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VS 80의 사회 - 상위 20퍼센트는 어떻게 불평등을 유지하는가
리처드 리브스 지음, 김승진 옮김 / 민음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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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계급에 대한 상위 20퍼센트 중상류층의 이중적인 태도를 지적해야 할 때!

상위 1퍼센트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췄던 불평등 담론을 과감히 부수다!

 

 

 

   공자는 “가난은 근심하지 않지만 균등하지 못한 것은 근심한다.”고 말했다. 공자가 살았던 무렵에도 가난보다 더 큰 문제는 불평등이었나 보다. 민주주의가 더욱 공고해진 오늘날,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사회는 더욱 심각해진 불평등 문제로 인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는 크게 벌어졌고 학력이나 자산에 따른 계급의 격차 역시 눈에 띄게 심화되었다. 드라마 <상속자들>과 <SKY 캐슬>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이른바 대한민국의 상위 1% 집단에 속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부를 상속하고, 고소득 전문직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지위를 되물림 하기 위한 욕망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고소득층 사람들은 부자가 부자인 이유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소득이 높지 않은 사람들은 부자가 부자인 이유는 조건이 더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결코 좁혀 지지 않는 물리적이고 정서적인 틈은 상위 집단과 하위 집단의 격차를 더욱 확대시켰고, 마침내 ‘수저론’과 ‘헬조선’로 점철된 시대에 이르고야 말았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문제는 전 세계에 공통적으로 대두되고 있으며, 불평등은 매우 열띤 정치 논쟁이 벌어지는 사안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에서 불평등과 상향 이동의 경직성은 이미 위험한 수준이고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라며 “이것이 열심히 노력하면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중산층 미국인의 기본적인 믿음을 망가뜨리고 있다.”라고 우려했다. 미국 중상류층의 불평등 구조는 한국 사람들이 체감하는 현실과도 매우 흡사하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이를 단순히 상위 1%의만의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상위 20퍼센트는 어떻게 불평등을 유지하는가

 

 

   리처드 리브스의 <20 VS 80의 사회>는 너무나 자주 불평등 담론을 상위 1%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며 나머지 99%는 모두 비슷하게 불행한 처지라는 듯이 말하는 경향을 지적한다. 1퍼센트의 최상류층에만 관심을 집중하면 중상류층조차 다수 대중과 같은 배를 탔다고 믿기 쉬워진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 중상류층은 나머지 대중으로부터 확연하게 분리되고 있다. 최상류층, 슈퍼 리치, 상위 1퍼센트 등으로 불리는 맨 꼭대기에 부가 막대하게 집중되고 있다는 뜻이다. 특히 가구 소득 기준으로 통장 잔고와 월급 액수 등에서 드러나는 경제적인 분리뿐만 아니라 학력, 가족 구성, 건강과 수명, 심지어 시민 공동체 활동 등에서도 분명하게 차이가 나타난다.

 

 

 

계급은 돈으로 구분되지만 돈으로만 구분되는 것인 아니다. 계급 격차는 학력, 안전 및 안정성, 가족 구성, 건강 상태 등 삶의 모든 면에서 드러난다. 물론 각각에 나름의 불평등이 존재하지만, 돈, 교육, 부, 직업 등 다양한 영역에서의 불평등 요인들이 서로 단단히 결합해 하나만으로도 누가 어느 계급에 속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을 때 불평등은 계급 격차가 된다. 그리고 계급적 특권과 지위가 세대를 이어 지속될 때 계급 격차는 고착된 계급 체제가 된다. 현재 미국에서 중상류층의 계급적 지위는 과거 어느 때보다, 또 다른 어느 나라에서보다 효과적으로 세습되고 있다. / 39p

 

 

 

 

 

 

   문제는 단지 계급이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 아니라 계급 분리가 세대를 거쳐 영속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 이유에 대해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시장에서 인정되는 능력’이 계급에 따라 불평등하게 육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불평등은 어린 시절에 시작되며 세대를 거쳐 전승된다. 이러한 계급 분리는 노동 시장에서 가치가 인정되는 ‘능력’을 발달시킬 기회가 중상류층에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발생한다. 즉, 이들은 같은 수준에서 배우자를 선택해 계획된 출산을 하며 높은 교육 수준에 따라 아이를 양육한다. 또 양질의 수업을 받고 고등 교육의 정원을 부유층 아이들이 더 많이 차지함으로써 자연히 이후에 부유층이 될 기회도 늘어나는 셈이다. 빈곤한 주거지에 살면 삶의 기회가 축소된다는 현실론에 따라 같은 경제 환경을 이루는 이웃끼리 모여 살고, 건강이나 여가, 레저 등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기회도 더 많이 얻는다. 차마 외면하고 싶은 사실이지만 추상적인 성취나 지능에 대한 지표가 아니라 어떤 부모를 두었느냐, 부모가 얼마나 많은 사회 경제적 자본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아이들은 다른 출발선에서 서게 되는 것이다. 호레이스 만의 표현에 따르면 교육은 “평등을 일구는 가장 위대한 기제이자 사회라는 기계의 평형 바퀴”여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사회는 그러한 기제가 썩 훌륭하게 진행되지 않고 있다.

 

 

 

부유한 사람들의 자녀 교육이 전적으로 좋은 의도에서, 또 전적으로 공정한 수단을 통해서만 이뤄진다 해도(뒤에서 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지위의 대물림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계급 경직성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의 인적 자본이 사회적으로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재능이 고숙련 노동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시장의 역동성을 저해한다. 시장에서의 경쟁은 경제 성장과 번영에도 필수적이지만, 능력 본위 원칙에 따른 계층 이동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시장이 보상하는 종류의 능력을 키울 기회가 모두에게 공정했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것은 ‘계층 이동성 없는 능력 본위주의’다. / 27p

 

뉴욕 대학의 플로렌시아 토치는 세대 간 소득 수준의 연계성을 조사해서 아래쪽보다 위쪽에서 경직성이 더 강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가난한 부모를 둔 아이들이 동질적으로 가난한 정도보다 부유한 부모를 둔 아이들이 동질적으로 부유한 정도가 더 크다.” 스탠퍼드의 파블로 미트니크와 데이비드 그러스키는 세대간 소득 탄력성을 분석했는데, 역시 꼭대기 쪽이 바닥 쪽보다 경직성이 컸다. 무엇을 지표로 잡든 동일한 양상이 발견된다. 고소득은 가난의 대물림만큼, 혹은 가난의 대물림보다 더, 경직적으로 대물림된다. / 98p

 

 

 

 

 

 

   계급의 영속성에 일조하는 또 다른 요인은 중상류층이 불공정하게 기회를 사재기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것은 중상류층에서 떨어질 경우 더 깊게 추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중상류층 부모는 자녀가 떨어지지 않도록 유리 바닥을 깔아 주고자 할 동기가 커지며,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원도 있다. 그래서 기회 사재기를 포함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해서 자녀의 하향 이동 위험을 줄여 주려고 한다. 그렇다면 기회 사재기의 행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저자는 배타적인 토지 용도 규제, 불공정한 대학 입학 제도, 인맥과 연줄이 더 중요한 인턴 제도 등을 꼽는다. 배타적인 토지 용도 규제는 비싼 집을 구매하는 것이 ‘좋은’ 동네에 거주할 기회 및 자녀를 좋은 공립 학교에 보낼 기회와 효과적으로 연결된다. 부모 중 한 명이 그 대학 출신이면 입학 사정에서 우대를 받는 제도는 이미 태생적으로 불공정하다.

