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예찬 - 숨 가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품격 있는 휴식법
로버트 디세이 지음, 오숙은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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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휴식을 통해 균형 잡히고 품격 있는 삶을 구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하는 가장 멋진 게으름의 기술!

 

 

 

   일명 ‘열정 만수르’라 불리는 유노윤호의 명언이 유행이다. ‘인간에서 가장 해로운 충’은 ‘대충’이라고. 이른바, 게으름과 나태함이 인간을 좀먹는 해충 취급을 받는 시대다. 물론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과거 그리스인과 로마인 모두 게으른 사람을 죽음으로써 벌했고, 심지어 공화정 말기의 많은 로마인은 안락한 삶을 일종의 직무태만으로 여겼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진보된 정책으로 하여금 삶의 질이 더욱 높아졌다고 하지만, 우리는 고된 노동의 쳇바퀴에서 쉽사리 뛰어내리지 못하고, 정작 자유 시간이 주어져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거나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으로 인해 불안해하기도 한다. 나만 하더라도 두 아이가 낮잠을 자는 시간에는 함께 잘 법도 한데, 그 시간이 마냥 아까워서 커피를 몇 잔씩 마셔가면서까지 밀려오는 잠을 이겨내려고 하니 말이다.

 

 

 

나를 자유롭게 하여 균형 있는 삶을 이루도록 하는 휴식법

 

 

   <게으름 예찬>의 저자 로버트 디세이는 이렇게 말한다. “요즘 우리는 바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니 참으로 미련하기 짝이 없다! 바쁘다는 말은 사실 자신이 노예상태에 있음을 광고하는 것이다.”고. 일이 아무리 즐겁고 유용하거나 필요할지라도, 본질적으로는 우리가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얽매인 상태에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봉건시대 일본의 불교 승려이자 시인인 요시다 겐코는 『쓰레즈레구사』라는 수필집에서 한 명의 주인에게, 또는 우리의 소유욕에, 우리의 식욕에 노예처럼 종속되어 우리 삶을 낭비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장 자크 루소는 ‘순간의 기분에 따라 뜬금없고 맥락 없이 하루를 허비’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삼았다. 안톤 체호프 역시 ‘가장 큰 기쁨’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 또는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이었다고 했으며, G. K. 체스터턴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 가장 신성한 일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자신의 저서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을 통해 빈둥거리는 능력에는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확실한 인식이 따라와야 한다고 말했듯, 수많은 사상가 역시 게으름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라기보다는 어떤 것이든 할 자유로 표현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경우 게으름이란, 앨런 베넷의 말을 인용하면, ‘어떤 목적이 있는 어떠한 것도 하지 않기’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나의 시간을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나를 위해서, 나를 자유롭게 하여 균형 잡힌 삶을 살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고, 당신이 하고, 내가 하는 그 모든 것이 바로 여가다. 그것을 라틴어로 오티움(여가, 휴식)이라고 한다. 네고티움(일, 활동)은 그 반대다. 인간은 모든 사냥과 채집 활동, 즉 네고티움을 인생의 중간에 몰아넣은 채로 빈둥거리고 깃들이고 재미있는 것, 즉 오티움을 즐기기 위한 시간은 고작 마지막 몇 년만 남겨두니 딱한 일이다. 반대로 개는 일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끝없이 자고 짧은 시간 열중해서 노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은 그 균형을 찾아보자고 호소하는 맑은 소리가 되고자 한다. / 29p

 

 

빈둥거리는 사람은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명심할 점은, 부르주아 계급 혹은 지주나 고용주는 자기 여가를 일정한 ‘생산 네트워크’에 통합시키길 원치 않는 사람에게 ‘나태하다’는 꼬리표를 붙이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틀림없이 그들은 해먹에 누워 햇볕을 쬐는 사람더러 나태하다(또는 게으르다, 태만하다)고 할 것이며, 시를 읽거나 개를 산책시키거나 순전히 재미로 고대 그리스어를 배우는 사람에 대해서도 똑같이 매우 비판적일 것이다. 반면에 조깅, 음악 감상, 주방 리모델링 같은 여가 활동은 누군가의 주머니(아니, 당신의 주머니는 아니다)를 두둑하게 해줄 테니 나태하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나태’라는 단어를 남용하는 것이다. / 42p

 

 

 

 

 

 

