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토랑에서 - 맛, 공간, 사람
크리스토프 리바트 지음, 이수영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초기의 레스토랑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식과 사회 문화 생산을 주도한 레스토랑을 해석하다!

 

 

 

 

   미식, 외식 문화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특히, SNS를 통해 이른바 ‘맛집’을 공유하고 소비자 스스로 문화를 주도해가는 분위기가 날로 높아져가고 있다. 이제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욕구의 행위를 넘어서 시대와 문화를 ‘향유’하는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하기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 있어서 뉴욕의 칼럼니스트 애덤 고프닉이 ‘마치 새로운 종교나 스포츠, 신분 증거, 섹스 대용, 윤리적 의식으로 여겨진다’고 이에 대해 논한 말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우리는 한 사회와 세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정서와 가치관 그리고 생활습관 등이 응축되어 있는 대표적인 문화코드로써 이에 대한 이해가 다채로운 각도에서 동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 ‘레스토랑’은 우리에게 있어 의미가 한정적이기는 하지만, 서양의 미식 산업을 주도하고 현대인들에게 대중적인 공간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으며 ‘음식점’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접근한다는 가정 하에 이를 문화사회학적 관점에서 기술한 책이 있어 흥미를 끈다. 『레스토랑에서』는 독일 출생으로 역사학 및 각종 문화사를 전공으로 하고 있는 저자가 파리의 첫 고급 레스토랑과 같은 초기 레스토랑에서부터 전후 시대를 거쳐 맥도널드에 이르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레스토랑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조망한 책이다. 책에 접근하기 전에 유의해야 할 것은 단순히 레스토랑의 역사를 다루는 기술 및 이론서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책은 주방 직원과 요리사, 웨이터와 철학자, 미식가와 사회학자 등을 통해 그들이 레스토랑을 중심으로 펼치는 행동과 의식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화들을 조합, 나열한다는 데 특징을 두고 있다. 더욱이 겉으로 보기에는 우아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치열한 삶의 면면들이 존재하는 곳임을 눈여겨보면 좋을 듯하다.

 

 

 

 

 

 

레스토랑, 지식 사회의 실험실이 되다

 

 

   유럽 레스토랑의 역사는 사람들이 배를 곯지 않게 되면서, 또는 배가 고프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표면적으로 파리의 초기 레스토랑은 시민 계층의 여론을 형성하고 엘리트들의 살롱이자 교양 있는 계층의 사교 모임에 가까웠던 카페와 유사하게 등장하였으나, 보다 개인과 그들의 욕구에 집중하여 사적인 공간에 가깝게 활용된 덕분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때 미식 전문가의 활동과 대충 매체의 세계가 확대됨으로써 음식물 섭취라는 육체적 행위를 미학적이고 지적인 활동으로 변화시키는데 기여했다. 또한 율리우스 벨렌도르프가 메뉴판의 상징과 기능성에 주목하면서 이를 구체화한 것이 오늘날에까지 이르렀다. 레스토랑의 홀과 주방을 개혁한 에스코피에로 인해 구이, 소스, 제과, 찬 요리 담당 등 각자 분야를 구분해 보다 조직적이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개선되기도 했다. 최고의 레스토랑을 찾아 별점을 주는 것으로 유명한 ‘미슐랭 가이드’가 사실은 타이어 회사의 이름(미쉐린)이고, 타이어 구매 고객에게 무료로 배포한 안내서가 그 기원이었다는 점은 매우 의외였다.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레스토랑의 엘리트적이고 귀족적인 요소는 밀려났다. 최초의 페스트푸드 체인점의 등장은 햄버거를 주 상품으로 한 화이트 캐슬의 선점에서 비롯되었다. 화이트 캐슬은 의심스럽게 여겨지는 다진 고기의 깨끗함과 안전성을 거듭 강조하는 시스템을 전면에 내세우고, 하루에 20~24개의 햄버거를 먹어도 건강 상태가 양호한 사례를 들며 곳곳에 선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런던에 값싸고 따뜻한 식사를 제공하는 런던 최초의 급식소들이 설치되었는데, 윈스턴 처칠은 ‘브리티시 레스토랑’이라는 이름을 씀으로써 사람들이 괜찮은 식사를 제공받는다고 느낄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이는 주로 집에서만 식사를 하던 영국인들이 외식에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오사카 출신의 레스토랑 소유자 요시아키 시라이시는 이동식 화장실 발명가로, 맥주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착안해 오늘날 회전식 초밥을 고안해낸 점도 흥미롭다. 고와 미요의 ‘누벨 퀴진 10계명’으로 인해 레스토랑에서 무절제한 것들이 배제되고, 저칼로리의 효율적인 요리로 변형을 꾀하기도 한 점 역시 새로운 시대를 반영한 결과로 작용했다.

 

 

 

대규모 체인점을 운영하기에는 모두의 입맛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음식이 아직 없었다. 민족적 정체성은 오랫동안 식습관을 결정했다. 그러다가 1920년에서 1930년 사이에 이르러 현대화되고, 유동적이고, 대중 매체의 영향력이 커진 사회에서 그러한 관계가 비로소 해체되었다. 미국은 이제 동일한 것을 소비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화이트 캐슬>에서 대량으로 판매한 표준화된 햄버거였다. 화이트 캐슬은 월트 앤더슨이 위치토에서 운영하던 가판점 4개에서 시작된 미국 최초의 패스트푸드 체인점이었다. / 58p

 

 

그로부터 20년 뒤 독일에 문을 연 피자 전문점들은 매년 1억 마르크에 달하는 매출을 올리게 된다. <외국 것>으로 여겨진 음식점들이 독일의 얼굴도 바꾸게 된다. 특히 이탈리아 레스토랑은 삶의 즐거움과 낭만을 표현하는 새로운 형식을 대변했다. 그들은 독일 도시들에 이탈리아적인 것을 들여왔다. 음식과 웨이터, 실내 장식을 통해서 자유와 감성의 새로운 분위기를 독일에 전파했고,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그 <본보기>로 행동했다. / 110p

 

 

 

