 

 

 

  추리소설일 거라는 기대감 한 스푼만 덜어내고 나면 따뜻한 감동과 공감 어린 이야기로 마음이 뭉클해지는 작품이다. 결이 다른 미나토 가나에의 새로운 작품을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 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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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함 속 세계사 - 129통의 매혹적인 편지로 엿보는 역사의 이면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최안나 옮김 / 시공사 / 2022년 6월
평점 :
절판



 

 

 

 

한 장의 편지에 이토록 놀랍고도 위대한 자취들이 담길 수 있다니!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사를 바라보고 싶다면 이 책에 주목해보라!

 

 

 

  괴테는 편지를 가리켜 “한 사람이 남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회고록”이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편지에는 한 사람의 진실과 거짓이, 감정과 추억이, 맹세와 희망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편지는 전쟁이든, 평화든, 예술이든 아니면 문화든 여러 분야에서 인간사를 바꿔놓기도 했고, 한 개인과 개인을 영원으로 묶어두기도 했으며, 역사상 수많은 성취와 파멸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편지란, 한 개인과 세상을 아우르는 역사 그 자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우편함 속 세계사』는 고대 이집트와 유럽, 아프리카, 인도, 중국,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와 전통, 국가 그리고 인종을 아우르는 총 129통의 편지들을 한 데 모은 책이다. 엘리자베스 1세, 표트르 대제, 로렌초 데 메디치, 오스카 와일드, 안톤 체호프, 에밀 졸라, 스탈린, 체 게바라, 마하트마 간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쓴 편지를 만나볼 수 있다. 한 개인의 내밀한 감정과 진실을 들여다보는 것은 물론, 공공의 목적으로 쓰이거나 정치적 목적의 중대한 사안이 적힌 편지를 통해서는 매우 결정적인 세계사의 한 장면과 숨겨진 이면까지 두루 살펴볼 수 있다. 꾹꾹 눌러 담아 쓴 편지 한 장에 이토록 위대한 세계사가 담겨 있다니,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사를 바라보고 싶다면 이 책에 주목해보자.

 

 

 

129통의 매혹적인 편지로 엿보는 역사의 이면

 

 

  여기, 부적절한 사랑에 빠진 이라면 공감할 만한 아주 특별한 편지가 있다. 파리 주재 미국 대사이자 독립선언문 초안을 쓴 인물, 토머스 제퍼슨(43세)이 괴짜 화가의 아내인 마리아 코스웨이(27세)에게 쓴 편지다. 이는 서양사에서 손꼽히는 지성인 중에 한 명이 사랑에 빠져 가슴앓이를 하다못해 ‘머리와 가슴이 나누는 대화’라는 은유로 하여금 사랑에 빠진 이의 고통과 딜레마를 표현한 장면을 볼 수 있다. 가슴은 머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가시에 찔리지 않고서는 장미를 꺾을 수 없네. 고통 없이는 즐거움도 없어. 이것이 우리 존재의 법칙일세. 그리고 우리는 이를 순순히 따라야 하네”라고. 이어 1520년부터 46년 동안 오토만제국의 술탄이었던 술래이만 대제가 노예 소녀였던 록셀라나(휘렘 술탄)에게 쓴 편지는 얼어붙은 마음도 단번에 녹아내릴 듯 다정하고 아름다워서 계속 곱씹어 읽게 된다.

 

 

 

나의 외로운 자리 왕좌, 나의 부, 나의 사랑, 나의 달빛

나의 가장 진실한 친구, 나의 동반자, 나의 존재 그 자체, 나의 술탄

아름다운 자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자…

나의 봄날, 명랑한 얼굴을 한 나의 사랑, 나의 낮, 나의 연인, 웃음을 터뜨리는 나뭇잎… / 술레이만 대제와 휘렘 술탄이 주고받은 편지 중에서 55p

 

 

나는 당신과 전투를 벌이고 싶고, 동시에 당신에게 굴복하고 싶기도 해요. 왜냐하면 여성으로서 나는 당신의 용기를 아끼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고통을 아끼고, 당신 스스로 짊어진 내면의 분투, 나만이 완전히 깨닫게 된 그것을 아끼고, 당신의 끔찍한 진정성을 아끼기 때문이에요. 나는 당신의 힘을 사랑해요. 당신이 옳아요. 세상은 희화화되어야 해요. 하지만 나는 당신이 풍자하는 대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알고 있어요. 아,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열정이 있는지! 내가 당신 안에서 느끼는 게 바로 그거예요. 나는 학자나 폭로자나 관찰자를 느끼지 않아요. 내가 당신과 함께 있을 때 느끼는 건 바로 피예요. / 아나이스 닌이 헨리 밀러에게 쓴 편지 중에서 61p