 

 

 

   인턴 제도는 노동 시장 규제에서 사실상 벗어나 있기 때문에 연줄을 통해 서로 혜택을 주는 식으로 알음알음 분배된다. 실제 많은 고용주들이 채용 시에 구직자의 인턴 경험을 높이 사며 곧바로 채용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부유한 학생들이 인턴 기회를 잡기에 더 유리하다면 여기에는 매우 불공정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기회 사재기가 성공적일 경우, 위쪽이 더 경직적인 계층 구조가 생겨나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면 중상류층은 자녀가 계층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어 재분배 정책에 돈을 지불할 의향이 줄어든다. 그러면 불평등이 더 심화된다. 이렇듯 현 세대에서의 소득 격차가 다음 세대에서 기회의 격차가 된다면, 경제적 불평등은 영속적인 계급 격차로 고착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현재 미국의 능력 본위 시스템이 가진 문제는 시장이 인정하는 종류의 능력이 불평등하게 육성된다는 데 있다. 대체로 중상류층 아이들은 노동 시장에 진입할 무렵이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능력을 갖춘 상태여서 경쟁에서 더 유리한 위치에 선다. 미국의 능력 본위 시스템은 계급 장벽을 부수기는커녕 유지하고 영속화하는 메커니즘으로 변질되었다. / 119p

 

 

이와 달리 기회 사재기는 타인에게서 무엇을 가져오느냐가 아니라 당신 자신이 무엇을 확보하고 있느냐와 관련이 있다. 틸리에 따르면, 어떤 집단은 “가치 있고, 재생 가능하고, 독점하기 쉽고, 네트워크에 도움이 되고, 그 네트워크의 작동 방식에 의해 강화되는 종류의 자원에 더 잘 접근할 수 있다.” 이런 집단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자원에 대해 계속해서 통제력을 가질 수 있게 해 주는 신화와 제도들을 만들고 접근권을 사재기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그 자원을 누리지 못하게 막는다. / 152p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계급 격차를 줄이기 위해 시행할 수 있는 일곱 가지 조치를 제시한다. 그중 네 가지는 인적 자본 개발의 기회를 평등하게 만들어서 시장에서 인정되는 능력이 더 공평하게 분배되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더 나은 피임법을 통해 의도치 않은 임신을 줄이는 것, 가정 방문 복지 프로그램을 확충해 양육 격차를 줄이는 것, 훌륭한 교사들이 가난한 학교에서 일할 수 있도록 교사 임금 체계를 개선하는 것, 대학 학비 조달의 기회를 더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머지 세 가지는 기회 사재기를 줄이기 위한 조치로 보다 공정한 토지 규제를 도입해 배타적인 택지 구획을 없애는 것, 동문 자녀 우대제 폐지를 포함해 고등 교육의 기회를 넓히는 것, 인턴 기회를 확대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조차도 이제는 불평등의 문제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난색을 표하는 입장에서 저자가 제시한 이와 같은 방법들이 현실적으로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게다가 스스로 중상류층임을 솔직하게 밝히며 ‘우리’ 중상류층이 약간의 피해를 감수하면서 불평등을 평등하게 만드는 데 기꺼이 동의해주기를 바라는 점 역시 불확실성에 기대는 미약한 희망 같아 아쉬움도 남는다. 과연, 기꺼이, 자신이 가진 권력을 내어놓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관행을 없애도 계급의 재생산을 막는 데 커다란 효과를 내지는 못할 것이다. 동문 자녀 우대제가 없어져서 생길 ‘아주 좁은 일각’의 자리에는 역시나 비슷한 사회 경제적 배경 출신인 다른 지원자가 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리로 이 제도가 유지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면 중요한 점 하나를 놓친 것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이후의 삶에서 갖게 될 기회와 물질적인 성공 가능성에 크게 영향을 미치므로,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느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개인의 능력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동문 자녀 우대제는 상징적인 것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 168p

 

 

 

   그럼에도 불구하고 <20 VS 80의 사회>는 상위 1퍼센트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췄던 불평등의 담론을 과감히 부수고, 불평등과 계층 이동성에 대해 가장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책이다. 책은 전적으로 미국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현실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매우 시의적절하고 시사 하는 바도 크다. 한 때는 막연하기만 했던 주제였는데, 두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불공정한 기회와 시스템의 문제가 우리 가족은 물론 아이에게까지 되물림되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해진다. 내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돈과 권력 따위가 아닌데, 아이가 살아갈 미래에는 그것만이 살 길인 시대가 될 것 같아 막막한 기분이다. 다만 이 책이 그들만의 세상에 살고 있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이룬 것들이 온전히 자신만의 노력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보다는 좀 더 공정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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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있는 북유럽 신화 그림이 있는 옛이야기 2
김원익 지음 / 지식서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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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열광하던 판타지의 원형이 바로 여기에!

최고의 신화 권위자와 컬러 그림 130점이 만나 더욱 생생한 북유럽 신화 이야기!

 

 

   한때 우리나라에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기가 대단했던 적이 있었다. 각종 문학 작품에 그리스 로마 신화를 모티브로 한 이야기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역시 큰 인기를 얻어 유사 작품이 다수 출간되기도 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때여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세계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고 해석했다. 이와 달리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북유럽 신화는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야 대중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그것은 북유럽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난 탓도 있지만, 오늘날 수많은 판타지 팬들을 열광시킨 <왕좌의 게임>, <반지의 제왕>, <토르>, <어벤져스> 시리즈의 기원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영화 <토르>와 <어벤져스>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영화를 볼 때마다 오딘과 토르, 로키 등의 매력적인 캐릭터와 그 속의 독특한 세계관에 금세 사로잡혔다. 신들이 사는 아스가르드, 무지개다리인 비프로스트, 이를 지키는 헤임달, 토르의 망치 묠니르를 탄생시켰고 타노스를 대적할 무기를 만들었던 손재주가 좋은 난쟁이들의 공간 니다벨리르(스바르트알프헤임), 라그나뢰크를 막기 위해 토르를 돕는 발키리까지. 이 모든 이야기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북유럽 신화를 읽는다면 좀 더 그들의 세계관을 깊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 나는 <그림이 있는 북유럽 신화>를 읽기 시작했다.

 

 

 

인류의 집단 무의식은 바로 신화다.

 

 

 

   세계적인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에,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신화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라고 말했다. 덧붙여 <그림이 있는 북유럽 신화>의 저자 김원익 역시 “모든 것은 인간과 통한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 신화도 결국 인간의 이야기다. 신화는 고대 인간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다.”라고 말했다. 결국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재미있고도 의미 있는 방법, 바로 이것이 우리가 신화를 알아야 하는 이유다.