   레스토랑은 관계를 가꾸고, 고무하고, 지식을 확장하는 역할을 했다. 사람들은 다른 문화와 새로운 유행, 새로운 창의적 형식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이곳을 이용했다. 지식 사회의 실험실로써, ‘감정 요리’에 이르는 심미적인 기능으로써 다층적으로 작용하는 이와 같은 기능은 사회 진단 사이의 연관성으로 확대된다. 이에 대해 조지 리처는 현대 사회의 <맥도널드화>에 대한 연구에서 서비스 분야가 지배하는 사회, 즉 노동과 소비가 표준화된 사회를 보여 준다. 이 사회에서는 서비스의 확대와 규율화로 인간의 감정이 상업화되고 통제된다. 그렇다고 패스트푸드 체인점들을 단순히 효율성과 획일성의 상징으로만 여겨서는 안될 일이다. 이들은 세계 곳곳에 편재하기 때문에 실제로도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거대한 상징성을 지니는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레스토랑은 인간의 노동이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각종 사회의 모순과 정치적 과제, 개혁의 이념들도 불러일으킨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이념이 부딪치는 곳

 

 

   레스토랑은 향유과 힘든 노동을 동시에 지닌 이중적인 공간이다. 홀에서는 손님들이 우아하게 비싼 음식을 먹지만, 홀과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주방에서는 쥐꼬리만 한 임금이 지급되고, 육체적 폭력이 가해지고, 불법 이주자들이 고용주의 기분에 따라 무방비로 내몰린다. 조지 오웰, 귄터 발라프, 사루 자야라만은 그들이 살았던 특수한 시기에 이들 노동자들의 삶을 관찰하고, 이러한 불평등한 조건들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이들을 아울러 ‘감정 노동자들’이라 칭하듯, 서비스직 종사자들의 감정은 더는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일하는 조직의 것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감정이 실제로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을 만큼 오로지 고객을 위한 서비스를 강요하는 구조적인 문제 또한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이다.

 

 

 

그런 호텔에서 박봉을 받고 일하는 요리사들은 눈에 띄지 않았고, 존중받지도 못했다. 그들은 하루에 14시간, 15시간, 16시간씩 일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40살이 되기도 전에 죽었다. 육체적 과로에다 대부분 창문도 없고 공기가 통하지 않는 주방 구조 때문이었다. 요리사들은 광부들보다 많은 직업병에 걸렸다. 그들은 만성적인 산소 결핍과 폐결핵, 정맥류에 시달렸고, 심지어는 영양 결핍인 경우도 많았다. / 32p

 

 

 

   한때 레스토랑의 백인 전용 스탠드는 새로운 흑인 정항 운동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이전의 흑인 단체들은 대부분 인종 범죄나 차별 대우와 같은 일이 생겼을 때 반응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울워스의 백인 전용 스탠드에 앉은 학생들은 실제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손 놓고 있지 않으려는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그저 반응하는 대신 행동에 나섰고, 단순히 스탠드 반대편에 있는 종업원들을 신경질적으로 만드는 일에 그치지 않고, 남부 지역 전체로 확산되는 새로운 저항 운동의 형태를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베리스와 데이비드 서튼은 레스토랑을 <포스트 모던의 이상적인 기관>이라고 칭했다. 레스토랑에서는 문화학자들이 관심을 갖는 모든 것, 즉 생산, 소비, 교환, 감각적인 것, 상징적인 것, 지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이 만나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장 피에르 아순도 레스토랑처럼 한 공간에서 내밀한 향유와 사회적, 기업가적 야망을 동시에 연구하기 좋은 곳은 없다고 강조한다. 그만큼 레스토랑은 인간과 인간, 이념과 인간이 부딪치고, 시대와 문화가 겹겹이 쌓인 다층적인 형태의 공간으로 수많은 이야기 거리들을 양산해냈다.

 

 

 

 

 

 

   『레스토랑에서』는 앞서 밝힌 레스토랑을 둘러싼 각종 흥미로운 이야기와 기록들로 재미있게 잘 읽힌다. 다만 긴밀한 서사나 세세한 분석 및 해석이 배제된 채 파편화된 기록들을 쭉 나열만 한다는 점에서는 그 전개 방식에 어느 정도의 적응이 필요한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특별한 사전 지식 없이도 가볍게 잘 읽히고 특히, 상업 공간의 실내 인테리어를 주 업으로 삼고 있는 남편에게 미식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꽤 도움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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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07-24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트잇이 얼마나 깊이 읽으셨는지를 보여주네요. 사회학자의 작품인가봐요.

투콤마 2017-08-06 14:41   좋아요 0 | URL
포스트잇 붙여가며 다시 들춰보고 싶은 정보들이 꽤 있었어요^^ 학자지만 책 내용은 쉽게 잘 읽히는 편이었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트] 군함도 세트 - 전2권
한수산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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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무슨 기괴한 형태인가. 과연 실존하고 있는 섬의 모습이 맞는 것인가. 잿빛 바다 위에 폐허가 된 골조만이 남아 있는 섬은 마치 뼈만 앙상하게 남은 혼령을 붙들고 있는 것 같다. 이름도 서슬 퍼런 ‘군함도’다. 맨 위에 서 있는 신사를 중심으로 섬 전체를 둘러싼 드높은 방파제 때문에 그 모습이 바다에 떠 있는 군함 같아서 사람들은 하시마라는 이름 대신 군함도라 불렀다고 한다. 이곳은 일본 나가사키현 나가사키항 근처에 위치한 섬으로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이 주목을 받아 우리 앞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었다.

 

 

 

   1940년대 무렵 일본의 항구도시 나가사끼는 거대 군수기업 미쯔비시의 자본 아래 놓여 일본 최대의 해저탄광으로 성업 중이었는데, 이곳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군함도에서 석탄이 채굴되면서 조선인들을 향한 강제징용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태평양전쟁의 도발과 함께 궁핍과 자원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한 일본은 조선의 나이 어린 소년까지 닥치는 대로 훑어가 탄광에 처넣을 정도로 무차별 강제징용을 자행했고, 그 결과 조선인들의 인권은 그들 뜻대로 좌지우지 되어 유린당해야만 했다. 한수산의 『군함도』는 바로 이 지옥의 섬이라 불리던 곳, 거대한 악의 수레바퀴 속에서 강제노동에 처했다가 끝내 원폭 피해자로 목숨을 잃어야 했던 조선인들의 처절한 삶을 그린 장편소설이다. 나라를 잃은 설움이란 게 이런 것인가, 읽는 내내 몇 번이나 먹먹해질 정도로 일제 강점기의 역사가 적나라하게 담겨져 있는 이 소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럼에도 어제를 기억하는 자에게만이 과거를 반복하지 않고 내일을 희망으로 채워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저자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지, 마땅히 마주하고 진지하게 성찰해봄으로써 한때의 과거가 아니라 계속해서 주목해야 할 일임을 우리 모두 일깨울 필요가 있는 듯하다.