 

 

 

  자고로 부모는 죽는 날까지 자식 걱정을 한다고 했던가.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과 왕비일지라도 자식 걱정 앞에서는 예외 없이 부모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편지가 있어 눈길을 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통치령의 상속자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프랑스 왕가로 시집을 간 딸 마리 앙투아네트를 꾸짖는 편지다. 외교관이나 장관들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무례하게 굴고, 둔하고 나약한 남편 루이 16세를 무시한 채 추파를 던지는 아첨꾼들과 어울린 데에 따른 걱정이 담겨 있다. 아마도 어머니는 딸에게서 재앙을 예견하는 위험한 무언가를 본 게 아니었을까. 마찬가지로 왕과 의회가 종교 갈등으로 대립하다 내전으로 패배한 찰스 1세가 아들인 찰스 2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이 같은 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아버지의 마음으로 전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울컥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만약 신께서 네게 성공을 주신다면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복수에는 사용하지 마라. 만약 신께서 어려운 조건하에 네 권리를 회복해주신다면 네가 무엇을 약속했든 꼭 지켜라. 자신도 준수해야 하는 법을 시행한 그 사람들은 자신의 승리가 문제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세상에 반칙과 부정한 방법으로 얻을 가치가 있는 것이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너는 우리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 찰스 1세가 찰스 2세에게 쓴 편지 중에서 108p

 

 

나는 네가 너무 쉽게 손에 넣은 성공과 너를 둘러싼 아첨꾼들에 대한 생각으로 그 긴 겨울을 떨며 보냈는데, 너는 쾌락과 터무니없는 과시의 삶에 스스로를 내던졌구나. 왕이 심성이 착해 자신은 즐겁지 않음에도 네게 맞춰주거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빼놓고 쾌락에서 다시 쾌락을 좇는 네 행동 때문에 전에도 마음속 두려움을 담아 편지를 썼는데, 이제 로젠베르크에게 보낸 네 편지를 보고 그런 내 두려움에 다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알겠구나…. / 마리아 테레지아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쓴 편지 중에서 282p

 

 

 



 

 

 

 

  이토록 정신없고 과도하게 지저분한 편지가 있다니. 바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사촌 마리아네와 성적 공모 그리고 기이한 유머를 즐기며 나눈 편지가 그러하다. 편지를 읽다보면 특히 똥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지금 나는 거의 22년 동안 똑같은 오래된 구멍으로 똥을 싸왔고, 하지만 그게 아직 조금도 찢어지지 않았어! 비록 나는 그걸 똥 싸는 데 너무 자주 사용했지만 말이야. 그러고 나서 야금야금 똥을 뜯어먹지.’ 어쩌면 그는 음악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또라이가 아니었을지. 읽으면 읽을수록 훗날 이 말을 한 것에 대해 땅을 치고 후회했을 편지도 눈에 띤다. 페이버앤드페이버의 출판인인 T. S. 엘리엇이 조지 오웰에게 그의 최근작 출간을 거절하는 편지다. 소비에트연방이 어떻게 치명적 테러 국가가 되는지 보여주기 위해 농장에 비유한 바로 그 작품, 『동물농장』이다. 엘리엇의 깔보는 듯한 출간 거절 편지를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치게 된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그리고 긍정적 관점에서 저는 트로츠키파를 선택하는데, 이 작품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오웰 씨는 양쪽 어느 편에서도 강력한 공감을 얻지 못하고 표를 분산시키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순수한 공산주의 관점에서 러시아의 동향을 비판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른 관점에서 작은 국가의 미래를 염려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의 돼지들은 다른 동물보다 훨씬 지성을 갖추었으니 농장 운영자로는 최적입니다. 사실 그들이 없었다면 동물농장은 태어날 수조차 없었겠지요. 따라서 필요한 것은(누군가는 반대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더 많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더 공공심 있는 돼지들입니다. / T. S. 엘리엇이 조지 오웰에게 쓴 편지 중에서 138p

 

 

 

  이 외에도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죽음을 앞둔 여인이 남편에게 담담하게 안부를 전하는 편지는 먼 훗날 지금의 세대에게까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안톤 체호프가 죄수들의 인구 실태 조사를 위해 러시아 극동 지역 사할린의 죄수 유배지에서 관찰한 것들을 기록한 편지에서는 날것 그대로의 역사 속 한 장면을 마주하는 기묘한 감각을 선사하기도 한다. 아울러 프랑스 군대의 불의와 반유대주의를 폭로하기 위해 에밀 졸라가 프랑스 대통령 펠릭스 포르에게 쓴 편지는 한 편의 문학처럼 고귀하다. 드레퓌스의 누명과 반유대주의 공공 캠페인, 은폐 공작 뒤에 있는 사람들을 폭로한 그녀의 목소리 덕분에 드레퓌스는 혐의를 벗고 사면되었으며 대위로 복직해 1935년 중령으로서 사망했다. 그녀의 용기가 없었더라면 이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미약해보일지라도 한 명 한 명의 목소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그녀의 글은 커다란 울림을 준다.