 

 

 

   특히 북유럽 신화의 모든 이야기는 ‘라그나뢰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고대 노르웨이어로 ‘라그나’는 ‘신’을 뜻하는 ‘레긴’의 복수형이며, ‘뢰크’는 ‘황혼’ 혹은 ‘파멸’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라그나뢰크’의 글자 그대로의 뜻은 ‘신들의 황혼’이나 ‘신들의 파멸’이다. 하지만 북유럽 신화에서 신들의 파멸은 자신들뿐 아니라 거인들과 인간들 그리고 난쟁이들 모두의 파멸을 초래하기 때문에 라그나뢰크는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의 종말을 뜻한다. 북유럽 신화는 태초부터 신들과 거인들의 갈등에서 시작되어 그것이 계속 증폭되다가 결국 양측 사이에 총체적인 전면전이 일어나 소위 아홉 세상 전체의 파멸로 끝을 맺는다. 북유럽 신화는 마치 인간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라그나뢰크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북유럽 신화는 세상을 갈등과 충돌의 역사로 본다는 점에서 비관적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처해 있는 비극적 현실을 아주 적확하게 대변해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책은 바로 이 비교신화학적인 관점에서 각각의 이야기가 ‘바로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연 어떤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

 

 

 

 

 

 

세상을 창조한 거인 살해 사건부터 세상을 몰락시킨 라그나뢰크까지

 

 

  그리스 신화에서 이 세상은 ‘텅 빈 공간’이자 ‘혼돈’을 의미하는 ‘카오스’에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나 신들이 생성된다. 북유럽 신화에서도 이 세상은 그리스 신화의 혼돈과 비슷한 ‘어둠’에서 시작된다. 어둠이라는 말은 “땅도 바다도 공기도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여기에서 불의 나라를 상징하는 무스펠헤임과 얼음의 나라를 상징하는 니플헤임이 만들어진다. 북쪽 니플헤임의 얼음 절벽에서 마르지 않는 샘물이 12개의 물줄기를 이루며 계곡으로 흘러내렸고, 불의 공간에서 불어오는 열기와 얼음 공간에서 불어오는 한기에 의해 생성된 서리에서 어느 날 북유럽 신화의 최초 생명체인 이미르라는 거인 하나와 아우둠라라는 거대한 암소 한 마리가 태어난다. 암소의 젖을 먹으며 자신의 살을 불린 이미르는 잠을 자는 사이 남자와 여자 거인 하나씩과 머리가 6개 달린 거인을 만들어 낸다. 이 3명의 거인들이 북유럽 신화의 모든 거인들의 조상이 되고, 또 암소 아우둠라가 니플헤임 계곡의 얼음덩이를 핥다가 찾아낸 부리가 북유럽 신들의 조상이 된다. 이후 부리의 아들 보르에게서 오딘 삼형제가 태어나고, 그들은 거인 이미르의 시신으로 하여금 마침내 세상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오딘 삼형제는 신을 공경할 인간을 만들기 위해 죽은 물푸레나무와 느릅나무 가지로 각각 자신들의 모습을 본 떠 남자와 여자의 형상을 만들고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이들이 바로 모든 인간들의 조상 아스크와 엠블라이며 난쟁이(트롤, 코볼트, 드워프)와 요정(엘프)도 이때 생겨난다. 삼형제 중 신들의 왕이 된 오딘은 지상과 지하, 하늘의 공간을 9개로 나눈다. 신들이 거주하는 아스가르드, 반 신족이 거주하는 바나헤임, 요정들이 거주하는 알프헤임, 인간들이 거주하는 미드가르드, 손재주가 좋은 난쟁이들이 대장간을 운영하여 오딘의 창인 궁니르, 토르의 망치인 묠니르를 탄생시킨 스바르트알프헤임(니다벨리르), 거인들이 거주하는 요툰헤임, 얼음의 공간인 니플헤임, 불의 공간으로 이곳의 수장인 거인 수르트가 지키고 있는 무스펠헤임, 죽은 자들의 공간이자 이곳을 지배하는 여신의 이름을 딴 헬(헬헤임)과 마지막으로 생명의 나무 이그드라실이 9개의 공간을 아우른다.

 

 

 

   흥미롭게도 북유럽 신화의 가장 큰 특징은 이처럼 아주 독특한 공간 구조에 있다. 북유럽 신화에는 신들과 인간들의 세계뿐 아니라 제3의 공간인 거인들의 세계가 있다. 특히 거인들은 신들과 대립하면서 전체 플롯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들은 크기에서 단연 신들을 압도한다. 변신술 등 여러 가지 능력에서도 신들과 필적하며 계속해서 그들의 세계를 위협한다. 심지어 거인들이 신들의 존재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들이 거인들의 공격을 두려워하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북유럽 신화의 거인들은 무엇을 상징할까? 그들은 우선 어둠, 죽음, 불의, 악의 세력 등을 상징할 수 있다. 거인들은 또한 자연의 거대한 힘을 상징할 수도 있다. 고대의 북유럽 사회에서 혹독한 겨울을 비롯한 거친 자연환경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데 최대 난관이었을 것이다. 당대 인간이 풀어야 할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숙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 신이나 대적할 수 있는 거대한 폭력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에 저자는 그 폭력이 바로 북유럽 신화에서 거인들로 형상화된 것은 아닐까하고 말한다.

 

 

 

이미르나 반고나 하이누웰레 이야기는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져 준다. 죽음의 진정한 의미는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자 희망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는 누군가의 성공 뒤에는 반드시 다른 사람의 희생이 숨어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누군가 인생에서 새로운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죽음과도 같은 혹독한 시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경에도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장 24절) / 26p

 

 

무지개다리 비프로스트는 2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로, 그것은 하늘로 올라가고픈 인간의 욕망을 표현했을 수 있다. 둘째로, 그것은 인간이 신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원래는 아주 선해서 원하면 언제든지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다는 증거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타락하면서 그런 자격을 박탈당했던 것이다. / 46p

 

 

 

 

 

 

   그리스 신화에 제우스를 비롯한 12주신이 있는 것처럼, 북유럽 신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주요 12주신을 선별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신들의 왕 오딘으로 그는 힘이 아닌 지혜로 신들의 마음을 얻고 그들을 다스린다. 두 번째는 결혼과 모성의 여신인 오딘의 아내 프리그다. 세 번째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천둥의 신 토르다. 대지의 여신 요르드의 아들로 신들 중 가장 힘이 세고, 허리에 차면 힘이 2배나 솟아나는 메긴교르드라는 허리띠와 던지면 표적을 반드시 명중하고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천하무적의 망치 묠니르를 가지고 있다. 그는 이 강력한 무기로 아스가르드와 미드가르드의 질서를 해치려는 자는 누구든 용서하지 않았다.

 

 

 

   네 번째는 풍작의 신 프레이그이고 다섯 번째는 사랑과 미의 여신 프레이야다. 여섯 번째는 무지개다리 비프로스트를 지키는 파수꾼 헤임달로 그는 신비한 탄생 일화를 가지고 있는데, 일곱 번째 주신인 바다의 신 에기르에게서 난 9명의 딸에게 반한 오딘이 그들과 번갈아 가며 사랑을 나누었다가 이들이 서로 힘을 합해 낳은 아들이 바로 그다. 여덟 번째는 시와 음악과 음유시인의 신 브라기이고, 아홉 번째는 브라기의 아내이자 청춘의 여신 이둔이다. 이둔이 매일 제공하는 황금 사과 덕에 신들은 늘 젊음과 불면을 누릴 수 있었다. 이어 열 번째 주신은 빛의 신인 발데르이고, 열한 번째 주신은 전쟁의 신 티르다. 마지막으로는 악의 화신이자 장난꾸러기의 신 로키로, 그는 교활한 꾀로 계속해서 신들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들을 위험에서 구해 주기도 한다. 영화 <어벤져스>와 <토르>에 등장하는 바로 그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로키처럼 말이다.