 

 

 

 

 

 

 

 

나라 잃은 청춘들, 거대한 악의 수레바퀴에 내몰리다

 

 

   진폐증으로 쿨럭쿨럭 기침을 해대는 조선의 징용공들이 누에처럼 꿈틀거리며 잠들어 있는 지옥의 섬, 군함도. 이때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로, 조선의 징용공들은 하나같이 너무도 가혹한 운명에 처해져야만 했다. 지하 700미터를 내려가면 시작되는 갱도에서 12시간 혹은 15시간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노동 착취는 물론, 고작해야 콩비지에 삶은 콩, 정어리조림과 같은 형편없는 식사가 전부이며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탄광 속에서 파리 목숨보다 가벼운 취급을 받았다. 어이없게도 조선 사람들 내에서도 서열 혹은 지역감정을 조장하여 한뜻으로 마음을 모으지 못하고, 일본의 뜻에 반대하여 뒤에서 무슨 꿍꿍이를 벌이려할라 치면 이를 밀고하는 이 또한 조선인이라는 점이 참으로 애석할 따름이었다. 이른바, ‘인간 공출’. 유복하게 자란 친일파의 아들 지상 역시 이 ‘인간 공출’이라는 일본의 서슬 퍼런 사슬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막 임신한 아내 서형을 고향에 둔 채 군함도로 징용을 오고 말았다.

 

 

 

반도의 물자를 닥치는 대로 걷어가던 공출이 이제는 사람에게까지 와 있는 것 아닌가. 쌀 보리 콩처럼, 절간의 종처럼, 제사에 쓰던 유기그릇처럼, 나는 물자가 되어 끌려가는 반도인인 것이다. 그들이 거둬가던 쌀이나 놋쇠와 다름없이 내 팔다리는 일할 수 있는 자원이 되어, 인간이 아닌 노동력으로 끌려가는 것이다. / 『군함도 1』91p

 

 

이것이구나. 나라가 없다는 것이 이런 거였구나. 지상은 처음으로 나라라는 말을 생각했다. 내놓으라면 그게 어디 곡식만이었나. 조상님 제사 모시던 유기그릇까지 다 꺼내주어야 했다. 가자고 하니까 여기까지 끌려왔다. 그러고도 이제 또 서라면 서고, 때리면 맞아야 한다. 왜 우리가 이래야 하는가. 우리는 그 무엇에서도 주인이 아니다. 이제야 알겠다, 나라가 없다는 게 무엇인가를. / 『군함도 1』 118p

 

 

 

   인권의 사각지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에 짓눌린 채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던 징용공들은 이곳에 남느냐 목숨을 걸고 도망치느냐 기로에서 끊임없이 내몰린다. 설상가상으로 증탄독려를 위한 가혹행위들은 거세지고 광부들의 자해행위는 늘어갔으며 눈에 띄지 않는 기생충으로 인해 숙사의 환경은 더욱 열악해지고 있었다. 때마침 지상은 아내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에 남을지, 목숨을 걸고 탈출을 해야 할지 고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험한 바닷길에 휩쓸려 죽거나 육지에 도착하더라도 갈 곳이 마땅치 않아 끝내 붙잡혀 돌아왔다가 모진 고문을 당해 목숨을 잃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곳이었다. 결국, 오랜 고심 끝에 군함도에서 머무를 수 없다고 결심한 지상은 오랫동안 군함도에서 징용공들의 큰형님으로 손꼽히는 명국과 춘천에서 징용되어 온 우직한 벗 우석과 함께 탈출을 도모하기에 이른다. 과연 죽어야만 나갈 수 있다는 이 지옥섬을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이렇듯 총 2권에 이르는『군함도』의 1권은 군함도에서의 탈출을 꿈꾸는 지상과 그 일행들에게 놓인 절체절명의 순간들을 매우 긴장감 있게 재현한다.

 

 

“세상은, 우리가 다 함께 사는 게 세상이다. 나한테는 남의 일이지만 그 사람한테는 손톱 밑에 가시만 끼어도 아픈 거, 그게 세상이다. 남의 일이냐 내 일이냐, 남의 탓이냐 내 탓이냐, 그렇게들 사니까 우리가 이 모양인 거야. 남의 일이 아니라 그게 결국은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생각을 해야 하는 거다.” / 『군함도 1』192p

 

 

우린 왜 이렇게 되었나. 왜 여기까지 끌려왔으며, 이제 목숨을 걸고 여길 나가야 하는가. 살기 위해서다. 산다는 건 뭔가. 그건 자유다. 나는 지금 자유를 찾아서 나가려는 거다. 자유란 게 뭐냐. 그건 간단하다. 내 나라가 없어지면서 우리는 자유를 잃었다. 할 말을 하며,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곳, 그걸 할 수 있는 게 조국이라면 우린 거기서부터 잘못됐던 거야. 나를 잃었다는 바로 그거. 내 나라 말도, 내 나라 글도, 제 이름조차 잃어버린 우리들. 이게 그 시작이다. 이름을 찾고 말을 찾고 혼을 찾아야 한다. / 『군함도 1』368p

 

 

 

   소설은 거대한 악의 수레바퀴에 내몰린 조선 청년들의 굴곡진 삶, 불굴의 의지를 강렬하게 담아냄과 동시에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낸 조선의 여인들이 품어야했던 회한마저 가슴 아프게 그려낸다. 남자들은 떠나가고 죽어가는데, 남아서 그들의 자식을 지키고 길러내야 하는 여인들의 처지와 애끓는 마음을 절절하게 표현한다. 생생하게 살아있던 님이 느닷없이 목숨을 잃어 뼛가루가 되어 돌아왔을 때 마주해야 하는 마음이란 얼마나 괴로운 것이겠는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길이 없어 가슴을 쥐어뜯으며 살아야 하는 마음은 또 어떠하겠는가. 그럼에도 살아서 견디고 이겨내어 아이들에게 제 뜻 펴고 살아갈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은 여인네의 단단한 마음에서 또한 희망을 본다. 뿐만 아니라, 소설은 스스로 일본으로 건너가 적극적으로 남편을 찾아 나서는 서형과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음으로 맞선 금화를 통해 이를 더욱 극적으로 완성시킨다.