 

 

 

신께서 내리시는 벌은 이성을 앗아가실 때 가혹합니다. 종말의 시작이지요. 당신께서는 국민의 아버지 차르이니 광인들이 승리하고 그들 자신과 국민을 파멸로 이끌도록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그들은 독일을 점령하겠지만, 러시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중에 누군가는 러시아처럼 사람들이 고통받고 자신의 피에 잠겨 죽은 나라는 결코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위대한 것들이 파괴되고, 슬픔이 끝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 라스푸틴이 니콜라이 2세에게 쓴 편지 중에서 199p

 

 

당신도 칼럼에 썼듯, 사람들은 진주만 폭격이 우리가 일본과 평화로웠고 그들과 조약을 협상하려 최선을 다하던 시기에 이루어졌음을 잊어버린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나가서 진주만에 있는 전함들의 용골에 서서, 자신의 삶을 구하기 위한 어떤 기회도 얻지 못한 3,000명의 젊은이와 함께하는 것뿐입니다. 진주만에 가라앉은 두세 척의 다른 전함에 대한 얘기도 진실입니다. 모두 모아 3,000명에서 6,000명의 젊은이가 어떠한 전쟁 선언도 없이 그때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저 살인에 불과했지요. / 해리 트루먼이 어브 컵치넷에게 쓴 편지 중에서 220p

 

 

진정 끔찍한 자연철학의 파편이네! 우리는 모든 가능한 세상 중 최고의 곳에서 벌어지는 이런 무서운 재앙에서 운동의 법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내기란 어렵다고 느낄 것이네. 이곳에서는 10만 마리의 개미, 즉 우리 이웃이 개미 언덕 위에서 한순간에 뭉개지고, 결코 탈출할 수 없는 잔해 아래에서 확실히 반쯤 죽어가는 상태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네. 유럽 전역에서 가족들이 거지로 전락하고, 상인 백 명, 즉 자네와 같은 스위스인들의 재산이 리스본의 폐허에 삼켜졌지. 인간의 삶이란 그야말로 운에 좌우되는 게임이 아닌가! / 볼테르가 트롱신에게 쓴 편지 중에서 232p

 

 

 



 

 

 

 

  이처럼 책 속에 수록된 편지들을 우리는 세계사 속의 주요 한 장면 속으로 가 닿게 한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역사 속 인물들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되고, 그들의 내밀한 감정을 훔쳐보는 즐거움을 맛보게 하기도 한다. 어떤 편지들은 문학 작품보다 더 강렬하고 깊은 울림을 주기도 하니, 한 장의 편지에 이토록 놀랍고도 위대한 자취들이 담길 수 있다는 것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편지쓰기에 인색해진 오늘날, 이 책으로 하여금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 한 장이 주는 귀중함을 되새겨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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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 선택적 함구증을 가졌던 쌍둥이 자매의 작은 기록들
윤여진.윤여주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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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불안과 상처로 가득했던 시간들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들!

말문이 닫힌 아이들의 마음속에 갇혀 있는 말들, 이제는 먼저 귀를 기울여주세요!

 

 

 

  “학급 회의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친구들은 복도로 나가서 무릎 꿇고 있어라.”

  엄하기로 유명했던 나의 담임선생님은 학급 회의 때 이렇다 할 말을 하지 않은 아이들을 모두 복도로 불러내셨다. 그날 아무런 안건을 내지 않은 나를 비롯해 많은 아이들이 우르르 복도로 나가 무릎을 꿇어야했다. 학급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길 바랐던 특단의 조치였겠지만,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 되어버리는 순간은 학년 내내 나를 괴롭혔다. “더 크게! 큰 목소리로!”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아이들 앞에서 나의 목소리가 주목 받는 게 부끄러웠던 나에게 선생님의 다그침은 격려가 아니라 그저 고통이었다. 오죽하면 반에서 4인이 출전한 합창 대회에서 1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등한 기념으로 독창을 해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는 당황해서 아예 입을 떼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평소에는 말을 잘 하지만 유독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혼자 목소리를 내는 게 두려웠던 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소극적이었는지, 또 언제 사람들 앞에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유년시절을 떠올리면 늘 아무 말도 하지 못해 얼굴만 붉히고 있는 내 모습만 선연히 떠오른다.