 

 

 

아홉 번째 주신으로는 브라기의 아내이자 청춘의 여신인 이둔을 들 수 있다. 그녀는 난쟁이 이발디의 딸로서 청춘의 사과밭을 가꾸며 지킨다. 북유럽 신들은 신과 거인의 후손으로 순수 혈통이 아니라서 유한한 생명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이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청춘의 여신 이둔이 그들에게 공급해 주는 청춘의 사과 덕분이다. 특히 청춘의 신 이둔이 시의 신 브라기의 아내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혹시 시인은 영원한 젊음의 소유자란 뜻이 아닐까? / 79p

 

 

 

   책에는 다양한 신들의 모험 이야기가 등장한다. 신들에게 보물을 선사한 시프의 머리카락 도난 사건, 프레이야로 여장하고 거인 트림 일당을 처치하는 토르, 거인 티아지에게 빼앗긴 청춘의 여신 이둔과 황금 사과, 죽은 아버지를 복수하러 아스가르드에 갔다가 얼굴이 아니라 발을 보고 신랑감을 잘못 고른 스카디, 거인들의 왕 우트가르드로키와 세 가지 대결을 벌인 토르, 거인 흐룽그니르의 애마 굴팍시와 오딘의 애마 슬레이프니르의 경마 대결과 거인 여인 게르드에게 사랑에 빠진 프레이르의 중매에 나선 스키르니르, 질투심 때문에 빛의 화신 발데르를 죽음으로 내몬 로키가 신들의 분노를 사고, 아들 나르피의 시신에서 수습한 창자에 묶인 채 독사의 독을 얼굴에 맞는 형벌을 받는 일까지 매우 흥미롭다. 가만 보면 마치 인간 세상의 축소판 같다. 질투에 사로잡혀 형제를 죽음에 내몰고, 탐욕으로 빼앗은 반지 하나가 저주를 낳으니 말이다. 여담이지만 사건과 사고를 몰고 다니는 로키도 참 얄궂다. 번번이 그로 인해 신들의 세계가 위협을 받게 되니 말이다.

 

 

 

아스가르드에서 청춘의 여신이 사라지자 과연 신들은 날마다 먹던 사과를 먹지 못한 탓에 금세 노쇠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점점 허리가 굽어지고 피부도 탄력 없이 쪼글쪼글해지며 머리카락은 눈처럼 하얗게 세어지기 시작했다. 기력도 하루가 다르게 떨어졌다. 사과는 아마 고대부터 인간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것 같다. “하루 사과 한 알이면 의사가 필요 없다”라는 영국 속담도 있지 않은가. / 155p

 

 

우트가르드로키에 의하면 로키가 먹기 시합을 한 상대인 로기는 사실 자신이 마술을 부려 거인으로 만든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었다. 그래서 로키가 아무리 빨리 먹어 치웠어도 로기는 모든 것을 불태우는 화마처럼 고기뿐 아니라 식탁까지도 집어삼켰다는 것이다. 또한 티알피가 달리기 시합을 한 후기도 사실 자신이 마술을 부려 거인으로 만들어 낸 자신의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티알피가 아무리 빨라도 우트가르드로키의 생각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중략)... 마지막으로 우트가르드로키에 의하면 토르가 노파라고 생각한 거인 엘리는 사실 자신이 마술을 부려 노파로 만든 ‘흐르는 세월’이었다. 그 누구도 흐르는 세월은 피할 수 없는 법. 그래서 토르 같은 천하장사라도 그 노파와의 씨름에서 절대 이길 수 없었다는 것이다. / 198p

 

 

로키는 흐레이드마르의 불만을 듣자마자 특유의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돌려 오딘의 약지손가락을 쳐다보았다. 오딘은 하는 수 없이 아까 자기 몫으로 챙겨두었던 황금 반지를 빼어 로키에게 던져 주었다. 로키가 황금 반지로 틈새를 메우자 흐레이드마르는 그제야 만족하며 이제 가도 좋다며 오딘에게 압수해 두었던 창 궁니르도 돌려주었다. 오딘 일행을 데리고 막 흐레이드마르의 집 대문을 나서려는 순간 로키는 아까 안드바리가 했던 저주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몸을 돌려 흐레이드마르 삼부자에게 그 황금의 주인이었던 난쟁이 안드바리의 저주를 그대로 전했다. 앞으로 그 황금 반지를 갖게 되는 자는 반드시 파멸하고 말 것이라고 말이다(이 반지는 이후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와 영화 <반지의 제왕> 등 여러 작품의 모티프가 된다). / 227p

 

 

 

 

 

 

   끝내 라그라뇌크는 찾아온다. 그 전조는 맨 먼저 인간 세상인 미드가르드에서 나타난다. 라그나뢰크가 다가올수록 인간 세상은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야만의 시대로 변해간다. 혹독한 겨울이 계속되고, 하늘에 떠 있던 모든 별들이 바다로 떨어져 암흑천지가 되었으며 지진이 나 늑대 펜리르가 끈에서 풀려나고 물에서 불어난 바다에서는 왕뱀 요르문간드가 서서히 몸을 풀기 시작하여 해일이 일어난다. 세계수 이그드라실 역시 고통스러운 듯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비튼다. 마침내 헬의 전용배로 헬헤임의 전사와 거인들, 로키, 요르문간드, 펜리드 등이 모여 무지개다리 비프로스트를 건넌다. 신들과 거인들을 비롯하여 그들의 적들이 모여 싸운 곳은 바로 아스가르드의 광활한 비그리드 평원이다. 평원 한쪽에서는 오딘을 총사령관으로 내세우고 아스 신족, 반 신족이 수많은 전사 영웅 에인헤랴르를 대동하고 전열을 갖춘다. 이에 맞서 다른 쪽에서는 불의 거인 수르트를 총사령관으로 내세우고 서리 거인들, 지하세계의 문을 지키는 개 가름을 비롯한 헬의 군대들, 로키와 그의 자식들인 늑대 펜리르와 왕뱀 요르문간드 등이 전열을 갖춘다. 이 싸움에서 결국 신들이나 거인들뿐 아니라 아홉 세상의 모든 것이 몰락한다.

 

 

 