 

 

 

남자들은 떠나가고 죽어가는데, 그래도 남겨놓고 간 그들의 자식을 지키고 길러내야 하는 여자의 처지가 서럽고도 절절하게 가슴을 적셔왔다. 그러리라. 살아서 견디고 이겨내야 하리라. 그래서 어느날 시퍼렇게 자라날 그 아이들에게 억장이 무너지던 이 한스런 세월을 말해야 하리라. 잊지 않고 전해서 알게 하리라. 못난 조상은 이렇게 살았다면 너희들만은 달라야 한다고, 저마다 시퍼렇게 제 뜻 펴고 살아가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이 한을 풀어줘야 한다고, 그렇게 말이다. / 『군함도 2』102p

 

 

 

어제를 기억하는 자에게만이 내일은 희망이다

 

 

   한편, 미군의 공습이 본격화되고 일본은 군수 시설을 지하에 옮기려는 시도를 계속하면서 징용된 조선인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진다. 지상은 운이 좋게 탈출에 성공하지만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란 보이지 않는다. 지상은 같이 지내던 광재가 급성 폐렴이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공상해제증명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죽을병에 걸려서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현실에 힘이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징집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하는 조선인들을 보며 ‘사지 멀쩡한 자들이 눈 벌겋게 뜨고 쪽지 하나에 이리 끌려가고 저리 끌려가는 우리 모두가 나라 잃은 청춘의 현실 같다’ 하고 되뇌는 그의 자조 섞인 목소리가 유독 가슴을 후벼 판다. 사실 전쟁이란 것은 젊은 일본 청년들의 꿈을 앗아가기는 마찬가지였다. 빛나는 생의 의지를 군부에 희생당하기는 우리와 다를 게 없었으며 원자폭탄으로 인해 한순간에 폐허가 된 삶의 터전으로 많은 것을 잃어야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체 이는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거기에 무슨 정의로움이 있을 것이란 말인가. 저자는 전쟁의 그늘과 이 참혹한 피해가 과연 누구에게 돌아가는 것인지를 『군함도 2』을 통해 여실히 보여준다.

 

 

 

이것은 무엇인가. 침략전쟁이며 살육이다. 침략과 살육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 하물며 인간의 목숨이 인간의 살육을 위해 쓰여도 좋단 말인가. 거기에 무슨 정의로움이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인가. / 『군함도 2』239p

 

 

우리들 하나하나가 아니다. 이 모래알 같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으로는 항거할 수 없이 크고 엄청난 어떤 집단이나 제도가 거대한 악이 되어 우리를 내리누르며 지배하고 있는 거다. 집단의 탐욕과 편견이 거대하게 뒤엉키고 제도와 제도 간의 경멸과 증오와 부패가 거기 뿌리 깊게 자리 잡아 그들만의 거대한 악을 구축하고 결속시킨다. 우리들 하나하나의 저편에 그 거대한 악이 있는 거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죄악, 국가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거대한 죄악, 그것은 자멸하는 것밖에 제어할 길이 없는 불가항력의 악일 것이다. / 『군함도 2』284p

 

 

 

 

 

 

   동명의 영화 <군함도>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고 들었다. 영화 역시 나름의 복원력과 서사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줄 것이라 기대되지만, 그 전에 이 소설을 읽고 지난날의 역사에 보다 진지하게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가져보면 어떨까 싶다. 어제를 기억하는 자에게만이 내일에 희망이 있다던 것처럼, 책이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많이 읽히고 기억될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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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델라이언 데드맨 시리즈
가와이 간지 지음, 신유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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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전대미문의 시신이 발견되다!

정교한 트릭과 신비한 민담이 어우러진 반전 미스터리!

 

 

 

   성경에 민들레와 얽힌 이야기 하나가 있다. 옛날 노아의 홍수 때 삽시간에 온 천지에 물이 차오르자 온통 달아났는데 민들레만은 뿌리가 빠지지 않아 도망을 못 갔다고 한다. 두려움에 떨다가 그만 머리가 하얗게 다 세어 버린 민들레의 마지막 구원 기도를 하나님이 가엾게 여겨 씨앗을 바람에 날려 멀리 산 중턱 양지바른 곳에 피어나게 해 주었다는 이야기다. 굳이 성경의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민들레를 향한 우리의 정서는 소박하면서 서정적인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어쩐지 애잔한 마음까지 들 때가 있다. 이른바 민초라고 불릴 만큼 끈질긴 생명력으로 그 자리에서 굳건히 견뎌내다가 마침내 자신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 번식을 하는 그 과정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런 민들레가 지닌 특유의 감수성 탓인지 이것이 미스터리 소설의 모티브가 된 소설의 표지를 마주하는 순간, 마음을 덜컥 사로잡히고 말았다. ‘단델라이언’, 어쩐지 민들레라는 우리말이 지닌 어감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무엇보다 그간 알고 있었던 ‘감사’, ‘행복’과 같은 꽃말이 아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라는 꽃말이 지닌 이중성이 미스터리 장르와 절묘하게 결합되어 눈길을 끈다.

 

 

 

하늘을 나는 소녀, 시신이 되어 나타나다

 

 

   소설은 에미와 유메라는 쌍둥이 소녀가 엄마를 통해 알게 된 옛 민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 민담이란, 하늘을 날 수 있는 불가사의한 소녀가 깊은 산속의 ‘행복한 마을’에 찾아오지만, 하마터면 큰 뱀의 산 제물이 될 뻔하고, 결국 ‘행복한 마을’은 큰비로 인한 홍수에 흔적도 없이 쓸려 가버린다는 내용의 이야기다. 이 ‘하늘을 나는 소녀’의 이야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쌍둥이 소녀는 이때부터 ‘하늘을 난다’는 것을 동경하고, 행복한 마을처럼 돈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에 대한 이상을 품게 된다. 이렇듯 소설 초반에 소개되는 민담과 쌍둥이 소녀의 천진난만한 대화들은 어쩐지 슬프고도 끔찍한 결말에 가 닿을 것만 같은 기막힌 복선과 암시가 되어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다.

 

 

 

시신이 공중을 날고 있다.

 

 

 

   시신이 공중을 날 턱이 없고 만약 살아 있다 하더라도 인간이 공중을 날 수 없기 때문에 표현이 마땅하지 않겠으나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것도 우아하게 날아오르는 형상의 아름다운 시신이 나타난다. 수사 1과의 가부라기와 히메노 히로미는 폐목장이 있는 히노하라 촌에서 이 기막힌 형태의 시신을 발견한다. 곡식이나 사료를 모아두는 큰 탑 모양의 사일로 내부에서 발견된 시신은 두 개의 작은 창구멍에 걸린 쇠파이프에 명치 부근이 꿰여 허공에 고정된 채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무려 16년 동안 미라화되어 시신의 형태가 온전히 유지되어 있었음은 물론, 안쪽에는 빗장이 질리고 바깥문은 자물쇠로 채워졌으며 천창은 바깥쪽에서 판자로 막아버려 완벽한 밀실 살인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더욱 기이한 것은 사일로 주변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얀 민들레 솜털이 가득하다는 것이었고, 이는 하늘을 나는 소녀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아니나 다를까 시신은 바로 하늘을 나는 소녀가 되고 싶었던 소녀, 바로 쌍둥이 소녀 중 하나인 에미였다.