 

 

 

“어린 시절, 나는 말을 하지 않는 아이였다.”

 

 

  선택적 함구증. 특정 상황에서 말하기를 거부하는 증상으로, 불안장애의 범주에 속하며 아동기에 주로 나타난다고 한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향, 태아기부터 유아기까지의 직간접적 경험들, 부모와 교사의 양육과정, 가족 환경, 영유아기의 분리불안 등으로 인해 불안도가 매우 높은 채 사회에 나선 아이들에게서 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선택적 함구증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아이의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이 원인이라 여겼었다.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놀랍게도 이 책의 저자인 쌍둥이 자매는 비슷한 시기에 함께 선택적 함구증을 앓았다고 한다.

 

 

 

  “뭐가 불안해? 왜 말이 안 나와?” “낯을 많이 가려서 그런 거 아니야? 뭐가 불안한 거야? 이유가 뭔 것 같아?” 사람들은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러게.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일종의 불안 장애였는데, 말을 하고 싶은데 못한 게 아니고, 아예 말을 하고 싶은 욕구도 없었어. 말만 그런 게 아니고 표정도 안 지어졌어. 웃는 것도, 우는 것도 못했어. 움직이는 것도 부자연스러웠어. 그렇게 편하지 않은 장소에서는 늘 무표정한 마네킹 같았어.” 쌍둥이는 이렇게 대답을 하면서도 늘 벽에 부딪히는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들도 뭐라 분명하게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무엇이 그렇게 무서웠는지, 왜 불안했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저 쳐다보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싫었고, 말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겁이 났다고 한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펼쳐지는 것이 두려웠고, 그래서 약속이나 한 듯 집 밖에만 나서면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들은 얼음쌍둥이가 되어간 것이다.

 

 

 

  비록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착실하고 어른들의 말을 잘 들었기 때문에 집 안팎으로 큰 문제는 없었고, 그로인해 7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년에는 조금씩 나아지겠지’라는 희망으로 방치되었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러는 사이 이들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고민과 갈등의 소란스러움을 혼자 겪어내야 했고, 그런 순간들이 쌓일수록 삶은 늘 벅차고 아팠다고 고백한다. 뿐만 아니라 선택적 함구증을 앓았던 유년시절의 기억은 성인이 되어서도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낯선 환경을 싫어하는 아이를 보며 자신의 유년시절과 겹쳐보게 되고, 혹여 내 아이도 선택적 함구증을 앓게 되는 게 아닐지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체육 시간마다 ‘오늘은 부디 교실 수업이길’하고 기도하던 어린 소녀. 신발 갈아 신는 일조차 어려웠던 나는 나 스스로를 초라하고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나는 왜 그토록 당당하지 못했을까? 왜 늘 죄인처럼 숨고 싶었을까? 사춘기가 다가올수록 나는 자존감이 더욱 낮아졌다. / 97p

 

 

 




 

 

 

 

  이처럼 『이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에는 7년간 입을 꼭 다물었던 ‘선택적 함구증’ 쌍둥이 자매의 진솔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어째서 그들은 이 기나긴 시간동안 말을 하지 않았는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왔는지, 이후 어떻게 침묵이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었는지를 조곤조곤 풀어내고 있다. 덕분에 이 책을 읽는 동안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혼자 목소리를 내는 게 두려웠던 내 유년 시절의 모습이 여러 번 겹쳐져서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사람이 많은 곳보다 혼자서 노는 게 더 편했던 아이, 눈물이 헤프다고 또 놀림을 당할까봐 꾹꾹 삼켰던 아이, 혼자서는 얼마든지 잘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과 함께 하거나 앞에서 발표를 하는 게 두려웠던 아이, 미움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피해를 받는 게 더 나았던 아이. 그 모든 게 한 데로 겹쳐져 마음이 너무나 무거웠다.