   그렇게 라그나뢰크로 모든 것이 끝나는 듯했으나 다시 희망의 싹은 돋아나기 시작한다. 바다에 가라앉았던 대지가 다시 솟아오르고 모두 죽은 줄 알았던 신들과 인간들 중에서도 생존자들이 나타난다. 신들 중에서는 오딘의 아들 비다르와 발리, 그리고 토르의 아들 모디와 마그니가 살아남는다. 지하세계에서도 발데르와 호드가 살아남아 아스가르드로 올라온다. 이들은 그 밖에 살아남은 다른 신들과 함께 아스가르드의 새 주역이 되고, 이제 오딘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새 시대가 도래한다. 저자는 이와 같은 결말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두 가지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고 설명한다. 하나는 신들과 거인들을 끊임없는 대결의 관계로 설정함으로써 이 세상을 선과 악이 치열하게 싸우는 전쟁터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신들과 거인들의 최후 결전인 라그나뢰크에서 신들을 살아남게 하여 이 전쟁에서 결국 선이 승리한다고 확신한다. 특히 라그나뢰크에서 신들뿐 아니라 거인들과 난쟁이들과 인간들에게까지도 가장 사랑을 받았던 발데르가, 그것도 자신을 죽인 형제 호드와 함께 다시 살아난다는 점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이는 마치 영화 <토르:라그나로크> 편에서 결국 라그나뢰크를 막지는 못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이 모여 아스가르드는 어느 특정 공간이 아니라 모두의 마음속에 있다는 점을 되새기는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 <토르:라그나로크>를 보면 도입부에 불의 거인 수르트가 토르에게 “네 힘으로는 못 막는데 왜 싸우는 거냐?”고 질문하는 대목이 있다. 이때 토르는 “그게 영웅이 하는 일이니까.”라고 대답한다. 비록 영웅이라는 말을 쓰지 않더라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미래지만 이에 저항하고 싸우려는 의지를 지닌 자들에 의해 이 땅은 숱한 좌절 속에서도 일어서왔다. 그것이 갈등과 충돌의 역사 속에서 다시 희망을 일으켰던 북유럽 신화가 전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최근 다양한 출판사에서 북유럽 신화에 관한 책들이 나오고 있지만, 최고의 신화 권위자로 손꼽히는 저자의 친절한 설명과 원문에 충실한 컬러 삽화가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어 읽는 재미가 배가 되었던 책이었다. 마지막 장에는 《니벨룽의 반지》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뵐숭 가문과 니플룽 가문의 비극’ 편도 수록되어 더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니, 북유럽 신화에 입문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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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예찬 - 숨 가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품격 있는 휴식법
로버트 디세이 지음, 오숙은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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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휴식을 통해 균형 잡히고 품격 있는 삶을 구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하는 가장 멋진 게으름의 기술!

 

 

 

   일명 ‘열정 만수르’라 불리는 유노윤호의 명언이 유행이다. ‘인간에서 가장 해로운 충’은 ‘대충’이라고. 이른바, 게으름과 나태함이 인간을 좀먹는 해충 취급을 받는 시대다. 물론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과거 그리스인과 로마인 모두 게으른 사람을 죽음으로써 벌했고, 심지어 공화정 말기의 많은 로마인은 안락한 삶을 일종의 직무태만으로 여겼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진보된 정책으로 하여금 삶의 질이 더욱 높아졌다고 하지만, 우리는 고된 노동의 쳇바퀴에서 쉽사리 뛰어내리지 못하고, 정작 자유 시간이 주어져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거나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으로 인해 불안해하기도 한다. 나만 하더라도 두 아이가 낮잠을 자는 시간에는 함께 잘 법도 한데, 그 시간이 마냥 아까워서 커피를 몇 잔씩 마셔가면서까지 밀려오는 잠을 이겨내려고 하니 말이다.

 

 

 

나를 자유롭게 하여 균형 있는 삶을 이루도록 하는 휴식법

 

 

   <게으름 예찬>의 저자 로버트 디세이는 이렇게 말한다. “요즘 우리는 바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니 참으로 미련하기 짝이 없다! 바쁘다는 말은 사실 자신이 노예상태에 있음을 광고하는 것이다.”고. 일이 아무리 즐겁고 유용하거나 필요할지라도, 본질적으로는 우리가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얽매인 상태에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봉건시대 일본의 불교 승려이자 시인인 요시다 겐코는 『쓰레즈레구사』라는 수필집에서 한 명의 주인에게, 또는 우리의 소유욕에, 우리의 식욕에 노예처럼 종속되어 우리 삶을 낭비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장 자크 루소는 ‘순간의 기분에 따라 뜬금없고 맥락 없이 하루를 허비’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삼았다. 안톤 체호프 역시 ‘가장 큰 기쁨’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 또는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이었다고 했으며, G. K. 체스터턴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 가장 신성한 일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자신의 저서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을 통해 빈둥거리는 능력에는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확실한 인식이 따라와야 한다고 말했듯, 수많은 사상가 역시 게으름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라기보다는 어떤 것이든 할 자유로 표현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경우 게으름이란, 앨런 베넷의 말을 인용하면, ‘어떤 목적이 있는 어떠한 것도 하지 않기’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나의 시간을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나를 위해서, 나를 자유롭게 하여 균형 잡힌 삶을 살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고, 당신이 하고, 내가 하는 그 모든 것이 바로 여가다. 그것을 라틴어로 오티움(여가, 휴식)이라고 한다. 네고티움(일, 활동)은 그 반대다. 인간은 모든 사냥과 채집 활동, 즉 네고티움을 인생의 중간에 몰아넣은 채로 빈둥거리고 깃들이고 재미있는 것, 즉 오티움을 즐기기 위한 시간은 고작 마지막 몇 년만 남겨두니 딱한 일이다. 반대로 개는 일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끝없이 자고 짧은 시간 열중해서 노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은 그 균형을 찾아보자고 호소하는 맑은 소리가 되고자 한다. / 29p

 

 

빈둥거리는 사람은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명심할 점은, 부르주아 계급 혹은 지주나 고용주는 자기 여가를 일정한 ‘생산 네트워크’에 통합시키길 원치 않는 사람에게 ‘나태하다’는 꼬리표를 붙이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틀림없이 그들은 해먹에 누워 햇볕을 쬐는 사람더러 나태하다(또는 게으르다, 태만하다)고 할 것이며, 시를 읽거나 개를 산책시키거나 순전히 재미로 고대 그리스어를 배우는 사람에 대해서도 똑같이 매우 비판적일 것이다. 반면에 조깅, 음악 감상, 주방 리모델링 같은 여가 활동은 누군가의 주머니(아니, 당신의 주머니는 아니다)를 두둑하게 해줄 테니 나태하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나태’라는 단어를 남용하는 것이다. / 42p

 

 

 

 

 

 

  <게으름 예찬>은 나의 황금 같은 휴식 시간을 더 현명하게 즐기기 위한 게으름의 기술들을 제시한다. 이를 테면 낮잠, 책 읽기, 바라보기, 행글라이딩, 대화, 걷기, 깃들이기, 놀이, 취미, 외국어 시도하기, 쇼핑, 여행 등이 손꼽힌다. 예부터 낮잠은 무리와 함께 사냥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늦잠 자는 일에 죄책감을 느낀다. 침대에 누워서 뒹굴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왜 죄책감을 느끼는지 물어보면 그들은 대개 수줍게 미소를 짓고는 늦잠 자는 게 ‘시간 낭비’처럼 느껴진다고 대답한다. 톰 호지킨슨은 인기를 끈 선언서 『게으름을 떳떳하게 즐기는 법』에서 그것을 ‘침대 죄책감’이라고 부르는데, 이 죄악의 감정에 대해 그리스도교 일반과 특히 프로테스탄티즘을 탓한다. 늦잠 자기를 옹호하는 열렬 가톨릭교도 G. K. 체스터턴은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아주 크고 근본적인 것들’을 희생시키면서 ‘아주 작고 부차적인 행동의 문제’를 부풀리는 현대의 경향을 비난한다. 프랑스 철학자 티에리 파코에 따르면 낮잠은 ‘자유와 자제력’을 나타내는데 결국 그것은 여가의 본질 자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낮잠은 ‘삶을 사는 기술의 백미’이며 도시 주민의 ‘저항 행위’라고까지 표현한다. 저자 역시 낮잠은 낮잠 자는 사람 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진정 자유로운 시간이며, 왁자지껄한 도시 생활 속 휴식이자 공장, 시장, 도로, 열차, 그리고 시장 가치를 따지는 세계의 폭압에서 한숨 돌리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참 거창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낮잠을 무기력함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오전 나절 동안 잠시 지친 에너지와 리듬을 되찾을 수 있는 활력의 시간으로 생각한다면 아주 적절한 휴식법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란 말의 의미를 콕 집어 설명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바쁜 것을 접고 쉬면서 방금 바쁘게 하던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부터 존 키츠의 시처럼 “나른한 오후/꿀 같은 게으름에 적신 밤”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동안의 초각성 상태부터 일종의 사하자(인위적 노력이 없는 존재 상태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상태까지, 나르시시즘에 빠진 자기 소통부터 니르바나(열반)에 이르기 위한 연습까지 모든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마치 사랑이 그렇듯 무엇을 제시해도 다 해당되는 것 같다. 아이어의 책 뒤표지에 이것이 간결하게 요약되어 있다. “방 안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궁극의 모험일 수 있다.” 맞는 말이다. / 48p