 

 

 

산 사람이 차별받아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은 자 또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시신이 제아무리 아름다운 모습이건, 눈을 돌리고 싶어질 만큼 비참한 상태건, 살해당한 사람의 원통함은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사람을 죽인 범인의 죄의 무게 또한 한 톨만큼의 차이도 없다.

하지만 마사키 말마따나, 빛의 띠를 받으며 하늘을 날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 시신은 아름답다고 형용하고 싶어질 만큼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 68p

 

 

 

불에 타고 있는 시신,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범인

 

 

   히노하라 촌의 사일로 사건에 대한 수사가 난항을 겪고 있는 가운데, 경시청 앞으로 시오도메에 있는 호텔 콩코드 도쿄 옥상으로부터 누군가가 날 죽이려 한다는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신고 전화를 받자마자 출동한 경찰들로 모든 엘리베이터와 비상계단으로 향하는 출입구가 차단되었으나 호텔 옥상에는 범인의 흔적이란 온데간데없고 오직 불타고 있는 시신과 휴대전화만이 있을 뿐이다. 하늘을 날아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사라진 범인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한, 이른바 개방형 밀실 사건. 깊은 산 중의 폐목장과 해안가의 고층 빌딩가라는 전혀 다른 지리적 환경과 사건이지만, 발생한 시간에도 무려 16년이라는 간극이 존재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두 사건이 긴밀하게 엮여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가부라기를 사로잡는다. 황당무계하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지만 ‘인간이 하늘을 날았을지도 모른다’라는 점 때문이다. 거기에 좌익 과격파 담당 사건을 맡는 것으로 알려진 경시청 공안부 수사관이 이 두 사건을 지휘하려들면서 이들 사건 뒤에 정치적인 계략과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히노하라 촌의 사일로에서 죽음을 맞은 히나타 에미와 시오도메에서 죽음을 맞은 가와호리 데쓰지의 접점은 무엇인가. 허공에 떠 있는 시신과 개방형 밀실이라는 이 도무지 풀리지 않는 기묘한 살인사건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시신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 좁혀나가는 과정이 우선시 되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어떠한 정보도 공유하려 들지 않는 공안부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란 더더욱 쉽지 않아 보이지만, 가부라기 형사는 특유의 강단과 신뢰를 바탕으로 마침내 피해자들이 ‘민들레 모임’이라는 대학 환경 동아리 회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회장 노부세와 아마노, 부회장 가와호리와 히나타 에미로 구성된 이 모임은 ‘종이 팩 운동’과 ‘라이프 백 운동’, ‘해피 캡 운동’과 같이 아름다운 자연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대학 내 환경 보호 단체의 일원이었다.

 

 

 

   사실 히나타 에미는 건강하고 활발한 쌍둥이 유메와 달리 항상 몸이 허약해 학교를 다닐 수 없었으나, 그토록 바라던 대학교에 입학함으로써 어릴 적부터 사로잡혀 있었던 민담, 즉 민속학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던 중 고에이 대학에서 만난 민들레 모임의 회장 노부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그의 권유와 자연을 지키고자 하는 순수한 목적에서 모임에 가입을 하게 된다. 그러나 폐목장이 된 히노하라 촌을 그들만의 유토피아, 즉 ‘민들레 나라’의 거점으로 사용하여 그들이 원하는 이상향을 실천하고자 했던 순수한 꿈은 이뤄지지 못하고 결국, 두 명의 일원이 16년이라는 간극을 두고 죽음을 맞게 되는 비극에 이르고 만다. 저자는 어쩌면 애초부터 유토피아란 허울만 좋은 나라일지 모른다며, 민담에서 나오는 행복한 마을 역시 누군가의 희생 위에 얻어진 행복이었으므로 이를 과연 유토피아라 할 수 있을지 현실에 냉소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허울만 좋은 나라…….”

중얼거리는 가부라기를 보며 히메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유토피아는 오히려 반이상향 작품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카렐 차페크의 희곡 「로봇 R.U.R」이나, 프리츠 랑의 영화 <메트로폴리스>에서 묘사된 비인간적인 관리사회의, 지배계급의 생활에 도 가깝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 디스토피아야말로 본래의 유토피아라는 거죠.”

유토피아란, 사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 이상향이 아니라, 사실은 비인간적인 반이상향, 더구나 지배계급을 위한 나라……. 그 말을 듣는 순간, 가부라기는 유토피아라는 단어에서 무언가 불길한 울림을 느끼게 되었다. / 194p

 

 

“‘행복한 마을’에는 온갖 것들이 갖춰져 있고, 게다가 공짜로 얻을 수 있어. 그야말로 행복한 상태지. 하지만 그건 일 년에 한 번 누군가가 큰 뱀의 먹이가 되어야 한다는 공포스러운 조건 아래 성립된 행복이야.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성립된 행복을 과연 참다운 행복이라 부를 수 있는가, 그리고 현실 사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라는 대단히 냉소적인 문제 제기를 하고 있어.” / 274p

 

 

 

   도대체 누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단 말인가. 단순히 개인적인 원한이나 복수극에서 그치지 않고, 일본 사회 내의 정치적 음모와 사회 구조의 모순까지 아우르며 마지막 결말로 나아가는 저자의 탄탄한 복선과 전개력에 몇 번이고 감탄하게 된다. 더욱이 신비로운 민담과 기이한 형태의 시신, 도무지 해결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뛰어난 과학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살인 사건의 전개 등으로 시선을 압도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충분히 미스터리 추리 장르의 요소를 잘 갖추었다 할 수 있겠다.

 

 

 

   사실 읽으면서 여타의 추리 소설들이 ‘형사 시리즈’를 앞세워 특정 형사의 돋보이는 캐릭터나 그의 활약상에 집중한다는 점을 비추었을 때, 『단델라이언』의 가부라기 형사는 캐릭터가 주는 인상이 미비하다는 점이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가부라기 형사의 일방적인 활약이 아니라 그를 중심으로 팀원들이 의기투합하여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오히려 진정성을 느끼기도 했다. 최근 들어 몇몇 작품들에서 작가들이 저마다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앞세워 독자들에게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사건을 내던지는 데에만 사로잡혀있거나, 엽기적인 살인 행각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려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이곤 했는데, 꽤 오랜만에 탄탄한 추리 요소와 문제 제기와 시사점을 함께 제시할 수 있는 작가를 만나 내심 기쁘기도 했다. 무더운 여름,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읽을 수 있는 추리 소설 한 편 어떨까. 이 책을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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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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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시대의 소음에 무엇으로 답변할 것인가

예술과 정치의 괴리 속에서 신음한 어느 예술가의 고뇌!