  <게으름 예찬>은 나의 황금 같은 휴식 시간을 더 현명하게 즐기기 위한 게으름의 기술들을 제시한다. 이를 테면 낮잠, 책 읽기, 바라보기, 행글라이딩, 대화, 걷기, 깃들이기, 놀이, 취미, 외국어 시도하기, 쇼핑, 여행 등이 손꼽힌다. 예부터 낮잠은 무리와 함께 사냥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늦잠 자는 일에 죄책감을 느낀다. 침대에 누워서 뒹굴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왜 죄책감을 느끼는지 물어보면 그들은 대개 수줍게 미소를 짓고는 늦잠 자는 게 ‘시간 낭비’처럼 느껴진다고 대답한다. 톰 호지킨슨은 인기를 끈 선언서 『게으름을 떳떳하게 즐기는 법』에서 그것을 ‘침대 죄책감’이라고 부르는데, 이 죄악의 감정에 대해 그리스도교 일반과 특히 프로테스탄티즘을 탓한다. 늦잠 자기를 옹호하는 열렬 가톨릭교도 G. K. 체스터턴은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아주 크고 근본적인 것들’을 희생시키면서 ‘아주 작고 부차적인 행동의 문제’를 부풀리는 현대의 경향을 비난한다. 프랑스 철학자 티에리 파코에 따르면 낮잠은 ‘자유와 자제력’을 나타내는데 결국 그것은 여가의 본질 자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낮잠은 ‘삶을 사는 기술의 백미’이며 도시 주민의 ‘저항 행위’라고까지 표현한다. 저자 역시 낮잠은 낮잠 자는 사람 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진정 자유로운 시간이며, 왁자지껄한 도시 생활 속 휴식이자 공장, 시장, 도로, 열차, 그리고 시장 가치를 따지는 세계의 폭압에서 한숨 돌리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참 거창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낮잠을 무기력함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오전 나절 동안 잠시 지친 에너지와 리듬을 되찾을 수 있는 활력의 시간으로 생각한다면 아주 적절한 휴식법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란 말의 의미를 콕 집어 설명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바쁜 것을 접고 쉬면서 방금 바쁘게 하던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부터 존 키츠의 시처럼 “나른한 오후/꿀 같은 게으름에 적신 밤”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동안의 초각성 상태부터 일종의 사하자(인위적 노력이 없는 존재 상태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상태까지, 나르시시즘에 빠진 자기 소통부터 니르바나(열반)에 이르기 위한 연습까지 모든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마치 사랑이 그렇듯 무엇을 제시해도 다 해당되는 것 같다. 아이어의 책 뒤표지에 이것이 간결하게 요약되어 있다. “방 안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궁극의 모험일 수 있다.” 맞는 말이다. / 48p

 

 

 

 

 

  독서하기는 개인적으로도 가장 좋아하는 휴식법 중에 하나다. 나의 남편에게 “책 읽는 게 스트레스 푸는 거야.”라고 말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을 짓는다. 아이를 보느라 피곤하니 쉴 수 있을 땐 그냥 편하게 쉬라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말한다. 그냥 TV만 보고 있는 것보단 이게 훨씬 낫지 않느냐고 말이다. <게으름 예찬>의 저자 역시 독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하는 가장 멋진 방법이라고 말이다. “삶을 대신할 막강하지만 핏기 없는 대체물”이라고 표현했던 루이스 스티븐슨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독서는 더 과감하고, 더 다채롭고, 더 솔직하고, 더 교활하고, 더 싶고 더 다면적인 나 자신이 되기 위한 좋은 방법이다. 특히 독서에는 많은 상상력을 요구하는데, 이 활짝 펼친 상상력은 하루를 천 년처럼 만드는 힘이라는 말은 좋은 가르침이 된다.

 

 

 

그냥 바라보기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매우 만족스럽지만 과소평가되고 있는 예다.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는데, 차를 마시는 것처럼 명상이나 수면에서 한 걸음 나아갔지만 그 보폭은 작다. 당신은 오블로모프카의 주민들이 흔히 그러듯 차를 마신 후 강가를 거닐며 바라볼 수도 있고 그냥 바라보기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무언가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내키면 골똘히 생각할 수도 있다. / 85p

 

 

요가 하러 갈 때나 프랑스어 수업을 들으러 갈 때, 당신이 빈둥거리며 시간을 때우러 간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 심지어 강아지도 그냥 쫓기 놀이를 하는 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애초의 ‘날것’은 분명 몇백, 몇천 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요리’되어왔으며, 종종 지나치게 익기도 했고 때로는 시커멓게 타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문화가 날것의 놀이에서 나온다는 건 거의 확실하다. 어쩌면 우리가 확장해야 할 것은 문화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놀이에 대한 개념이리라. / 199p

 

 

 

 

 

 

   이 외에도 요리, 먹기, 정원 가꾸기, 섹스와 같이 우리 자신에게 편안한 느낌을 주고, 자신을 향한 특별한 친밀함을 느끼고 마음이 즐거울 방식으로 나 자신을 재구성할 수 있는 방법으로 ‘깃들이기’를 제시하고, 죽으면서 동시에 죽지 않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가장 세련되고 가장 계몽된 형태의 여가로 행글라이딩을 추천한 것도 인상에 남는다. 이렇게 <게으름 예찬>은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 시간을 가장 멋지게 보낼 수 있는 휴식법을 소개하면서 무엇보다 그 속에서 가장 나답게 살 수 있기를 응원한다는 점에서 현대인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책이다. 필립 라킨의 말을 인용하자면, 시간은 사실 그 안에서 행복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웅덩이에서 한가롭게 지낸 뒤 저 웅덩이에서 느긋하게. 시간은 그 안에서 우리의 인간성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요, 그 안에서 우리 존재의 무한성을 즐기기 위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의하면 에우다이모니아, 즉 행복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저자의 “행복하기 위해 게으름을 피워야 하는 게 아니다, 당신은 게으름을 피우기 위해서 행복해야 한다.”는 의미를 새겨볼 일이다.

 

 

 

   오늘날 자유 시간에조차 무언가 실용적인 것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휴식이란 무엇인지 되새겨볼 수 있는 참신한 책이었다. 훌륭한 휴식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가장 치열하고 유쾌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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