 

 

 

  하지만 서로의 ‘존재’가 위로가 되고, 내가 ‘나’로 있을 수 있었던 시간과 가족에게 사랑받고 사랑하던 빛나는 ‘순간’이 있었기에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던 그들의 말에 어찌된 일인지 나까지 치유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때의 나는 한심하지도 초라하지도 않다고, 그저 단지 조금 달랐을 뿐이라고, 남들 앞에서 뭐 하나 자연스럽게 잘해낼 수는 없었지만 끈기와 인내심은 뒤지지 않았고 누구보다 성실했다고 나를 칭찬해주는 일은 퍽 위로가 되었다. 조각난 유리파편을 모으듯 그렇게 내 마음도 하나씩 주섬주섬 챙겨보면서 지난날의 나를 쓰다듬어주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우리만의 비밀 놀이터. 집은 생활의 공간이자 유일한 놀이공간이었다. 학교를 오가는 발걸음은 단 한 번도 가벼웠던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의 진정한 나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가족과 할머니, 그리고 비밀 놀이터 덕분이다.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던 시간.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작고 소중한 놀이의 기억들. 가족에게 사랑받고 사랑하던 빛나는 순간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살아가는 일이 마냥 쉽지는 않지만 때론 이 기억들이 나를 살게 한다. / 53p

 

 

그 순간, 내 아이가 나의 예상보다 단단한 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하게 두근거릴 뻔하던 심장이 마침내 행복감에 잦아들었다. 운동장에 뛰어다니는 이 많은 아이들은, 낯선 장소에서 평범하게 적응해가는 일이 실로 얼마나 대단한 것임을 알까. 혹여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라 해도 낯선 환경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쓰며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존중받을 만하다는 걸 알고 있을까. / 91p

 

 

“선한 아이야, 곧 너는 너만의 그 작은 세상을 깨고 나올 수 있어.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 / 113p

 

 

 




 

 

 

 

  책의 말미에, 선택적 함구증을 겪고 있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당부의 이야기가 담겨있어 여기에도 남겨보고자 한다. 저자는 먼저 아이의 감정을 이해해주라고 말한다. 선택적 함구증을 겪고 있는 아이들은 평소 소외감과 고립감에 시달린다. 그래서 의견표현이 없는 것은 별다른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불안하구나”, “너 힘들구나”, “오늘은 못했지만, 다음에는 잘할 수 있을 거야.” 하고 아이가 자신이 겪는 감정을 부모가 이해한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둘째는 아이들에게 말하라고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말 못하는 아이라고 규정 짓기보다 목소리를 내는 일이 덜 부담스러운 환경을 만들어주고, 침묵마저도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주자.

 

 

 

  또 부모의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응원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시간이 지나면 덜 해지더라고, 조금만 용기를 내면 금방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특히 유치원이나 학교 입학 전과 같이 환경의 변화를 앞두고 있을 때, 아이에게 긍정적인 힘을 불어넣어주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 외에도 ‘말하는 것이 무서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작은 경험들, 부모가 먼저 나서서 아이를 배려한다는 생각에 “우리 아이는 말을 안 해요”라고 단정짓거나 폭로하지 않기, 언젠가 나을 거라고 방치해두기 보다 미리 전문가를 찾아가 도움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하니 참고해야겠다.

 

 

 

내가 청소년이 되었을 때도, 성인이 되었을 때도, 내 안의 그 아이는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늘 수치심에 젖은 채 성장하지 않는 그 작은 아이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서, 나는 그 아이를 사랑하기보다 회피하기를 택했던 것 아닐까.

만약 나의 아들, 딸이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상상해보니 큰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파도에 모래성 같은 내 마음이 풀썩 무너졌다. 아, 나의 자식들만 나와의 안정적인 애착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구나. 내 속의 작은 문신 아이도 애착이 필요했던 거로구나. 이제 와서 그것을 깨달았다. / 178p

 

 

본래 내향적인 성향이 강한 이 아이들은, 스스로가 가진 섬세함을 바탕으로 주변 환경을 모색하고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기에 사려 깊고 배려심이 좋은 편입니다. 비록 사회생활에 실패하는 경험들이 쌓이면서 스스로 위축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 시간들은 본래의 성향을 강점으로 배양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지요.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을 갖춘 자들이기에, 지독한 마법에서 풀리게 되면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원래 그랬던 것처럼’ 진행이 됩니다. 가면 속 ‘나 자신의 원래 모습’을 사회에 자연스럽게 드러내기 시작한다면 그 순간, 본격적으로 문제 해결이 된 셈이지요. / 282p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말은 생소할 수 있겠지만 우리 주변에는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성격으로 규정짓고, 언젠가는 괜찮아지리라는 막연한 낙관으로 아이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아이가 스스로 알을 깨부수고 나오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 책을 읽고 말하지 않는, 말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이해해줄 수 있는 부모가 보다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울러 똑같은 상처를 겪었던 어른이들도 이 책을 통해 스스로를 격려해주고 위로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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