 

   ‘진실한 생활이란 자유로운 곳에만 있을 수 있다. 억압, 통제하는 곳일수록 연극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문득, 북한 체제의 현실을 고발한 소설 『고발』속의 글귀가 떠오른다. 체제에 철저히 순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공산주의 내부에서는 자유의지를 강탈한 독재자를 위해 누구랄 것 없이 모두가 연극인이 되어야만 했다. 레닌과 스탈린을 잇는 암흑의 러시아를 살아간 이들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러시아가 코끼리의 고향이 될 수 있고, 베토벤의 고향 또한 러시아가 될 수 있었던 시대였다. 예술가라면 응당 어떤 정치적 지시도 없이 오직 그들의 자유의지로 자신의 창의성을 빛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예술의 존재론적인 가치마저 체제의 형장에 가두고 마음대로 총살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했다. 뛰어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역시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체제의 부름에 응답해야만 하는 연극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줄리언 반스의 신작 『시대의 소음』은 이러한 러시아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재구성한 소설로, 예술과 정치의 괴리 속에서 신음해야만 했던 이 예술가의 내적투쟁을 치열하게 그려나간다.

 

 

 

예술이 권력에 혀가 묶이고

 

 

   윤년엔 악운이 깃든다고 했던가.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의 삶 중에서 ‘최악’이라 꼽은 시기는 마치 운명의 수레바퀴처럼 12년을 주기로 찾아왔다. 소설은 바로 1936년, 1948년, 1960년에 이르는 이 세 시기를 중심으로 살얼음판을 걷듯 인생의 시험대에 올라야만 했던 그의 삶을 조명한다. 이야기는 스탈린 앞에서 선보인 연주곡을 망친 이유로 곡을 금지당하고 목숨까지 잃을 위기에 처한 그가 매일 밤 승강기 옆에서 체포되기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의 연주곡은 갑자기 요란하게 짖어대 주인의 기분을 거스른 개와 같은 꼴이 되었고, 그의 죄는 또한 정치적인 것이기도 했다. 우호적이었던 언론은 물론 고위 관료들로부터 그의 음악은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고 낙인찍혔고, 자신의 후원자이던 투하쳅스키 마저 반스탈린 쿠데타를 주도한 혐의로 처형당하면서 그 역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도시 전역에서 매일 밤 체포되기를 기다리는 수백 명의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체포되는 모습만은 보여주지 않으려고 그는 승강기 옆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그는 어째서 권력층이 이제 음악에, 그리고 그에게 주의를 돌리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권력층은 항상 음보다는 말에 더 관심이 있었다. 작곡가가 아니라 작가들이 인간 영혼의 기술자로 선포되었다. 작가들은 <프라우다> 1면에서 단죄를 당했고, 작곡가들은 3면에서 비난을 받았다. 두 면은 따로따로였다. 그러나 별일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죽음과 삶을 가를 수도 있었다. / 62p

 

 

 

   친구와 후원자는 모두 죽었지만 그는 결국 살아남는다. ‘우리는 꿈꿀 때만 쉴 수 있다’던 시인 블로크의 말처럼, 이제 살아남았으니 가족과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대중적이고, 인민이 듣기 좋은 음악을 쓰는 것으로 권력의 호의에 응답해야만 하는 운명 앞에 놓인다. 이는 1984년, 두 번째로 찾아온 최악의 시기 속에서 그의 날선 고통이 더욱 극대화된다. 적절히 지도를 받기만 한다면 명쾌하고 사실주의적인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최고위층의 견해에 따라 교육받아야 했던 그는 마침내 미국 뉴욕에서 열린 문화 과학 세계 평화 의회에 참석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는 그곳에서 소비에트적 가치의 대표이자 얼굴마담 역할을 하며, 자신이 쓰지도 않은 연설문을 읽어야했고 그간 자신의 우상으로 삼았던 스트라빈스키를 비판해야 했다. 체제에서 벗어나 이상주의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기를 바라는 미국인들 앞에서 작곡가 조합의 일원이 아니면 악보 용지조차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할 수도, 권력층으로부터 자신의 오페라가 살해당할 수 있다는 현실을 과감히 드러낼 수 없는 데에서 자기혐오를 느낀다.

 

 

 

아이러니는 파괴자와 사보타주 주동자들의 언어로 통했기에, 그것을 쓰면 위험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는―어쩌면 가끔씩은, 그는 그러기를 바랐다―시대의 소음이 유리창을 박살낼 정도로 커질 때조차―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지킬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 그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무엇일까? 음악, 그의 가족, 사랑. 사랑, 그의 가족, 음악. 중요도는 바뀔 수 있었다. 아이러니가 그의 음악을 보호해줄 수 있을까? 잘못된 귀들이 듣지 못하도록 소중한 것을 숨겨서 통과시킬 수 있는 비밀의 언어로 음악이 남아 있는 한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음악이 암호로만 존재할 수는 없었다. 때로는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말하고 싶어 좀이 쑤셨다. / 127p

 

 

 

   세 번째로 찾아온 최악의 시기, 1960년에는 스탈린의 시대가 막을 내린다. 그간 스탈린의 부름으로 명예를 회복하고 각종 상을 받으며 영예를 되찾은 그이지만, 공산당은 러시아 연방 작곡가 조합 의장을 억지로 맡기면서 입당을 강요한다. 공포가 끝나니 당 입적이라는 영혼의 소유를 요구받는다며 자신의 처지를 넋두리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갖은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나 도덕적 자살을 결심해야 하는 그의 가혹한 운명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소설은 이렇듯 시대의 소음에 피폐해져가는 예술가의 고뇌를 매우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다. 겁쟁이가 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고, 머뭇거리고, 움츠러들고, 고무장화의 맛, 자신의 타락한, 비천한 상태를 새삼 깨닫게 될 다음 순간을 기다려야만 하는 삶 또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던 그의 자조는 참으로 서글프기까지 하다. 결국 이러한 자기혐오와 고뇌는 완벽하게 순응하기보다 사회가 듣고 싶은 것을 들려주되, 그들이 읽어낼 수 없는 체제의 아이러니와 조롱을 교묘히 담아내 저항함으로써 예술가 본연의 뜻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의 작품이 오늘날까지도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데에는 바로 현실을 통찰력 있게 담아내려는 그의 의지를 음악 속에서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리라.