 

 

 

 

 

  독서하기는 개인적으로도 가장 좋아하는 휴식법 중에 하나다. 나의 남편에게 “책 읽는 게 스트레스 푸는 거야.”라고 말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을 짓는다. 아이를 보느라 피곤하니 쉴 수 있을 땐 그냥 편하게 쉬라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말한다. 그냥 TV만 보고 있는 것보단 이게 훨씬 낫지 않느냐고 말이다. <게으름 예찬>의 저자 역시 독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하는 가장 멋진 방법이라고 말이다. “삶을 대신할 막강하지만 핏기 없는 대체물”이라고 표현했던 루이스 스티븐슨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독서는 더 과감하고, 더 다채롭고, 더 솔직하고, 더 교활하고, 더 싶고 더 다면적인 나 자신이 되기 위한 좋은 방법이다. 특히 독서에는 많은 상상력을 요구하는데, 이 활짝 펼친 상상력은 하루를 천 년처럼 만드는 힘이라는 말은 좋은 가르침이 된다.

 

 

 

그냥 바라보기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매우 만족스럽지만 과소평가되고 있는 예다.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는데, 차를 마시는 것처럼 명상이나 수면에서 한 걸음 나아갔지만 그 보폭은 작다. 당신은 오블로모프카의 주민들이 흔히 그러듯 차를 마신 후 강가를 거닐며 바라볼 수도 있고 그냥 바라보기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무언가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내키면 골똘히 생각할 수도 있다. / 85p

 

 

요가 하러 갈 때나 프랑스어 수업을 들으러 갈 때, 당신이 빈둥거리며 시간을 때우러 간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 심지어 강아지도 그냥 쫓기 놀이를 하는 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애초의 ‘날것’은 분명 몇백, 몇천 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요리’되어왔으며, 종종 지나치게 익기도 했고 때로는 시커멓게 타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문화가 날것의 놀이에서 나온다는 건 거의 확실하다. 어쩌면 우리가 확장해야 할 것은 문화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놀이에 대한 개념이리라. / 199p

 

 

 

 

 

 

   이 외에도 요리, 먹기, 정원 가꾸기, 섹스와 같이 우리 자신에게 편안한 느낌을 주고, 자신을 향한 특별한 친밀함을 느끼고 마음이 즐거울 방식으로 나 자신을 재구성할 수 있는 방법으로 ‘깃들이기’를 제시하고, 죽으면서 동시에 죽지 않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가장 세련되고 가장 계몽된 형태의 여가로 행글라이딩을 추천한 것도 인상에 남는다. 이렇게 <게으름 예찬>은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 시간을 가장 멋지게 보낼 수 있는 휴식법을 소개하면서 무엇보다 그 속에서 가장 나답게 살 수 있기를 응원한다는 점에서 현대인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책이다. 필립 라킨의 말을 인용하자면, 시간은 사실 그 안에서 행복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웅덩이에서 한가롭게 지낸 뒤 저 웅덩이에서 느긋하게. 시간은 그 안에서 우리의 인간성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요, 그 안에서 우리 존재의 무한성을 즐기기 위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의하면 에우다이모니아, 즉 행복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저자의 “행복하기 위해 게으름을 피워야 하는 게 아니다, 당신은 게으름을 피우기 위해서 행복해야 한다.”는 의미를 새겨볼 일이다.

 

 

 

   오늘날 자유 시간에조차 무언가 실용적인 것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휴식이란 무엇인지 되새겨볼 수 있는 참신한 책이었다. 훌륭한 휴식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가장 치열하고 유쾌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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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만한 인간 - 개정증보판
박정민 지음 / 상상출판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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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배우 박정민 너머에 있는 사람 박정민의 진솔한 이야기를 만나다!

위트와 따뜻한 에너지로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모든 청년들에게 위로를 건네다!

 

 

   ‘못하는 것도 없지만 잘하는 것도 딱히 없는, 잘생기지 않았는데 개성 있게 생겼다기엔 한 끗이 부족한, 못돼 처먹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저걸 착하다고는 할 수 없는, 아주 애매한 선상에 위치한 인간, 이른바 과도기적 인간, 나쁘게 말하면 그냥 좀 찌질이 정도’로 배우 박정민은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한다. 영화 <파수꾼>, <들개>, <오피스>, <동주>, <사바하> 등에 출현했고, 저예산영화계의 송강호라 불린다는 배우지만 좀처럼 자신을 거창하게 수식할 줄 모르는 배우인 듯하다. 스스로를 만년 유망주, 아니 노망주라고 말하는 걸 보면 말이다.

 

 

 

   문득, 이 배우가 출현했던 영화 중 내 마음 속에서 가장 강렬했던 영화 한 편이 떠오른다. <전설의 주먹>이다. 주연배우는 황정민과 유준상, 윤제문 등이지만 여기에서 어린 황정민의 역할을 맡은 그를 나는 처음으로 스크린에서 보았다. 그의 책을 읽었기에 하는 소리가 아니라, 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배우가 무려 황정민이나 유준상도 아니고 생전 처음 보는 배우 박정민이었다. 체격이 큰 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잘 생긴 것도(죄송) 아닌데 이상하게 사람의 시선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게다가 연기까지 잘 하니 관상을 볼 줄 아는 건 아니지만 왠지 롱런할 만한 배우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현재 어마어마한 관객 수를 동반하는 영화를 찍지는 못했지만(또 죄송)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만한 꽤 괜찮은 작품들을 두루 거쳐 오고 있다(꼭 대박나소서).

 

 

 

   그런 그가 몇 해 전 에세이 한 권을 출간했다. ‘어, 이 배우 글도 쓸 줄 아는 구나’ 하고 놀란 기억이 있는데, 최근 영화 <타짜: 원 아이드 잭> 개봉과 맞물려 새 개정증보판까지 출간되었다고 하니 관심이 쏠렸다. 한편으로는 배우라는 직업상 영화 캐스팅 후기라던지, 현장에서 있을 법한 에피소드로 점철된 이야기가 아닐까 우려와 편견 역시 없지 않았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이 배우 참 괜찮은 사람이구나.’, 작품이 제목 따라 간다고 ‘참 쓸 만한 인간이 쓸 만한 글을 썼구나,’ 싶었다. 딱 내 남동생과 같은 나이라서 그런지 대한민국을 사는 어느 보통 청년의 삶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유머 코드가 나와 맞는 건지 툭툭 내뱉는 그의 위트 있는 글이 좋았고, 어차피 끝내는 전부 다 잘될 거라는 패기 있는 응원과 위로에 기분이 좋아졌다. 스스로 쓸 만한 인간이 못된다고 하는 것치곤 이웃과 이웃 너머의 세계까지 진중하게 들여다볼 줄 아는 속 깊은 구석도 있었다. 그래서 ‘거기서 뭐 하세요. 뭘 하시든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네준 그에게 나 역시 ‘고맙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라고 꼭 답해주고 싶다.