 

 

 

예술은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모든 시대의 것이고 어느 시대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그것을 창조하고 향유하는 이들의 것이다. 예술은 귀족과 후원자의 것이 아니듯, 이제는 인민과 당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시대의 소음 위로 들려오는 역사의 속삭임이다. 예술은 예술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인민이고, 누가 그들을 정의하는가? / 135p

 

 

그는 무엇으로 시대의 소음과 맞설 수 있었을까? 우리 안에 있는 그 음악-우리 존재의 음악-누군가에 의해 진짜 음악으로 바뀌는 음악. 시대의 소음을 떠내려 보낼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진실하고 순수하다면, 수십 년에 걸쳐 역사의 속삭임으로 바뀌는 그런 음악.

그가 고수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 181p

 

 

 

   『시대의 소음』은 사실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이야기적인 요소가 아닌, 주인공인 쇼스타코비치의 의식과 그 흐름대로 진행되기 때문에 보다 많은 집중력을 요구한다. 전작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가 그러했듯 나에게는 줄리언 반스의 소설이 친절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다만, 시대를 통찰하고 예술가의 내적 내레이션을 그만의 지적 감수성으로 치열하게 문장을 통해 담아내려는 소설가적 사명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무엇으로 시대의 소음과 맞설 수 있는가, 시대의 소음을 떠내려 보낼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진실하고 순수한 우리 존재의 음악을 고수하려했던 쇼스타코비치의 생애가 던지는 질문에 우리 역시 응답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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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지기 전에 - 1차 세계대전 그리고 한반도의 미래
김정섭 지음 / Mid(엠아이디)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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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자 없는 비극, 1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재구성하다!

1차 세계대전이 한반도의 안보에 던지는 질문과 경고들!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과 압박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ICBM을 발사했다.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핵탄두 소형화 기술 발전을 향한 이번 발사는 미국과 국제 사회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의지를 명확히 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핵과 ICBM이 가져다주는 공포를 앞세워 체제를 공고히 하고 힘의 우위를 선점하여 한반도를 자신들의 뜻대로 재편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북한과 대화를 모색하던 정부와 미국은 보다 강력한 외교적 압박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그간의 정황으로 미루어봤을 때 실효성은 미지수다. 선제타격론이나 북한 핵 위협을 무력화하기 위한 방법들이 제기되고 있지만 단호함만으로는 평화를 담보할 수 없고, 서로의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 마냥 낙관적인 태도로 그들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것 또한 쉽지 않아 보인다.

 

 

 

   이제 우리에게는 냉정한 상황인식과 절제된 접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낙엽이 지기 전에>의 저자인 김정섭은 현재 국방부 고위공무원으로 재직 중인 실무자로서 “잘못된 정세판단, 군사와 외교의 단절, 위기관리에 대한 몰이해로 발발한 1차 대전이 한반도에 던지는 교훈”에 주목한다. 1차 대전처럼 의도하지 않아도 일어날지 모르는 한반도 전쟁의 위기 앞에서 이를 극복해나갈 민군관계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성숙하게 대처할 수 있는가, 의문을 던진다. 이것은 곧 1차 대전이 우리에게 전하는 심각한 경고이며, 진중한 메시지인 점에서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잘못된 믿음과 잘못된 선택들

 

 

   <낙엽이 지기 전에>의 저자 김정섭은 1차 대전은 온갖 아이러니가 가득 찬 수수께끼 같은 전쟁이었다고 평가한다. 주모자를 지목하기가 쉽지 않을 만큼 침략자 없는 전쟁에 가까웠고, 영토 정복과 경제적 이권 같은 탐욕의 충돌도 아니었다고 한다. 오히려 방어전쟁을 수행한다고 생각하며 뛰어든 전쟁이었고, 당시 서유럽 열강들이 지닌 공격지상주의 신화, 단기전의 환상은 국가적 차원의 일치된 전략적 결정이 아니라 그야 말로 '터져 나온 것'이라고 표현해야 할 만큼 뜻밖의 비극을 불러온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낙엽이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한 독일 빌헬름 황제 역시 수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될 정도로 장기간에 걸친 대재앙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1차 대전이 특별히 비극적인 것은 잘못된 믿음 때문에 필요하지 않은 전쟁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방어가 유리했는데도 공격우위의 악몽에 짓눌렸고, 전쟁이 불가피하지 않았는데도 어느 순간 체념하고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였건만 그 준비는 언제부턴가 자체 논리에 의해 움직였고 아무도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 탐욕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일어난 전쟁, 억제를 위한 노력 때문에 억제가 깨진 전쟁이 바로 1차 대전이었다. / 34P

 

 

  독일은 비스마르크가 재상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현상유지적인 유럽 질서와 안정적인 운영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런데 젊은 황제 빌헬름 2세의 등장으로 친러정책을 폐기하고, 독일의 번성을 바탕으로 제국 확장에의 야욕을 드러낸다. 독일이 해군력을 증강시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를 우려한 영국은 자신들을 향한 도전으로 인식하고 프랑스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독일을 주변국으로부터 고립시키려 한다. 아울러 러시아 역시 병력과 중화기를 대폭적으로 증강시키고 있었으며, 프랑스는 방어위주 작전이 아닌 기동성에 바탕을 둔 공격 위주의 군으로 개편한다. 이렇게 요동치는 서유럽 열강들 간의 역학변화 속에서 마침내 유럽의 화약고와 같은 동남부 발칸지역에서 1차 대전의 방아쇠가 된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사라예보에서 18세 청년과 세르비아 내 지하조직 ‘검은 손’에 의해 오스트리아 왕국의 황태자 암살 사건이 벌어지고만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이를 구실로 단호한 대응책을 펼치기 위해 독일로부터 전적인 지원을 약속받는다. 사실,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간의 국지 전쟁으로 끝날 수 있었던 사안이 독일의 지원으로 인해 세계 대전으로 확대될 단추가 끼워진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연합 하에 세르비아가 종속되는 것을 우려하여 당시 러일전쟁의 후유증으로 더 이상 전쟁을 벌일 수 없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준비태세를 갖추어나간다. 이들의 모습은 전쟁으로 보이기에 충분했고 유럽 각국이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너도나도 연쇄적으로 동원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비록 발단은 발칸 지역의 분쟁이 원인이었다고는 하나 이렇듯 세계의 열강들이 하나같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유럽 대륙 내 힘의 균형이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우려한 결과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대부분이 군사를 일으키면서도 반드시 전쟁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빌헬름처럼 길어야 3주 정도에 그치는 단기 전쟁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이러니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상하게도 1차 대전에서는 군사작전이 가져올 정치적 결과, 즉 전쟁의 궁극적 목적과 이후에 대한 토의가 없었다는 점이다. 전쟁이 요구하는 엄청난 피의 대가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배제된 채 마치 ‘눈을 뜨고 있었지만 보지 못하는 몽유병 환자처럼’ 유럽은 제 발로 재앙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만 것이다.