 

 

 

 

 

 

배우이자 한 사람으로서 전하는 작은 위로와 응원

 

 

그럴 듯한 문장과 서사는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그래도 읽어보시겠다면,

그저,

무심결에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쓸 만한 인간>은 한때 <topclass>라는 잡지사에서 글을 한번 써보라는 제의를 받고 노트 혹은 하드디스크 혹은 미니홈피에 쓰던 글을 정식으로 내놓은 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배우가 되어가는 과정과 연기 철학,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30대 청년으로서의 삶, 부모의 그늘과 아들로서의 일상, 여행지에서 있었던 일과 어느 한 시절에 대한 추억들을 돌이켜본다. 책에서는 그저 명문대라 일축하지만 알기로 고려대학교에 재학했었던 그는 느닷없이 연기를 하겠다고 한 예술학교에 지원을 했다. 정동진까지 가서 쓴 다소 소설 같은 자기소개서는 면접관들로부터 거침없는 공격을 당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기일전해서 재도전해서는 합격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극단에 들어가 “너 같은 놈 많이 봤어. 발 좀 담그는 척하다가 다 없어져.”라는 말을 듣고 아직까지 오기로 연기에 발을 담그고 있고, 시상식 장에서 열심히 박수치다가 이제는 박수를 받는 배우 박정민으로 거듭나고 있다.

 

 

 

   아차차, 요약하다보니 연기자로서 그의 성장과정이 너무나 담백하게만 쓰이고 말았는데, 실은 명예퇴직한 아버지가 집에 계신 줄도 모르고 헬로비너스의 노래를 목청껏 부르다 들켜 아버지가 PC방이나 가라며 쥐여 주신 만 원짜리를 흔쾌히 받아들여야 하는 약간의 찌질함과 면접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에 자존심은 있어서 서울대 갈 거라는 씁쓸한 객기도 종종 부린다. 하지만 과민성대장증후군 때문에 늘 설사약을 먹고 무대에 올라갔어도, 무대에서 물을 과하게 마셔 오줌을 쌀 뻔했어도, 머릿속이 하얘져 대사가 생각이 안 나는 순간 얼굴이 하얘진 연출과 눈이 마주쳤어도, 그는 무대를 사랑하는 배우였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 같은 것도 그러고 있으니, 본인이야 아직 재능이 차오르지 않아 불가피하게 드러내지 못하지만 재능이 가득한 서른들(혹은 다수의 청년들), 혹은 서른 즈음의 사람들이라면 조금 더 자신을 믿고 기다려봤으면 좋겠다고. 길게, 성실히, 충실히, 절실히 노력하며, 조급한 건 당연한 거니 자책치 마시고 내일 아침엔 조금 더 전투적으로 일어나시라 응원한다.

 

 

 

올 한 해 어떤 성장을 이루셨는지, 그리고 내년엔 또 어떤 성장을 이뤄내실 건지. 곰곰이 생각해보시라. 아마 잘 모를 거다. 하지만 이건 확실하다. 어제보단 오늘이 더 낫다. 당신들의 성장판도 평생 열려 있을 테니까 말이다. 모두 올 한 해 수고 많으셨다. / 40p

 

 

영화 같은 인생을 표현하기 위해 배우들은 이렇게 영화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 그리고 물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인생도 당신이 아닌 누군가에게는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영화 같은 인생일 것이다. 영화 같은 인생을 사시느라 수고가 많다. 그래도 우리 모두 ‘절망’치 말고 고구마를 심은 곳에 민들레가 나도 껄껄 웃으면서 살아가자. 어차피 끝내는 전부 다 잘될 테니 말이다. / 52p

 

 

 

 

 

 

   “주류에 편승하지 않으려는 게 아니고 못하는 겁니다.”

   남들이 핑클 좋아하면 써클 좋아하고, 남들이 CD플레이어 들고 다닐 때 MD플레이어 들고 다녔으며, 남들이 다 좋아하는 야구 선수보단 벤치의 선수를 더 좋아해서 그 선수의 이름이 박힌 유니폼을 샀다가 중고나라에서 팔지도 못했다던 그였다. 남들이 다 읽는 책은 읽지 않았고, 남들이 다 보는 영화도 보지 않았다. 대신 아무도 안 보는 영화를 골라 봤고, 그런 영화는 주로 야했다던, 뭐 요지는 그게 아니라 그런 취향 때문인지 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마이너하다 말한다고 한다. 글쎄, 그는 핑클 좋아하면 주류고 써클 좋아하면 비주류는 아니지 않은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마이너리거나 ‘Minor’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인 ‘별로 중요하지 않은’으로 해석돼선 안 된다고. 비단 야구뿐만 아니라 우리가 속한 모든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사회의 다수인 마이너들이 허약하면 그 사회도 그만큼 허약해진다. 1군과 2군의 교집합이 넓을 때 그 팀은 강팀이 되는 거다. 1군의 부상 선수 대신 올라온 2군 선수의 실력이 좋으면 좋을수록 팀은 강해진다. 그리고 그 2군 선수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1군에 붙어 있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테고, 에라 모르겠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주전 선수까지 돼보고 싶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타이틀도 얻고 싶을 것이고, 그러다가 메이저리그도 가보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도 관심 없던 선수에게 기회를 주는 팀과 그 기회를 잡은 선수, 그렇게 팀과 선수는 각자의 목표를 달성하려 애쓴다. 그게 좋은 팀이고 좋은 사회라고 그는 말한다. 참 멋지다.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전달할 줄 아는 이 배우, 참 멋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병이 정민 씨가 사는 데 있어서 나쁘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때 의사가 했던 그 말의 의미를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이러한 강박증세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한다. 만약 그런 사람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당신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 또 다른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솔직하게 누군가에게는 털어놓길 바란다. 혼자 갖고 있으면 곪는다. 뱉는 순간이 어렵지 뱉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랬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다고. 그리고 나도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더라는 것이다. / 97p

 

 

덜 불합리한 시대에 사는 우리는 더 불합리한 시대에 살던 그들의 선택을 보며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70여 년 전 그들의 행동이 현재 우리를 살게 했고, 지금 이 순간 우리의 행동이 또 70년 후 누군가들의 삶에 영향을 줄 것이다. 그런 고민을 줄 수 있는 영화다. 오롯이, 그리고 오로지 진심만을 담은 영화 <동주>. <베테랑>과 같은 통쾌함도, <매드맥스> 같은 장엄함도 없지만, 또 다른 통쾌함과 장엄함이 있는 영화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고 관객분들이 당신들 나름의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에 어느 정도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감히 말하지만 이 영화 <동주>는 우리가 세상에 내놓는 당신들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 144p

 

 

 

 

 

 