 

 

짜르의 표현대로 하면 “힘을 과시함으로써 평화를 지킨다.”는 정책이었다. 문제는 모든 나라가 같은 생각으로 부딪혔다는데 있었다. 사조노프뿐만 아니라 베르히톨트도, 베트맨도, 포앵카레도 모두 단호함을 부르짖었고 그것이 평화를 담보한다고 생각했다. 위기 시에 가장 어려운 일은 성급한 행동을 삼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위기의 먹구름이 모두의 시야를 가릴 때 절제의 용기를 보여주는 사람은 없었다. / 156P

 

 

어느덧 외교의 시간은 가고 군인의 시대가 도래했다. 동원령이 발령되고 병사들의 군화소리가 들리자 각국의 전쟁성은 활기가 넘쳤다. 장교들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굳게 악수를 나누며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돌이켜 보면 모두들 환상 속에 전쟁에 뛰어든 격이었다. 공격지상주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었고 낙엽이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며 전선으로 향했다. / 236P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연합,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연합의 전투는 이후 각 식민지 국가 및 소속 국가들이 모두 참여하면서 전선이 커지기 시작한다. 그야 말로 ‘세계전쟁’이 된 셈이다. 전쟁의 양상은 예상과 달리 지루한 진지전으로 이어지며 무의미한 살육전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독일의 잠수함이 미국 뉴욕을 출발한 영국 여객선을 공격해 침몰 시킨 사건을 계기로 독일이 멕시코 정부에 보낸 연합 제의 비밀 전문이 발각되면서 이제껏 지켜만 보고 있던 미국까지 참전 소식을 알리게 된다. 사라예보 암살과 세르비아 응징이라는 당초 전쟁의 목적 따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셈이다. 결국 미국의 합류로 전쟁은 1,568일에 이르러서야 정전협정이 이뤄지며 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게 된다. 이처럼 전쟁의 양상을 잘 살펴보면 결국 1차 세계대전은 전략 환경에 대한 오판으로, 방어우위라는 객관적 현실을 외면하고 선제공격 우위의 발상, 위기관리와 균형을 잃은 민군관계의 전형적인 실패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장군들뿐 아니라 외교관과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어떻게 위기를 증폭시키는지 몰랐고, 고조된 위기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몰랐던 결과가 이처럼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킨 비참한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인류가 미쳤다! 인류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을 보면 미친 게 분명하다. 너무도 끔찍한 학살극이다. 이처럼 끔찍한 공포와 대학살의 아수라장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내 기분을 말로는 도저히 옮길 수 없다. 지옥인들 이보다 끔찍하랴. 인간은 미쳤다!

이것이 주베르가 남긴 마지막 일기였다. / 260P

 

 

 

 

 

 

1차 대전이 한반도 안보에 던지는 질문

 

 

   100년도 전에 저 멀리 유럽에서 발생한 전쟁이지만 앞서 살펴본 문제들이 원인이었다는 점에 있어 우리 한반도 안보에도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한반도 전략상황에 대해 객관적이고 냉정한 판단을 하고 있는가? 두려움과 강박감에 젖어 과잉대응을 할 가능성은 없는가? 중요한 군사문제에 대해 평상시부터 민군간에 깊이 있는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저자는 북핵 위협으로 안보상황이 더없이 엄중해진 오늘날 절대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질문들로 우리의 안보 상황에 예리한 칼날을 드리운다.

 

 

 

   일단 저자는 핵무기가 실전에 사용될 가능성이란 북한 정권의 존립이 위협받을 경우 이를 저지하거나 최후의 보복 수단일 경우로 집약될 것이라 추측한다. 달리 얘기하면 한반도에서의 핵 전쟁은 억제의 허점을 노린 계획적, 의도적 결정으로 발발하기보다는 위기관리가 실패하여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북한의 핵 사용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단호함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기관리가 핵심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강력한 억제조치를 취할 경우에도 그것이 과도한 공포를 유발해 의도하지 않은 핵 사용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폐해는 이미 1차 대전이 증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반도에는 현재 공포의 균형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즉, 쌍방억제 상황이고 방어 우위 조건이다. 상대방의 의도를 확신할 수 없는 안보딜레마 상황이기 때문에 심리적, 전술적 차원에서는 상당히 불편하고 불안정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과잉 대응이 의도하지 않은 위기 불안정을 초래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방어 우위라는 객관적 조건을 놓치고 선제공격의 유혹과 공포에 굴복했던 1차 대전 유럽인들의 과오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 331P

 

 

되짚어 볼수록 1차 대전이 주는 교훈은 현재진행형이다. 전략상황에 대해 오판하지 말 것, 고정관념과 도그마에 유의할 것, 유약하지 않되 지나친 과잉대응을 조심할 것, 그리고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해 민군간에 건설적인 대화가 있을 것.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결코 쉽지 않은 과제들이다. 평화는 결국 힘을 통해서만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냉철함과 절제된 용기, 그리고 민군지도자의 통합된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점이 바로 그 많은 피를 흘리고 얻은 1차 대전의 값진 교훈이 아닐까? / 354P

 

 

 

   1차 대전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거나, 발칸에 국한된 작은 전쟁으로 끝날 수 있었던 전쟁이었으나 이를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어느 한 나라의 거대한 침략 의도가 아니라 수많은 잘못된 결정들이 누적되어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터져 버린 결과였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과오를 범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어느 일방이 약해 보여서가 아니라 상호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전쟁이 터질 가능성에 유의해야 하며 가장 중요한 점은 위기관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낙엽이 지기 전에>은 한 편의 역사책처럼 1차 대전 발발 전의 상황과 전시 상황을 매우 사실감 있게 전함으로써 전쟁에 대한 해석,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가능케 하는 의미 있는 책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던지는 한반도 안보에 전해는 경고와 메시지를 우리 모두 유념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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