   또 한 권의 책 출간을 제안하는 이들에게 그는 정중히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고 한다. 이유는 두려워서라고. 남에게 보여주는 글이라는 것이 그 독자가 한 명이든 만 명이든 상처를 준다면, 그로 인해 내가 받는 내상도 상당해 그것이 두렵다는 것이다. 책임에 익숙하지 않은 걸 보니 아직 나이를 덜 먹었나 싶기도 하고, 나이를 먹으면 좀 괜찮아지긴 하려나 싶기도 하지만 그 두려움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아서 당분간 쓸 만한 인간이 되지 못할 것 같은 심정이라고 고백한다. 덕분에 이 세상 모든 작가님들에게, 그들의 품위에, 그들의 고됨에, 넘볼 수 없는 존경을 표한다던 그의 서문이 참 의미있게 다가온다. 펜의 무서움을 알기에 이로 인해 상처받을 수 있는 이들의 마음까지 생각하고, 배우이자 공인으로 자신의 선한 영향력이 누군가에게 작지만 소중한 위로와 위안이 될 수 있음을 그는 알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쭉, 그런 마음으로, 소박하지만 넓은 마음으로 큰 배우가 되었으면 좋겠다. 당신이 나를 응원해주었듯, 나도 당신을 응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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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았다, 그치 - 사랑이 끝난 후 비로소 시작된 이야기
이지은 지음, 이이영 그림 / 시드앤피드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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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이별앓이로 아파하고 있는 이들에게!

가슴 시린 이별이 찾아 온 뒤, 나를 위한 진솔한 이야기를 시작하다! 

 

 

  한때 아이콘의 ‘사랑을 했다’라는 노래가 꽤 오랫동안 플레이리스트에 담겨져 있던 적이 있다. “사랑을 했다 우리가 만나 지우지 못할 추억이 됐다 볼만한 멜로드라마 괜찮은 결말 그거면 됐다 널 사랑했다”로 시작하는 가사는 “널 사랑했고 사랑 받았으니 난 그걸로 됐어”라며 온갖 감정으로 얼룩져있는 가슴을 담담하게 누르고, “너에게 참 많이도 배웠다”라는 가사로 이별이 반드시 슬프기만은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게 한다. 물론, “널 사랑한 것만으로도 되었다”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하고, 또 얼마나 아픈 마음을 위로해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언젠가는 “참 좋았다, 그치.”라고 지나간 사랑을 덤덤히 껴안을 수 있을 때가 오겠지. 그저 이 기나긴 시간동안 내가 덜 아파하고, 새로운 사랑에 인색하지 않고 그래도 다시 한번 거침없이 뛰어들 수 있는 용기를 잃지 않길 바랄 뿐.

 

 

 

하루 어린 내가, 하루 더 어른이 될 나에게

 

 

   <참 좋았다, 그치>는 사랑의 모든 순간들, 때로는 찬란했지만 가슴이 저리게 아팠던 그 많은 순간들에 관한 솔직한 이야기들을 담아낸 이별에세이다. 평생 단 하나일 것 같았던 사랑이었기에 모든 것을 다 주었던 마음과 만나기 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왈칵 치솟는 이별앓이를 묵묵히 견뎌내야 했던 그 모든 시간들에 위로를 건넨다. 그러면서도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 앞에 조금 더 담대해지기를, 무너질 것 같은 바람 앞에 조금 더 단단해지기를 하루 어린 내가, 하루 더 어른이 될 나를 위해 응원을 건네기도 한다.

 

 

 

 

 

 

우리 둘, 함께하고 있을 거라는 믿음만으로도 나의 내일은 벅차도록 아름다웠다. 그런 네가 떠났다. 너라는 사람을 사랑하다니, 세상에서 가장 기특했던 스스로가 너를 잃고 하나부터 열까지 잘못투성이인 사람이 되었다. 내 잘못이다. 마음이 떠나가는 것도, 의지를 잃어가는 사랑도 눈치채지 못한 나의 잘못. 분명한 것 하나 없던 나의 미래에, 너 하나만은 자신했던 나의 오만이다. / ‘엇갈린 계절, 나는 아직 여름’ 중에서 43p

 

 

 

   선명하게 새겨놓은 서로를 향한 기억이 자주 아파 하루는 울고, 울고 나면 개운해진 마음으로 또 하루를 살아낸다. 그 후에는 또다시 주저앉아 울고 싶은 날들이 반복된다. 그 누구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사랑을 했던 것 같은데, 이별을 하고 나면 다들 그렇게 감내하고 견디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지독히도 보편적인 결말. 그래서 이별을 하면 더 서러운 건가 보다. 내 사랑도 별 거 아니었던 것이고, 이별 앞에선 다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리니까.

 

 

 

떠나간 이의

이름 세 글자는

남겨진 이에게

한 편의 완전한 시가 되어

보이지 않는 행간에서

오래도록

길을 잃게 하는 것이었다. / ‘이름’ 중에서 101p

 

 

 

 

 

 

   나는 늘 관계 앞에서 ‘기대’라는 감정을 덜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줬으면 하는 건 그냥 내 이기심인 거라고. 물론 끊임없이 대화하고 때로는 다퉈가면서 기우는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지만, 어느 새 가장 쉬운 방법을 선택하기로 결론을 내린다. 기대하지 말자. 하지만 그러다가 나 혼자 상처받고, 외로워하고, 비우다 비워서 감정이 메말라지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이것마저도 알아달라고 하면 욕심일까봐 또 삼키고 삼키다 결국, 헤어진다.

 

 

 

욕심과 기대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잔뜩 흔들리기도 하면서

균형을 맞추어가는 일이 중요한 것인데,

계속해서 접시에서 추를 덜어내기만 하던 한쪽이

더 이상 내려놓을 추가 없어

저울이 기울어진 채 흔들림이 멎거든 그 인연도 끝이 난다.

한 번쯤 생각해보길 바란다, 당신.

저울 그릇에 자리가 없을 정도로 추를,

욕심과 기대를 올리기만 했던 것은 아닌지.

상대는 사랑하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

욕심 아닌 욕심까지도 내려놓고,

당신에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으려다

마음, 메말라가고만 있는데. / ‘양팔 저울’ 중에서 209p

 

 

 

 

 

 

   <참 좋았다, 그치>를 읽으며 몇 번이고 울컥해질 때가 있었다. 한때 내가 느꼈던 이별의 감정과 차마 건네지 못했던 말로 인해 애잔해진 감정들 때문에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사랑이나 이별, 실연의 아픔이란 모두 개별적인 추억이자 감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서 머물렀던 어떤 한 장면들이 떠오를 만큼 보편적이기도 해서 특유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사랑이란 건 아이처럼 시작하되 어른의 마음으로 지켜내야 하는 것’이라는 말에 여러 번 공감했다. 한 남자를 만나 두 아이를 키워내면서도 사랑이란 감정 앞에서는 순진무구한 아이여야 하지만, 그것을 단단히 지켜내는 힘은 어른의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나날이 더 크게 느끼고 있는 까닭이다. 이것이 ‘이별’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결국엔 ‘사랑’을 이야기했던 이 책이 좋았던 큰 이유 중에 하나다.

 

 

 

   이별 뒤 남몰래 몇 번이고 주저앉아 울고 있다면, 오랜 만남으로 서로에게 지쳐 상대를 할퀴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혹 새로운 사랑 앞에서 주저하고 있다면 한 번쯤 <참 좋아다, 그치>를 읽어보시라 추천을 드리고 싶다. 조금은 답답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내 안의 솔직한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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